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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신도들이 ‘정치’를 했는가? (1)

글/ 어우양페이(歐陽非)

[밍후이왕]

목치

1. 로마황제 박해의 ‘공개성’과 중공 박해의 ‘은폐성’ 2. 조기 기독교 신도는 어떻게 정면으로 맞섰는가? 3. 조기 기독교 신도는 어떻게 거짓말을 침전시키고 교를 보호했는가 (1) 박해는 늘 거짓으로 길을 연다(2) 거짓을 침전시키고 선교사를 보호 4. ‘로마법’과 ‘610’사무실 5. 로마 마교를 해체하는 것과 ‘9평’을 전하고 삼퇴를 추진하는 것6. 옛날에는 사자가 사람을 먹고, 오늘날에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다7. 무엇을 ‘당신의 적을 사랑한다는 것인가?’ 8. 만약 제자 베드로가 현수막을 들었다면 그가 정치를 하는 것인가?9. 결론

로마제국은 조기 기독교 신도들을 연속 300년 박해했다. 로마의 대형 화재를 기독교 신도들에게 전가한 네로(Nero 서기 54-68년 재위)는 가장 먼저 기독교 신도들을 박해했다. 데시우스(Decius 249-251 재위)는 가장 먼저 박해를 전 제국으로 확대했으며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284-305 재위)은 마지막으로 가장 심하게 기독교를 박해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306- 337재위) 대제는 313년에 밀라노에서 칙령을 발표해 기독교는 합법이고 자유종교로 인정했다.이후 후세인들이 ‘배교자(背敎者)’라고 부른 율리아누스(Julian the Apostate 355-363재위) 황제는 다시 기독교를 탄압했다.

2천 년이 지났다. 바른 믿음에 대한 박해는 또 인류에서 한 차례 재연되고 있다. 사람들은 자연히 조기 기독교 신도가 당한 것과 오늘날 ‘眞ㆍ善ㆍ忍’을 신앙하는 파룬궁 수련생들이 당한 박해를 비교하게 된다. 신앙이 박해를 당했을 때 그들의 반(反)박해 형식은 모두 자비와 선량한 것이며 폭력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조기 기독교 신도들은 사랑을 많이 이야기 하면서 박해자와 맞서지 않았고 대대적으로 박해를 폭로하지 않았으며 투수장(鬪獸場)인 콜로세움에 버려져 사자에게 잡아먹혀도 ‘적을 관용했다’고 여기고 있다. 하지만 파룬궁수련생은 도리어 진상을 알리고 박해를 폭로하고 제지했다. 심지어 『9평 공산당』을 전하고 ‘삼퇴’(중공의 3개 조직인 공산당, 공청단, 소선대 탈퇴)를 추진하고 중공을 해체하려 한다. 그리하여 일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조기 기독교 신도와 대비해 파룬궁은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오해하고 있다.

사실 이것은 역사를 이해하지 못해 조성된 오해다. 프린스턴대학의 종교학 교수 에일린 페이젤스(Elaine Pagels)은 기독교에서 장기간 형성된 순교자에 대한 관점은 후세 독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지적했다. 이런 관점은 순교자의 행위를 단순화시키고 당시 순교자들의 저항이 로마 정권에 가져다준 거대한 도전을 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일방적으로 하나의 ‘사랑’이란 글로 조기 기독교 신도들이 걸어온 간고한 노정을 소홀히 했다. 사실 오늘날 파룬궁수련생들이 반박해와 조기 기독교 신도들의 반박해가 다른 것은 없다. 다만 시대가 변하고 직면한 강권이달라 반박해의 구체적인 형식이 다를 뿐이다.

본문에서는 조기 기독교 신도들이 반박해한 일부 이야기를 캐내려 하는데 이것을 계기로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또 역사적 각도로부터 파룬궁수련생들이 자유 신앙을 위해 박해를 폭로하고 박해를 제지하며 정치를 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기 바란다. 아울러 더욱 많은 독자들이 함께 중국공산당이 ‘眞ㆍ善ㆍ忍’에 대해, 선량한 민중에 대한 탄압을 제지하고 이번 사회도덕을 파괴하는 민족의 재난을 종결하길 바란다.

1. 로마황제 박해의 ‘공개성’과 중공 박해의 ‘은폐성’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조기 기독교 신도들은 사자에게 잡아먹혀도 아주 조용히 있었으며 사방으로 다니며 박해를 폭로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파룬궁수련생은 박해를 폭로하는 규모와 역량은 매우 크기 때문에 사람들은 파룬궁이 소위 청치에 참여한다고 오해한다. 이 문제는 사실은 바로 로마황제와 중공은 신앙 박해에서 폭력이란 공통점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기 때문이다.

