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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한 폐렴 발생 중 ‘돈을 빼앗는(搶錢)’ 식의 정책을 말하다

글/ 옌밍

[밍후이왕] 우한 폐렴으로 인해 경제가 침체하고 국민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없어 세계 많은 나라에서는 이재민을 구제하고 보조금을 지급하기 위해 국고를 열었다. 이 일에 대해 중공(中共-중국공산당)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또 임금에서 직접 ‘소비 촉진’을 공제해, 소비를 강요하고, 서민 지갑에서 직접 ‘돈을 빼앗는(搶錢)’ 식의 정책을 펴는 곳도 있다.

4월 8일 후난(湖南)성 화이화(懷化)시는 직원들에게 임금의 일부분을 소비 쿠폰으로 제공하고 5월 5일 이전에 다 소비하라고 규정해 민중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

물론 강제 소비 대상에는 ‘안정 유지’ 팀이 포함되지 않는다. 우한 전염병이 시작됐을 때 구이저우(貴州)에서 후베이 어저우(鄂州)에 기부한 채소 천 톤은 창고에서 일부는 썩었고 일부는 공무원과 파출소에 후한 복지 혜택으로 주고 소량만 시중에 유통해 후베이 사람들에게 고가로 판 일이 드러났다.

2월 18일 후베이성 어저우시 어청(鄂城)구 공안분국 펑황파출소 직원 가족은 자기 집에 나눠준 과일과 채소를 자랑하는 동영상을 올렸다. 다 먹지 못할 정도로 많아 과일 세 상자를 친정에 가져다주면서 말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준 겁니다.” 마지막에 더 놀라운 말을 했다. “누가 당신의 남편에게 간부가 되지 말라고 했나요?”

한 네티즌은 “간부의 집에는 썩은 식량이 있고 일반인의 집에는 썩은 시체가 있다.”라고 평론했다.

4월 청명절 전후 우한시, 가족의 유골을 받으려고 긴 줄을 선 시민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상당수 시민은 집으로 가져간 유골이 자신의 가족 유골처럼 보이지 않아 매장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중 장안(江岸)구의 류 씨는 어머니 유골함 안에 남성 벨트의 버클이 남아 있었다고 밝혔다. 훙산(洪山)구의 인 씨는 그의 아버지가 죽기 전에 틀니를 한 적이 없는데 유골함 안에는 세라믹 틀니가 발견됐다고 말했고, 한양(漢陽)구의 천 씨는 삼촌과 어머니 유골을 동시에 받았는데 삼촌은 생전에 비만증이 있어 체중이 어머니 두 배 이상 됐는데도 받은 ‘어머니 유골’이 ‘삼촌 것’보다 1kg이나 더 많았다고 말했다.

중공의 지도자, 당원들은 낯선 사람의 유골, 수백 개의 유골을 자기 묘지에 묻어 자기 선조로 삼아 제사 지내겠는가?

이번 우한(武漢) 사태에서 중공은 정권의 안정에만 신경을 쓰고 민생에는 무관심과 냉혹함밖에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런 요소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볼셰비키 ‘법정’, 현장에서 형을 집행하다

1932년에서 1933년까지, 소련의 ‘집단 농장’ 운동이 대기근으로 이어졌다. 소련공산당은 일반 시민들을 대할 때 추악한 몰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느 날 우리 집에 도시에서 온 세 명의 공산당원이 들어왔다. 그중 한 명은 여성이었는데 몸에 가죽점퍼를 입었고 허리에는 권총을 찼다. 그들은 찢어지게 가난한 우리 집을 한번 훑어보고 돈이 될 만한 물건이 없자 식량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리 온 가족이 이틀 동안 먹을 수 있는 보리를 찾아내 전부 주머니에 넣었다. 우리 집은 이제 밥을 지을 수 없게 되었다. 또 낡은 나무상자에서 여기저기에 있는 1kg이 넘는 잡곡을 찾아 전부 주머니에 넣었다.

