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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4·25 전후 7단계의 함정 설치

글/ 주문광(周聞廣)

[명혜망] ‘돌이켜본다(回望)’는 것은 오늘의 시점에서 과거의 일을 되돌아보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1999년 4월 25일, 파룬궁수련자 만 명의 대규모 청원은 중국인의 도덕적 기념비를 세웠다. 이러한 감동 속에서도 우리는 사실 경과와 중요한 세부사항을 되짚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직면한 기본적 현실은 사악이 당시 사용했던 사기극과 악랄한 수법이 오늘날에도 국내외에서 형태만 바꿔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4·25 전후, 중국공산당(중공)은 7단계 함정을 연속으로 설치해 파룬궁을 소멸시키고 ‘진선인(眞·善·忍)’을 믿는 수많은 중국인을 탄압하려 했다.

‘함정 설치’란 음모를 꾸며 덫을 놓는 것을 의미한다.

수호지에는 ‘고구(高俅)가 백호당에 함정을 파다’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임충이 열무방 골목에서 우연히 보검을 샀는데, 다음 날 두 관리가 집에 찾아와 고태위 저택에 가서 칼을 보여달라고 했다. 임충은 칼을 들고 두 사람을 따라 관저로 들어갔고, 여러 곳을 거쳐 결국 ‘백호당’이라는 금지구역(군사기밀 논의처)에 잘못 들어가게 됐다. 이때 고태위가 나타나 군사들에게 임충을 잡아 참수하라 명령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임충은 결국 양산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현대 사례로는 1957년의 ‘뱀을 굴에서 유인하기(引蛇出洞)’가 있다.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온갖 꽃들이 함께 피어난다, 온갖 학파들이 함께 논쟁한다: 문화와 사상의 다양성을 장려한다는 의미)’이라는 구호로 중국 지식인과 대중에게 ‘공산당 정풍운동을 돕자’고 호소했다. 이는 ‘반당분자’들을 유인해내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꼬투리 잡지 않고, 몽둥이질하지 않으며, 모자 씌우지 않고, 가을 이후 보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결과적으로 반우파 투쟁이 가을 이후 보복으로 이어져 무자비한 탄압이 일어났고, 55만 명의 ‘우파분자’와 그 가족 수백만 명이 고통을 겪었다.

1999년 4월부터 2001년 1월까지 4·25 사건 전후, 중공은 박해를 강화하기 위해 세심하게 계획을 세웠고, 22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7단계의 기만책을 실행했다.

제1단계: ‘포위 공격’ 지국(“圍攻”之局, 사실은 ‘포위’도 ‘공격’도 없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4·25 만인 청원의 직접적 원인은 그 이전에 발생한 톈진(天津) 사건이다. 1998년 5월 베이징 TV에서 허쭤슈(何祚庥)는 거짓 사례로 파룬궁을 비방했다. 1999년 4월 11일, 허쭤슈는 톈진 교육대학의 잡지 ‘청소년 과학기술 박람’에 ‘나는 청소년 기공 수련을 반대한다’는 글을 발표해 다시 한번 조작된 사실로 파룬궁을 공격하고 비방했다. 4월 18일, 톈진 파룬궁수련자들은 톈진 교육대학과 잡지사 등 관련 기관을 찾아가 진실을 알리려 했다. 처음에 출판사는 정정을 약속했으나 다음 날 말을 바꿨다. 4월 23일과 24일 이틀간 톈진시 공안국은 300여 명의 진압 경찰을 동원해 상황을 설명하려는 파룬궁수련자들을 구타하고 쫓아냈으며 45명을 체포했다. 일부 수련자들은 피를 흘리며 부상을 입었다. 톈진 공안은 “이 문제는 톈진에서 해결할 수 없으니 중앙으로 가서 해결하라”고 말했다. 이 톈진 사건이 ‘4·25’ 청원, 즉 중앙청원사무실에 상황을 알리게 된 직접적 원인이다.

