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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龔遂)의 충간봉주(忠諫奉主)와 도적평정(和平息盜)

[밍후이왕] 공수는 서한(西漢) 선제(宣帝)시기의 한 지방 관리였다. 관직은 크지 않았으나 사람은 매우 강직하여 충심으로 황제를 섬기고 간언하는 신하였다. 그는 관리로서 청렴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병사를 움직이지 않고 발해지역의 반란을 평정시켜 황제의 총애를 깊이 받았다.

충심으로 황제에게 간언하다

경술(經學, 경서에 관한 학술)에 정통한 공수는 창읍국(昌邑國)에서 낭중령(郎中令)으로 지내면서 창읍국 왕 유하(劉賀)를 섬겼다. 유하는 세상 물정 모르고 호강스럽게 자란 귀족 자제로서 행위가 단정하지 못하여 공수는 몹시 초조해했다. 그는 태부(太傅)와 국상(國相)이 유하에게 바른길을 걷도록 권유하지 못하는 것을 질책했다. 공수는 경전(經典) 중의 어구(語句)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이해득실을 통절(痛陳)하게 진술하고 그 문제의 정곡을 설명하면서 늘 마음이 아픈 곳을 말하다 보면 눈물을 흘리곤 했다.

공수는 큰일을 함에 있어서 모호하게 한 적이 없었고, 유하에게 아첨하지도 않았으며, 늘 유하가 난처해질 정도로 그의 잘못을 직설적으로 이야기했다. 한 번은 공수가 한창 이야기하는 도중에 유하는 귀를 막고 도망가며 말하기를 “낭중령의 말은 참으로 사람을 부끄럽게 하오!” 창읍국의 위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다 공수를 매우 공경하면서 두려워했다.

하지만 유하의 악습은 고치기 어려워 여전히 먹고 마시고 놀며 돈을 물 쓰듯 했다. 공수는 궁으로 들어가 두 무릎을 꿇고 간언을 올렸다. 눈물이 공수의 온 얼굴에 가득 흘러내렸고 주변 사람을 감동하게 하여 눈물을 흘리게 했다. 유하는 황당하게도 질문을 했다. “낭중령은 왜 눈물을 흘리시오?”

공수가 말했다. “국가가 위태롭게 되어 신(臣)의 마음은 아프고 슬프옵니다! 폐하께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신의 우견(愚見)을 들어주셨으면 하옵니다.” 유하는 좌우의 신하들을 물러가라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공수가 물었다. “폐하께서는 교서왕(膠西王)이 악을 행하여 멸망한 사실을 아시옵니까?” 유하는 막연해하며 모른다고 말했다.

공수가 말했다. “교서왕에게는 아첨을 매우 잘하는 후덕(侯得)이라 불리는 한 신하가 있었습니다. 교서왕은 하걸(夏桀, 중국 하대 마지막 임금 걸 왕), 상주(商紂, 중국 상(은)나라 마지막 임금 주왕)처럼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하였지만, 후덕은 오히려 교서왕을 요순(堯舜,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에 비유하였습니다. 교서왕은 좋은 말만 듣기 좋아하다가 갈수록 후덕의 요사한 말을 믿게 되어 최후에는 자신도 죽고 나라도 망하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지금 소인(小人, 인격이 낮은 사람)을 가까이하시니 교서왕의 전철을 밟고 계시옵니다.”

유하가 멍해지자 공수는 기회를 빌려 말했다. “폐하께서 나라가 망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거든, 신이 폐하께 유교에 정통하고 인품과 덕성이 고상한 선비들을 폐하와 함께 생활하시도록 추천해드리는 것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정좌할 때 ‘시’, ‘책’을 읽으시고, 행립시 예의범절을 익히셔야만 나라를 다스릴 수 있사옵니다.”

유하는 이에 마지못해 동의하였다. 공수는 학문이 뛰어나고 품행이 높은 장안(張安) 등 열 명을 정성껏 골라 유하를 섬기도록 하였다. 하지만 유하는 고집불통이라 변화하려 하지 않아 며칠 되지 않아 그들을 내쫓았다.

