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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 <질풍경초(疾風勁草) > (6)

글/중팡츙

[명혜망 2004년 7월 21일] (이전 글에서 이어짐)

제 5부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
머리말: 박해를 반대하며 또 한번 정념으로 사악의 음모를 제지하다.

제1장 정념으로 경찰의 악행을 제지하다.

-족제비가 세배를 하다

매 년 명절이나 4.25, 7.20등 민감한 날짜가 되면 파출소 경찰이나 주민 위원회, 610사무실에서는 각종 명분을 만들어 대법제자를 괴롭혔다.

2001년 12월 22일 완낸창 파출소 경찰 웨이다핑은 사무실 주인 리챵쥔과 달력을 준다는 명분을 걸고 ‘보러’ 왔으며 26일 부녀위원회 주석이 나를 ‘보러’왔다. 28일에는 완낸창 파출소 사무실 그리고 청화구 정치법제위원회 서기 허우웬 등 몇 사람이 집에 와서 나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나는 인내성 있게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28일 밤 중 12시에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문 밖에 사람이 손으로 도어 스코프(확인창)를 가려서 나는 복도에 불이 안 켜져 있나 보다고 생각하며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을 열자 갑자기 사람들이 밀려 들어왔다. 완낸창 파출소 사무실 주민위원에서 온 사람들 이었다. 주민위원회에 새로 임명된 주임과 웨이다핑은 즉시 내 아들 방에 들어가더니 책상 위에 있는 과 사부님 사진, 경문 한 편을 몰수 하고 나를 파출소로 끌고 갔다. 다음날 나는 강제로 피현 구치소에 불법 압송되었다. 의사가 와서 신체검사를 하였는데 나는 의사보고 “제 몸에 옴이 심하여 접수하면 안돼요.”라고 하였으나 의사는 “어떠한 병이 있어도 우리는 모두 접수야.”라고 하였다. 이렇게 나는 한 달 동안 불법 구류되었다.

-꿈에서 금방 깨어난 어린 이씨(小李) 간사(幹事)

2001년 12월 29일 피현 구치소에서 어느 감방에 40여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 대법제자가 12명 이었다.

월요일 오후, 감방장(牢頭)이 나더러 나오라고 했다. 내가 방문을 나가자 여(20) 경찰이 큰 소리로 나를 보고 ‘쪼그리고 앉아라!’라고 명령하였다. 나는 서서 마주 보면서 발정념을 하였다.

2분이 지났다. 그녀는 다시 “쪼그리고 앉으라 했는데 못 들었어!?”하고 고함을 쳤으나 나는 조용히 그녀 앞에 묵묵히 서 있었다. 그녀를 향한 발정념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열이 올라 얼굴이 붉어지면서 감방장을 향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귀머거리야, 아니면 벙어리야, 왜 말을 하지 않아!”라고 계속 고함을 질렀다.

감방장은 겁이 나서 얼굴색이 변하였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내게 와서 “언니, 말하세요. 이분은 여기 간사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다시 2분이 흘러갔다. 나는 천천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예쁘게 생긴 아가씨가 말하는 것이 생김새와 너무 다르네요?” 라고 하자 태도가 돌변하면서 호의적으로 말하였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들은 너무 힘들어요.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야근을 하고 매일 80여 명이 드나드는 것을 관리하여야 하니 한 시도 쉴 수가 없어요.” 라고 하였다. 나는 “매일 범인과 실랑이를 하는 것이 무척 짜증나는 줄은 알아요. 하지만 우리는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억울하게 여기에 갇혀 있는데, 본래 여기에 있지 말아야 할 사람들에요.” 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그녀의 말도 많이 부드러워 졌다. “몇 번이나 구류되었던 겁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한 번 알아 맞혀 봐요.”라고 하자 그녀는 “3번, 5번?” 하고 물었는데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그녀는 마음 놓고 농담하듯 물어보기를 “아무래도 10번은 되지 않겠죠?”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엄숙한 표정으로 “구류 13번, 1년 강제 노동교양, 3개월 추가.입니다.”라고 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그녀는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의심스런 눈초리로 “강제 노동교양을 받았었다고요? 우리들이 회의를 할 때 영도가 분명히 강제 노동 교양소에서 ‘전화’된 사람이 100%에 달한다고 하였는데?”라고 말했다. 나는 “그것은 안심하라고 하는 거짓말이고 만약 영도가 말한 것이 진실이라면 지금 난 네 앞에 서 있지 않을 거 아닌가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여기에 들어 왔지 않았습니까? 내가 말하는 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이 몇 년 동안 장사도 못하고 감옥살이를 하겠습니까? 제가 당신에게 거짓말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그녀는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내게 일어난 일에 관한 얘기를 계속 들었다. 그녀는 나의 얘기를 듣고 호의로 “돌아간 후에 조심하세요. 다시는 여기에 들어오지 마세요.”라고 하였다. 나는 “우리가 만날 곳은 여기가 아닐 겁니다. 전 조카딸이 있는데 나이는 당신과 비슷한데 예쁘게 생겼어요. 이담에 친구로 사귀어 우리 집에 놀러 와요.”라고 말하였다.