일부 사람들은 4·25 사건이 인위적으로 꾸민 함정이 아닌지 의문을 제기했다. 필자는 그렇다고 생각하며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톈진 사건에서 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파룬궁수련자를 체포한 것은 전국적으로 처음 있는 일로, 명백히 사태를 확대하려는 의도였다.

2. 톈진에서 체포한 경찰이 파룬궁수련자들에게 베이징에 가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알려준 것은 베이징 고위층의 지시 없이는 톈진 경찰이 체포자를 풀어주지 못한다는 의미다. 이는 수련자 체포도 베이징의 지시였음을 암시하지 않는가?

3. 4·25 청원에 관한 많은 회고록은 청원자들이 중난하이(中南海) 담장을 따라 서도록 안내한 현장 지휘자가 경찰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4. 현장에서는 파룬궁수련자가 지휘하지 않았으며, 경찰과 장쩌민 등 톈진 사건의 주범인 허쭤슈를 포함해 당일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

5. 다른 증거들로는: 뤄간(羅干)이 이전에 파룬궁에 대한 두 차례 조사를 지시했으나 아무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고, 이는 그의 승진에 불리했다. 허쭤슈와 뤄간은 동서지간으로 이런 친인척 관계는 사적으로 공모하기 쉬운 조건을 제공했다. 뤄간의 파룬궁에 대한 일관된 적대적 태도와 장쩌민에게 탄압을 부추긴 음험한 심리가 함정을 꾸민 원인이 됐다. 중난하이 근처의 특수한 지리적 위치에 있는 중앙청원사무실이 음모자들에게 이용됐다.

6. 목격자들이 당국의 모함을 증언했다 등등.

오랫동안 서방 언론은 중공의 주장만을 반복 인용하며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한 원인이 ‘중난하이 포위 공격’에 있다고 선전해왔다. 그러나 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사실 이 사건은 중난하이를 겨냥한 것도, 정부기관을 포위 공격한 것도 아니었다. 법에 따라 국가청원사무실에 청원을 제기한 것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평화롭고 이성적이었고, 공격 행위나 폭력은 전혀 없었다.

포위도 없었고 공격 의도나 행동도 없었는데 어떻게 ‘포위 공격’이라 할 수 있겠는가? 포위 공격이라고 조작한 것은 명백히 박해의 구실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중공은 오래전부터 파룬궁을 박해하기로 결정했으며, 모든 박해 행위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청원자들은 구호나 표어 없이 경찰이 지정한 위치에 조용히 서거나 앉아 있었다. 저녁이 되자 톈진에서 체포된 이들이 풀려났고, 청원자들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떠나기 전에는 공중위생까지 챙겼다. 1~2만 명이 하루 종일 모였던 장소에 종이 조각 하나 남기지 않았고, 심지어 경찰이 던진 담배꽁초까지 주워 쓰레기통에 버렸다. 어둠 속에서 무장하고 긴장했던 관병들은 하루 종일 헛수고를 했다. 이 계략은 실패했다.

제2단계: ‘610’ 특별 기구 설립

1999년 6월 7일, 장쩌민은 직접 중앙 파룬궁 문제처리 영도소조를 설립했다. 3일 후인 6월 10일, 이 영도소조는 사무실(610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유래했으며 지금까지 사용됨)을 설치했다. 이 조직은 수년간 형태를 바꾸며 숨었다가 나타났다가 하면서, 특유의 4대 초월적 특성(초월적 권력, 법 초월, 초월적 잔혹함, 국경 초월)으로 막강한 통제력을 갖게 됐다. 폭력적 세뇌의 지휘 중심이 되어 파룬궁 박해의 모든 사무를 총괄하는 세뇌 박해의 주범이 됐다. 또한 10가지 흑권술(정치적 속임수)을 보유했다. 블랙리스트, 전향율, 연좌제, 비밀 정책, 비밀 지령, 암흑 통로(각 세뇌반 간 이송 통로로, 전향하지 않은 수련자가 감옥에서 출소하면 즉시 현지 610에 의해 세뇌반으로 강제 이송됨), 검은 거래(밀고 보상, 체포 보상, 전향 보상, 명예와 이익으로 유인 등), 거짓말 조작, 사기 계획, 민감일 등이 있다.