그 후, 왕궁에는 묘연하고 괴이한 현상이 자주 나타났다. 유하는 자주 사람의 몸에 개의 목을 지닌, 곰과 나는 새 등 이상한 괴물을 볼 수 있었지만, 곁에 있는 수행원은 보지 못했다. 한번은 유하의 좌석에 핏자국이 나타나 유하는 약간 두려워 공수에게 무슨 까닭인지 물었다.

공수가 말했다. “이것은 하늘의 경고입니다. 폐하께서는 ‘시경(詩經)’을 읽어보셨을진대 그 중의 예의 규범은 행하셨습니까? 귀하신 왕의 신분으로 폐하의 언행은 오히려 서민보다도 더 혼탁하시니 이러다가는 재앙을 초래하게 될 것이옵니다! 혈은 음재지상(陰災之像)이오니 머지않아 나라에 큰 화가 닥칠 것이온데 폐하께서는 아직도 서둘러 자신을 반성하지 않으십니까!” 유하는 여전히 흘려들었다.

황제 폐위를 다시 간청 올리다

공교롭게도 소제(昭帝)가 승하하여 대신 곽광(霍光)과 많은 조정의 관리들이 유하를 맞아들여 황제로 세우자 유하는 곧 그의 배운 것도 없고 재주도 없는 수행원들과 부하들을 거느리고 상경하여 즉위하였다. 가는 길에 유하는 민간 여성을 강제로 빼앗기까지 하였고, 경성 부근에 이르러서는 무릎을 꿇는 국상 예의도 갖추지 않았다.

입궁한 후, 유하는 더욱 물 만난 고기처럼 법도를 무시하고 거만했으며, 횡포하고 자만했다. 공수는 속에 불이 난 듯 초조하여 안락(安樂), 장락궁(長樂宮), 위위(衛尉)에 말했다. “황제께서 천자가 되셨는데 나날이 교만하고, 사치스럽고, 방탕 무도해지셔서 간언은 듣지 않으십니다. 지금 아직 선화의 수상(守喪) 기간인데 신하들과 술을 마시고 행락하며, 아홉 개의 채색 깃발이 나부끼는 차를 몰고 마구 돌아다니니 이는 하늘의 뜻과 국법에 맞지 않고 백성을 저버리는 것이며 정도와는 너무 멀리 벗어났습니다.”

“옛날에는 제도가 관대하여 대신들이 임금의 무도함을 만나면 피은(避隐)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관직에서 물러날 수 없으니, 신은 미친 척하며 어리석게 굴어 관직에서 물러나 화를 피하고 싶어도 조정의 관리들이 알게 될까 봐 두렵고 하루아침에 몸이 죽어버리면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대는 과거에 폐하의 재상이셨으니, 마땅히 서둘러 직언으로 간언하셔야 합니다.”

애석하게도 충직하고 강직하며 인자하고 후덕한 공수는 끝내 유하의 마음을 돌려세우지 못했다. 유하는 재위 27일 만에 조정의 관리들에 의해 물러나게 되었고, 이 짧은 기간 동안 유하는 평균 매일 40가지에 가까운 법도에 맞지 않는 죄를 범했다.

유하가 폐위된 후, 창읍국에서 온 뭇 대신들과 수행원들은 왕을 무도에 빠뜨린 죄목으로 모두 사형되었다. 유독 공수와 중위(中尉), 왕양(王陽)만이 유하에게 여러 차례 간하고 자신의 직책을 이행하여 사형을 면했다.

선제(宣帝) 대책

유하가 폐위되고 선제(宣帝)가 즉위하였다. 선제가 즉위하고 얼마 후, 발해군과 그 인접 지역에 흉년이 들어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났고, 백성이 평안하지 못하여 일부 굶주린 백성은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했다. 당시에 군 태수(太守)는 그들을 제압할 능력이 없었다.