어머니는 배고픈 네 아이를 보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요만한 식량만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돌려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동생과 나를 발로 차고 밀치면서 강탈했다. 어머니는 쌀 주머니를 놓지 않고 이빨로 그들의 손등을 물었다. 그 여성은 권총을 뽑아 들더니 어머니 머리와 얼굴을 마구 내리쳐 여러 곳에서 피가 뿜어 나왔다. 이때 그들 세 사람은 앉아서 판결서를 쓰고 즉석에서 읽었다. ‘볼셰비키 법정 판결, 식량 납부를 거부한 온 가족을 모두 총살한다!’”

이것은 대기근의 생존자 바블로비치의 진술이다.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소련공산당은 가족의 생명을 구하는 식량을 지키려는 시민을 마음대로 처단할 수 있었다.

“도시에서 파견된 공산당원 공작대(工作隊) 외에도 현지 농장의 적지 않은 볼셰비키 당원들도 그들 행렬에 가담했다. 폭행, 약탈에 협력해 그들은 자신의 식량과 재산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마을의 과반수가 맞아 죽거나 아사했다.”

소련공산당에 이용되어 정권을 수호하던 공산당원, 총자루, 칼자루는 민중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식량을 마음대로 빼앗으며 그들을 굶주리게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기근에 왜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악한 자나 악한 일은 늘 무리 지어 있다. 소련공산당의 대기근은 겨우 1년간 일어났을 뿐인데, 중공은 1959년에서 1961년까지 중국 서민은 3년 대기근이라는 불의의 재난을 당했다.

안후이(安徽)성 공안청의 전 상무위원회 인수성 부청장은 2011년 중공 당 매체 인민일보에 “‘대약진’ 후 왜 대규모 동란이 일어나지 않았는가?”라는 글을 게재했다. 이 글에는 ‘대약진’ 이후 전국에 대기근으로 수천만 명이 굶어 죽은 것을 인정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아사했는데 왜 대규모 동란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것은 국가의 치밀하고 엄격한 사회적 통제 때문이었다.

‘대약진’ 시기 안후이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아사한 것은 ‘반혁명분자 진압’이라는 명목으로 야만적인 사회 통제를 계속해 온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57년 2월 22일 안후이성 페이시(肥西), 수청(舒城) 두 현(縣)의 접경지에서 농민 400여 명이 “먹을 것과 토지를 달라.” “지금의 정부는 인민의 정부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두 현의 공안 경찰과 성 공안청은 무장 인민경찰을 파견 그들을 포위하고 총격전을 벌여 그 자리에서 49명을 사살하고, 34명을 체포했으며 10명이 투항했다.

이 글에는 안후이성은 당시 수십만 농민은 기아로 인한 죽음 앞에서 산간지역으로 도망쳐 야생동물과 식물로 배를 채웠는데 공안 기관 등 폭력 무장 기관에 붙잡혀 ‘반동분자, 나쁜 분자’로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학자 쑹융이(宋永毅)가 편집한 ‘중국 대약진-대기근 데이터베이스’의 중국 공안부의 극비 보고에 따르면 1957년에만 수백 건의 중국 농부들이 굶주림으로 끼니를 때우기 위해 발생했던 소위 ‘반란’이 있었다. 이때 중국공산당 정규군이 기관총으로 무장 진압에 나섰다.

중국공산당 정권의 안정을 유지하고 있는 군대와 경찰은 물론 체면치레를 하는 베이징, 상하이 등 대도시에는 식량 공급이 넘쳐나 식량난이 발생하지 않았다. 1960년 5월 28일 식량 재고가 거의 소진되어 베이징, 톈진, 상하이와 랴오닝(遼寧)성에 분배해야 할 식량마저 충분하지 않아 중공 중앙은 ‘식량 조달에 대한 긴급 지시’를 발표했다. 쓰촨(四川)의 많은 곳에는 이미 식량이 떨어져 많은 사람이 아사한 상황에서도 중공은 여전히 쓰촨 밖으로 식량을 조달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쓰촨의 농민 수천 명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편벽한 산간지역의 마지막 ‘쓰자오량(死角糧-국가에서 이용할 수 없는 식량)’마저 다 수탈해 바쳤다. 결과 쓰촨에는 대기근 때 1250만 명 이상이 아사해 전국 각 성(省)에서 아사자가 가장 많은 성이 됐다.