1999년부터 2025년까지 26년간, 매년 주요 명절인 신정, 설날, 노동절, 중추절, 국경절뿐만 아니라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기간을 포함해 거의 연중 내내, 중공은 이러한 악랄한 수단을 동원해 없는 일도 있는 것처럼 함정을 만들었다. 이러한 ‘민감한 날’은 해마다 활용됐고 박해, 괴롭힘, 납치, 구금, 체포 등 불법 활동이 일상화됐다.

제3단계: ‘적발·비판’ 지국

(1) 1996년, ‘광명일보’는 기공에 대한 ‘선전하지 않고, 간섭하지 않으며, 비판하지 않는다’는 ‘삼불(三不)’ 정책을 위반하여 사상 영역에서 근거 없이 파룬궁을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이후 공안과 ‘과학자’ 명분을 내세운 정치인들의 파룬궁 괴롭힘이 끊이지 않았다. 1999년 7월 23일, ‘해방군보’는 ‘뚜렷한 기치를 내걸고 파룬궁 폭로 투쟁을 전개하자’는 사설을 게재해 인민일보의 7월 20일 내용을 반복하며 군부의 강경한 입장과 태도를 드러냈고, 폭로 비판의 국면은 전국으로 급속히 확산됐다.

왜 폭로 비판을 하고 함정을 설치했을까? 파룬궁은 심신을 함께 수련하는 고덕(高德)대법으로, 국가와 사회, 개인에게 백 가지 이로움이 있고 해로움은 하나도 없다. 두 차례의 대규모 잠입 조사에서도 어떤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 파룬궁이 나쁘다는 증거가 전혀 없었기에 장쩌민과 뤄간 일당은 박해하고 탄압하려 해도 잡을 만한 꼬투리가 없었다. 6·4 천안문 사건 이후 국제 제재 등을 고려해 공개적으로 대항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운동 방식으로 ‘계란에서 뼈를 찾는 식’으로 약간의 결점이나 소위 증거를 조작해내려 했다. 이것이 폭로 비판 운동의 진짜 배경과 원인이다.

오늘날 당시 폭로 비판의 국면을 되돌아보면 적어도 세 가지 사실이 명확하다.

첫째, 폭로 비판은 전국적 강제 세뇌의 기성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문화대혁명의 기존 모델을 차용했으며 장쩌민, 뤄간 및 그들이 이끄는 610 사무실에게는 익숙하고 편리한 방법이었다.

둘째, 폭로 비판은 파룬궁수련자들을 이간질하고 분열시키는 수단이었으며, 610이 혼란 속에서 이득을 취하고 더 많은 거짓말을 만들어내기 위한 시간벌기 전략이었다. 당시 파룬궁수련자는 약 1억 명(중국 인구의 10분의 1)에 달했고,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참여했지만 명부나 가입 조건 없이 누구나 배우고 싶으면 배우고,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둘 수 있었다. 진선인(眞·善·忍) 대도무형으로 수련자들은 느슨하게 관리됐다. 이에 대해 1997년 이후 공안부는 여러 차례 파룬궁수련자 속에 잠입요원을 심었고, 당국은 이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상황을 이해한 상태에서 중공은 폭로 비판과 분열, 거짓말로 오명을 씌우는 방식을 단계적으로 추진하여 파룬궁에 죄를 뒤집어씌웠다. 이렇게 함으로써 전당(全黨)을 위협하고 전국민을 세뇌시키는 목적을 달성했다.