감방에 돌아가자 어느 대법제자가 내게 말하기를: “당신 이만 저만이 아닌데. 어떻게 이 간사를 다 설복시켰어요? 당신 알아요?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그녀를 무서워한다고요. 그들은 (범인) 말을 걸다가 이 간사에게 발각되면 무조건 TV를 끄고 감방 규칙을 20번 써야 돼요! 당신이 일찍 왔으면 좋았을 거예요.” 라고 말했다.

감방에 경제 문제로 들어온 사람(기업의 사장)이 있었는데 밖에서 증거를 수집하다 경찰과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경찰은 “안에서 지내기가 괜찮으세요?”라고 물었다. 그녀는 “안에서 파룬궁 덕분에 같이 말도 하고 하여 마음이 편하고 시간도 빨리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만낸창 파출소에서 온 중팡츙과 같이 있어요.”라고 하자 경찰은 “그 사람은 대단한 인물이야, 견정하고 강인한 사람이지.” 라고 하였다

-떳떳치 못한 경찰

아침에 나는 바람 부는 둑 위에서 눈을 감고 2장 공법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얼굴에 통증이 와 눈을 뜨고 보니 누군가 나를 찌르는 것 이었다. 행동이 이상한 경찰이 긴 대나무 막대기로 나를 찌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말은 하지 않고 내가 쳐다보자 도망쳤다.

어느 날 밤 12시경에 당직을 하고 있던 소장이 문을 열더니 대법제자인 텐(田) 아주머니를 보고 짐을 싸라고 하였다. 나는 소장을 보고 “소장님 보세요. 이것이 경찰이 하는 짓입니까? 매 번마다 밤에 사람을 집에 데려가고 왜 낮에는 데리러 오지 않아요? 민중들이 보고 경찰이 착한 사람만 잡아간다고 분노를 일으킬 염려가 있어서 하는 짓이지요?” 라고 묻자 소장은 묵묵히 답이 없었다. 급히 짐을 싸고 있던 텐(田)아주머니는 나를 보고 “오늘은 너무 늦어서 돈을 찾지 못하겠네. 내가 통장을 줄 테니 네가 올 때 좀 갖다 줘! 부탁해.”라고 말했다. 나는 “좋아요! 그렇게 하지요.”라고 하면서 통장을 받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소장이 “당신은 매일 앉아서 입장(발정념을 가리킴)이나 하고 이렇게 해서 집에 가겠나?”라고 물었다. 나는 “며칠 후면 집에 꼭 갈 거에요. 내가 집에서 연공하고 발정념을 하면 당신들 눈에 보이지 않을 것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소장을 할 말이 없다는 듯 문을 닫고 가버렸다.

-수련은 만일의 경우가 없다

어느 날 오후에 감방의 문이 열리더니 감방장이 “언니 또 동수 한 명이 들어 왔어요.”라고 알려 주었다. 이 분은 문을 들어서자마자 “당신은 어느 구에서 왔으며 그는 어느 구에서 왔는가?” 물었다. 결과 청화구에서 온 사람이 몇 명 있었다. 그녀는 단호하게 “청화구에서 온 사람들은 모두 가지 못해! 구치소에서 기한이 되면 수용소에 가고, 수용소에서 기한이 되면 다시 구치소에 돌아오는 거야. 구치소에 가보면 대부분 청화구에서 온 사람들이야. 모두 반복하여 구속되는 사람들이지. 나 자신도 청화구에서 왔어! 바로 수용소에서 이송하여 온 거야.”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말했다. “난 그런 헛소리를 믿지 않아! 난 꼭 집에 돌아가야 돼.”

