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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심종(史海尋蹤) : 포용력이 있어야 위대하다(有容乃大)

글/문정(文正)

【명혜망 2002년 4월 18일】 전국시대 중국의 역사를 기록한 《전국책(戰國策)》에 《조위후가 제나라 사신에게 묻다(趙威侯問齊使)》라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 제나라 왕이 조(趙)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위후(威侯)의 문안을 물었다. 이때 조위후는 서신을 보기도 전에 사신에게 물었다. “올해 작황은 어떠한가? 백성들은 편안한가? 제나라 군주께서는 건강하신가?”

그러자 사신이 이 말을 듣고는 언짢아하면서 말했다. “저는 국왕의 명령에 의해 조나라에 사신으로 온 것이니 응당 국왕의 안부를 먼저 묻고 그 후에 작황이나 백성들에 대해 묻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이는 본말(本末)이 뒤집힌 것이 아닙니까?”

조위후(趙威侯)가 대답했다. “아니오, 작황이 좋지 못하면 백성들이 어찌 편안히 살 수 있겠소? 또 백성들이 편안하지 못하다면 어찌 군왕의 강산이 안정될 수 있겠소? 때문에 과인이 이렇게 물은 것이니 이를 두고 어찌 본말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것이오?”

조위후는 이어서 또 말했다. “당신들 제나라에 은거한 인물 중에 종리자(鍾離子)란 사람이 있는데 잘 지내오? 그의 사람됨은 타인의 경탄을 자아내 부자건 가난뱅이건 누구나 다 그를 돕고자 한다 하니 이는 군왕을 도와 백성들을 양육할 인물이 아니오? 그런데 왜 아직 중용하지 않는 것이오?

또 엽양자(葉陽子)는 잘 지내오? 그의 사람됨은 외롭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조급해 하는 것을 조급해하며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생각하며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없는 사람들을 돕고 있소. 이는 국왕을 도와 백성을 위로할 인재가 아니오? 그런데 왜 아직 중용하지 않는 것이오?”

북궁(北宮)의 딸 영아자(嬰兒子 제나라의 효녀)는 잘 지내오? 그녀는 욕심이 없고 담담하며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늙도록 시집을 가지 않았으니 이런 효성스런 미덕은 모든 사람이 배울 가치가 있는 것이오, 그런데 왜 아직 그녀가 조정에 불려가 표창받지 못하는 것이오? 두 군자가 중용되지 못하고 한 효녀가 조정에 나가 조현하지 못했으니 그러고도 어찌 제나라를 잘 다스리고 만민을 통치할 수 있겠소?

우릉(于陵)의 자중(子中)은 아직 살아 있소? 그의 사람됨은 위로는 군주에게 충성을 다해 나라를 다스릴 수 없고 아래로는 몸을 닦아 집안을 다스릴 수 없으며 중간에서는 제후들에게 쓰일 수 없으니 이런 사람은 단지 백성들에게 나쁜 영향만을 끼칠 뿐인데 왜 아직 살아있는 것이오?”

지금 중국인의 관념에 따른다면 조위후의 이런 작법은 다른 나라에 대한 내정간섭이다. 제나라 ‘외교부 대변인’은 마땅히 이 일에 대해 강력히 항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조용히 하고 생각해보면 위후의 말에 어디 하나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는가? 어느 한 구절 폐부를 찌르지 않는 말이 있는가? 제나라에 대해 마땅히 백가지 이로움만 있을 뿐 한 가지 해로움도 없다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도덕과 정사(正邪), 선악(善惡)의 표준은 하늘이 정한 근본적인 표준으로 그 어떤 문화, 정치, 국경, 정권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현재 세계 각국이 중국 독재자의 파룬궁 박해에 대해 비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중국 정부에서 해외 유학생을 포함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사람이든 진심으로 들은 적이 있는가? 세계 많은 나라들이 중국 독재자를 비판하는 방법은 결과적으로 모두 반(反)중국이 되었고 모두 중국에 대한 내정간섭이 되었으며 모두 사람에게 알릴 수 없는 목적을 지닌 것이 되었다. 그런 후에 다시 돌이켜 이들의 파룬궁에 대한 평가가 어떠어떠하다고 하는 것이 공정한가? 이것이 진정 애국인가? 솔직히 말해 비판이 자극하는 것은 그 얄팍한 얼굴이 아닌가? 무슨 용납하지 못할 것이 있는가?

그렇다, 최근 1,2백 년 동안 중국은 강대국의 능욕을 받아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시달려왔고 이것은 중국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 상처는 물질적인 것도 있지만 더 심각한 것은 정신적인 것이다. 일찍이 박대정심(博大精深)하고 사해(四海)를 포용했던 민족이 협애하고 고집을 피우며 천박한 민족으로 변해버렸다. 비굴하게 무릎을 꿇거나 폭력적으로 배설하지 않으면 마치 세상을 평화롭게 대하지 못하는 것 같다. 사실 이 평화에는 내력이 필요하며 또 기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역사는 중국인들에게 또 한 차례의 기회를 주었다. 파룬궁 문제가 바로 그 시금석이다. 매 한 사람의 중국인이 근 2백년 이래 중국인들의 이기적이고 고집스럽고 증오하고 선망하며 자존심과 뒤틀린 심태가 결합되어 있다. 냉정하게 문제를 분석해보자. 광적으로 ‘국가(사실은 그 독재자)’의 체면을 수호하지 말고 담담하게 비판을 대하고 교활함으로 죄악을 덮어 감추지 말아야 한다. 객관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제출해야지 아무 근거도 없이 모자를 씌우거나 심지어 욕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정말 이와 같이 할 수 있다면 이는 장차 전체 중화민족에 대한 세례가 될 것이다.

문장발표 : 2002년 4월 18일
문장분류 : 천인사이
문장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2/4/18/28676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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