4·25 청원 사건 이후, 장쩌민과 뤄간은 다시 전국적으로 파룬궁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대규모 공안 인력을 동원해 정보를 수집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동시에 그들은 새로운 전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셋째, 폭로 비판 운동으로 시작해 죄명을 조작하고 시험적으로 박해를 추진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당시 중앙 정치국의 다른 6명의 상무위원들은 마음속으로 파룬궁 박해에 반대했지만, 장쩌민의 ‘망당망국(亡黨亡國)’ 협박에 침묵했을 뿐 내심으로는 불복했다. 게다가 장쩌민 본인도 겉으로는 강하게 나섰지만 실제로는 매우 겁이 많아 이런 계획을 통해 단계적으로 박해를 강화하는 것이 위험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중공 공안 인원들은 수년간 파룬궁 내부에 잠입했지만 어떤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고, 심지어 많은 잠입요원들도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왜일까? ‘진선인’이 정말로 좋기 때문이다.

(2) 1997년 초, 중공 중앙 정법위원회 서기 뤄간은 자신의 권한을 이용해 공안부서에 전국적으로 파룬궁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다. 이는 죄명을 조작해 파룬궁을 금지하려는 의도였다. 각지에서 “아직 어떤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온 후, 뤄간은 1998년 7월 다시 중국 공안부 제1국(정치보위국)을 통해 공정[1998] 제555호 ‘파룬궁에 대한 조사 실시에 관한 통지’를 발표했다. 이 통지는 먼저 파룬궁을 ‘사교(邪敎)’로 규정한 뒤, 전국 각지 공안부서에 체계적인 ‘잠입 조사’를 실시해 증거를 수집하도록 지시했다. 조사 결과 여전히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만약 여러 차례 잠입 조사에서 확실한 증거를 확보했거나 약점을 찾아냈다면, 직접 박해를 할 수 있었을 것이고 굳이 폭로 비판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밀리에 진행하는 것이 어려웠기에 아예 공개적으로 대항하며 이간질하고 억지로 트집을 잡았던 것이다. 비판 국면에서 전국 각계의 탄압 세력이 총동원되어 결국 ‘1400건의 사례’와 같은 사실 확인이 불가능한 저급한 선전물도 만들어냈다.

폭로 비판 국면은 전국을 대상으로 한 정신적 공격이었다. 이 과정에서 중공은 운동을 전개하는 전통적 수단을 집중적으로 사용해 전국에 강제적 사상 통제, 이간질, 침투, 해체, 전향, 금지, 대중 간 투쟁을 실시했다. 또한 선동하여 증오를 만들고, 일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증오하도록 부추겼다.

제4단계: ‘피가로’ 지국

이 단계는 ‘외국 언론을 이용한 정죄’ 전략이다. 즉, 외국 언론을 빌려 모자를 씌우고 국내를 압박해 박해에 법적 외피를 씌우려 했다. 1999년 10월 25일, 중국 중앙텔레비전 ‘신문련보(新聞聯播)’는 장쩌민이 프랑스 방문 중 ‘피가로’지 기자의 질문에 답한 내용을 방송했는데, 그는 근거 없이 “파룬궁은 사교다”라고 주장했다. 수백 명의 파룬궁수련자들은 이 방송을 본 후 천안문 광장과 인민대회당에 청원하러 갔다가 체포됐다.

1999년 10월 26일, 중국 주요 관영 매체들은 “파룬궁은 사교다”라는 제목으로 장쩌민의 발언을 1면 헤드라인에 실었다. 외부에서는 이것이 중국 당국의 파룬궁에 대한 공식 규정을 의미한다고 인식했다. 천 명 가까운 파룬궁수련자가 천안문과 민원사무실로 가다가 체포됐다. 다음 날 ‘인민일보’는 특약 평론원 글 “파룬궁은 사교다”를 게재했다. 약 600명의 파룬궁수련자들이 천안문에서 파룬궁 현수막을 펼치다 체포됐다. 17명의 파룬궁수련자들이 천안문 성루에서 파룬궁 현수막을 펼쳤고, 이 중 15명의 베이징 파룬궁수련자는 4개월에서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다른 2명의 외지 수련자는 고향으로 끌려가 구금됐다.