우리 중에 다음 날이면 만기가 되어 집에 갈 수 있게 된 50여세 된 아주머니가 있었다. 그 아주머니는 여태 쓰던 물건을 남겨두고 내일 집에 갈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이 말을 듣고는 긴장되어 “내일 가더라도 모든 짐을 다 챙겨야겠어! 만일 집에 가지 못하면 어쩌지?” 라고 말했다. 나는 “아주머니의 그 일념은 틀린 것이에요. 수련은 만일이 없어요.”라고 말해 주었다. 결국 그 아주머니는 계속 피현(郫縣)의 세뇌반에 남아 있게 되었다. 장기적으로 시멘트 바닥에서 잔 결과 심한 류머티즘에 걸렸고 등이 아파서 허리를 굽히지 못하였다. 다리는 류머티즘 때문에 걷기가 힘들었으며 장기간 기침을 하였고 체중이 급격히 줄어 본래 모습을 잃었다. 집의 가족들이 와서 보는 것도 허용하지 않아 가족들은 그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지도 못하였다. ‘세뇌반’에서 보낸 시간도 1년이 지났다. 2003년 2월, 아들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어 어머니를 위하여 시정부에 가서 두 번이나 청원(上訪)을 시도하였다. 시장을 찾아 어머니를 구하려 했지만 도리어 파출소에 잡혀간 후에야 석방되었다. 아들은 “어머니도 구하지 못한 아들이 살아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란 생각에 죽겠다는 마음을 품고 술을 먹고 취한 후, 파출소에 전화를 걸어 자살한다고 하였다. 전화를 걸고 창문을 닫고 가스를 틀어…… 경찰이 쫓아 왔을 때 그는 이미 입에서 거품을 물고 정신을 잃은 상황이었다. 이 사건으로 경찰은 인명 사건이 발생할까 봐 두려워하여 박해를 받아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된 숨만 붙어 있는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 왔다. 나는 한달 동안 구류되었다가 경찰 웨이다핑 사무실 주임 이챵쥔이 나를 파출소로 데려 갔다.

-자신의 일은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소장 란(冉)**는 이렇게 내게 물었다. “중팡츙, 돌아가서 어떻게 할 작정인데?” 나는 “의연히 쩐(真), 싼(善), 런(忍)의 이치로 나의 일언일행을 요구하지요.”라고 답하였다. 이 말을 듣자 그는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대노하여 “다시 잡아들여!” 라고 고함을 치면서 말을 끝내기도 전에 사무실에서 사라졌다. 걸상에 앉아 있던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일어서며 손으로 책상을 쳤다. 나는 당당하게 말하기를 “당신이 결정할 수는 없어요, 나는 오늘 곧바로 집에 돌아갈 겁니다.”라고 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경찰 웨이다핑은 이런 상황을 보고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그는 달려와서 나를 잡더니 “잠깐만 기다리면 동생에게 연락하여 데려가라고 할게.”라고 말 했다. 나는 “내 동생은 장사하느라 바빠요! 시간 없어요! 난 혼자 갈겁니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걸상에 앉아 집에 돌아가는 일념을 더 확고히 하였다. 시간이 좀 지나 경찰 웨이다핑은 “중팡츙 잠깐이라도 대기실에 있어 그러면 풀어 줄게. 란소장님의 체면을 좀 봐 줘! 파출소 24시간 대기실에 있으면서 조사하라는 명령에 란소장이 사인했어!”라고 하였다. 나는 “체면? 체면을 세워 달라구요? 그럼 누가 나의 사부님의 체면을 세워 주었습니까? 그 누가 대법의 체면을 세워 주었습니까? 그리고 누가 나에게 체면을 주었어요? 속인 사회에서 난 그보다 더 신분이 있는 사람이고 지위가 있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가서 란소장과 면담할겁니다.” 라고 하자 그는 “란소장은 회의 중이야” 라고 하였다. 가보니 확실히 회의 중이었다. 나는 웨경찰이 일하는 사무실에 돌아가 조용히 걸상에 앉아 란소장을 향하여 발정념을 하였다.

5시쯤이 되자 동생은 나를 데리러 왔다. 이것을 본 란소장은 “중팡츙 소문을 들으니 집을 잘 꾸며 놓았다던데, 나도 같이 가서 한번 보자!”라고 하였다. 이렇게 나는 집에 돌아왔다.

