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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의 인권 사설(邪说)을 평하다—어느 정도까지 ‘배불러야’ 비로소 말할 자유가 있는가?

【명혜망 2004년 12월8일】중공(中共)은 국제사회의 인권질책을 마주할 때 본래의 얼굴은 일그러진다(灰头土脸). 후에 어느 문인이 ‘중국특색’의 인권 사설(邪說)을 어디서 찾아냈는지 모르겠지만, 바로 “생존권은 인권보다 높다”라는 말을 날조해냈다. 중공은 보배를 얻은 듯이 세계각국으로 가져가서 중국인권문제에 대처하는 호신부로 사용하였다.

“생존권”은 바로 의식이 풍족한 생활문제를 가리킨다. 의식이 풍족한 생활, 사람 목숨이 관계된 이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당연히 아주 이치가 있다. 그래서 중공의 ‘일언당(一言堂)’이 이렇게 선전하자 아주 많은 중국의 국민들은 정말로 믿어버렸다. 중공 자신도 담을 키우게 되어 감히 세계조류를 거스르면서 곳곳에 가서 떠들어댄다.

확실히, 최근에 한 학자의 소개의 의하면 청조(淸朝)의 건룽시기에 중국 국민 총생산(GDP)이 전세계의 51%를 차지하였고 손중산선생이 창건한 중화민국초기에 중국의 GDP는 전 세계의 27%를 점하였으며, 민국 11년에 GDP는 여전히 12%에 달하였다.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잡았을 때 (다시 말하여 국민당이 중국대륙을 떠났을 때)중국의 GDP는 전세계의 5.7%를 점하였고 작년(2003년) 중국의 GDP는 다만 전세계의 2.1%였다. 중국이 세계의 GDP를 점유한 비율에서 볼 때 중국의 지난 150년은 경제에서 본래 진보가 없고 점차적으로 내리막길을 걸어왔는데 특히 중국 공산당이 집정한 이 반세기가 더욱 그러하다. 이는 국민정부시기에 몇 십년 동안 치룬 전쟁으로 경제가 내리막길을 걸은 것과 다른 바, 중공은 기본적으로 평화로운 시기에 경제는 내리막길로 미끌어져왔다. UN은 1인당 평균 연수입 365달러 이하를 절대 빈곤선으로 정하고 있다. 지금 중국 대륙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지표에 도달하였는가?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절대적 빈곤의 표준보다도 훨씬 낮게 떨어져 있는가?

그러나 이 숫자들은 몇몇 대도시의 흥청거리는 유흥가와 고층빌딩이 중국경제의 실상을 뒤덮고 있음을 설명할 뿐, 오히려 결코 중국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최소한 이런 빈곤은 어떻게 조성되었는지는 다른 문장에서 평하겠다) 기본인권을 생존권으로 바꾸어놓은 이것은 중공의 망나니 본성인 ‘때에 맞춰 나감’에 불과하다.

우선, 중공은 55년을 집권하였지만 현재 여전히 ‘의식이 풍족한 생활문제(溫飽問題)’를 말하고 있는 것은 중공이 국가와 민족에 가져다 준 재난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증명한다. 비공산국가에서는 사람의 생존권을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중공이 통치하는 중국에서 사람들은 단지 ‘생존’을 기본인권으로 해야 하는데, 국제가 공인하는 신앙 자유와 언론 자유, 천부의 기본인권은 오히려 대들보를 훔쳐 내고 기둥으로 바꾸어 넣기 식으로 박탈당했다.

그 다음으로, 인권의 중요한 부분에는 ‘말하는 자유’를 포함한다. 의학의 각도에서 말할 때 언어기관이 정상적인 한 사람이 말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배가 부르고 부르지 않고와 관계가 없다. 사람들은 “나는 배가 고프다”를 항상 들어왔는데 바로 의식을 충족시키지 못한 정황 하에서 의식을 해결하기 위한 자유 논의이다. 사실상 사람이 살아 있기만 하면 말하는 것은 모두 가능한 바, 특히 배가 고플 때 배가 고플수록 큰 소리로 외쳐서 해결책을 찾고자 한다.

셋째, 중국의 ‘의식을 풍족하게 하는 문제’는 비록 해결되지 않았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으며 아울러 ‘일부분 사람들이 먼저 부유해졌다’. ‘의식을 풍족시키는 문제’가 없는 사람들은 왜 여전히 말할 자유가 없는가? 최소한 그들이 아직까지 배를 굶고 있는 그 사람들을 도와 말하게 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만약 배가 고파서 말하지 못한다면) 중공은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된 사람들마저 모두 말하지 못하게 하는데 무슨 “의식 이 풍족한 생활권이 인권보다 높다”는 말은 순전히 사람을 속이는 허튼 소리임을 알 수 있다.

넷째, “사람 목숨이 최우선”임을 말해보면, 모두들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즉 배를 곯는 사람은 “배고프다”고 말할 수 없으며, 배부른 사람은 배를 곯는 사람을 대신하여 “굶는 것”을 외칠 수 없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람 목숨이 최우선”이란 말은 “배고프다고 외칠 자유”는 없다는 뜻이 아닌가. 사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인권문제”가 아닌가? 어찌하여 “의식을 풍족시키는 문제”란 말인가?

다섯째, 중국사회에서 현재 각종 박해를 당하는 사람들은 본래 의식을 풍족하게 할 문제가 없었다. 바로 진실한 말을 견지함으로써 박해당하여 집을 잃고 떠돌아다니며 가정이 파괴되었고, 사람이 죽게 되어 비로소 “생존위기”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들은 “인권”이 박탈당하여 비로소 “생존권”이 침범당한 것이 아닌가?

인권은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이다. 사람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무슨 ‘의식을 풍족하게 하고, 풍족하지 않은’ 그런 것을 모른다. 우선 먼저 앙앙 크게 우는 것인바, 바로 언론의 자유는 태어날 때부터 갖고 온 것이다. 중공은 국민들에게 인권을 부여하지 않고 국민들에게 언론의 자유를 주지 않는데, 단지 그것들 자신이 저지른 추악한 일이 폭로되어 국민들의 불신임을 초래하고, 곧 자기의 이익을 잃을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생존권은 인권보다 높다’는 말은 완전히 뜯어 맞춘 생억지의 그릇된 주장이고, 백성과 국제사회를 우롱하는 구실에 불과하다.

최근에 중국 공산당은 무슨 ‘3불주의(三不主義)를 내놓았는데, 제 1조가 바로 “쟁론하지 않는 중에서 발전한다”이다. ‘발전’할지 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쟁론하지 않음’은 확실히 중공이 사람들더러 말하지 말라는 명백한 표시이다. 시비는 이야기를 통해 더욱 명백히 가려지는데, 쟁론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람들더러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질러도(예를 들어 이 몇 년동안 파룬궁 문제에서) 사람들이 말하지 못하게 하며, 더욱이 진실한 말을 하는 사람은 죽도록 망가뜨리는데 이는 국가와 국민에게 재앙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닌가?

한 사람이 진실한 말을 하지 않음은 그 개인의 선택이지만, 그가 오히려 다른 사람이 진실한 말을 하지 못하게 할 권리는 없다. 다른 사람에게 진실한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자신이 진실한 말을 하지 않는 것보다 더욱 마땅히 사회와 양지(良知)의 질책을 받아야 한다. (명혜기자 어우양페이 글)

문장완성:2004년 12월 07일
문장발표:2004년 12월 08일
문장갱신:2004년 12월 08일 04:50:34
문장분류 : [시사평론]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4/12/8/90939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