이 계략은 세뇌와 박해에 법적 외피를 씌우려는 것이었다. 비열한 수법으로 선제공격하고, 국제 여론을 활용해 국내를 압박했다. 악랄하고 불량하게 행동하며 독재적이고 전제적인 태도를 보였다. 국제 여론을 속이고 전 세계 사람들을 세뇌하려 했으며, 강압적 상황을 조성하고 강경 돌파하려 했다. 불량배의 모습이 세계 앞에 드러난 것이다. 더 악랄한 점은 말로 법을 대신하고 법치 체계를 우회해 속임수를 썼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 내에서 파룬궁에 대해 공개적으로 정의내리지 않고, 먼저 외국 언론에 이런 주장을 발표함으로써 해외에서 여론을 조성해 자신의 잘못된 정책을 지지하도록 했다. 이는 장쩌민 자신이 자기 발언의 진실성에 대해 불안해했음을 보여준다.

이 계략은 ‘수출을 내수로 전환’하는 수법으로, 외부에서 내부를 압박하는 효과를 얻었다. 610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불법적인 탄압에 ‘법적’이고 ‘합법적’인 외피를 씌우려 했다. 탄압이 지속되면서 계속해서 소위 ‘법적 근거’와 ‘법 조항’을 만들어내는 한편, 탄압의 합법성에 대해 전 세계를 기만했다.

제5단계: ‘부당한 판결’ 지국

당시 중공은 매년 국민 경제 총생산의 4분의 1을 파룬궁 탄압에 투입했다. 금전적 이익으로 진실을 모르는 관리와 대중이 박해에 참여하도록 유도하고 박해를 더욱 확대했다. 610이 전국 사법기관과 세뇌 박해 체제를 조종한 메커니즘과 책략은 다음과 같다. 조직적으로 610은 공안, 검찰, 법원, 사법 시스템을 조종했다. 사상적으로는 공안, 검찰, 법원, 사법기관의 당원들을 정신적으로 통제했다. 경제적으로는 국가 재정을 동원해 박해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다. 이렇게 박해는 일상화, 장기화, 전문화되었고, 더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특성을 갖게 됐다. 이러한 통제는 파룬궁수련자에 대한 형사 박해 과정, 즉 체포, 기소, 재판, 부당한 판결 등 일련의 과정에서 집중적으로 드러났다.

1999년 11월 13일, 장쩌민 일당은 공식 명의로 처음으로 파룬궁수련자에 대한 불법 ‘사법’ 재판을 시작했다. 하이난(海南)의 4명 파룬궁수련자는 하이커우(海口) 중급 법원의 ‘심리’를 거쳐 각각 2년에서 1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로써 26년간의 파룬궁수련자에 대한 부당한 판결의 역사가 시작됐다. 보수적 추산에 따르면, 지금까지 최소 2만 명의 파룬궁수련자가 불법 재판을 받았다.

610은 파룬궁 사건 재판을 조종했다. 법정에서 재판 방식으로 공공연하게 법을 위반하며 파룬궁수련자들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각급 공안, 검찰, 법원 부서는 ‘바보 행세’를 하거나, 가족을 속여 변호사를 해고하게 했고, 변호사의 사건 파일 열람을 방해하거나, 비밀리에 재판을 열어 근거 없는 ‘죄명’으로 파룬궁수련자들에게 불법 재판이나 형을 선고했다. 많은 사람들이 610이 각지 법원을 조종해 파룬궁수련자들에게 불법적으로 형을 선고하고 있음을 간파했다. 죄명부터 형기까지 모두 610과 정법위원회에서 미리 정해졌다.

불법 재판 과정에서 판사들은 종종 내심 불안해하며 심지어 공개적으로 “파룬궁에게는 법을 적용하지 않는다”고 외쳤다. 중공 판사들이 파룬궁 사건을 심리할 때 자주 하는 말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당신에게 법을 얘기해서 뭐하겠소? 난 당신에게 정치 얘기를 하겠소”, “당에서 변호를 금지했소”, “지도자의 말이 바로 법이오”, “법원은 공산당 지도 아래 있고 당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파룬궁 문제는 법적 절차를 따르지 않아도 됩니다”, “나한테 양심을 얘기하지 마시오.”

