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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0 평론] 박해 원흉 장쩌민의 길

글/ 룽옌(龍延)

[밍후이왕] 많은 사람은 장쩌민이 파룬궁(法輪功) 박해 원흉임을 알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왜 기어이 파룬궁을 박해하려 하고, 22년 동안 그가 파룬궁에 어떤 짓을 했는지 물을 것이다.

중국에는 ‘원한은 질투에서 오고, 질투는 부러움에서 생긴다(羨慕嫉妒恨)’라는 말이 있다. 이 다섯 글자는 장쩌민이 파룬궁에 대한 태도 변화를 진실하게 반영했다. 1992년 5월 파룬궁이 창춘(長春)에서 전해진 후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특효와 ‘진선인(真·善·忍)’의 도덕적 감화력으로 중국 전역에 빠르게 전해졌고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 급격히 증가했다. 파룬궁은 사람에게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 중국 사회의 안정과 정신문명 건설에 거대한 긍정적인 작용을 가져왔다.

‘장쩌민 그 사람’이라는 책에 따르면 장쩌민은 처음에 파룬궁을 매우 부러워했고 심지어 파룬궁 창시 인의 손짓을 모방했다고 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 점점 증가했고 게다가 많은 퇴직 간부와(많은 고위 간부를 포함) 당원들도 파룬궁을 수련하여 1999년 중국에서 파룬궁 수련생이 7000만~1억 명에 달해 당시 중공(중국 공산당) 당원 수 6600만 명을 넘어섰다. 장쩌민은 파룬궁에 대한 부러움에서 질투로 변했다. 사람들이 모두 파룬궁을 수련하면 총서기인 자기 말을 듣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장쩌민은 질투에서 증오를 품게 되었고 기어이 파룬궁을 제거하려 했다.

(1) 중공 공안 파룬궁 수련생에게 장기간 소란

일찍이 1994년 중공은 암암리에 파룬궁을 조사했으나 아무런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다. 1997년 초 당시 정치법률위원회 서기였던 뤄간은 죄명을 꾸며대어 파룬궁을 막으려 했고 직권을 이용하여 파룬궁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라고 공안부문에 지시했다. 각지에서 ‘어떤 문제도 발견하지 않았다’라는 결론을 낸 후에도 뤄간은 1998년 7월 또 공안부 1국에 먼저 파룬궁에 ‘사교’라는 죄를 정한 다음 공안 부분에서 체계적으로 증거를 수집하라는 통지서를 보냈다. 조사 결과 여전히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공안은 아무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신장(新疆), 헤이룽장(黑龍江), 허베이(河北), 푸젠(福建, 장쑤(江蘇), 랴오닝(遼寧), 산둥(山東) 등 지역의 공안 경찰은 이미 ‘불법 집회’라는 명목으로 밖에서 연공하는 군중을 강제 해산시키고 파룬궁 수련생의 사유재산을 수색하며, 파룬궁 수련생을 심문하고 수감하며 때리고 욕했다.

1998년 하반기에 차오스를 대표로 하는 일부분 퇴직 노간부는 파룬궁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를 했다. 조사 결과 파룬궁은 ‘국가와 국민에게 백 가지 이로운 점은 있으나 한 가지 해로운 점도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또한, 조사 보고서를 장쩌민을 우두머리로 한 정치국에 제출했다. 장쩌민은 차오스에 대한 증오심으로 이 보고서를 아주 불쾌하게 여겨, 이 보고서를 줄곧 파룬궁을 탄압하려던 뤄간에게 처리하도록 넘겨주었다.

뤄간의 동서인 중국과학원 원사 허쭤슈(何祚庥)는 과학자라는 모자를 썼지만, 사실은 중공 형세를 바싹 따른 정치인이다. 사람들은 ‘건달과학자’라고 불렀다. 1999년 4월 11일 그는 톈진교육원의 ‘청소년 과학기술 박람’ 잡지에 파룬궁은 사람들을 정신병에 걸리게 한다고 비방하는 기사를 발표했다. 또한, 파룬궁은 의화단처럼 나라를 망치게 할 것이라고 은유했다. 톈진의 일부 파룬궁 수련생은 사실 진상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잡지 편집부와의 협상을 통해 이 기사의 잘못된 영향력을 제거하길 희망했다. 그러나 4월 23일, 24일 이틀간 톈진 공안국은 300여 명의 진압경찰을 동원하여 상황을 반영한 파룬궁 수련생을 구타하여 수련생이 피를 흘리고 부상하였으며 45명이 체포되었다.

