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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였지만 잘난 척하지 않고 스승을 극진히 모셨던 자공 (2)

글/ 서동(書僮)

[명혜망](전편에 이어) 춘추시대 사람들은 서민이든 학자든 대도(大道)를 구하는 것을 삶의 주된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도를 말하는 사람은 존경받고, 도에서 벗어난 사람은 올바른 삶의 길에서 벗어난 것으로 간주됐는데, 이러한 보편적 가치는 그 후 2000년 동안 이어졌다.

따라서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도를 구했던 원헌(原憲)은 당시 다른 사람들의 귀감이 됐지만, 오늘날 사회에서는 비웃음만 샀을 것이다. 이는 고대와 현대의 도덕적 격차가 너무나 크다는 것을 설명한다.

자공은 원헌을 만난 후 자신을 반성하고 부지런히 대도를 구했는데, 그가 스승 공자로부터 큰 깨우침을 얻은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한번은 공자가 자공을 데리고 노나라 환공의 사당을 찾았는데 거기에 유치(宥卮) 또는 의기(欹器)라고 불리는 큰 그릇이 있었다. 유치는 속이 비면 기울어지고 물이 반쯤 차면 똑바로 서며, 가득 담으면 뒤집어져서 물이 쏟아져서 노나라에서는 관개용으로 사용했다. 노환공은 자신의 수양을 위해 이 그릇을 항상 자리 오른쪽에 두었다고 한다.

공자는 자공에게 이 그릇에 물을 붓게 했는데, 비었을 때 살짝 기울어져 있던 유치는 물이 반쯤 차자 똑바로 세워졌다. 공자가 계속하게 하자 물이 가득 찰 무렵 유치가 갑자기 뒤집히면서 물이 쏟아졌다.

자공이 그 그릇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자 공자는 자세를 고치고 정색하며 대답했다. “세상 만물은 정점에 이르면 쇠약해지고, 좋은 일이 생기면 나쁜 일이 오는 법이다. 해가 중천에 이른 후 황혼이 오고, 달이 차면 기울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똑똑하고 예지가 뛰어나더라도 스스로 어리석다 여겨야 하고, 큰 지략 있는 대단한 인재라 해도 스스로 모자란다고 생각해야 하며, 강인하고 용맹한 사람이라도 경외심을 가져야 하고, 부유하고 존귀한 사람이라도 소박하고 담담하게 살아야 한다.”

자공은 공자의 말씀에 크게 깨달았고, 스승이 유치에 물을 붓게 한 의도도 알게 됐다.

또 한번은 공자가 자공에게 자신이 젊었을 때 노자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던 이야기를 해줬다. 당시 노자는 공자에게 “일이 잘 풀릴 때 자제할 줄 알아야 오래 갈 수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은 간단하지만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가난하고 비루해도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이를 악물고 잘 견뎌내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부귀해진 후에도 사치하지 않고 어진 마음을 갖기는 쉽지 않다. 욕망을 내려놓고 권력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어야 마음의 평온을 잃지 않고 겸손과 절제를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자공은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기에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갈수록 많은 것을 깨닫게 됐다. 얼마 후 그는 공자를 찾아가 말했다.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해도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치를 알게 됐는데 어떻습니까?”

이에 공자는 말했다. “그것도 좋지만 가난해도 도를 구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부자라 해도 예를 따르는 것을 좋아하면 그것이야말로 더 높은 경지다.” 자공은 이 말을 듣고 대도를 얻게 되었다며 기뻐하며 말했다. “시경에서 군자의 수양은 다듬고 또 다듬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런 말씀이시지요?”

다른 사람의 장점을 칭찬하고 단점을 지적하다

공자가 평생 추구했던 목표는 예(禮)를 복원시켜 천하 사람들을 어질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를 알지 못하면 세상에 바로 설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 자공은 이런 유교적 도덕을 숭상해 완벽한 인격을 추구한 덕분에 고상한 성품을 갖췄는데,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면 칭찬하는 동시에 단점을 보면 숨기지 않고 지적했다.

‘예’에 관한 공자와 자공 사제 간 대화 중 많은 것은 명언으로 남아, 지금까지도 사람 간 대인 관계, 심지어 국가 간 왕래의 가치 기준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알지만, 어진 자는 사람을 사랑한다(知者知人, 仁者愛人)’, ‘내가 싫어하는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己所不欲, 勿施于人)’ 등이 있다.

자공은 또 ‘군주의 예는 생사존망의 기본(夫禮生死存亡之體也)’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는 군주가 예를 알고 모름에 나라의 흥망이 달렸다는 의미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뒤 노애공(魯哀公)이 조문을 갔는데, 자공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를 꾸짖었다. “스승님이 살아 계실 때 중용하지 않고 지금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앞뒤가 다르신 것이 아닙니까? 예에 어긋나신 것이 아닙니까?” 이는 자공이 공자의 가르침처럼 예를 받들고 군주를 떠받들지 않았으며, 임금 앞에서 바른말을 간하는 신하였음을 보여준다.

자공은 또 권력자들이 백성을 가혹하게 대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정(鄭)나라 대부 자산(子産)의 어진 통치를 높이 평가했다. 자산은 선정을 베풀어 백성의 칭송을 받았는데, 그가 병으로 죽자 선비들은 조정에서 통곡하고, 상인들은 시장에서 통곡했으며, 농민들은 들판에서 통곡했다고 한다.

공자는 ‘가르치지 않고 죽이는 것은 잔학한 것(不敎而殺謂之虐)’이라고 했고, 자공도 군주가 백성을 예로 교화하지 않고 형벌로 처벌한다면 폭군이라고 했다.

공자는 말했다. “훌륭한 군주는 충분한 식량과 무기를 비축해야 하고, 백성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이에 자공이 물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빼야 한다면 무엇입니까?” 이에 공자는 ‘무기’라고 답했다. 자공이 다시 물었다. “한 가지를 더 빼야 한다면 무엇입니까?” 공자는 ‘식량’이라고 답하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자고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백성의 신뢰가 없으면 군주는 설 수조차 없다.”

자공은 이런 세 종류의 사람을 가장 싫어했다고 한다. 첫째는, 남을 따라 하면서도 자신을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둘째는, 겸손하지 못하면서도 용기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셋째는, 남을 공격하면서도 자신을 정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런 자공에게도 부족한 점이 있었는데 바로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논어’에 보면 공자는 그에게 “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라고 세 번이나 지적해준다.

맺음말

유교 사상에 따르면 사람은 부유하면서도 어진 것을 좋아하고(富而好仁),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며(富而好禮), 부유하면서도 덕을 쌓는 것을 좋아하고(富而好德), 부유하면서도 배움을 좋아해야 한다(富而好學).

자공은 평생 이런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어 천하 백성을 이롭게 했다. 그는 인의와 지혜를 두루 갖췄고, 부를 쌓고 베푸는 것을 조화롭게 하여 정치와 사업 능력이 탁월했다. 또한 뛰어난 언변이 있었기에 열국을 자유자재로 오가면서 무역을 하고, 역학 구도를 바꿨으며, 전쟁을 막기도 하면서 어질고 성실하고 지혜로운 성품을 갖춘 유학자 출신의 사업가로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이 때문에 자공은 당나라 개원 27년(서기 739년) ‘이후(黎侯)’로 추봉된 데 이어, 송나라 대중상부 2년(서기 1009년)에는 ‘이공(黎公)’으로 추존됐으며, 명나라 가경 9년에는 ‘선현단목자(先賢端木子)’로 추대됐다.

 

원문발표: 2023년 9월 5일
문장분류: 문화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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