제2장 인권 박해

-행동을 감시하다

집에 돌아 온 나는 란**소장의 결정에 의해 매일 저녁 9시에 집 전화로 당직실에 전화를 걸어 행방을 보고해야 하였다. 일이 있어 청두를 떠나려면 반드시 보고를 해야 했다. 그 당시 나는 “다른 사람을 배려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전화를 걸면 거는 것이지 뭐? 그들도 장(江)씨 집단의 박해를 받아 불쌍한데…”라고 생각하였다. 구정이 다가 왔다. 몇 년 동안 고향에 가보지 못한 나는 고향 생각이 났다. 이 일을 말하였더니 가도(街道) 주임 이챵쥔은 “위에 보고하여 결정을 내리겠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단계별 허가를 받고 가도 위원회 사람의 감시를 받으면서 고향 땅을 밟게 되었다. 길을 떠나기 전에 파출소 소장 란**는 “돌아간 후에 매일 전화로 파출소나 이 주임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해야 한다.”라고 명령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모두 그들이 나의 행동을 장악하려는 것 이었다. (나중에 가서야 나는 그들에게 전화를 걸거나 청두를 벗어날 때 그들에게 보고하는 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 그들의 지시대로 한다면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승인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우리 연공인이 또 어디에 잘못이 있는가?)라고 생각하였다.

3월에 나는 일이 있어 보고를 하지 않고 고향에 가 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날 저녁에 파출소에 전화를 걸었는데 란**소장이 당직을 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그는 전화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휴대폰으로 건 것임을 알고는 “지금 어디에 있어?”라고 물었다. 나는 “젠양 고향에 있어요.”라고 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그는 언성을 높이며 “누가 허락하였는데?”라고 물었다. 나는 “내 마음입니다.”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가도 사무실 주임 이챵쥔으로부터 끊임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건 전화에서 그는 강경한 어조로 “누가 가는 것을 허락하였어?”라고 물어서 나는 전화를 꺼 버렸다. 집에 돌아가서야 어머니는 나에게 “이챵쥔이 아침 일찍 왔는데 난 그저 네가 일이 있어 고향에 갔다고 하고 가능하면 오늘 온다고 하였다. 오후 1시에 이챵쥔은 또 왔다가 네가 돌아오면 파출소에 가보라고 하였다. 그리고 오후 3시경에 또 와서 네가 돌아와서 파출소에 가지 않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고 저녁 6시에 와서는 ‘아직도 오지 않았는가?’고 묻자 돌아 왔는데 일보러 나갔다고 .”라고 알려 주었다. 저녁 8시에 또 우리 집에 왔는데 내가 집에 있는 것을 보고 돌아갔다.

-인신자유를 제한하다

2000년 5월부터 지금까지 내가 집에 있거나 없거나 집의 가족과 나를 모두 감시하여 왔다. 완낸창 파출소소장 란**는 매일 저녁 9시에 반드시 집 전화로 파출소에 전화를 걸어 보고 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일이 있어 청두를 떠날 때는 반드시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 모든 것을 나는 모두 정념으로 부정하였다.

2003년 5월11일은 엄중한 박해를 받아 반신불수 상태로 된 내가 정상으로 회복되어 문을 나선 첫날 이었는데, 나는 자전거를 타고 아들에게 신발을 사주려고 나갔다. 이 일을 사보안이 보고 파출소에 전화를 걸어 보고 하였다. 결국 나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2층에 올라서자마자 파출소 경찰과 사무실의 이챵쥔에게 잡혔다. 그들을 보고 나는 “어디에 가는 길이오?”라고 묻자 그들은 “당신을 보러 왔어.”라고 했다. 나는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챵쥔은 3층의 나의 방문을 열라고 요구하였다. 나는 “당신들은 나를 보러 온 것이 아닌가요. 여기서 얘기하면 되지 않습니까? 왜 꼭 방에 들어오려고 하는데요?”라고 하자 이챵쥔은 “문을 열어 들어가서 이야기 할게.”라고 하였다. 나는 “방문을 열지 않을 겁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챵쥔은 “그럼 당신이 얼마나 버티는가 보자. 우리는 여기에 서서 기다릴 테다.”라고 말했다. 나는 말하기를 “몇 년 동안 난 당신들을 친구처럼 대해 주었어요! 매번 어떠한 이유로 나의 집에 왔던지 간에 난 모두 과일과 녹차를 드렸고 힘들게 당신들에게 진상을 알려주었어요! 그런데 나에게 돌아 온 것은 무엇인가요? 2년 동안의 감옥살이, 혹형, 두 번이나 생명을 잃을 번 하였는데, 지금 나는 경험을 쌓았으니 다시는 당신들이 집에 들어와 나쁜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아야 겠어요!”라고 하였다.