선제는 사태를 평정시킬 수 있는 사람을 골라 발해군 태수로 삼으려 했다. 승상(丞相)과 어사대부(御史大夫)는 공수를 극구 천거하며 그는 위험과 재난에 직면하여 천명을 받는 것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황제는 서둘러 임명장을 발표하여 공수를 발해군 태수로 가도록 했다.

당시 공수는 이미 고희를 넘어 일흔여 세가 되어 몸집이 왜소했다. 선제는 소견할 때 공수의 용모를 보고 마음속으로 다소 실망했고, 중신[重臣, 중직(重職)에 있는 신하(臣下)]들이 천거한 그 공수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고 느꼈다.

선제가 공수에게 물었다. “발해는 온통 흉흉하여 어지러운 상황이오. 법률과 기율은 문란해져 백성들이 불안정하오. 그대는 무슨 좋은 계책으로 그곳을 다스려 짐(朕, 황제가 자신을 이르는 말)이 베개를 높이 하고 걱정 없이 잘 살도록 할 수 있겠소?”

공수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발해군은 너무 외지고 먼 곳에 있어서 성왕의 은혜와 교화가 아직 미치지 못하여 그곳의 백성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방 관리들은 그들의 입장이 되어 돌보아 주지 않고 구제하지 않아 쌓인 원한이 이미 오래되어 폐하의 백성이 성조(聖朝)의 병기를 절도하게 되어 연못 기슭에서 몇 번 가지고 놀다 초래하게 된 것이지 그들이 저의를 품고 반란을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선제는 공수의 말을 듣고 매우 이치가 있다고 생각했고, 용안에 기쁨이 가득했다. 공수는 이어서 황제에게 반문했다. “폐하께서는 신(臣)이 가서 그들을 토벌하여 섬멸하게 하시렵니까, 아니면 가서 그들을 달래어 평안하게 하시렵니까?”

황제가 말했다. “짐이 현량하고 유능한 신하를 선출하여 발해로 가게 하는 것은 당연히 그들을 달래어주고 평안하게 해주고 싶기 때문이네.” 이리하여 공수는 추가로 그의 시정방침(施政方針)을 아뢰었다. “신은 질서를 잃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엉킨 밧줄을 푸는 것과도 같다고 들었사옵니다. 일을 너무 서두르면 도리어 이루지 못하는바 천천히 해야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부임한 후, 승상과 어사대부가 신의 일에 대하여 잠시 관례에 따라 구속하지 말고 신이 현지 실제 상황에 근거하여 재량껏 처리할 수 있도록 윤허하여 주옵소서.”

평화롭게 도적을 평정하다

선제는 공수의 이 요구를 승낙하고 그에게 황금을 하사하여 역차(驛車)를 추가로 보냈다. 공수가 황제가 하사한 역차를 타고 발해군 경계에 이르니 군부의 관리들은 새 태수가 부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병 대열을 지어 영접했다. 공수는 상황을 목격하고 그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즉시 공문을 보내어 각 현에 소속되어 있는 전문적으로 도적을 잡는 관리와 관직을 없애도록 명령했다.

공수는 또 지혜롭게 양민과 도적에 대하여 하나의 구분을 지었다. 농기구를 손에 들고 있는 그런 사람들은 모두 양민들이어서 관리들이 그들에게 죄를 묻지 않고 병기를 휴대한 사람만이 도둑이라고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어서 공수는 어떠한 수행원도 없이 홀로 수레를 타고 군부에 도착했다. 공수의 방법은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고, 군내 백성들은 잇따라 매우 빠르게 안정을 찾았으며 도적도 활동을 멈추었다.

