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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명군(明君)이 경천자율(敬天自律)한 이야기

[밍후이왕]

1. 《상사(商史)》에 기재: 상(商)나라 개국 군주 성탕(成湯)이 즉위한 후 비가 오지 않아 7년이나 큰 가뭄이 들었다. 그리하여 성탕은 뽕나무 들판에 나아가 여섯 가지 일에 대해 자책하며 하늘에 간절히 빌었다. “제가 정령(政令)함에 절도가 없기 때문입니까? 제가 신하와 백성으로 하여금 직책을 거스르게 했기 때문입니까? 저의 궁정생활이 사치스럽고 부패했기 때문입니까? 제가 후궁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정치를 어지럽히게 했기 때문입니까? 제가 엄격히 관리하지 않아 뇌물이 성행했기 때문입니까? 제가 참언(讒言)을 곧이듣고 소인(小人)이 득세하게 했기 때문입니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방 몇 천리에 큰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의 ‘탕도상림(湯禱桑林)’이다. 상탕도우(商湯禱雨)는 역대 명군이 수양과 충언을 귀담아듣고 과감하게 자기 잘못을 꾸짖은 첫 사례가 되었다. 황제가 곧 법이던 시대에 위대한 하늘은 친하게 여기는 이 없이 오직 덕이 있는 사람만을 도와주며 더욱 위력을 드러냈다.

2. 당태종이 자신에게 죄를 돌리다. 어사가 당태종에게 광주도독(廣州都督) 당인홍(黨仁弘)이 뇌물을 받아 법을 어겼다고 고발하였다. 태종은 마음속으로 ‘그가 여러 해 동안 나를 따라 다니면서 동정서벌(東征西討)한 아주 재능있는 자인데 어찌 이런 죄를 범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해 윤허하지 않았다.

당태종은 탐관오리를 처벌하지 않으면 사악한 기풍이 널리 퍼져 백성이 고통받고 조정의 법도가 혼란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대리시(大理寺, 형벌을 관장하는 관서)에 조서를 내려 체포해 재판에 회부하고 공정히 심사하여 처리하게 했다. 대리시는 법에 따라 그에게 사형을 판결하고 태종에게 아뢰었다. 당태종은 당인홍이 얻기 어려운 인재이고 자신을 위해 큰 공로를 세운 적이 있으니 그에게 잘못을 뉘우칠 기회를 주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필(禦筆, 황제의 친서)로 삭탈관직해 유배를 보냈다.

당태종은 마음대로 판결을 뒤집어 법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횡령한 자를 용인한 것을 반성했다. 조회(早朝)에서 “짐이 옛 신하를 두둔하고 국법을 어겼으니 민심을 잃게 되었느니라. 가악(可惡)한 사심이도다.”라고 선포하며 목메어 울기 시작했다.

태종이 탁자를 두드리며 “짐이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법을 어겼으므로 당연히 징계를 받아야 하오. 지금 나는 남쪽 교외로 나가 초가집에서 목욕재계하고 하늘을 향해 3일간 사죄하겠소.”라고 침통하게 말하자 대신들은 무릎을 꿇고 극구 만류하였다.

태종은 땅바닥에 꿇어앉은 조정의 문무백관들을 보고 침통하게 말했다. “경들이 짐을 용서할 수 있어도 짐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소. 짐이 잠시 교외로 나가 하늘에 사죄하지는 못하나 조서를 내려 천하에 자신의 죄과를 알리려 하오.” 말을 마치고 붓을 들어 죄기조(罪己詔: 임금이 스스로를 꾸짖는 조서)를 써서 속히 전국의 신하와 백성들에게 선포하도록 대신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당태종은 “재난을 짐의 탓으로 돌려 만국을 보존하는 것은 내가 바라는 바이니 달갑게 받아들이겠소.”라고 말했다. 백성을 위하여 재난을 모두 자기 몸에 내려줄 것을 하늘에 간청했다. 마음이 바다처럼 넓은 당태종은 천하를 품고, 간언을 받아들이고, 사심없이 지성지덕(至誠之德)하여 백국(百國)이 순례하는 영보(靈寶), 대당제국(大唐帝國)를 이뤘다. 후덕재물(厚德載物) 즉 덕을 두텁게 해 만물을 포용한 것이다!

