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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정말 빙산에 부딪혔을 때는 모든 것이 늦다

글/ 위칭(宇清)

[밍후이왕] 영국 초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는 1912년 4월 10일 영국 사우샘프턴항을 떠나 미국 뉴욕항으로 첫 항해를 떠났다. 1912년 4월 14일 일요일 23시 40분에 빙산에 충돌해 결국 배가 침몰했는데, 1514명이 사망하는 역사상 평화 시기 최악의 선박 재난사고가 됐다.

빙산과 충돌하기 전 이미 여섯 차례 해빙 경고를 받았고, 선장은 인근 빙산의 출몰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배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바다 위의 얼음은 위험하지 않고, 신속하게 피하는 일도 흔하고 심지어 정면으로 충돌해도 큰 피해가 없다는 게 당시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전망대원이 빙산을 발견했을 때 이 배의 속도는 최고 속도에 근접했다. 빨리 방향을 바꿀 수 없었기 때문에 배의 우현 측면에 한 차례 충돌한 후, 2시간 40분 뒤 결국 배는 침몰했다.

이 사고는 우리에게 위기가 하루아침에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인식을 갖고 있다는 점과 표면 현상으로 본질을 본 사람들은 결정적 시기를 잘 파악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전, 독일에서 철수한 아인슈타인

많은 사람은 아인슈타인이 위대한 물리학자라는 사실만 안다. 사실 그는 시사에 깊은 통찰을 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을 위해 국가가 있는 것이지 국가를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 간단한 판단은 국가 권력과 민생 안위에 대해 개괄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만약 중국문화에 비교해 말한다면, 이 말은 맹자가 말한 “백성이 귀하고 사직은 다음이며, 임금은 가벼운 것(民爲貴,社稷次之,君爲輕)”이라는 말과 비슷하다. 아인슈타인의 이 말은 훗날 독일의 공공장소에 새겨져 국가 권력의 변이에 대해 각성할 것을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아인슈타인전’에 따르면 1932년 말 베를린을 떠나 미국으로 학술강연을 떠날 때 아인슈타인은 예감한 듯 아내에게 “이번엔 당신의 별장을 잘 봐둬요! 더는 별장을 볼 수 없을지도 몰라요.”라고 했다. 아내는 우스갯소리를 하는 줄 알았는데, 아인슈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떠났다. 수년 전부터 아인슈타인은 이미 시국 변화, 경제 위기, 의회 해체, 나치당이 개시한 시가전 등 모든 것을 예리하게 꿰뚫어 보고, 폭풍이 곧 닥칠 것임을 예감했다. 1933년 1월 30일, 아인슈타인이 베를린을 떠난 지 한 달여 만에 히틀러가 독일 총리에 공식 취임하면서 독일은 나치 시대로 들어섰다.

얼마 후, 아인슈타인은 신문에 공개적인 공격 대상이 됐고, 베를린은 아인슈타인에 대해 궐석재판의 서막을 열었다. 주미독일 총영사관은 한때 아인슈타인의 독일 귀환을 요구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3월 10일, ‘뉴욕 월드 텔레그래프’는 아인슈타인을 인터뷰했다. 아인슈타인은 이와 관련해 공식성명을 발표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이런 나라에서만 살고 싶다. 공민의 자유는 말이나 글로 정치적 신념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하고, 관용은 다른 사람의 어떤 신념을 존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조건은 현재 독일에 존재하지 않는다. 국제양해사업에 특히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은 거기에서 박해받고 있는데, 그중에는 일류 예술가들도 있다.”

이때 독일 내 나치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지자, 5월 파시스트 이데올로기 선전장관인 괴벨스는 나치 사상에 부합되지 않는 책을 공개적으로 불태웠다. 시인 하이네는 ‘책을 불태운 다음 인간을 불사르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나치의 지나친 폭력에 절대다수의 독일 학자, 교수들은 자기 보전을 위해 시대 조류에 휩쓸려 절개를 굽히고 굴종하는 수밖에 없었다. 1933년 총선거에서 철학자 하이데거와 예술사학자 핀더가 앞장섰고, 300명의 대학교수들이 나치당 지지 성명에 서명했다. 이어 같은 해 11월에는 또 700여 명의 대학교수가 ‘독일대학과 단과대학 교수가 아돌프 히틀러와 민족사회주의 국가를 지지하는 성명서’에 서명했다.

괴벨스가 지시해 출간한 ‘히틀러 제도의 적’이란 그림책의 첫 페이지에는 아인슈타인의 사진에 주석을 달아 그의 범죄를 나열하고, 말미에는 ‘아직 목매달아 죽이지 않았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만약 독일에 머물렀다면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절친한 친구인 수학자 게오르게 피크는 유대인 신분이란 이유로 나치 수용소에서 참사당했다.

중공이 강남으로 진격하자, 첸무(錢穆)는 왜 홍콩으로 갔을까?

1948년, 국민정부는 중국 근현대사 첫 번째 원사(院士, 자연 과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학자들에게 주는 최고의 명예 칭호)를 선정했다. 총 81명인데 1949년 이후에 대만에 도착한 사람은 단지 9명뿐이고, 미국에 간 사람은 13명, 중국에 남은 사람은 59명으로 원사 총수의 74%를 차지했다. 이들의 결말은 또 어떻게 되었을까? 문화대혁명 중에 절대다수가 학대, 비판 투쟁, 노동 개조, 조리돌림을 받았다.