제6단계: ‘전향’ 지국 (“전향하지 않으면 화장하라!”)

7단계 중 이 단계가 가장 잔인하다. 폭력으로 진선인을 수련하는 파룬궁수련자들에게 강제로 전향을 강요했다. 어디로 전향하라는 것인가? 중공의 ‘가악투(假惡鬪-거짓, 악, 투쟁)’로 전향하라는 것이다. 이는 사람을 파멸시키는 행위가 아닌가? 이 계략의 규모는 크거나 작을 수 있고, 장소는 어디든 설치할 수 있으며, 전향 형태는 천변만화하고, 강경과 유화 수단을 모두 사용했다. 고문은 극단에 이르러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다. 구호는 악랄하고 잔인했다. “전향하지 않으면 화장하라!”

전향에 사용된 방법은 매우 다양했다. 100여 가지 세뇌 고문, 육체적 고문으로 전향시켰다. 이미 드러난 고문에는 구타, 전기 고문, 쇠로 지지기, 강간, 야만적 강제 음식물 주입, 구속복 입히기, 등 뒤로 수갑 채우기, 철장에 가두기, 오마분시(五馬分屍), 십자가에 매달기, 시체침대에서 재우기, 맹견으로 물게 하기 등이 있다. 최대한의 정신 통제로 거짓말을 통해 대중의 사상을 완전히 장악했다. 9족 연좌제, 물질적 이익으로 모든 사람의 정신을 통제했다. 세뇌반을 개설해 자기기만적인 거짓말로 수련자들을 통제했다. 인권 거래, 경제적 이익으로 타국에 대한 ‘정신 통제’를 실시했다. 위선적 세뇌와 박해: 전향 사기, 자기기만적 거짓말, 위선적 말, 기만 행위. 가족애를 이용한 압박, 친인척 압력 등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다. 목적은 진선인을 믿는 사람을 진선인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 전향시키는 것이었다. 폭력적 세뇌 과정에서 수백만 명이 부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었다.

명혜 자료관에서는 집단 학살 정책 하의 폭력적 세뇌 박해를 다섯 유형으로 분류했다. 육체적 고문, 정신적 박해, 기본 인권 침해, 경제적 박해, 기타. 그 중 하나인 육체적 고문 통계에 따르면, 18개 유형 130여 종에 달한다.

제7단계: ‘분신’ 지국(도대체 누가 그 몇 사람을 속여 ‘분신당하게’ 했는가?)

‘분신자살’은 극적으로 연출된 세기의 사기극이다. 2001년 1월 23일, 중국 전통 설날 전날 밤(음력 12월 29일), 천안문 광장에서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분신자살’ 사건이 발생했다. 천안문 광장에서 5명이 분신한 ‘돌발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 발생 2시간 만에 신화통신은 이례적인 속도로 전 세계에 영어 보도를 내보내며 “분신자들이 5명의 파룬궁수련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의 소리(VOA) 기자가 전화로 베이징 공안국과 공안부에 확인을 요청했을 때, 놀랍게도 그들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고 답했다. 중공 당국 매체가 공안 조사보다 더 빨리 소식을 전한 것은 이 사건이 돌발 사건이 아니라 철저히 계획된 음모임을 보여준다. 곧이어 중앙텔레비전은 파룬궁을 공격하는 ‘분신자살 뉴스’와 ‘초점방담(焦點訪談)’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전국 각계각층과 모든 기업, 기관이 강제로 시청하게 하고 반복적으로 ‘학습’하도록 했다.

