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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옥에 갇혔어도 굴하지 않고 남편은 악인을 고발(1)

글/ 중국 파룬궁수련생

[밍후이왕] 현재 많은 파룬궁수련생과 가족이 공안(경찰), 검찰, 판사, 교도관 등 자신의 친인을 박해하는데 직접 참여한 사람들을 고발하고 있다. 장쩌민과 중국 공산당의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18년 박해과정에 많은 파룬궁수련생의 가정이 집을 수색당하고, 불법적인 체포와 노동교양을 당하고, 판결을 받는 등 여러 가지 형식으로 박해를 당했다. 많은 파룬궁수련생의 가족도 수련생과 함께 박해를 반대하고 있는데 리강이 바로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석탄성 솽야산의 환난 실상

‘세찬 바람이 불어야 억센 풀을 알 수 있고, 환난을 겪어 보아야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 는 속담이 있다. 중국대륙 동북 헤이룽 장성에 있는 석탄성 솽야산은 완다산 북쪽의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성 밖은 구릉이 이어져 있고, 지세가 기복을 이루는 성 안에는 단층 건물과 층집들이 들쭉날쭉 들어서 있다. 리강(李剛)과 쑨펑제(孫鳳傑) 일가는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선량하고 부지런한 아내 쑨펑제는 싼마루 무역시장에서 피륙장사를 한다. 성격이 쾌활하고 남을 잘 도와주는 쑨펑제는 인간관계가 좋았고, 근검하게 가정생활을 꾸리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을 사랑했다. 두 사람에게는 일남일녀가 있는데 딸 신신은 어머니 성을 따르고, 아들 화린은 아버지 성을 따랐다. 가정은 아름답고 행복했다.

리강의 호적은 한족으로 되어있지만 사실은 만주족이다. 리강은 조상들처럼 말 타고 활 쏘는 것은 할 줄 모르지만 책 읽기를 좋아했다. 무슨 ‘소무목양(蘇武牧羊)’ ‘범중엄 현상(範仲淹賢相)’ ‘허다년이 선을 베풀어 복을 받다’ 등을 읽기 좋아했고 고대 성현을 많이 알고 있었다. 한 평생을 ‘리(理)’자만 아는 강직한 사람으로 살아왔다. 문예를 좋아하는 리강은 시가도 쓰고, 피리도 불면서 꽤나 생활 정취를 즐겼다. 리강이 아내에게 갖고 있는 불만은 딱 하나인데 바로 펑제(아내)의 성질이 급한 것이다. 펑제는 바닥을 쓸고 있다가 아이들이 잘못하는 것이 보이면 곧 빗자루로 아이들을 때리는데 누가 말해도 고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유일한 단점을 어떻게 고쳤는가?

1996년 5월, 시장의 한 언니가 펑제에게 파룬궁을 소개했다. 펑제는 신체도 좋아지고 심성도 변했다. 항상 웃으면서 리강과 아이들을 대했다. 아이들에게 도리를 말하고, 진실하며 선량하고 관대한 사람이 되라고 교육했다. 리강은 펑제에게 ‘현모양처의 표준’ 에 도달했다고 만점을 주었다. 펑제는 늘 출근을 하지 않는데다 마음씨가 따뜻하고 일 처리를 잘하기에 사람들은 그녀를 솽야산 파룬궁보도소의 소장으로 추대했다. 이 소장은 누가 임명한 것도 아니고, 월급을 주는 사람도 없으며, 또 무슨 권리도 없다. 다만 신 수련생이 오면 연공동작을 가르쳐주고, 누가 도움을 요구하면 봉사할 뿐이다.

파룬궁수련생이 모두 무엇을 하는가? 리강은 다 알고 있다. 아침에는 이서우산 공원에 가서 연공을 하고, 저녁에는 함께 모여 ‘전법륜’을 읽고, 명절이면 홍법 등을 한다. 출근하는 사람은 출근하고, 살림을 하는 사람은 살림을 하면서 사람마다 모두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자신을 단속하며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좋은 일만 한다. 쑨펑제는 연공을 시작한 후부터 층집 앞의 눈을 혼자 다 쓸었다. 과거에는 이익을 챙길 줄 모른다고 남편을 나무라던 쑨펑제가 공짜를 탐내지 않고 직장에서 물품관리를 하면서도 자신의 집을 장식할 못도 모두 자신이 샀다. 연공을 한 후 펑제는 변했다. 집에 직장의 물건이 있으면 리강에게 모두 직장으로 되가져가게 했다. 확실히 경지가 달라졌다. 펑제의 몸은 확실히 좋아졌다. 기절해 쓰러지지 않았으며, 두통도 좋아졌다. 리강은 여러 가지 질병이 나아진 사례와 파룬궁수련생들이 좋은 일을 많이 한 것도 보고 들었다. 리강은 대법 사부님에 대해 진심으로 감탄했고, 대법 ‘진·선·인(眞·善·忍)’법리를 마음 깊이 받아들였다.

