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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문화의 요언에서 벗어나 ‘4.25’를 보자

글/德元(더위안)

【밍후이왕 4월 22일】1999년 4월 25일 1만여 명의 파룬궁 수련생은 베이징 푸유(府右)거리 국무원 민원 사무실에 찾아가 합법적인 수련환경을 요구하는 청원을 이성적으로 평화롭게 했다. 이 과정에서 파룬궁 수련생들은 대선대인, 평화와 이성, 순정한 도덕 풍모를 나타내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럼에도 중공은 지금까지 그 사건을 두고 요언을 날조하고 있다. 여전히 당문화 식으로 해석해 일부 사람들의 머리 속에 작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만약 파룬궁이 중난하이를 에워싸지 않았더라면 공산당은 탄압하지 않았을 것이다’, ‘연공은 집에서도 할 수 있는데 왜 중난하이에 갔는가?’ 등등이다. 이는 곧 많은 사람들이 이미 습관적으로 해석하는 기준이 되었는데, 그럼 궁극적인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박해를 먼저 사전모의 했고, 평화적인 청원은 뒤였다

중국대륙에는 이런 농담이 있다. ‘참대 곰은 칼라 사진을 찍을 수 없다’ 왜냐하면 참대 곰은 흑백 두 가지 색깔이기 때문이다. 중공의 특성도 이 같이 검은 것이 아니면 흰 것이고 친구가 아니면 적이다. 포용을 모르며 일관된 투쟁으로 문제를 해결하며 정치적 각도에서 문제를 보고 있다. 모든 정상적인 사회문제나 신앙문제가 중공의 손에 들어가면 정치문제가 돼, 투쟁과 박해의 방법으로 해결하려 한다. 중국인은 어려서부터 줄곧 이러한 당문화의 사유로 문제를 사고하는 주입식 교육을 당했다. 그러다 보니 청원을 가로막고, 강제로 주거를 철거하는 등, 이런 기본 인성을 벗어난 사건도 중국에서는 이치에 맞는 일이 된다. 오늘 중국사회에서 사람들의 청원은 일을 저지르는 것이며, 생존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둘러싸는 것을 정치라고 하는 데, 이러한 것은 모두 중공이 만들어낸 짓이다.

중공이 파룬궁 박해를 결정한 것은 ‘4.25’ 이후에 시작된 게 아니다. 1997년 초 뤄간은 전국성시에다 파룬궁의 죄를 샅샅이 조사하라고 공안부에 지시해 파룬궁을 ‘사교’로 규정하려 했다. 하지만 전국각지 공안국은 낱낱이 파룬궁을 조사해도 전혀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상급에 회보해 흐지부지하게 마무리되었다. 1998년 7월 공안부 1국은 공정 [1998] 제555호 《파룬궁 전면조사 착수 통지》를 선포했다. 《통지》에는 우선 파룬궁을 ‘사교’라 정죄하는 내용을 연이어 게재했다. 활동내막을 파악해 범법행위를 발견하면 각지 공안정보부가 철저하게 조사해야한다는 것이었다. 1999년 초 소문을 들은 군과 공안 고위층의 가족은 파룬궁을 수련하는 친척들에게 조심하도록 정보를 제공했다. 위에서 ‘반동공’이라 여겨 단속한다는 것이었다.

파룬궁 청원은 가장 좋은 선택

중국 헌법에는 공민의 언론, 신앙과 청원은 자유라고 명확히 규정돼 있다. 파룬궁이 법에 따라 청원한 것은 수련생의 자발적인 행위였다. 허쭤슈(何祚庥)가 파룬궁을 중상 모함한 문장은 확실히 파룬궁의 원칙에 위배되지만, 도리어 파룬궁 탓으로 뒤집어 씌웠다. 독자에게 파룬궁을 수련하면 큰 문제가 나타날 것같이 암시했고 심지어 나라를 망하게 한다고 했다. 많은 파룬궁 수련생은 만약 사실이 밝혀지지 않으면 합법적인 수련환경이 위협받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관용적이었던 국민들을 이용해 중국 전 사회를 정치운동으로 몰고 갈 중공의 속셈을 읽을 수 있었다.

파룬궁 수련생이 진실을 밝히고, 출판사에서 성명을 발표해 자신들의 잘못을 시정하려할 무렵, 톈진시에서는 갑자기 폭력방비 경찰을 동원해 45명의 파룬궁 수련생을 폭행한 뒤 체포했다. 청원하러간 파룬궁 수련생을 체포하는 것은 베이징의 명령이었기에 파룬궁수련생들은 베이징 상방행이 고무격려 됐다.

중공통치의 중국사회는 삼엄하며 제한적이다. 이런 조건에도 파룬궁 수련생은 평화와 이성을 선택해 헌법에 따라 단체청원을 했다. 진심으로 선한 마음을 담아 중공내부의 양지를 불러일으키려 했고, 당성보다 인성을 앞세우는 지도자들이 진상을 알도록 바라면서, 최대한도로 충돌을 피하는 방법으로 청원했다. 이는 중공의 고압하에서 능히 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문제를 만든 중공을 상대로 파룬궁 수련생이 청원한 것은 처음에 중난하이 부근인 푸유가이며, 국가 민원사무실 소재지였지 중난하이로 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4.25’그날 수련생은 무장경찰의 재촉과 인솔 하에 중난하이로 가게 됐다.

그때 중공내부에는 파룬궁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파룬궁 조사를 실사구시의 관점에서 진행해야 한다는 측과, 의도적으로 파룬궁을 모함하는 자료를 만들자는 측이었다. ‘4.25’ 청원 당시 수련생 대표가 주룽지(朱鎔基)와 면담했을 때에야 비로소 주룽지가 파룬궁을 탄압하지 말도록 정면적인 지시를 내렸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주룽지 총리의 지시마저 누군가 감히 무력화시키며 파룬궁 탄압은 점점 열기를 더해갔다.

‘4.25’ 사건은 합법적인 청원이었으나, 중공의 모함으로 ‘에워 싼’게 되었다. 이처럼 중공은 결과를 원인으로 만들어 박해하는 구실로 삼았는바, 이는 세상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수단에 불과하다. 중공 장쩌민 일당인 사악한 세력은 ‘4.25’ 전에 줄곧 박해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번 박해는 중공의 사악한 본성이 결정한 것이지, 파룬궁 수련생의 청원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문장발표: 2010년 4월 22일
문장분류: 평론 >수련자평론
문장위치: http://minghui.org/mh/articles/2010/4/22/22166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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