발해군에는 무리를 지어 약탈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공수의 교령(教令)을 듣고 자진하여 해산했으며, 손에 든 병기를 버리고 농기구를 잡기 시작했다. 이렇게 공수는 몇 일병일졸(一兵一卒)도 쓸 필요 없이 절도와 반란을 평정했고, 백성은 안정된 생활을 누리며 즐겁게 맡은 바 일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공수는 곳간을 열어 빈민에게 양식을 빌려주었고, 청렴한 관리들을 일부 선발하여 백성을 달래어주고 평안하게 하도록 하였다. 공수는 발해지역의 사람들이 농경지 경작을 중시하지 않고 오로지 상품 판매만을 선호하며 사치를 즐기는 기풍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솔선수범하여 절약하고 백성에게 농업에 주력하여 부지런히 경작할 것을 권했으며, 사람마다 모두 느릅나무 한 그루, 염교(薤) 100포기, 파 50포기, 부추 한 뙈기씩 심게 하였고 집마다 암컷 돼지 두 마리, 닭 다섯 마리를 기르도록 하여 그들이 영농 기반을 세우는 것을 도왔다.

백성 가운데 칼을 지닌 사람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공수는 그들에게 검을 팔아서 경작할 수 있는 소를 사게 하고, 칼을 팔아서 송아지를 사도록 권유하며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왜 ‘소와 송아지’를 몸에 차고 다니는가?” 봄과 여름철이 오면 공수는 백성들이 모두 밭에 나가 일을 하도록 권하고 가을과 겨울철이 오면 그들의 수확을 독촉했다.

공수는 또 사람들이 과실과 열매 등 농산물과 부업 생산물을 많이 축적하도록 격려했다. 공수가 부지런히 경작을 살핀 덕분에 발해군 내에는 집마다 곡식이 저장되어 백성들이 점차 부유하고 풍족해지도록 하였고, 사회적으로 소송과 범죄가 많이 줄어들었다.

인재를 소중히 여기고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을 천거하다

몇 년 후, 선제는 공수를 경성으로 불러들였다. 의조(議曹, 군수의 하급 관리)의 왕생(王生)이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공조(功曹, 군수의 주요 보좌 관리)는 왕생이 지나칠 정도로 술을 좋아하고 절제가 없어 따라가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공수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왕생이 자신을 따라 경성으로 가도록 허락했다.

경성에 도착한 후, 왕생은 매일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술을 마셨고 공수를 보러 가지도 않았다. 하루는 공수가 황제의 부름을 받고 궁에 들어가는 길에 곤드레만드레 취한 왕생을 만났다. 왕생은 잔뜩 취하여 뒤에서 큰소리로 공수를 불러 세웠다. 공수는 어찌 된 일인지 묻자 왕생이 말했다. “만약 황제께서 어떻게 발해를 다스렸느냐고 물으시면 ‘전적으로 폐하의 위덕이지 신의 능력이 아닙니다.’라고 말씀하셔야 합니다.” 공수는 왕생이 자신에게 스스로 공로가 있다고 여기며 교만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황제를 만난 후, 황제는 과연 공수에게 발해를 다스린 상황을 물었고, 공수는 왕생의 말대로 폐하께 아뢰었다. 황제는 공수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예양 하는 모습을 마음에 들어서 물었다. “그대가 이렇게 충직하고 온후하며 겸손한 모습은 어떻게 갖추게 된 것인가?”

공수는 기회를 빌려 황제에게 아뢰어 청하였다. “신은 현명하지 않사옵니다. 이는 전부 저의 의조 왕생이 신을 일깨워준 것입니다.”

황제는 공수의 도량과 아량 그리고 부하의 공을 자신이 떠맡지 않는 모습에 더욱 감복하여 인재를 소중히 여겨 현명한 사람을 천거하였다. 공수는 나이가 많아 황제는 그의 건강을 소중히 여겨 그에게 천자의 곁에 남아 임원(林苑, 임금이 사냥하고 즐겼던 동산)과 궁궐을 배치하는 일을 맡게 하고 종묘 제사의 일을 관리하게 하였으며 수형도위(水衡都尉)에 임명하고 왕생은 수형승(水衡丞)으로 삼아 두 사람을 포상하고 이끌어주었다.

참고문헌: ‘한서·순리전·공수(漢書·循吏傳·龔遂)’, ‘한서·창읍왕전(漢書·昌邑王傳)’

 

원문발표: 2019년 07월 12일
문장분류: 천인지간(天人之間)>문사만담(文史漫談)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7/12/38990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