중공 당국은 사건 발생 즉시 이 일이 파룬궁수련자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고, 이어서 중앙텔레비전 등 관영 매체들은 대대적으로 후속 보도를 쏟아내며 대중의 파룬궁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겼다. 이후 파룬궁수련자들은 중국에서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고, 사망자 수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26년 동안 분신 사건의 거짓을 폭로하는 증언과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됐고, 심층 분석 기사도 수천 건에 이른다. ‘천안문 분신’을 검색하면 명혜망에서 13,959개의 결과가 나온다(2016년 6월 30일 기준). 오늘날 천안문 분신 사건은 정교하게 계획된 세기의 사기극임이 확실히 증명됐다.

조사에 따르면, 파룬궁을 ‘사교’로 규정하기 위해 뤄간은 ‘천안문 분신’ 사건 3일 전부터 활발하게 움직였다. 2001년 1월 20일, 그는 전국 ‘엄중 단속’ 회의를 주재하며 지방 관리들에게 더 많은 체포를 지시하고, 파룬궁을 포함한 국내외 적대 세력, 소수민족 분리주의자, 종교 세력에 대해 엄중하게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베이징시 공안국 형사수사총대 특수경찰지대, 무장경찰 베이징 총대 제6지대, 베이징시 공안국 국내안전보위총대를 방문해 경찰과 무장경찰들을 위로했다. 신화통신 보도에 따르면, 그는 최근 경찰과 무장경찰이 천안문 광장에서 행한 무력 진압을 충분히 긍정하며, 피로를 두려워하지 말고 연속 작전을 수행해 다음 단계의 강력한 탄압 임무를 완수하라고 요구했다. 이틀 후인 1월 23일(음력 12월 29일, 섣달 그믐)에 소위 ‘천안문 분신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조작은 허점투성이였다. 2002년 1월, 신당인(新唐人, NTD) 텔레비전은 ‘천안문 분신’의 진실을 폭로하는 영화 ‘위화(僞火)’를 제작해 ‘분신’ 사건의 일부 허점을 드러냈다. CCTV 슬로우 모션 화면은 현장에서 사망한 류춘링(劉春玲)이 군복을 입은 경찰이 무거운 물체로 때려 죽인 것을 보여준다. 불에 검게 그을린 왕진둥(王進東)의 두 다리 사이에 있던 휘발유가 담긴 페트병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왕진둥의 왼쪽 앞쪽 바닥에는 마이크도 보였다(그렇지 않다면 그의 구호 소리가 어떻게 그렇게 선명했겠는가?). 12세 류쓰잉(劉思影)은 ‘중증 화상’을 입었는데도 기자가 그녀가 구급차에 실려가기 전에 가로막고 “엄마”라고 울부짖는 모습을 녹화했다. 이처럼 허점이 너무나 많아 사기극임이 명백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2001년 2월 4일 1면에 조사 보고서 ‘분신 불꽃이 중국의 어두운 면을 비추다 – 공개 분신의 동기는 파룬궁에 대한 투쟁 강화’를 게재했다. ‘워싱턴 포스트’ 기자 필립 판은 분신으로 사망한 류춘링의 고향 카이펑(開封)으로 직접 현장 조사를 갔는데, 이웃들은 류춘링이 파룬궁을 수련한 것을 본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일반 시민들 사이에는 더 직설적인 ‘분신 조작 사건’ 노래도 있다.

분신 사건은 의문점이 많으니, 내 분신 노래를 들어보게나
플라스틱 병은 타지 않고, 교차한 두 다리는 가부좌가 아니네
소화기는 빨리 왔고, 타격 물체는 머리 위로 지나갔네
화상 인터뷰 마음대로 하고, 기관지 절개에도 노래 부르네
왕진둥만 세 명이고, 다른 의문점은 더 많다네
(명혜망 2013년 1월 5일)

위의 사기극들을 종합해보면, 1999년 4·25 사건부터 2001년 1월의 ‘분신’ 조작 사건까지, 불과 22개월 동안 7가지 대규모 사기극이 펼쳐졌다. 평균 3개월마다 하나씩 새로운 계략을 내놓았는데, 이런 식으로 오랫동안 계획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원문발표: 2025년 4월 21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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