장쩌민은 대법 사부님에 대한 질투로 대륙에서 ‘집단 멸종’ 방식으로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박해를 발동했다. 쑨펑제는 불법가택수색, 고문, 네 차례 체포, 한 차례 노동교양, 징역 13년 형, 감옥에 15년 감금 등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그들은 피륙장사를 하면서 몇 십만 위안(한화 약1,710만 원)의 고정자산이 있었고, 젠산구 핑싱루 19위에 살고 있는 몇 백 가구 중에서 첫 번째로 전화를 설치했었는데 현재 피륙가게는 문을 닫았고 상점은 파산됐다. 감옥에 감금된 아내를 면회하기 위해 양쪽으로 뛰어다녀야 하는 리강에게는 몇 백 위안(한화 약 17,000 원)의 퇴직 노임뿐이라 담배도 한 갑에 2위(한화 약 340원) 하는 제일 값싼 것으로 피웠고, 교통비를 절약하려고 아주 먼 거리도 걸어 다녔다. 10시간씩 기차를 타고 하얼빈에 갈 때에도 침대표를 사지 않고 앉아서 갔지만 왕복에 82위안 (한화 약14,000원) 씩 들었다. 구은 빵 하나에 국수 한 그릇으로 한 끼를 때웠다.

매번 8월 15일과 새해를 맞을 때면 리강은 등을 밝히며, 촛불을 켜고, 물만두와 요리를 했다. 네 명의 사발과 접시, 젓가락을 차려놓고 이것은 펑제 것, 이것은 신신이 것, 이것은 화린이 것이라고 했다. 새해를 맞을 때면 그믐날부터 새해 초하루까지 리강은 펑제와 아들딸을 위해 이 집을 지켰다.

“매화 향기 백화원에 날리고, 온몸의 정기(正氣)로 봄볕을 반기네 (百花園中梅芬芳 一身正氣迎春光).” 리강이 2004년에 쓴 시 ‘매화송’ 의 첫 두 구절이다. 11년 후, 2015년 12월 5일, 룽장(헤이룽장)에 대설이 내렸다. 솽야산 ‘610’ 차량이 출발하기 전에 길이 막혔다. 6일은 쑨펑제가 만기 출소하는 날이다. ‘610’은 미리 리강에게 그들이 쑨펑제를 데려오겠다고 알렸다. 리강은 말했다. “필요 없습니다! 원하지 않습니다!” 그 날 대지는 하얀 눈에 덮이고 하늘은 아득했다. 쑨펑제는 한 걸음 한 걸음 헤이룽장성 여자감옥의 회색 담장을 걸어 나왔다. 경비 경찰이 물었다. “이름은요?” “쑨펑제” “무슨 죄입니까?” “죄가 없어요. 파룬궁을 수련합니다.”

펑제는 솽야산에서 재난을 당하고 리강은 노동교양소에서 새해를 보내다

파룬궁에 대한 공개적인 박해가 시작된 1999년 ‘7,20’ 당일, 쑨펑제는 곧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 집으로 돌아온 그날 밤 집에 뛰어든 솽야산 샹양 파출소 경찰에게 납치돼 3개월 넘게 불법 구류를 당했다. 1999년 10월 25일, 장쩌민은 프랑스 ‘르피가로’지와 인터뷰에서 파룬궁을 ‘사교’라고 모독했다. 이틀 후인 10월 27일 중공당보 ‘인민일보’는 당장 논평을 게재해 호응했다. 쑨펑제는 7세 되는 아들을 데리고 베이징으로 갔다. 속속 하얼빈으로 송환되었는데 쑨펑제는 탈출하여 또다시 베이징행 열차를 탔다. 이번에도 쑨펑제는 법에 따라 정당하게 청원했지만 역시 붙잡혀 철창에 갇혔고 박해 당했다.

쑨펑제는 솽야산으로 붙잡혀 와서 광무국 공안처 구치소에 감금되었다. 면회를 못하게 하자 리강은 공안국을 찾아가고 ‘610′ 두목 위융장을 찾아갔다. 마지막에는 시위 서기 후샹딩을 찾아갔다. 리강은 마음속으로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한 쑨펑제는 죄가 없다. 왜 만나지 못하게 하는가?‘ 라고 생각하면서 아주 당당했다. ‘특별 허가’를 받아 리강은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쑨펑제에게 ‘회개서’ ‘보증서’를 쓰게 하기 위해 솽야산 공안국 ‘610’, 국보대대의 리썬, 리훙보까지 동원되었고, 솽야산 광무국 공안처 처장이 직접 출동했다. “나는 리강과 초등학교 동창입니다. 당신이 보증서만 쓰면 내가 곧 당신을 집으로 돌려보내겠습니다.”