이챵쥔은 “도대체 문을 열거야 안 열거야!”라고 위협하듯 말했다.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안 열어요! 방에 들어와서 뭘 하려고 합니까? 당신들이 방에 들어 갈 때 마다 사람을 납치하지 않으면 물건을 가져가고 하였어요! 무슨 좋은 일을 한 적이 있어요?”라고 하자 옆에 있던 경찰은 급히 “오늘은 그럴 생각이 없어! 중팡츙 다시는 사방으로 돌아다니지 마. 당신 때문에 웨이다핑이 고생이 이만 저만 아니야 부부가 모두 실업하였고 아들이 당신 아들만 한데 ….. 그래서 보러 온 거야.”라고 하여 나는 “내가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을 박해하면 악보를 받기 마련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경찰은 계속하여 “이주임 이 분이 문을 열지 않으면 여기서 말하지요.”라고 하였다. 이챵쥔은 “그럼 좋아, 중팡츙 잘 들어! 지금부터 ‘런허왠’을 한 발자욱도 떠나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일어난 일은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하였다. 나는 반문하였다. “누가 결정한 겁니까, 증거를 내놔요! 만약 증거가 없으면 글이라도 쓰던지요? 이러면 내가 고발할 때 증거라고 있지요! 도대체 그 어느 누가 중팡츙의 인신의 자유를 침범하는가 봅시다.”라고 하자 결국 그들은 아무것도 쓰지 않고 우물쭈물하다가 가버렸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저녁 식사 후 나는 산책하러 나갔다. 보안 요원인 천 씨는 어떤 할아버지를 시켜 나를 미행을 하더니 후에 전화를 걸어 사무실 주임 이챵쥔에게 알렸다. 이챵쥔은 급히 택시를 타고 왔다. 그는 저는 완낸창 “국미”백화점에서 나를 강제로 집으로 데리고 왔다. 나는 그들의 무리한 행위를 견결히 제지 하였다. 이챵쥔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고 나를 때리려고 시도 하였으나 주위의 사람들이 볼까 봐 보안을 시켰다. 청도은하창신 회사의 당직하는 보안이 이창쥔의 지시를 받고 나를 때리려고 하자 나는 “누가 감히 좋은 사람을 때려요!”하고 말했다. 결국 그는 나의 정념에 억제되어 손을 대지 못하였다. 후에 이챵쥔은 나를 집으로 강제로 끌어갔다. 나는 돌아가는 길에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장쩌민은 이미 여러 나라 대법제자로부터 다른 나라에서 기소 당하였고 그를 따라 나쁜 일을 계속한다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이챵쥔은 “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라고 하였다. 집에 돌아오자 이챵쥔은 천과 샤 두 보안에게 “집을 한발자국도 떠나서는 안 된다. 만약 듣지 않으면 때릴 거야! 사건이 벌어 지면 내가 책임져!”라고 하였다. 옆에 있던 나는 “누가 감히 사람을 때려요! 이것은 인권침해야 당신이 결정할 수 없어요, 내 일은 내가 결정을 내릴 겁니다. 밖에 나가고 나가지 않는 것은 나의 자유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나와 이챵쥔은 집 대문에서 오랫동안 논쟁을 했지만 결과가 없었다. 날이 저물자 이챵쥔은 할 수없이 집에 돌아갔다.

-30만 위안이 11,500 위안으로 변하다

장쩌민이 1999년 7월 20일부터 전면적으로 전국에서 파룬궁을 탄압하여 4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경제상에서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나는 원래 재산이 70만 위안이 있었는데 그 중에 집 한 채와 자가용을 산 돈을 빼고 94년부터 97년까지 노후대책으로 38만 위안을 당지 지방정부에서 개설한 주식시장에서 주식을 사들였다. 99년 10월 수련한지 6개월 만에 나는 쥬루춘 구치소에 구치되는 기간에 주식은 변질한 도박이라는 것을 깨달고 (나는 수련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도박을 하면 안된다.) 구치소에서 나온 후 30만 위안 되는 주식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나는 주식을 전혀 모르는 상황이라 아는 사람에게 처리하여 달라고 당부하였다. 이어서 3년이라는 기간을 나는 장기적으로 불법으로 강제 노동 교양소에 구치되어 있었고 반복으로 구치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2002년까지 지속되어 후에 박해를 받아 떠돌아다니는 동안 생활이 힘들게 되자 전에 주식을 부탁하였던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분이 말하기를 장기간 주식을 관리하지 않아 30만 위안 되는 가치가 지금은 11500 위안 밖에 되지 않는다고 알려왔다. 그 중에서 나의 불법강제 노동교양기간 동안 어머니와 아들의 생활비며 등록금 10000 위안을 떼면 1500 위안이 남을 것 이었다.

