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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禮)를 배워야 하는가? (2)

글/ 류이춘

[밍후이왕] (전문에 이어)

효도하는 아들 – 부모의 뜻에 따르며 절개를 지키다

​은(殷)나라 말기, 주(周)나라 태왕(太王)인 고공단부(古公亶父)에게 아들이 세 명 있었는데, 첫째는 희태백(姬泰伯), 둘째는 중옹(仲雍), 셋째는 계력(季歷)이었다. 계력이 희창(姬昌)이라는 아들을 낳았으니 바로 훗날 주나라 문왕(文王)이다. 희창이 태어날 때, 빨간 참새 한 마리가 입에 단서(丹書, 짧은 글귀가 적힌 물건)를 물고 대문에 서 있었다. 태왕이 그런 상서로운 모습을 보고 왕위를 셋째 아들인 계력에게 주려 하자 계력은 다시 희창에게 넘겼다. 희태백이 아버지의 생각을 알고 동생인 중옹과 함께 형만(荊蠻, 당시 야만족이 살던 양쯔강 이남 지역) 땅으로 달아나 머리를 자르고 문신까지 새겨 죽을 때까지 배반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했다. 계력이 받은 왕위를 희창이 넘겨받으니 곧 주나라 문왕이다.

태백은 형만으로 달아나 스스로 구오(句吳)라고 불렀다. 형만의 백성 천여 가구가 주동적으로 그를 따랐고, 그를 오(吳)나라 군주로 옹립했다.

태백이 건국한 오나라가 명맥을 이어 제19대 국왕 수몽(壽夢)이 집권할 때였다. 수몽이 넷째 아들 계찰(季札)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계찰은 군자의 절개를 굳게 지키며 세 번이나 거절했다. 오나라 백성들이 계찰을 옹립하려는 생각을 꺾지 않자 계찰은 궁궐을 떠나 밭을 갈고 살았다.

공자는 태백이 천하를 극구 양보해 지극한 덕의 경지에 이르렀고, 스스로 공적을 감추어 백성들이 그를 찬양할 마땅한 말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좋은 형 – 순임금이 인자하고 효성스러우며 원망하지 않다

​‘가범(家范)’의 기록에 의하면 순(舜)의 부모와 동생은 늘 순을 살해할 방법을 찾았다. 순에게 곡식 창고를 수리하게 하고, 순이 지붕으로 올라가자 사다리를 치우고 창고에 불을 질렀다. 순은 아래로 도망쳤다. 그들은 또 순에게 우물을 치게 하고, 순이 우물 아래로 들어가자 흙으로 우물을 메웠다. 순은 옆으로 뚫린 구멍으로 나왔다. 순의 동생 상(象)은 순을 죽이려는 것이 모두 자기 생각이라며, 소와 양과 곡물 창고를 부모에게 주고, 방패와 창, 거문고, 활을 자신이 가지며, 두 형수에게 자신의 이부자리를 돌보게 하겠다고 했다.

상이 순의 방으로 들어가니 순은 침대에 앉아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상은 부끄러워하며 형님이 정말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순이 말했다. “나는 신하와 백성들을 생각하고 있으니 네가 나를 대신해 다스려라!”

순은 상이 자신을 죽이려 함을 잘 알았는데, 왜 여전히 기뻐했을까? 맹자는 말했다. “소인배의 방법으로 군자를 속일 수는 있으나, 도의에 벗어난 속임수로 군자를 속일 수는 없다. 상이 형을 존경하며 사랑한다고 거짓말했으나, 순은 진심으로 그를 믿었고 그를 대신해 기뻐한 것이다.”

예로부터 성현들은 모두 효행을 근본으로 여겼고, 부모가 자애롭고 자식이 효도하면 곤란이 없다고 했다. 유독 순의 부모가 자애롭지 않았으나, 결국 순에게 감화되었다. 그래서 후에 세인들은 순을 큰 효자로 불렀다.

형을 따르는 동생 – 왕람이 독을 빼앗다

진(晉)나라 시기, 형제애로 유명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왕람(王覽)이다. 왕람이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 주(朱) 씨가 회초리로 형인 왕상(王祥)을 때리는 것을 발견하고 울면서 형을 끌어안았다. 왕람은 성장한 후에도 늘 어머니에게 행동을 신중히 할 것을 건의했다. 어머니는 매번 아주 많은 일을 왕상 부부에게 맡겼고, 왕람이 나서서 그들을 도왔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왕상의 명성은 갈수록 높아졌고, 어머니는 왕상을 더욱 증오해 독주로 그를 죽이려 했다. 왕람이 알고는 형과 함께 가서 독주를 빼앗았다. 주 씨는 왕람이 죽는 것을 걱정해 술을 빼앗아 부어버렸다. 이후 주 씨가 왕상에게 음식을 줄 때는 왕람이 먼저 맛을 보았다. 주 씨는 왕상을 죽이려는 생각을 더는 하지 않았다.

얼마 후, 형제가 모두 벼슬을 얻었다. 당시 여건(呂虔)은 국사를 보좌하는 왕상의 도량에 감동하여 허리에 차는 칼 한 자루를 왕상에게 주었다. 삼공(三公, 영의정과 좌의정, 우의정)이 된 사람만 그 칼을 찰 수 있다고 했다. 왕상은 죽기 전에 칼을 아우인 왕람에게 주면서 말했다. “너의 후손이 반드시 번창해 족히 이 칼에 걸맞을 것이다.”

나중에 왕람의 여섯 아들은 각각 어사(御史), 무군장사(撫軍長史), 치서어사(治書御史), 상서랑(尚書郎), 중호군(中護軍), 국자제주(國子祭酒)로 임명되었고, 그중 무군장사 왕재(王裁)의 아들 왕도(王導)는 ‘진서(晉書)’에 특별히 기록(왕도전)되었다.

​(계속)

원문발표: 2021년 8월 21일
문장분류: 문화채널
원문위치: http://big5.minghui.org/mh/articles/2021/8/21/42967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