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첸무(錢穆)는 이미 폭풍전야를 예견하고 위난이 닥치기 전에 현명한 선택을 했다.

1949년 봄, 첸무는 광저우(廣州) 화교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당시 많은 지식인이 중공의 유혹으로 중국에 남을 것을 선택했지만, 첸무는 결연히 홍콩으로 떠났다. 이유가 무엇일까? 첸무의 회고록 ‘사우잡억(師友雜憶)’에는 이런 옛이야기가 담겨 있다. 1949년 중공군이 천연요새인 양쯔강을 넘어 강남으로 진격하자 지식인들은 거취의 딜레마에 빠졌다. 고전문학을 연구하는 유명한 첸지보(錢基博) 선생이 첸무에게 가지 말라고 권유하자 첸무는 “고문사(古文辭)를 연구하는 선생님은 군대가 강을 건넜다는 그 통지문을 보고 넓은 도량으로 포용할 수가 있습니까?”라고 묻자 첸지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통지문은 바로 마오쩌둥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첸무는 통지문에서 세상의 영웅은 만유지기(萬有之氣)를 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읽고, 역사학자로서 자신은 관용을 베풀어서는 안 될 것 같아 홍콩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첸지보는 중공을 믿었다. 두 사람의 향후 운명은 자연히 현저한 차이가 났다. 첸무는 홍콩에 서원을 세워 문하생이 천하에 가득했고, 첸지보는 심혈을 기울였던 저서 원고가 1959년 학계의 ‘백기 뽑기’ 운동에서 대량 소각되어 결국 우울하게 죽었다. 첸무의 통찰력은 사람을 탄복하게 한다.

첸무가 홍콩에 도착한 후, 신아서원(新亞書院, 후에 홍콩중문대학으로 확충)을 설립했다. 그는 “본 서원을 설립한 것은 1949년 가을, 당시 공산당이 중국에서 자국 문화를 일부러 파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서원은 중국문화를 발양하는 것을 교육의 최고 취지로 삼는다.”며 “오늘 민주주의와 독재 투쟁 속에서 중국 청년들은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사상적으로 올바른 인식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전도를 놓치고, 국가 민족과 세계평화에 해를 끼친다.”고 말했다.

1950년대 초, 중공은 첸무에 대해 통일전선 작업을 벌였다. 그의 스승 뤼쓰맨(呂思勉)과 조카 첸웨이창(錢偉長)을 통해 그에게 편지를 써서 중국행을 권유했으나 첸무는 거절했다. 동시에 첸무는 중공의 각종 역행 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계속 써서 자신의 학설을 세웠다. 그는 ‘중국사상사’에서 “지금 중국에서 만연한 공산주의는 기껏해야 뼈와 피와 살이 있는 시신일 것이다…… 대륙정권은 큰 돌덩어리처럼 높은 산에서 굴러 떨어져 붕괴에 가까워질수록 그 힘이 세다….. 삼면 홍기와 홍위병 문화대혁명은 얼마나 두려운가. 다음에는 더 두려운 일이 또 있을 것이다.”라고 썼다. 첸무는 중화 전통문화를 수호하는 반면 문화를 파괴하고 인성(人性)을 왜곡하는 중공 정권에 대해서는 환상을 품지 않았다. 첸무는 만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공산 정권에 대해 명석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에 남은 민국 원사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중공의 노예로 전락한 것을 제외하고는 비참한 처지가 되거나 박해 속에서 참혹하게 죽거나, 일이 벌어진 뒤 구차하게 살다가 우울하게 죽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청나라 말기의 부정부패를 거쳤고, 항전의 치열한 전투를 견뎌냈으며, 민국의 동요를 겪을 대로 겪었다. 하지만 1949년 이후의 비운은 피하지 못했다.

역사는 또 하나의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오늘날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배가 빙산에 부딪혀 위기가 코앞에 다가올 때까지 절대 기다리지 말고 세인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경자년이 되니 재난이 빈번하다. 제1차 코로나 사태가 끝나지 않았는데 제2차 전염병이 곧 닥칠 것이다. 또 홍수가 범람하고 메뚜기 재해가 다시 일어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70년을 우리가 뒤돌아보니 중공의 ‘무신론’이 횡행했다. 하늘과 땅을 공경하지 않고 또 대자연과 싸웠다. 거짓말과 폭력으로 세인을 독해했고, 삼반(三反), 오반(五反), 반우파, 대약진, 문화대혁명, 6.4, 파룬궁 박해로 8천여만 명이 비정상적으로 사망했다. 사람이 하는 일을 하늘이 보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을 어찌 흐지부지 끝낼 수 있겠는가?

역사는 또다시 갈림길로 들어섰다. 인간의 일념 사이에서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옛사람은 “군자는 위태로운 벽 아래에 서지 않는다.”고 말했다. ‘무신론’의 중공에서 벗어나 ‘붉은 배[紅船]’에서 빨리 뛰어내리고, 중공의 당단대(黨團隊) 조직에서 탈퇴하며, ‘쩐싼런하오!(真善忍好: 진선인은 좋습니다)’를 명심해야 한다. 그러면 당신은 가장 현명하고 시기적절한 선택을 한 것이다.

 

원문발표: 2020년 8월 2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8/2/40866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