내게 남은 1500 위안이 떠돌아다니는 기간의 명줄이 된 셈이었다. 이 돈으로 3개월 집세를 내고 3개월 생활비로 쓰려고 하였다. 하지만 뜻밖에 며칠 후 청두시 광룽파출소 경찰 장쯔등 열 몇 명이 집 수색을 할 때 강제로 가져가 버렸다. 그리고 내가 보유하고 있던 자가용도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매달 관리비용만 나가고 하여 싼값에 팔아버렸다.

-연루

장(江)씨 집단은 탄압에서 연좌제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대법제자에 대한 잔혹한 형벌 이었다. 1999년 11월, 나와 9년 동안 거래를 해 왔던 회사는 압력을 받아 나와의 합작을 포기해야 했다. 이리하여 매달 1만 위안에 달하는 수입이 없어졌다. 나는 직업을 잃었고 어머니는 시골에서 평생을 보낸 사람이라 퇴직금도 없었다. 온 가족이 경제적인 수입원이 없어진 것이다. 아들은 중학교 1학년을 다녀야 하는데 단지 내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도시 호적을 올릴 수 없어 여기저기에서 돈을 빌려 많은 돈을 내고 공부해야 했다.(한 학기에 3000위안, 학비 잡비 제외)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지금 살고 있는 100여 평의 큰집을 다른 사람에게 세를 내주고 가족과 같이 다른 곳으로 이사하여 작은 집에 살면서 그 차액으로 생활을 유지하기로 하였다.
우리 온 가족이 이러한 곤경이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괴롭힘은 계속되었다. 티오덩허(현재 파출소 합병)파출소 경찰, 런허왠의 경찰 손융, 류잉팡 등은 몇 번이나 내 동생의 가게에 와서 괴롭히며 위협하였다. “당신 누나가 돌아오지 않으면 수배령을 내릴거야.”라고 하면서 “당신 누나 집은 세를 놓아도 안돼! 누가 이사하여 들어가면 내쫓을 거야.”라고 하면서 종일 집 아래에서 감시하며 세 놓는 것을 방해하였다.

-온갖 생트집을 잡아 방해하다

2003 년 4월 아들이 중학교를 가는데 도시호적이 필요하였다.(지금 아들이 가지고 있는 호적은 농촌 호적이다) 국가 규정에 의하면 ①90평 이상의 도시 집을 사면 두 사람의 호적을 신청할 수 있다. ②자녀는 아버지를 따라 호적을 올릴 수 있다. 라는 규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적을 관리하는 경찰 웨이다핑은 갖은 수단을 다하여 괴롭혔다. “당신의 집은 집문서를 신청하지 않아서 호적을 못 올려!”라고 하여 나는 ‘아들이 학교 다니는 것인데 3000위안을 빌려서라도 집문서부터 하자’라고 생각하여 서류를 밟기 시작하였다. 웨이다핑은 계속하여 “먼저 토지 증명서를 내고 집문서를 내야 하는데 대개 2만 위안이 들어.”라고 하였다. 나는 경제적 수입이 전혀 없는 상황이라 더는 돈을 빌려 토지 증명서와 집문서를 낼 수 없었다. 더 이상 산더미 같은 빗이 가져다 준 정신적 압력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집’ 명의로 아들의 호적 문제를 해결하려던 길이 장(江)씨 집단에 의해 막혀 버렸다.

아들이 학교 다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동생을 시켜 아들도 모르는 나와 10년 별거한 남편을 찾아 아들의 호적을 그한테로 올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소재지 집도 허문 것이어서 그도 역시 세를 내고 사는 형편이다. 그의 호적도 옮겨가야 하는 판인데 아들의 호적을 그가 있는 곳에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후에 생각하여낸 방법은 아들 아버지의 호적을 내가 살고 있는 완낸창 파출소로 옮기면 되지 않는가? 이렇게 하면 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경찰 웨이다핑은 “반드시 아버지가 사는 파출소에 가서 파룬궁을 수련하지 않는다는 증명을 떼야 한다.”고 말하여 주었다. 증명을 가져다주었으나 웨이다핑은 또 “아들 아버지의 회사에서 그가 파룬궁을 수련하지 않는다고 증명해야 한다.” 고 알려 주었다. 또 증명서를 떼어왔지만 이번에는 “아들 아버지가 사는 주민위원회에서 그가 파룬궁을 수련하지 않는다. 라는 증명을 하여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나에게 생트집을 잡는 것이 아닌가? 파룬궁을 수련하고 쩐, 싼, 런(眞, 善, 忍)을 수련하여 좋은 사람으로 되려고 하는 것이 죄가 있단 말인가? 여성, 아동보호법은 말로만 그쳐도 되겠는가? 밖에서 이리 저리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주민위원회에서 뭘 안다고 증명을 하여 줄 것인지? 그리고 그전에 있던 호적도 돈으로 산 것이라, 호적을 올릴 수 없었다. 학교에서 통지서가 왔는데 이번 학기에 반드시 나머지 비용 만 위안을 모두 내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해마다 9000위안을 내야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처럼 비싼 등록금을 놓고 나는 학교 보낼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학교를 다니지 않을 수는 없다. 그는 필경 12살 밖에 되지 않는 어린애다. 문제는 이와 같이 나와 똑같은 처지에 있는 파룬궁 수련생들이 아주 많고, 학교를 중단해야 하는 애들도 아주 많으며,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가정도 아주 많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사회 각 계층에 많은 도움을 보내어 나의 집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고, 특히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며 진정하게 인권을 체현시켜 모든 어린이들로 하여금 유쾌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보장하여 줄 것을 호소한다.