로마황제가 기독교 신도들을 박해하는 특징 중 하나는 ‘공개성’이다. 기독교 신도들을 경기장에 내던져져 사자에게 먹히거나 산채로 불에 태워 죽였다. 로마황제는 백성들 앞에서 이를 공개적으로보여주었다. 이 역시 당시 로마 법률이 죄수를 사형하는 일반적인 방식이며 기독교 신도들을 위해 전문적으로 만든 방식이 아니다. 기독교 신도들은 신앙을 위해 살해당하는 것을 ‘순교(Martyr)’라고 한다. 그리스어로 말하면 ‘목격’이다. 박해를 폭로할 필요없이 전 사회가 거의 모두 로마황제가 어떻게 기독교 제자를 대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하는 최대 특징은 ‘은폐성’이다. 미국 국무원 2008년 종교자유보고에 따르면 중국 노동교화소에 감금된 사람 중 파룬궁수련생 인원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밍후이왕에서 발표한 중국대륙으로부터 온 직접적인 대량의 자료에도 고문 학대로 수련생들이 불구가 되어 사망했다. 심지어 대량의 수련생은 중공이 폭리를 얻기 위해 산채로 장기를 적출당했다. 이렇게 큰일이지만 사회상에서는 모두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중공은 이런 일을 모두 배후에서 일으켜 은폐했을 뿐만 아니라 이런 피비린내 나는 비극을 위장하고 소위 ‘춘풍화우(春風化雨)’ ‘인성관심’ 등으로전 세계를 속였다. 그러므로 반박해 수단에서 조기 기독교 신도와 파룬궁수련생은 필연적으로 다르다.

기독교 신도는 ‘박해를 폭로할’ 필요가 없었다. 로마황제는 기본상 박해를 숨기지 않았지만 파룬궁수련생의 중대한 임무는 바로 중공이 숨긴 박해를 폭로하는 것이고 세인에게 중공은 어떻게 음험하게 파룬궁을 박해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독자가 여기까지 보고 여전히 이번 박해의 처참함을 믿지 않는 자체가 곧 중공의 은폐성과 속임수에 넘어간 증거 중 하나다.

2. 조기기독교 신도는 어떻게 정면으로 맞섰는가?

파룬궁을 박해하는 구체적인 대책 중 하나는 바로 ‘전향(신앙 포기)’이다. 파룬궁수련생에게 연공하지 않겠다고 보증서명을 받는 것이다. 신앙을 견지하고 전향을 거절하기 때문에 천만 파룬궁수련생은 극심한 타격을 당하는 대상이 됐다. 많은 사람들은 일종 관념이 있는데 보증서를 쓰거나 연마하지 않겠다고 구두로 말하고 집에 돌아가 슬그머니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한다. ‘보라. 조기 기독교 신도들이 얼마나 평화롭고 얼마나 사랑하는가.’

사실 그렇지 않다. 이 역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람으로 하여금 역사에 대해 착각하게 만든 것이다. 복종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부와 맞선다고하는데 조기 기독교 신도 역시 파룬궁수련생이 억지로 전향하는 것과 유사한 잔혹한 현실에 직면했다.

옛 로마인들은 본래 다신교(Greco-Roman polytheism)를 신봉했으며 또 매번 한 개 지역을 정복하면 기본상 모두 당시 현지에 신을 믿는 전통을 보유했다. 로마제국은 신앙에 대해 대부분 관용한 태도를 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통치자는 권위를 수호하기 위해 한 가지 규정을 내렸는데 모든 국민은 당신이 무엇을 믿든지 막론하고 반드시 모종의 의식을 통해, 예를 들면 황제의 조각상 앞에서 제를 올리는 것으로 로마제국에 충성한다는 것을 표시해야 했다. 이 점은 오늘날 중공이 모든 종교단체는 반드시 당의 지도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과 차이가 없다.