3. 《청사고(清史稿)》에 기재: 가경제(嘉慶帝, 청나라 7대 황제)는 즉위 후 조언이나 제안을 올리라는 조서를 내렸다. 홍량길(洪亮吉)은 서재에 재직하면서 많은 상소문을 써서 조정의 폐단을 직언했는데 말이 격렬하고 직설적이어서 가경제가 노여워했다. 가경제는 죽을죄라며 감옥에 보낸 뒤 후회가 되어서 다시 조서를 내려 이리(伊犁)로 유배 보냈다. 홍량길이 유배간 그해 4월, 북방에 큰 가뭄이 들어 지방 관리들과 가경제는 비가 내리기 바랐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죽을 쑤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해도 비가 오지 않고, 죄인을 사면하라고 명했어도 여전히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근심걱정에 시달린 가경제는 홍량길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 하늘이 노해서 비를 내리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경제가 직접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는 조서를 쓰는데,흠차(欽此, 조서를 끝맺는 말) 부분의 마지막 한 획을 그을 때 한줄기 번개가 하늘을 가르더니 곧이어 천둥소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큰비가 쏟아졌다! 가경제는 감탄해서 “숨을 돌리기도 전에 천감(天鑒, 하늘의 거울)이 민첩하게도 그 뜻을 아니 참으로 무섭도다”라고 했다. 신의 눈은 번개와도 같아 사람의 행위를 주시하고 있고, 사람의 선하고 악한 행위는 하늘에서 감지할 수 있는즉 “하늘은 사람을 비추는 거울과 다를 바가 없다.”

주(周)나라 문무백관……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3대에 걸친 강건성세(康乾盛世)에 이르기까지 많은 명군은 신(神)을 공경하고, 직접 사죄하고, 백성을 구제하였다.

천도(天道)는 자비롭고 신성하다. “백성은 의식(衣食)을 제공해주는 부모이다.” 많은 명군은 ‘죄기조’로 백성에게 은덕을 베풀고 널리 덕정(德政)을 폈으며, 불법(佛法)을 추앙하여 인심에 불광이 널리 비추게 했다. 바른 기풍으로 오랫동안 태평하고 평안하여 경제는 전례 없이 번영하였으며, ‘문명고국, 예의지국’으로 알려져 백국이 순례하는 나라가 되어 전 세계에서 중국 백성이 가장 부유했다. 당나라 때 중국 백성의 재산은 세계의 64%였고, 송나라 때는 39%. 명나라 때 44%, 청나라 건륭(乾隆) 시기에는 51%, 청나라 말기에는 27%를 차지하였으나 2003년에는 4%에도 미치지 못했다.(대량의 재산이 중국 공산당 고위층 일가의 수중에 있음)

‘천도는 위엄이 있고 신성하다. 하걸(夏桀), 상주(商紂), 진(秦)2세 호해, 수양제(隋煬帝) 등은 하늘을 거스르고 역행하는 폭정통치로 백성을 탄압한바 도처에 억울한 사건이 넘쳤고 이들은 천벌을 받아 단명했다. “하늘이 그를 멸망시키려 하면 반드시 먼저 그를 미치도록 한다”, ‘3무 1종(三武一宗)의 폐불’로 아둔한 군주와 자손 모두 악보(惡報)를 받았다…… 모두 역사에서 증명되었다.

하늘에 맹세하는 것도 아이들 장난이 아니다. 하늘에 맹세한 나성(羅成)은 ‘화살에 맞아 죽고’, 진경(秦瓊)은 ‘피를 토해’ 죽었고, 송나라 현인(顯仁)황후는 ‘두 눈이 실명되었으며’, 두아(竇娥)의 맹세로 ‘6월에 눈발이 날리고 초(楚)나라에 3년간 큰 가뭄이 들었다.’ 하늘은 하나하나 맹세한 대로 실행하였다. 머리 석자(三尺) 위에 신령이 있는 것이다!

 

원문발표: 2018년 6월 25일
문장분류: 천인사이>문사만담(文史漫談)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6/25/36865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