2000년 설은 21세기의 첫 새해이다. 사람마다 행운을 바라는 마음으로 폭죽도 많이 터뜨렸다. 30일 저녁, 보증서를 쓰지 않은 쑨펑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철문 소리가 나더니 리강이 13세의 딸과 8세의 아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온가족이 구치소에서 ‘송구영신’ 하게 되었다. 리강은 집에서 잘 다진 만두소와 잘 반죽한 밀가루를 갖고 와서 아내와 함께 철창 안에서 만두를 빚고, 함께 쪄먹었다. 구치소에는 또 파룬궁수련생 후(胡) 선생이 있었는데 그도 리강의 식구들과 함께 박해 속에서 첫 새해를 보냈다.

태양이 사라진 시거무, 빙설로 뒤덮인 이수산

2000년 2월 6일, 쑨펑제는 노동교양 1년을 당하고 자무쓰시 시거무 노동교양소에 감금되었다. 쑨펑제가 노동교양소에서 경문을 외우고, 연공했다는 이유로 악인들은 쑨펑제를 독방에 가두고, 욕하고 때리며, 문틀에 달아매고, 여러 가지 형벌을 가했다. 노동교양소의 경찰은 갖가지 방법을 생각해 내 사람을 해쳤다. 쑨펑제와 두 수련생을 침대 옆에 수갑으로 함께 채워 놓아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었고, 한 사람이 움직이면 서로 잡아당기게 돼 더욱 고통스러웠다.

2001년, 쑨펑제가 집으로 돌아온 후 생활을 위해 쑨펑제와 리강은 작은 가게를 열고 채소와 과일을 팔았다. 부부가 정성들여 상품을 선택하고 공정하게 거래하며, 가짜를 섞지 않고, 저울을 속이지 않았기에 장사는 아주 빨리 흥하게 됐다. 먼 곳에 있는 사람들도 이곳에 와서 물건을 샀다. 아이들도 하교 한 후에는 도와주며 온 가족이 근면성실하게 일하면서 생활이 안정되는 듯했다. 부근의 푸안 파출소의 정위 리스원과 지역 책임 경찰 주웨이둥이 할 일이 있든 없든 찾아와서 이쪽저쪽을 살펴보고 엉뚱한 말을 하면서 쑨펑제에게 소란을 피웠다.

12월 28일, 온 가족이 바삐 보내고 있는데 경찰차 몇 대와 10여 명의 경찰이 가게를 에워쌌다. 솽야산의 ‘610’, 국보대대의 리훙보, 리썬까지 모두 왔다. 리강이 물었다. “무슨 근거로 우리 집으로 왔습니까?” 한 사람이 종이 한 장을 내보였다. 평시에 아주 얌전하던 딸 신신이가 그 종이를 빼앗아 찢었다. 경찰은 아이를 붙잡아 가겠다고 소리쳤다. 리강은 딸 앞을 막아서면서 “나를 잡아가시오.”라고 말했다. 리스원은 쑨펑제의 두 손을 비틀어 뒤로 가져간 후 쑨펑제의 머리를 내리눌러 고개를 숙이게 했다. 이것을 본 리강이 달려가 리스원을 한 대 때리면서 두 사람이 맞붙어 싸웠다. 다른 경찰들이 서서 구경하자 리스원이 경찰들이 합세하지 않는다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경찰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리강과 쑨펑제의 덜미를 잡아 끌어 차에 실었다. 리강은 힘껏 저항하면서 “파룬따파 하오!(法輪大法就是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를 외쳤다.

아들딸이 울부짖는 속에서 부부는 잡혀갔다. 쑨펑제는 박해에 저항해 9일 동안 단식하면서 물도 마시지 않아 들것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다. 쑨펑제는 몸이 좀 회복되자 매일 공안국으로 가서 남편을 내놓으라고 호소했다. 마지막에 펑제의 연로한 아버지까지 공안국에 가서 사람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는 파룬궁도 수련하지 않는데 왜 그를 감금합니까?”

리강은 구치소에 한 달 이틀 감금되었다가 풀려났다. 2002년의 첫 달을 리강은 구치소에서 지냈다. 매일 딱딱한 워터우(窩頭-잡곡가루를 원뿔 모양으로 빚어 찐 것)를 먹었다.

