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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학과 수련문화 (7)

원색 이론의 한계

글/ 아르노 H.

[밍후이왕] (전편에 이어) 사실 세상에는 다양한 색채학 이론이 아직도 많다. 예를 들어 독일의 오스트발트 색체계(Ostwald color system)는 4원색 이론에 기반을 두고 있고, 미국의 먼셀 색체계(Munsell color system)는 5원색 이론을 다루고…. 이것들은 모두 학교에서 가르치는 3원색 이론과 차이가 큰데, 많은 사람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해 색채학에 3원색 이론만 있다고 오해한다.

​일부 상황은 실생활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난 세기말부터 많은 명품 회사는 고급 인쇄를 할 때 4색 인쇄를 사용하지 않고 더 비싼 6색 인쇄를 채택한다. 기존의 4색을 바탕으로 2가지 잉크를 추가하면 색의 영역이 확연히 확장되므로 더 정확한 색감 재현이 가능하고, 더 정교하고 아름다운 색상을 출력할 수 있다. 만약 삼원색 이론 적용이 실제로 아주 좋다면 왜 다른 색의 잉크를 추가하겠는가?

​물론 삼원색 이론도 하나의 형식으로 존재하고, 분명 어느 정도의 역사가 있으며, 많은 학자의 지지를 받으며 체계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그것은 사물을 대하는 수많은 이론 중 하나일 뿐이며, 학계에서 늘 말하는 하나의 모델, 또는 유형처럼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 사물을 이해하도록 하지만, 이 모델 자체는 결코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 수준에서 이런 이론에 상당히 큰 한계가 있음을 보았으므로, 다른 수준에서는 더욱 가치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수련 중에서 나타나는 공(功)의 색을 보면 빨간색은 에너지가 낮고, 주황색이 빨간색보다 한 단계 높다. 그런데 어떻게 빨간색은 원색이 되고 더 높은 주황색은 안 될까? 보라색은 파란색보다 에너지가 더 높은데, 왜 파란색은 원색이 되고 보라색은 원색이 될 수 없을까? 따라서 더 높은 경지에서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색은 각 색깔 자체의 고유한 의미가 있고 대체할 수 없는 측면이 있음을 보게 된다. 그 배후에 방대한 요소가 있는데, 어째서 반드시 그중에서 뽑은 몇 가지만 가지고 무엇이 옳고 그름을 정의해야 하겠는가?

​사실 이 일곱 가지 색 외에도 많은 아름다운 색들을 화방에서 찾아낼 수 있는데, 모두 섞어서 만들어내기 어려운 것들이다. 예를 들어 선명한 진홍색은 채도가 선홍색과 같지만, 차가운 느낌이 있다. 이때 만약 선홍색에 파란색 또는 다른 차가운 색깔을 섞는다면 혼합 후의 색깔은 어두워지며, 필요한 선명도를 유지할 수 없다. 경험 있는 화가들은 색을 섞는 방법으로 수많은 선명한 색깔을 절대 만들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상점에서 사는 것이다.

​여기에는 또 안료 안정성 문제도 있다. 각각의 안료는 각기 다른 재료로 만들어지며, 서로 화학 반응을 일으켜 색상의 내구력이나 도막의 견고성이 손상되기 아주 쉽다. 그러나 테스트를 거친 천연 추출 색상은 함부로 섞지만 않는다면 이런 부분에서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특히 이 점은 유화처럼 재료의 특성에 민감한 그림에 더욱 중요하다.

​예를 들어, 카드뮴 오렌지는 단일한 오렌지색 물감으로, 빨강과 노랑의 혼합물이 아니며, 단독 사용 시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카드뮴 레드와 크롬 옐로우를 혼합해 주황색을 만든다면 생성된 주황색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련의 화학 반응으로 인해 갈색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이유로 색상 혼합에 관한 금기는 19세기가 되어도 미술계의 화가들 사이에서 여전히 심각한 토론 거리였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 각종 현대파 의식이 점점 대두하자 이런 엄격한 학문은 점점 관심 밖으로 밀려났으며, 일부 지식은 계승이 끊기고 소실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수많은 회화 작품이 안료로 인해 수십 년, 심지어 몇 년 만에 금이 가고 떨어지면서 저절로 훼손되었다. 이는 역사가 말법(末法) 시기에 이르러 모든 것이 대세에 따라 부패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한 것은 사실 여러분의 일부 고정관념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서다. 지난 2세기 동안 사람의 사상은 고대인의 그것과 크게 달라졌다. 수천 년의 기록된 역사 속 인간의 전반적인 문화와 관념은 현대인의 그것과 현저한 차이가 있다. 게다가 사람들이 말하는 전통 존중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는 수천 년 동안 다져온 정통 사상은 생각해볼 가치도 없다고 여긴다. 수많은 사람은 현실이라는 가상에 속고, 각종 현대의식에 자아를 잃었으며, 벼랑 끝에 서 있으면서도 꼭두각시처럼 부패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마치 폐허 속에서 신성한 문화의 흔적을 찾듯이 법리의 계시 속에 짙은 안개를 뚫고, 고난을 헤치며, 한 걸음 한 걸음 전통의 길로 되돌아가는 듯하다. 예술의 회귀 과정도 흡사 수련의 과정처럼 모든 것이 거대한 물결 속에서 바른길을 회복해 순진(純真), 순선(純善), 순미(純美)한 상태로 돌아갈 것이며, 신이 전한 예술의 광채를 다시 꽃 피울 것이다.

​(전문 완료)

​참고문헌:​

Aristote,《 De Sensu et Sensibilibus 》, 4th century BC
Cennino Cennini,《 Libro dell』Arte 》, 1437
Charles Moreau-Vauthier,《 La peinture 》, 1913
Ewald Hering,《 Zur Lehre vom Lichtsinne 》, 1878
Étienne Dinet,《 Les Fléaux de la Peinture 》, 1926
Giorgio Vasari,《 Le vite de’ più eccellenti pittori, scultori e architettori 》, 1550
Jacques-Nicolas Paillot de Montabert,《 Traité complet de la Peinture 》, 1829
Jean-Georges Vibert,《 La Science de la peinture 》, 1891
Leonardo da Vinci,《 Trattato della pittura 》, 1651
Léonor Mérimée,《 De la peinture à l』huile 》, 1830
Paul Coremans,《 Les Primitifs flamands 》, 1953

 

​원문발표: 2021년 10월 19일
문장분류: 문화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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