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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傳文化] 검소하고 노래와 색을 멀리하고 충성과 의리(忠义)를 지키고 공명(功名)을 담담히 여긴 악비

글 / 칭앤

【명혜망 2007년 11월6일】 수천년 이래 중화 대지에서는 마음과 몸을 다하여 국가에 충성한, 충의를 겸비한 악비에 대하여 거의 집집마다 알고 있으며 부녀와 어린이도 다 알고 있다. 역사 문건에 의하면, 악비는 청렴하고 검소했으며 색과 노래를 멀리했다. 명리를 담담히 여긴 악비의 품행은 사람들로 하여금 십분 감개무량하게 하고 탄복하게 한다. 악비는 말하기를, “문관이 돈을 탐하지 않고 무관이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천하는 태평할 것이다.” 라고 했다. 그는 이러한 말을 곧 자신이 솔선수범한 것이다.

악비는 남송의 주요 장수로서 봉급은 상당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매우 검소한 생활을 했다. 한번은 후처 리와(李娃)가 견직 의복을 입고 있었다. 이를 본 악비는 그로 하여금 질이 낮은 삼베옷을 입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봉급의 대부분은 군용을 보조하여 사용하도록 했다. 한번은 집에 보관한물품을 처리하여 2천개의 활짱을 만들었다. 악비가 살해당한 후 집을 수색할 때 집에는 가치있는 금은, 진주가 전혀 없었다. 오직 3천필의 삼베천과 견직물이 있었고 또 5천여곡(斛)의 밀이 있었는데, 이는 군비보충을 위해 사용했던 것이었다.

당시의 고관 귀족들은 대부분 색과 노래로 향락을 누렸다. 항금(抗金) 명장 오제(吴玠)는 술과 색에 묻혀 살았고, 한세충(韩世忠)은 처와 첩이 한 무리였다. 악비의 본처 유씨는 전란중에서 개가해버렸기 때문에, 악비는 현숙하고 덕행이 있는 리와(李娃)를 처로 맞아 모친을 봉양하고 어린이를 양육하게 했다. 악비는 부인 리와와 함께 죽을 때까지 ‘일부일처’의 천리 인륜을 유지했다.

악비가 샹양(襄阳)을 공격할 때 장수 오제가 사자를 악비 진영에 파견하여 군무를 토의하려 왔다. 악비는 연회를 차려 맞이하였는데, 사자는 악비 신변에 처첩이나 노래하고 춤추는 아가씨가 없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돌아가서 이를 오제에게 말하자, 오제 역시 매우 놀라와 하면서 사천의 높은 가격의 벼슬아치 집 아가씨를 세내여 악비에게 헌납했다. 악비는 혐의를 피하기 위해 이 여자를 옆집의 한 집에 안배한후 병풍을 사이에 두고 완연히 거절하면서 그 여자를 사천으로 돌려 보냈다.

악비는 군무에 일생을 보냈고 전장을 달리면서 무수한 적과 싸워 위대한 공적을 세웠지만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외에 공명을 추구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고 명리를 담백히 하고 겸손했다. 그는 몇번이나 상소하여 때가 되면 퇴직할 것을 표시하였다. 유명한 “만강홍” 중의 한 마디 “30공과 명은 땅과 먼지이고 8천리 노정에서 구름과 달뿐이다.”에서 악비는 공명을 허무한 땅과 먼지로 비유했던 것이다. 당시에 백성들은 악비를 칭찬하며 이러한 노래를 불렀다. “검을 손에 잡으면 승리를 거두고 몸은 공작이지만 마음은 조용한 곳만 찾는다.”

악비의 엄격한 지도 하에서 그의 아들 악운은 어린 나이에도 용맹하고 전투를 잘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유명한 잉창(颍昌)전쟁에서 악운은 앞장서서 적진지를 선후로 10여 차례 출입하면서 전신에 백여곳의 상처를 입었다. 최종에는 8백여 명의 적은 군사로 몇 만이나 되는 금나라 군사를 크게 대패시켰다. 그러나 일반 정황하에서 악비는 장졸들의 전공만을 보고하였고, 악운의 전공은 모두 보고하지 않았다. 동시에 몇번이나 조정에서 올리는 악운의 승진 요청을 거절했다.

악비 장수의 고상한 덕행과 절개는 수천 년동안 사람들의 존경과 공경을 불러일으켰으며, 그의 충의는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문장완성 : 2007년 11월3일
문장발표 : 2007년 11월6일
문장수정 : 2007년 11월5일 17:46:59
원문위치 :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7/11/6/165921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