-가족과 친구들을 위협하다

집에 있지 않으면 나의 행적을 알아내기 위하여, 완낸창 가도 사무실 주임 이챵쥔은 계속 나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집에 와서 나의 어머니를 5번이나 협박하였다.

2003 년 2월 박해를 받아 침대에 누워있었고 언니도 병으로 돌아간 상황에서 70세 되는 어머니는 비통을 참고 나를 보살폈다. 11살 밖에 되지 않는 아들도 초등학교 6학년이라 힘들고 고된 공부를 밤늦게 하고는 나의 기저귀를 갈아 댔고, 더운 수건으로 다리와 발의 딱딱한 살을 찜질하여 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경찰 웨이다핑과 진씨 보안은 나의 집에 뛰어 들어와 나를 괴롭히면서 가지고 있는 대법 책을 몰수 하고 나를 체포하려고 했다. 우리는 정념으로 그들의 악행을 제지하여 나서자 그는 책을 돌려주었다.

웨이 경찰이 간 후에 어머니는 나에게 알려주기를 “네가 간 후에 그들이 몇 번이나 여기에 와서 괴롭혔어”라고 하였다. 사무실 주임 이챵쥔과 웨이다핑은 3000위안을 내라고 위협까지 하였는데 어머니는 “지금 밥도 못 먹는 형편인데 돈이 어디 있어요.”라고 대답하자 이챵쥔은 “그러면 TV와 세탁기를 다 팔아야지”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람은 이러하다. 웨이다핑이 나에게 “난 위에 늙은 노인이 계시고 밑에는 애가 있어 방법이 없네! 만약 중팡츙이 매달마다 나에게 2000위안을 주면 당신을 위하여 일할게”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 말에서 그들의 모든 행위는 돈을 위해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江)씨 일당은 바로 국민이 피땀으로 번 대량의 돈으로 이런 사람들을 매수하여 그들로 하여금 악인을 도와 나쁜 일을 하게 하였던 것이다. 돈을 주지 않으면 그들은 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마음으로 대법을 수호하고 있다.

완낸창 파출소 사람들은 몇 번이고 나의 집에 와서 위협하고 괴롭혔다. 심지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걸음을 좀 걷자 2003년 4.25 직전에 나를 찾으러 왔다. 점심 때라서 객실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데 웨따핑과 이챵쥔은 갑자기 집에 들어오더니 나를 납치하려고 하였다. 나는 발정념을 하여 그들의 배후에 조종하고 있는 사악을 제거하기 시작하였으며 나는 주불의 제자다. 다른 어떠한 배치도 요구하지 않고 승인하지 않는다는 강한 정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때 아들의 아버지가 처음으로 나의 집에 와서 아들 호적 문제를 논의 하려고 들어섰다. 이것을 본 그들은 아들의 아버지에게 신분증 출시를 요구하였는데 “신분증은 집에 있어!”라고 아들의 아버지가 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같이 가서 신분증 확인하러 집 문을 나서게 되어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되돌아 왔는데 두 사람은 문 밖에서 고함을 지르며 벨을 누르고 전화까지 하면서 문을 발로 찼지만 나의 정념에 제지 되였고 더 이상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번의 위험은 이럭저럭 넘어갔다.

