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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회고: 바른 믿음이 어둠을 이겨낼 수 있는 이유 (1)

글/ 원신(聞欣)

[밍후이왕] 동서고금을 통틀어 모든 바른 믿음은 박해를 겪었다. 잔혹한 박해는 신도들에게 신앙에 대한 시험이 됐다. 이런 시험이 합당했는지를 떠나서, 이러한 맹렬한 불길은 순금을 제련했고, 최종적으로는 어떠한 탄압도 바른 믿음을 견지한 사람의 성취를 막지 못했다. 믿음에 확고한 사람들은 또한 사회와 인심이 선(善)을 지향하도록 격려하고 이끌었으며, 바른 믿음은 생명의 진리를 추구하는 방식이자 영혼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임을 사람들에게 인식하게 했다.

바른 믿음은 왜 항상 어둠을 이겨낼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중국에서는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멸불(滅佛: 불교 소멸) 사건이 있었고, 서양에서는 기독교 박해가 3백 년간 지속됐다.

역사를 돌이켜 현실과 대조하면 사건의 맥락을 보아낼 수 있다.

‘삼무일종’의 불교 소멸

시호에 ‘무(武)’ 자가 있는 세 황제(북위의 태무제, 북주의 무제, 당나라의 무종)와 ‘종(宗)’ 자가 있는 황제(후주의 세종) 한 명이 역사상 네 차례의 법난(法難)을 일으켰으므로 이를 ‘삼무일종’ 법난이라고도 한다.

서기 438년, 북위(北魏)의 태무제(太武帝) 탁발도(拓跋燾)는 50세 이하 승려들에게 환속을 명해 병력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서기 446년 대신 최호(崔浩)는 모든 승려를 죽이고, 불경과 불상을 불태우라고 탁발도에게 진언했다. 탁발도는 칙령을 내려 불상과 불경을 불태우고 사원을 철거하고 승려들을 생매장했다.

서기 574년, 북주(北周)의 무제(武帝)는 불교와 도교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려 경서와 조각상을 모두 파괴했고 승려와 도사를 강제로 환속시켰다.

서기 845년(회창 5년)에 당나라 무종(武宗) 이염(李炎)은 서경(西京)인 장안(長安)에 사원을 4개만 남기되 각 사원에 승려 10명을 남기고, 동경(東京)인 낙양(洛陽)에는 사원 2개를 남기며, 나머지 절도사가 있는 34개 주도(州都)에 각각 사원 하나만 남기고, 자사(刺史)가 관할하는 주에는 사원을 남기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칙령에 따라 4천 6백여 개의 사원과 4만여 개의 소규모 절이 철거됐고, 대량의 불경을 불태웠으며 불상을 녹여 화폐를 주조하고, 26만여 명의 승려와 비구니를 강제 환속시켰다. 역사상 이를 ‘회창멸불(會昌滅佛)’로 칭한다.

서기 955년, 후주(後周)의 세종(世宗) 시영(柴榮)은 조서를 내려 임의 출가를 금지했고, 황제의 친필이 있는 사찰 외에는 각 현에 하나의 사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철거하게 했다. 승려의 조건에 엄격한 제한을 두어 반드시 일정 권 수 이상의 불경을 암송하고, 윗사람의 동의를 얻어야 출가할 수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범죄로 간주했다. 전국에서 총 3만 360개의 사찰을 철거하고 불상을 녹여 화폐를 주조했으며, 약 백만 명의 승려와 비구니를 강제 환속시켰다.

네 차례의 법난 가운데 가장 짧은 것은 8개월, 가장 길어도 6년을 넘지 않았다. 가장 심각한 박해는 첫 번째 법난에 발생했다. 이십사사(二十四史)의 ‘위서(魏書)’ 기록에 의하면 탁발도는 “젊든 늙든 승려를 모두 묻으라”, 즉 승려를 생매장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그러나 불교를 믿는 선비족 상류층의 보호로 승려 대부분이 도망쳤고 소수의 승려만 죽임을 당했다.