정부가 민원사무소(信訪辦)를 설립한 본뜻은 청원하러 온 군중을 위로하고 법적 이외 민사 모순을 해결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파룬궁 대중의 평화적인 청원에 대해 진압경찰을 출동시킨 이외 장쩌민, 뤄간 일당은 또 다른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톈진 정부 공무원을 통해 청원하러 간 파룬궁 수련생에게 이 일은 톈진에서 상관할 수 없으니 상황을 설명하려면 상급인 베이징 중앙 정부를 찾아가야 한다고 알려주게 했다. 파룬궁 수련생이 수련생을 석방하라고 요구할 때 그들은 공안부에서 이 일에 개입하여 베이징에서 권한을 부여하지 않으면 체포된 파룬궁 대중은 석방할 수 없다고 알려주었다. 톈진 공안은 파룬궁 수련생에게 “당신들은 베이징에 가세요. 베이징에 가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라고 제안했다. 그들은 수련인은 진리를 위해서라면 개인의 득실을 따지지 않고 자신이 신앙하는 우주 진리를 위해서라면 위험을 무릅쓰고 청원하러 갈 것이고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이 많으니 얼마 되지 않아 소식이 널리 전해질 것이며 간 사람이 많을 때 ‘정부를 포위 공격’했다고 말하면 세인들은 쉽게 믿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짐작했다.

(2) 장쩌민의 질투 대폭발

1999년 4월 25일 만여 명의 파룬궁 수련생이 베이징 중난하이 인근에 있는 국가 민원사무소(信訪辦)에 자발적으로 단체 청원하러 갔다. 당시 주룽지 총리가 친히 나가서 파룬궁 수련생을 영접하고 민원사무소 책임자에게 일임하여 수련생 대표와 좌담회를 가지라고 지시했다. 국무원 관계자와 파룬궁 수련생 대표는 온종일 회담했다. 그동안 다른 수련생들은 줄곧 밖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밤 9시 넘어 일차적인 결과가 나왔다. 톈진에서 체포된 수련생이 석방되고 파룬궁 대중은 잇따라 조용히 흩어졌는데 땅에는 종잇조각 하나 남기지 않았다. 사건은 평화적으로 막을 내렸다. 이것이 바로 나중에 말한 ‘4.25’ 만 명 청원이다.

‘4.25’ 청원의 평화적인 해결은 국제사회에서 광범위한 주목을 받았다. 국제 관찰자와 매체는 파룬궁과 주룽지를 높이 평가했다. 이 사건을 중국 정부와 민간이 협상하여 사회 문제를 해결한 선례이고 문명사회로 매진한 이정표로 보았다.

나중에 안 일이다. ‘4.25’ 청원 당일 오후 3시경 장쩌민은 짙은 색유리 방탄차를 타고 중난하이를 한 바퀴 돌면서 청원하러 온 사람들의 상황을 관찰했다. 장쩌민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파룬궁 수련생과 얘기도 나누지 않았다. 그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수십 명의 어깨에 계급이 있는 군인들이 군사위원회 주석인 그를 따르지 않고 파룬궁을 따른 것이었다.

국제사회는 이성적이고 평화적으로 만 명 평화 청원을 해결한 데 대해 높이 찬양했다. 많은 사람이 파룬궁을 연마했고 특히 많은 군인도 파룬궁을 연마하여 흉금이 좁은 장쩌민은 완전히 이성을 잃었고 그의 질투가 폭발한 것이다.