현모양처는 형을 당하고 남편은 아내를 찾으며 고난을 이겨내다.

2002년 4월, 전국에서 또 파룬궁에 대한 광범위한 체포가 있었다. 솽야산에 있을 수 없게 된 쑨펑제와 수련생 왕관룽(王關榮)은 외지에서 셋집을 얻어 살게 되었다. 12월 7일, 두 수련생이 거리에서 전단지를 배포하다가 고발당해 지셴현 공안국 경찰에 붙잡혔다. 쑨펑제는 간직하고 있던 현금 수천 위안을 빼앗겼고, 왕관룽은 최신 휴대폰을 빼앗겼다. 솽야산시에서는 쑨펑제를 붙잡았다는 소식을 듣자 공안국 부국장 리칭판이 팀장으로 된 전담팀을 꾸렸다. 팀원은 리훙보, 리썬, 다이창펑, 류웨이궈, 지셴 구치소의 장위산, 겅 씨 경찰 등 17, 8명이었다. 그들은 쑨펑제와 왕관룽에게 여러 차례 고문을 하면서 자백을 강요하고, 종일 수갑을 풀어주지 않았다. 장쩌민이 ‘610’을 조직한 다음날 공안부에 경찰이 상급의 착오적인 명령을 집행해도 법률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지시가 있었기에 경찰은 무슨 짓이든 감히 다했다.

12월 12일, 악인들은 50시간 동안 쑨펑제와 왕관룽을 심문하면서 밥도, 물도 주지 않았으며, 잠도 못 자게 했다. 그들은 차례대로 돌아가며 휴식하면서 체력을 회복한 후 사람을 괴롭혔는데 처음부터 사람을 두들겨 팼다. ‘가랑이를 쫙 벌려 찢기’ ‘비행기 조종’ 등 고문을 했다. 거대한 남자가 걸상에 앉아 다리와 발을 두 수련생의 잔등에 올려놓고 머리를 쳐들지 못하게 했다. 2시간 넘게 서있게 하면서 바로 서지 못하면 발로 얼굴과 가슴을 차고, 등뼈를 가격했다. 다이장펑이 발로 쑨펑제의 얼굴을 차서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마지막에 쑨펑제를 감방으로 끌어갔다. 왕관룽은 보름이나 걷지 못했고, 두 수련생은 여러 날을 각혈했다. 30일 저녁 6시, 쑨펑제와 왕관룽은 다시 각각 다른 방에서 심문을 당했다. 들어서자 경찰은 쑨펑제의 방한화를 벗겨내고 찬 시멘트 바닥에 서있게 했다. 당시는 엄동설한이라 헤이룽장에서는 떨어지는 물방울도 바로 얼어버리는 날씨였다. 쑨펑제더러 ‘함께 한 사람’을 대라고 핍박하면서 다이장펑은 라이터로 쑨펑제의 머리카락을 태워 찌지직 타는 소리가 났다. 리썬의 운전수 창 씨는 쑨펑제의 머리에 비닐주머니를 씌워 놓고 거의 질식하게 했다. 철 의자에 앉히고 교대로 두들겨 팼다. 12시간 후에 쑨펑제는 들것에 들려서 감방으로 돌아갔다.

20일 후에야 리강은 아내가 붙잡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리강은 여러 곳으로 사람을 찾아 소개장을 얻어 가지고 열 살이 되는 화린을 데리고 면회를 갔다. 2003년 5월 8일, 솽야산시 젠산구 법원에서 쑨펑제와 다른 6명의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법정 심리가 있었는데 리강과 화린은 방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헌법에는 신앙은 자유라고 하지 않았는가? 출판 집회는 자유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판사는 쑨펑제와 다른 파룬궁수련생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대충 겉치레만 하고 끝마쳤다.

수갑을 찬 초췌해진 아내가 사법경찰들에게 밀려 피고석에 서는 것을 먼 곳에서 바라보던 리강의 마음은 부글부글 끓었다. 리강은 아내를 향해 “펑제, 나와 아들은 당신을 영원히 지지하오!” 라고 외쳤다. 한 번 면회하려면 끝없이 싸워야 하고 사람을 찾아 부탁해야 했다. 9개월 동안 리강은 지셴현을 7, 8차나 뛰어다녔다. 마지막 한 차례는 리강이 지셴 구치소로 갔을 때 쑨펑제는 이미 헤이룽장성 여자감옥으로 이송되고 없었다. 아예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았었다.

 

원문발표: 2017년 8월 30일
문장분류: 천인사이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8/30/353145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