여러 시대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불가의 향선(向善: 선을 지향), 인과응보, 윤회 등 가르침은 수많은 중생을 감화시켰다. ‘삼무일종’의 각 조대 이후에 새로 들어선 조대는 기본적으로 모두 박해를 끝내고 불교를 회복시켰으며 불교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 방식 중 하나가 됐다.

고대 로마의 기독교 박해

기독교는 초기 3백 년 동안 잔인한 박해를 받았다.

로마 사학자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고대 로마 황제 네로는 로마에 고의로 불을 지른 다음 기독교도에게 죄를 전가했다.

네로는 적지 않은 기독교도를 경기장에 던져 넣어 맹수들에게 뜯어 먹히게 했다. 또 수많은 기독교인을 건초와 함께 묶여 횃불로 만들어 불태웠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도 대단히 잔인했다. 사학자 샤프는 “순교자의 시체가 거리에 가득 찼다. 시체들은 토막 나 불태워지고 남은 재는 강물에 뿌려졌다”고 묘사했다.

서기 250년, 왕위를 찬탈한 데키우스는 기독교도들이 반드시 정해진 회개일에 신앙을 포기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기독교도였던 정부 관리는 노예가 되거나 재산을 몰수당했고 확고한 사람들은 처형됐다.

서기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또 다른 칙령을 발표해 기독교에 대한 마지막 탄압을 시작했다. 기독교를 믿는 관리들을 처형하고 교회 재산을 몰수했으며, 성경을 소각하고 집회를 금지했다.

‘기독교사강(基督敎史綱)’에 따르면 300여 년 동안 10차례 큰 박해가 발생했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는 기독교의 광범위한 전파를 전혀 막지 못했고 갈수록 많은 사람이 순교자들의 정신에 감명을 받았다. 3백 년간 기독교도의 수는 급격히 증가했다. 서기 100년에 약 7천 5백 명이었던 기독교도가 2세기 말에는 로마시에 7천 명, 제국 전체에는 약 20만 명이었고, 서기 250년에는 약 백만 명이었으며, 서기 300년에는 이미 6백만 명이 됐고 전국에 1800여 개의 교회가 생겼다.

서기 313년, 콘스탄틴 황제는 기독교 교리가 이미 로마인들의 마음에 뿌리를 내린 것을 보고 하늘의 뜻에 따라 기독교 박해를 종식했다. 그때부터 기독교는 서양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 중 하나가 됐다.

보편적 가치가 된 신앙의 자유 

‘삼무일종’의 마지막 법난이 발생한 서기 955년으로부터 이미 천여 년이 흘렀고, 서기 303년 로마의 마지막 기독교 박해로부터 1700여 년이 흘렀다.

아무리 많은 고난을 겪더라도 진리에 대한 추구와 바른 믿음에 대한 확고함이 항상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정신적 지주였음이 오랜 역사를 통해 증명됐다.

근대에 이르러 신앙 자유는 마침내 보편적 가치가 됐다. 미국 ‘독립선언문’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나며 조물주는 그들에게 양도할 수 없는 일정한 권리를 부여했고, 그 속에는 생명권, 자유권과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포함되어 있다”라고 명시했다.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제36조도 표면적으로는 신앙 자유의 보호를 명시하고 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의 마음이 진정하게 행복하기는 몹시 어렵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과학을 믿으며, 물질을 숭배하는 사람은 재난이 닥치면 아주 쉽게 무너진다. 이는 그들의 가치관과 행복감이 물질과 권력에 기반했고, 이런 것들은 천재인화 앞에서는 흩날리는 모래와 뜬구름 같아 사람들에게 정신적 힘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가 21세기로 접어드는 시점에 장쩌민 집단과 중국공산당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신앙 박해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계속)

 

원문발표: 2022년 4월 26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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