(3) 법 대신 권력을 사용하여 파룬궁 탄압 명령

4월 25일 밤, 장쩌민은 중공 정치국에 보낸 편지에서 “공산당이 파룬궁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라고 썼다. 5월 8일 장쩌민은 중앙 정치국, 서기처와 군사위원회에 위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는 그 후 중공 중앙판공청에서 중판발(中辦發) [1999] 19호 문서로 작성하여 각지에 하달했는데 비밀리에 파룬궁 탄압을 준비하라는 내용이었다. 장쩌민은 파룬궁 박해를 비밀리에 계획하고 배치하기 시작했다.

6월 7일 장쩌민은 중앙정치국회의에서 “‘파룬궁’ 문제를 시급히 처리하고 해결하기 위한 연설”을 발표했다. 이 연설도 중공 중앙판공청 문건 형식으로 발행했으며 학습하고 관철할 것을 요구했다. 이 연설의 직접적인 결과로 3일 후 ‘중공 중앙 파룬궁 문제 처리 지도 소조’ 및 그 사무실이 설립되었다. 후자는 설립일을 따서 ‘610 사무실’로 약칭했다.

장쩌민은 중공 고위층에서 파룬궁 탄압을 위한 사상적, 조직적 준비를 완성하기 위해 요란하게 진행했다. 7월 19일 저녁 중공 중앙은 각 성(省) 당 위원회 주요 지도자 회의를 소집하고 장쩌민이 직접 회의에서 동원하는 발언을 했다. 장쩌민의 질투가 그에게 이성을 잃게 했고 법 대신 권력을 사용하여 세도와 고압으로 파룬궁을 탄압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 것이다.

장쩌민은 파룬궁 박해를 최초 제안한 원흉이다. 7월 20일 중공은 전국적으로 각지 파룬궁 봉사 연락인을 대규모로 체포하기 시작하여 ‘720’은 박해 시발점이 되었고 7월 22일 중공은 파룬궁 수련을 금지한다는 문서를 발표했다.

(4) 장쩌민이 직접 박해를 강력하게 추진

당시 중공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 중 장쩌민을 제외한 6명 모두 장쩌민의 파룬궁 탄압에 동의하지 않았다. 또한, 박해가 시작된 후 전국의 많은 파룬궁 수련생이 앞사람이 넘어지면 뒷사람이 계속 이어나가 끊임없이 베이징과 현지 정부에 평화 청원하러 가서 파룬궁 진상을 진술했기에 박해는 처음부터 저항력이 컸다. 박해 원흉 장쩌민은 직접 나서서 강력하게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추진했다. 다음 몇 개 예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공개적으로 파룬궁을 비방하고 파룬궁을 정의하다

1999년 10월 25일 장쩌민은 프랑스를 국빈 방문하기 전날 프랑스 ‘르피가로’와의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파룬궁을 ‘사교’라고 공개적으로 비방했다. 이튿날 중공 미디어 ‘인민일보’는 장의 인터뷰 발언을 바탕으로 파룬궁을 비방하는 논평을 실었다. 이후 중공은 줄곧 장쩌민의 이 사실 근거 없는 비방 단어를 그대로 좇았다.

많은 사람은 중공이 자체적으로 발표한 14개 사교 중에 파룬궁이 없다는 것을 모른다. 지금까지 중공의 파룬궁 박해는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다. 중국에서 파룬궁을 연마하는 것은 줄곧 합법이었다.

잔인무도한 박해 정책 제정

장쩌민은 “3개월 안에 파룬궁을 소멸하라”라고 여러 번 외쳤지만, 줄곧 뜻을 이루지 못해 박해를 끊임없이 격상했고 비밀리에 직접 박해 정책 명령을 내렸다. 당시 베이징 계획위원회 측량설계관리처 처장이었던 리바이건(李百根-현재 미국 거주)은 1999년 11월 30일 ‘610 사무실’의 책임자 세 명은 인민대회당에서 3000명의 정부 공무원을 소집하고 회의를 열고 파룬궁 탄압에 대한 문제를 토론했다고 말했다. 탄압이 몇 달째 계속되었으나 진행이 순조롭지 않고 파룬궁 수련생이 여전히 끊임없이 청원하러 갔다. 그 회의에서 ‘중공 중앙 파룬궁 문제 지도 소조’ 지도자 리란칭은 “명예를 실추시키고, 경제를 파탄시키며, 육체를 소멸하라”라는 장쩌민의 파룬궁에 대한 새로운 정책을 말로 전달했다. 장쩌민의 이 잔인무도한 비밀 명령은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하는 정책 방침이 되었다.