2003 년 7.22 전날 오후에 광룽아파트 단지 사무실에 있는 두 사람이 집에 와서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나는 정념으로 사악을 제지하면서 문을 열지 않았다. 저녁 11시에 파출소 리커(李科, 발음대로 썼음) 등 두 명이 또 집에 와서 문을 열라고 반 시간 이상 괴롭히었다. 나는 도어 스코프(門鏡)에서 내다보니 파일을 뒤지고 있었다. 대략적으로 기록된 사람을 찾아 대법제자를 감금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짐작하고 문을 열지 않으면서 정념으로 제지 하였다.

7.22일 11시가 넘어서 집을 나서자 2층 계단에서 완낸창 파출소 경찰이 찾아온 것을 보았다. 경찰은 문을 열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경찰은 “중팡츙, 요즘 어디에 나간 적이 있어? 집에 책은 아직 있어?”라고 물었다 나는 “나가지. 매일 나가서 일을 보고 있어. 지금 바로 일이 있어 나가는 중이예요?”라고 하면서 계단을 내리기 시작하였다. 경찰도 저와 같이 내려갔다. 경찰은 앞에서 있었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계단을 얼마 내려가지 않았는데 완낸창 파출소 소장 란**가 경찰을 데리고 아파트 밑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들이 나를 납치하려고 한다는 것을 짐작하고 매우 자연스럽게 그들이 계단을 오르지 못하게 하는 정념을 발하고는 3층 집으로 올라가서 문을 닫고 발점념을 하였다. 시간은 정확히 모르는데 얼마 후에 그들은 가버렸다.

10월 1일 오전에 신분이 명확하지 않은 사람이 집에 와서 나를 괴롭혔다. 도오 스코프로 보니 알지 못한 중년 남자였다. 경찰이라고 짐작하고 정념으로 제지하였다. 경찰은 장기적으로 시간과 때를 가르지 않고 와서 괴롭혔고 우리도 조건반사가 되어 문 벨이 울리거나 전화가 울리면 먼저 경찰인지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문으로 가는 동안 발정념을 하면서 문 벨을 누르는 사람(그들을 시키는 사람을 포함)이나 뒤에 있는 사악한 것을 제거한 후에 도어 스코프에서 보고 문 열 것을 결정하였다. 어머니와 애는 몇 번이고 나를 납치하는 현장을 목격하여 문 벨이 울리면 습관상으로 공포감을 느껴 아들의 어린 마음에 커다란 압박감을 주었다.

-불법으로 집을 수색하고 감금하다

몇 년 동안 경찰은 나의 집을 5번이나 불법 수색을 강행하였으며 그중 4번은 아무런 서류를 제시 하지 못하였다. 완낸창 파출소 경찰은 합법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실제로는 불법으로 많은 것을 강행하였으며, 대담하게도 그들이 증인으로 내세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나를 폭행하였다.

경찰은 매번 나를 불법으로 납치 할 때 마다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을 썼으며 강도와 다름이 없었다. 그들은 대법에 관여한 모든 물건을 가져갔을 뿐 더러 이런 임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집에 있는 물건을 훔쳐갔다. 2002년 9월 박해로 인하여 떠돌아다니는 동안 완내창 파출소와 주민위원회는 악행을 그치지 않고 불법 수색을 강행하여 주민위원회 주임은 집에 있는 에어컨에 쓰는 선을 가져갔다. 후에 어머니가 경찰 웨이다핑을 재삼 추궁하서야 비로소 내 동생이 되찾아왔다. 그들은 심지어 11살 나는 아들의 570위안 세배 돈을 훔친 적도 있었다.

나에 대한 불법 구치는 밥을 먹는 듯 하였고 무법천지였다. 나는 대략 통계해 보았는데, 1999년 7.20 후로 약 38개 단위나 소속기관이 박해에 동참하였으며 불법 구류는 29차례이고 총 날짜 수는 743일에 달하였다. 그중에서 형사구류는 4차례이고 93일이며, 치안구류는 10차례이고 140일이다. 그 중 치안구류는 10차례이고 140일이다. 감금, (북경주재 사무소, 칭양구 마약제거 중심, 올림픽체육장 완낸창 파출소) 13차례이고 25일이다; 아무런 허가 없이 형사고문이 1차례이고 30일이다,(바이푸룽 호텔 및 병원). 강제노동교양 1차례, 아울러 기한을 3개월 초과하였고 455일이다.

내가 뒤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후에 내가 잔혹한 박해를 받아 두 번이나 생명을 잃을 번 한 사연이다.

(다음에 계속)

문장 완성: 2004년 7월 16일
문장 발표: 2004년 7월 21일
문장 갱신: 2004년 8월 8일
문장 분류: [인심과 인과]
문장 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4/7/21/79563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