바로 황제에게 제를 올리는 이런 한 가지 행동이 조기 기독교 신도들이 생사를 선택하는 기준이 됐다. 조기 기독교 신도 중 비록 어떤 사람은 굴복했으나 많은 사람들은 거절했다. 로마인들은 이로 인해 매우 화가 났다. 대다수 로마인들은 정치의무 자체가 곧 그들 종교의무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로마신과 황제 초상에 제를 올리는 것은 로마 통치체계와 황권의 초석이었다. 기타 각종각양 종교인들은 모두 이 요구에 협력할 수 있었으나 단지 새로 나타난 기독교만이 그토록 고집스러웠으며 공개적으로 거절하고 이와 꼭 맞서려 했다. 사실 로마인들은 왜 기독교 신도들이 하늘이 내린 이 같은 전통에 도전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며 이런 행위가 무엇을 도모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일부 로마 관료들은 기독교 신도들이 로마신과 황제에게 제를 올리는 것을 거절하는 행위는 사실 전체 로마 권력체계에 대한 거대한 정치적 도전이고 로마 통치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고 보았다.

물론 결과는 엄중했다. 복종하지 않은 기독교 신도들을 제국에 충성하지 않는 적이라고 여겨 박해당하는 대상으로 삼았고 심지어 콜로세움에 던져 사자의 먹이로 삼았다. 그리하여 조기 기독교 신도들은 처음부터 로마황제와 맞섰으며 이 같은 저항은 박해가 종결될 때가지 계속됐다

반(反)박해 견지는 바로가장 유력한 무기

기독교에는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스란 순교자 전기가 있다. 페르페투아는 22세이고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온 로마의 귀부인이었으며 젖먹이 아이가 하나가 있었다. 펠리치타스는 그녀의 하녀였는데 임신 8개월이었으며 그녀들은 모두 기독교 신도였지만 아버지들은 로마교를 믿었다. 페르페투아와 펠리시티는 로마황제 조각상에 제를 지내는 것을 거절하자 바로 체포됐다. 페르페투아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정통했다. 그는 체포돼서부터 형벌받기 전 저녁까지 일을 기록했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그녀의 부친은 딸에 대한 애정으로 그녀의 결정을 개변하려 했으며 그녀에게 황제에게 제를 올리라고 설득했다. “딸아, 너는 아버지를 가엾게 여기고 나를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회백머리 너의 아버지, 너의 어린 아들 가엾어라.” 그러나 페르페투아는 동요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페르페투아는 아버지에게 꽃병을 가리키면서 저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꽃병’이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아버지에게 “꽃병을 꽃병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기독교인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며 신앙을 지키려 했다. 서기 203년 그녀와 펠리시티 및 기타 몇 사람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황제가 콜로세움에 던져져 야수와 검투사에게 희생됐다.

우리들이 보다시피 만약 조기기독교 신도들이 로마황제에 저항하는 용기가 없었다면 기독교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앙과 가족에 대한 사랑은 모순이 없다. 죄는 폭행자에게 있다. 다만 강권을 두려워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피해자를 질책할 뿐이다.

중공은 파룬궁수련생들에게 ‘연공하지 않는다’는 보증서를 쓰라고 했는데 로마황제가 기독교 신도들에게 제를 올리라고 하는 것과 같다. 모두 신도들을 바른 믿음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다.

파룬궁수련생들은 세뇌반, 노동교화소와 감옥에서 억지로 전향하는 불행에 직면하게 된 것은 페르페투아와 유사했다. 중공은 가족에 대한 정으로 압력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또 파룬궁수련생들을 실업시키고 더욱 심한 것은 가족이 연루되게 하는 것만 아니라 마을, 회사, 지방 지도자들까지 연루되게 했으며 수련생의 전반 생존환경에 압력을 가했다. 그 다음 ‘가정을 상관하지 않는다’, ‘가족에 대한 사랑을 헤아리지 않는다’, ‘타인에게 연루되게 한다’, ‘맞섰다’ 등등 비난을 파룬궁수련생들에게 퍼부었다.

한걸음 물러서 말한다면 제를 지내라는 요구는 필경 로마 법률에 본래 규정되어 있던 것이고 기독교 신도들을 대상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제를 지내라는 요구가 먼저고 기독교 신도 복종하지 않은 것이 나중이다. 맞섰다고 말하면 조기 기독교 신도들이 로마황제와 맞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중공은 억지로 파룬궁수련생을 전향시키려고 보증서와 같은 것을 쓰라고 했는데 이 형식은 파룬궁을 박해하고 사람을 괴롭히는 운동을위해 전문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은 파룬궁수련생들이 누구와 맞서는 것이 아니라 중공이 억지로 흠을 만들어 트집을 부리고 일부러 선량함을 박해하는 것이다.

(계속)

문장발표: 2011년 1월 14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문장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1/7/23459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