‘무자비하게 죽이라’는 비밀 명령

사람들은 이 불합리하고 문화대혁명 식의 운동을 싫어했다. 많은 지방 공무원도 지시를 소극적으로 대하여 2000년 하반기에 이르러 박해를 계속하기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장쩌민 정치 불량배 집단은 박해에 구실을 만들기 위해 놀라운 조작극을 계획했다. 바로 파룬궁에 죄를 뒤집어씌운 2001년 1월 23일 그믐날의 톈안먼 분신자살 사건이다. 1월 30일 CCTV ‘초점 취재’는 진일보 증오를 선동하는 분신자살 프로그램을 방송하여 진상을 모르는 많은 사람이 속아 파룬궁을 증오했고 박해가 격상되었다.

수년간 전체 국가 기구의 파룬궁에 대한 박해와 비방에 직면한 파룬궁 수련생은 중공의 거짓말을 밝히기에 최선을 다해 사람들은 진상을 똑똑히 보게 됐다. 2002년 3월 5일 저녁 7시 19분 지린(吉林)성 창춘에서 국내외를 놀라게 하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창춘 유선텔레비전 8개 채널에서 동시에 ‘분신자살인가? 속임수인가?’, ‘파룬따파 홍전(洪傳-널리 알리다) 세계’ 등 파룬궁 진상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40분이 지나가고 50분이 지나갔다. 수십만 대중이 꿈에서 깨어난 듯했고 사람들에게 증오를 불타게 했던 소위 ‘톈안먼 분신 사건’은 ‘위화(僞火’)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 완진둥(王進東)이라고 하는 분신 자살자는 코가 타서 비뚤어진 것 같은데 두 다리 사이에 있는 휘발유를 담은 페트병은 고온에서도 전혀 변형되지 않았다. 다른 한 분신자 류춘링(劉春玲)은 자욱한 연기의 엄폐하에 경찰에 의해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최연소 분신 자살자 류쓰잉은 기관지 절개 수술한 후 사흘 만에 말할 수 있었고 큰소리로 노래할 수 있었다. …… 상식을 깨뜨린 조작극은 매우 졸렬했고 허점이 수두룩했다. ‘분신자살’은 중공이 조작한 거짓말이라는 소식은 신속하게 전해졌다.

창춘 텔레비전 방송 삽입 사건은 재빨리 중난하이에 전해졌다. 장쩌민은 극도로 두려워했고 약이 올라 ‘무자비하게 죽이라’는 비밀 명령을 직접 내렸다. 그래서 삽인 방송 후 1시간도 되지 않아 현지 군대와 경찰은 창춘에서 대규모 체포를 시작했고 5000명의 파룬궁 수련생이 곧바로 체포되었다. 그 후 최소 8명이 맞아 죽었고 15명이 불법적으로 4~20년 불법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여러 큰 감옥, 수용소에 수감되어 은밀한 박해를 받았다. 그 후 많은 사람이 고문받아 죽었거나 정신 이상이 되었다.

직접 생체장기적출하라고 명령

2006년 3월 파룬궁 수련생 장기를 생체 적출하여 이익을 도모하는 중공의 범죄가 해외에서 처음으로 폭로됐다. ‘생체장기적출’은 장쩌민이 ‘육체를 소멸하라’라는 말살 정책의 구체적인 결과다. 그 잔인함과 무도함은 선량한 사람의 상상을 초월했고 ‘이 지구에 존재한 적 없는 사악’이라고 불렸다.

‘파룬궁 박해 추적 국제 조직’은 중공의 파룬궁 박해 대한 증거 수집 조사 과정에서 장쩌민이 파룬궁 수련생 장기를 생체적출하라고 지시한 최초의 사람임을 확인했다. 즉 장쩌민은 생체장기적출의 원흉이다.