잔인한 역사는 항상 침묵하며 피로 쓴 교훈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약화하고 희석된다. 우한 폐렴 중에 중공은 표면적으로 ‘위광정(偉光正-위대, 영광, 정확)’ 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잔인한 본성을 드러내고 있다.

전염병이 발생한 후, 중국 각지는 도시, 구(區), 마을을 봉쇄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안전에 대해 걱정했을 때, 중국공산당의 ‘610’은 담당하에 있는 여러 기관과 공검법사(공안, 검찰, 법원, 사법)에 파룬궁을 계속 박해하도록 지시했다. 전염병 절정기인 2~3월에 중공 법원, 검찰원은 거의 마비 상태에 처해 법정을 열지 못했지만, 가족과 변호사에게 알리지 않은 채 비밀리에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선고했다.

밍후이왕의 통계정보에 따르면 2020년 1월에서 3월까지 최소 70명의 파룬궁 수련생이 불법적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중 1월에 38명, 2월에 17명, 3월에 15명이 선고받았다. 2월에서 3월까지 중공 법원은 법정을 열지 않고 32명의 파룬궁 수련생을 비밀리에 선고했다. 이런 파룬궁 수련생은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인데 중공의 잔혹한 박해를 받았다.

‘가면’을 벗기다

‘9평 공산당 편집부’에서 출판한 ‘9평 공산당’ 중에는 세인이 알아차리기 어려운 중공의 심층적 요소를 시사했다. “공산당 조직 자체는 결코 생산과 발명, 창조에 종사하지 않지만 일단 정권을 획득하면 바로 국가와 인민의 몸에 붙어 인민을 조종하고 통제하는데, 사회의 최소 단위까지 통제하여 권력을 잃지 않도록 보호한다. 동시에 사회의 생산수단을 독점하여 사회의 부와 자원을 흡수한다.

중국에서, 공산당 조직은 없는 곳이 없으며 관여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태껏 중국공산당 조직의 재정 예산을 보지 못했으며, 다만 국가 예산과 지방 정부의 예산이 있고 기업 예산이 있을 뿐이다. 중앙 정부에서부터 줄곧 농촌의 위원회에 이르기까지 행정 관원은 영원히 당의 관원보다 낮고, 정부는 자신과 동급(同級) 당 조직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당의 비용 지출은 모두 행정 부서의 비용 중에서 지출하되 단독으로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이 당 조직은 마치 거대한 사령(邪靈)의 부체(附體)처럼, 중국사회의 모든 세포에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정교하고 세밀한 흡혈관(吸血管)을 통해, 사회의 모든 모세 혈관과 세포 속에까지 깊숙이 들어가 사회를 통제하며 조종하고 있다.

이런 기괴한 부체(附體) 구조는, 인류 역사상 때때로 사회의 일부에서 나타난 적이 있으며 때로 사회 전체에서 잠시 나타난 적도 있다. 하지만 공산당 사회처럼 이렇게 철저하고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지속한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다.”

역사에서 현실로, 현상에서 본질까지, 중공의 참모습을 더는 숨길 수 없게 됐다. 중공의 정체를 간파하고 중국공산당, 공청단, 소선대를 탈퇴한 사람은 중공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지금까지 여전히 중공의 선전을 맹목적으로 듣고 심지어 중공의 해적선에서 민중을 해치는 사람은 항상 위험에 처해 있다. 중공은 조만간 당신에게도 마수를 뻗칠 것이다.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중공의 악령에서 벗어나는 것은 재난을 헤쳐나가는 현명한 길이다. 중공의 공산당, 공청단, 소선대를 탈퇴하는 것은 선과 악 사이에서 정의로운 선택을 한 것이며 자신의 생명에 광명과 희망의 씨앗을 심은 것이다.

 

원문발표: 2020411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4/11/40366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