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선행(善行)에는 반드시 보답이 있다

글/지진(智眞)

옛말에 “선행을 쌓는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넘친다(積善之家,必有餘慶)” “보이지 않는다고 인과응보 없다 말라, 멀게는 자손에게 있고 가깝게는 자신에게 있다(莫道因果無人見 遠在兒孫近在身)”고 했다. 옛 사람들은 품성을 중시하여, 일을 함에 천리(天理)와 양심(良心)을 강구하였다. 어질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타인을 선하게 대하였고, 다른 사람 돕기를 즐기면서도 보답은 바라지 않았지만, 천리(天理)는 아주 빨리 반응하였다. 사실 사람이 선(善)을 행하고 선을 지향하면, 자신에게 좋은 운명을 만들 뿐만 아니라, 자손들에게도 복을 마련해주고 복을 쌓는 기초를 닦는다. 고서(古書) 중에 기재된 이러한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자고이래 인과응보가 정확히 들어맞지 않은 적이 없다. 선을 행하고 선을 지향한 사람들이 하늘의 보살핌과 보호를 받을 수 있음이 충분히 실증되었기에, 사람들은 선악에는 응보가 있다는 것과 선량함을 보우함이 하늘의 뜻이라는 것을 더욱 믿게 되었다.

명나라 때 절강(浙江)성 덕청현(德清縣)에 채개(蔡凱)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집안은 부유했고, 평소에 대범하고 의리를 중히 여겨 어려운 사람을 즐겨 도왔다. 그는 평민들의 어려움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으며, 스스로 말단 관직을 맡아 양곡을 호송하여 경성(京城)으로 운반하였다.

어느 날 채개가 배를 몰아가던 중 갑자기 이웃 배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그 배에 가까이 다가가 보니, 어떤 상인이 울고 있었다. 채개가 즉시 그에게 우는 이유를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저는 산서(山西)성 상곡현(上谷縣)에 사는 방지효(房之孝)라고 합니다. 석탄을 싣고 경성에 가 팔려고 하는 중인데, 어제 부친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제가 급히 돌아가려면 물건을 이곳에 남겨두어야 하는데, 부탁할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게다가 집에서 떠날 때 올 때의 여비만 가져왔고, 물건도 아직 팔지 못했기에, 돌아갈 여비도 없습니다. 그래서 울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채개는 “부친의 병이 위급하니, 당연히 빨리 돌아가야지요. 저는 양곡을 경성까지 운반해 가는데, 만약 형씨가 저에게 화물선을 맡기신다면, 함께 경성으로 가져가서 판 후 원금과 이익금을 전부 돌려드리겠습니다. 형씨는 마음을 놓으시지요. 저에게 돈이 좀 있는데, 당신에게 드릴 수 있습니다. 여비가 얼마나 되는지요?” 방지효는 감격해 하면서 말했다. “화물은 큰 배로 열 척이고, 원가는 2만 8천 냥인데, 모두 자세한 장부가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여비는 백 냥이면 됩니다.” 이리하여 채개에게 화물과 자세한 장부를 맡겼다. 채개는 장부를 꼼꼼히 챙겨 받아놓는 한편 여비로 2백 냥을 건네주었다. 방지효는 마음이 급하여 작별인사를 하고는 산서로 급히 출발하였다. 채개는 곧 양식을 실은 배와 석탄을 실은 배를 모두 출발시켰다.

경성에 도착하여 채개는 양곡을 인계했다. 당시 경성에는 석탄이 매우 부족하여, 채개가 석탄을 시장에 팔고 나서 원금과 이자를 계산해보니, 2만 8천 냥의 원금을 제하고도 10만 냥이나 남았다. 그는 반드시 직접 방지효의 집까지 가져다주어야 부탁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산서까지 가서 자세한 장부를 방지효에게 넘겨주었다. 방지효는 깜작 놀라 말했다. “당신의 도움으로 돌아와서 부친을 보살펴서 이미 쾌차하셨소. 당신이 고생하여 석탄을 팔았는데, 나는 원금을 건진 것으로 충분합니다. 나머지 10만 냥은 모두 당신 것인데 어찌 나더러 가지라고 합니까? 받을 수 없습니다.” 채개는 말했다. “제가 책임을 맡은 것은 형씨의 급한 일 때문이었고, 이익을 보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어찌 돈 얼마 때문에 자기 것이 아닌 것을 탐내겠습니까?” 그리고는 장부를 내려놓고 조용히 떠났다.

채개가 고향에 돌아와 보니, 절강(浙江)에는 큰 흉년이 들어 있었다. 채개는 즉시 가산을 털어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그때 방지효가 다시 절강성까지 찾아와 2백 냥의 여비와 이익금을 돌려주려 했지만, 채개는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두 사람이 서로 실랑이를 하다가 방지효는 결국 그 돈을 전부 재해민들을 돕는데 사용하였다. 채개는 나중에 수명이 100세까지 이르렀고, 집안이 번창하였다. 그 아들 중부(中孚)는 굉치진사(宏治進士)로서 관직이 복건도어사(福建道御史)에 이르렀고, 손자 연전(演傳)도 역시 진사에 합격하여 관직이 이부시랑(吏部侍郎)에 이르렀으며, 증손 혁침(奕琛)도 진사출신으로 벼슬이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에 이르렀다. 강희 경술년 장원(壯元) 및 임술년 장원 역시 모두 그의 자손들이었고, 후손들이 계속 과거에 급제하였다. 또한 방지효의 후손 역시 산서에서 명망 높은 가문이 되었는데, 사람들은 모두 조상이 덕을 쌓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문장발표: 2011년 4월 17일
문장분류: 천인사이
문장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4/17/239171.html23917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