(5) 국외에서 직접 박해를 추진

박해를 국제적으로 홍보하기 위해 장쩌민은 공공연히 나섰다. 예를 들면 1999년 9월 뉴질랜드에서 열린 APEC회의에서 장쩌민은 신분에 맞지 않은 행동을 했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파룬궁을 반대하는 150페이지나 되는 영어판 선전물을 직접 건네주었다. 책에는 극력으로 파룬궁을 비방하고 먹칠하는 무서운 사진으로 가득하여 회의에 참석한 각 나라 정상을 충격에 빠뜨렸다.

2000년 9월 장은 미국 CBS 텔레비전의 60분 사회자 월리스와의 특별 인터뷰에서 파룬궁 창시인이 보살과 예수의 환생이며 재림이라고 주장했다고 되는 대로 지껄였고, 또 파룬궁은 이미 수천 명의 수련생이 자살했다고 허위 날조했는데, 중국 미디어 매체가 1999년 조작한 ‘1400 사례’의 총사망자 수보다 몇 배나 더 많았다. 이는 장쩌민 자신이 바로 중공의 파룬궁을 비방한 나쁜 선례를 처음 만든 사람이라는 것을 충분히 증명한다.

(6) 장쩌민을 법에 따라 처리

장쩌민의 파룬궁 박해는 중국 헌법을 위반했고 인권을 짓밟았으며 막대한 인명과 재산이 손실을 초래했다. 많은 파룬궁 수련생과 정의 인사는 박해가 시작될 때부터 강력하게 박해를 제지했고 장쩌민을 법에 따라 처리하라는 목소리가 줄곧 끊임없었다.

국제사회가 장쩌민을 고소

2002년 10월 22일 장쩌민이 사적인 목적으로 미국 시카고를 방문했을 때 파룬궁 수련생은 ‘고문죄’, ‘반 인류죄’와 ‘집단학살 죄’로 그를 법정에 고소하여 파룬궁 수련생이 해외에서 장쩌민을 고소한 첫 번째 사건이 되었다.

이것은 처음으로 현 중공 지도자이자 국가 원수가 해외에서 법정에 고소된 사건이다. 이는 국내외에서 특히 중공 고위층에 매우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 후 여러 나라의 파룬궁 수련생이 장쩌민과 그의 공모자를 고소했다.

2003년 스페인 파룬궁 수련생은 장쩌민과 뤄간을 고소했고 그 후 잇따라 보시라이, 자칭린과 우관정을 추가 고소했다. 2009년 11월 사건은 돌파구를 마련했다. 스페인 국가법원은 장쩌민 등을 ‘고문죄’, ‘반 인류죄’, ‘집단 학살죄’ 혐의로 공소를 제출했고 2013년에 장쩌민 등 5명에게 체포령을 내렸다. 장쩌민 등 5명은 스페인과 범인 인도 조약이 체결된 국가에 입국하기만 하면 체포될 수 있다.

중국 내 20여만 명이 본명으로 장쩌민을 고소

밍후이왕 기록에 따르면 2015년 5월부터 중국 파룬궁 수련생은 장쩌민 고소를 발기했다. 현재 이미 20만 명이 넘는 파룬궁 수련생과 가족이 원흉 장쩌민을 고소하는 형사고소장을 중국 최고인민법원과 최고인민검찰원에 제출하고 접수하여 이 원흉을 법에 따라 처리할 것을 요구했다.

파룬궁 반박해 22년의 역사는 이미 장쩌민이 외친 “3개월 안에 파룬궁을 소멸하라”, “공산당이 파룬궁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것이 완전히 실패했음을 증명했다. 동시에 밍후이왕에 게재한 22년 동안의 박해사례 보도와 통계에 따르면 장쩌민, 뤄간, 뤄징, 저우융캉 등 일당이 내린 멸절 정책이 여전히 시행되고 있음이 확인됐다. 머지않은 장래에 역사는 장쩌민 박해 원흉이 저지른 죄악이 반드시 철저하게 청산될 것임을 증명할 것이다. 사람이 다스리지 않으면 하늘이 다스린다.

 

원문발표: 2021년 7월 20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7/20/42831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