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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문화】서법(書法)과 서도(書道)

【명혜망 2006년 12월 9일】 팔선(八仙 여덟 분의 유명한 신선들) 중 장과로(張果老)가 당나귀를 거꾸로 탔다는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그는 앞으로 나가는 것이 오히려 뒤로 후퇴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당나귀를 거꾸로 탔다. 인류는 과학이 발전하고 사회가 진보한다고 여기지만 사실 완전히 이런 것만도 아니다.

본문에서는 서법(書法)의 각도에서 이 문제를 논해보기로 하자.

중국의 3대 국수(國粹) 중 하나로 꼽히는 서법은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다. 서법은 한자(漢字) 쓰기를 표현 수단으로 하는 일종의 추상적인 시각예술이다. 서법계에서는 흔히 “진(晉)나라 사람들은 운(韻)을 숭상했고 당(唐)나라 사람들은 법(法)을 숭상했다.”는 말을 한다. ‘서법’이란 단어가 처음 나타난 것도 ‘법을 숭상하는(尙法)’ 당나라 시기와 관련이 있다. 당나라 이전에는 서법을 서(書), 서예(書藝) 혹은 서도(書道)라는 말로 표현했다. 지금 일본에서는 아직도 서도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고 한국에서는 서예라고 칭한다.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기에는 사회적으로 노장(老莊)학설이 성행했고 사람들은 현묘한 도리와 심오한 이치를 논하길 좋아했다. 이런 사회적인 풍조의 영향을 받아 서법도 서도(書道)라고 칭했다. 동진(東晋) 시대 인물로 ‘서성(書聖)’으로 유명한 왕희지(王羲之) 역시 도를 숭상했다.

‘서도’라고 하면 함의가 아주 깊다. 서도란 서법작품을 하나의 완전한 유기체로 보면서 정체적으로나 경지(意境), 분위기(意韻)면에서 서법예술을 파악하고 체험할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서법예술에 함축된 의미가 도가에서 말하는 ‘도(道)’와 부합한다고 여겼다. 서법가들이 추구하는 예술 경지 역시 도의 경지였다.

왕희지는 “서(書)의 기(氣)는 반드시 도(道)에 도달해야 하며 혼원(混元)의 이치(理)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당나라 때에 이르러 해서(楷書)가 발전하면서 점획 형식이 나날이 풍부해졌고 한자의 필획구조도 날로 복잡해져 필획(筆劃), 구조(結構), 장법(章法) 등을 강조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영(永)’자 팔법, 구양순(歐陽詢)의 결자(結字) 36법 등이다. 아울러 서법에 대한 교육이 등장하면서 ‘서도(書道)’의 개념이 모호하고 말로는 전하기 어렵다고 여겨 단지 서사(書瀉) 기법만을 실질적으로 말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리하여 ‘서도’는 날로 쇠퇴해졌고 ‘서법’은 날로 성해졌으며 명칭 역시 정식으로 ‘서법’이라 부르게 되었다.

서도가 서법으로 변한 것은 겉으로 표현된 것은 예술형식의 변화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사람들의 사상과 인식이 후퇴한 것을 반영한다. 즉, 정체적인 것을 중시하는 것에서 부분을 중시하는 것으로, 이상을 중시하는 것에서 현실을 중시하는 것으로, 내포를 중시하는 것에서 형식을 중시하는 것으로 변모했으며 정신적인 추구로부터 학술적인 추구로 변했다. 결국 “학문이 날로 성해지자 도는 날로 쇠퇴해졌고” “7규(竅)를 열자 혼돈(混沌)이 죽어버리는” 길을 걷게 되었다.

(English Translation: http://www.clearwisdom.net/emh/articles/2006/12/21/81037p.html)

문장발표 : 2006년 12월 9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6/12/9/144224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