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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혜망편: 리훙쯔 사부님께서 공을 전하며 설법하던 시절의 자그마한 이야기를 회상 (전집4)

글/동북 대법제자 왼루(缘路), 수련생정리

[명혜망 2004년 8월 3일] 1992년 봄, 중국 북방에서 사람들이 특별히 달리 보는(刮目相看) 기이한 공(功) 파룬궁(法輪功)이 출현했다. 파룬궁은 한 개의 빛을 뿜는 보배(明珠)와 같이 눈부신 광명으로 연공인의 마음속 먼지를 쓸어내고 수련대도의 밝은 등불을 밝혀 주었다. 파룬궁을 널리 전하고 중생을 구도하기 위하여 창시자인 리훙쯔 선생님은 고향을 멀리하고 북경, 산동, 태원 등 각지에서 법을 전하고 공을 전수하셨다.

배우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졌으나 당시에 정식으로 출판한 책도 없었다. 사부님께서는 원고를 써냈지만 돈이 없어 출판권마저 사지 못하셨다. 8천원(인민폐)을 꿔서 출판권을 사서 《/span>중국파룬궁을 출판하여 처음으로 각 지의 서점에서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연분이 있는 사람이 돈이 없어 사지 못하자 사부님께서는 돈을 받지 않고 책을 주었다. 책을 다 팔았으나 출판권을 산 밑천도 뽑지 못하였다. 법을 전하는 초기에는 아주 간고하였다. 제일 낮은 표준으로 돈을 받았는데 완전히 돈을 받지 않아도 안 된다. 장소를 빌리려면 돈이 들어야 하고 대행한 회사에서도 수속비를 받아서, 각종 비용을 지출하면 남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렇게 남은 적은 돈도 사부님께서는 한 푼도 쓰지 않으셨다. 완전히 각 보도소에서 전문인이 보관하게 하셨다. 이 돈의 용도에 대해서 사부님께서는 명확히 지적하셨는데, 이는 파룬궁 수련생이 헌납한 것이고 파룬궁에 대해 지지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파룬궁의 건설에만 써야 한다. 예를 들면 사부님의 딸이 학교에 가려고 시급히 돈이 필요할 때 월말이라 집에도 돈이 없어 사모님께서는 사부님께 5원을 꿨다. 사모님이 봉급을 타자 사부님께서는 5원을 받으면서 “대법의 돈은 전적으로 대법에만 사용한다(大法的钱,专款专用)”고 말씀하셨다.

사부님의 생활은 검소하여 간단한 층집에서 살았는데 겨울에도 난방설비가 없어 추운대로 지냈다. 집에는 텔레비젼 한 대만 있고 가구는 모두 80년대의 것이었다. 사부님께서는 딸에 대하여 아주 엄격히 요구하셔서 매월마다 100원의 생활비만 주었는데 그 중에는 학교에 다니는 비용을 포함한 것이었다. 한번은 여름 방학에 사모님께서 딸을 데리고 북경에 가니 사부님께서는 딸에게 2원짜리 신을 사 주셨다. 사부님 가족의 생활수준은 장춘에서도 제일 낮은 것이었다.

사부님께서는 어디를 가도 모두 친히 몸으로 교육하셨는데 제자들에게 모범을 수립하여 주셨다. 94년 말, 국내에서 전수반이 끝나자 95년부터 국외에 가서 법을 전하고 공을 전수하여 중생을 구도하셨는데 대법의 홍전(洪傳)으로 이미 60여 개 국가와 지역의 사람들이 법을 얻고 수익(受益)을 보았다.

1995년 초여름, 사부님께서 국내에서 법을 전수할 때 남은 돈을 모두 설법 비디오테이프를 만들어 전국 각지 보도소에 주셨다. 당시의 전국 보도소는 천여 곳이나 되었는데 이 테이프로 법과 공을 전수했다. 몇 년 후 억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법을 얻고 수혜를 보았으며 심신이 건강해지고 도덕이 되돌아 승화하였으며 정신문명과 사상소질이 신속히 제고되었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다. 사부님께서는 국가, 국민, 인류를 위해 말로써는 형용할 수 없는 크나큰 공덕, 공덕이 무량한 일을 하셨다(无量功德、功德无量).

청백을 인간에 남기다 (2)

글/동북 대법제자 왼루(缘路), 수련생정리

[명혜망 2004년 8월 4일] 1992년 봄, 사부님께서는 전국 각지에서 설법하고 공을 전수하기 시작하셨다. 매번 설법하실 때마다 사부님께서는 수련생들에게 교육하시기를 “파룬궁 수련은 직지인심(直指人心)이며, ‘쩐․싼․런(真、善、忍)’을 동시에 수련한다. 수련자는 ‘명․리․정’을 담담히 하고 덕으로 공을 연화한다. 착실히 수련을 견지하고 심성을 지킨다.” 등을 간곡하게 말씀하셨다. 파룬궁은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어 공이 빨리 자란다. 왜냐하면 매개 수련생 몸에는 모두 사부님께서 넣어 주신 파룬(法輪)과 치지(气机)、기제(机制) 등 수련계통이 있다. 이것은 돈으로 사지 못하는 둘도 없는 보배이다!(无价之宝). 이러하기 때문에 파룬궁은 무수한 연분이 있는 사람들을 잇따라 수련의 문에 들어서게 하였다. 내가 바로 많고 많은 진실한 신기한 일들을 직접 보고 들은 연분이 있는 수련자 중의 한 사람이다. 과거에 사부님께서 훌륭한 기술로 건강을 되찾아 주시고, 허다한 병이 위독한 수련생들을 기사회생(起死回生)하게 한, 하나하나의 사람을 깊이 감동시키는 장면들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사부님께서 설법하시고 공을 전수하실 때 매우 힘드셨다. 왜냐하면 당초에 학습반에 참가하는 대다수는 병이 있으며,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학습반에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리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좋다는 것을 알았고 도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즐겨 들었다. 매 번마다 몸에 큰 변화가 발생하였는바 병이 없어지고 몸이 가벼움을 느꼈으며 이득이 아주 컸다. 그러므로 사부님께서 어디에 가서 학습반을 꾸리시든지 늘 많은 수련생들이 따라다니면서 들었다. 마지막에 와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리를 깨달았을 때,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히 하던 데로부터 진정한 수련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나의 친척은 장춘시에 살고 있으며 사부님과 같은 지역에 있었다. 친척은 92년 여름에 창자가 달라붙어 병원에 입원하였다. 의사가 말하기를 “수술하면 수술대에서 내려오기 힘들다(왜냐하면 전에 두 번이나 수술하였다).”고 하였다. 약을 써도 효과가 없고 다른 치료 방법이라고는 없어 죽기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집사람이 조급하여 도처로 다니며 치료방법을 구했다. 그의 직장의 파룬궁 수련생이 알려주기를 “우리 장춘에 대기공사가 계시는데 이 대사님께서 한창 학습반을 꾸려 설법하고 공을 전수하고 있다. 학습반에서 많은 수련생들의 고치기 어려운 병과 위중한 병이 이 대사님의 손을 거쳐 신체가 정화된 후, 신기하게도 다 나았다. 지금 4기 학습반이 끝났고 며칠 후면 북경에 간다.” 친척이 들은 후 이 수련생에게 이 대사님께 한번 봐주게 해달라고 졸랐다. 이 수련생이 사부님께 이야기한 후 사부님께서는 환자가 사부님 집에 오는 것을 동의하셨다.

친척이 걷지도 못하는 병자를 택시에 태워 사부님 댁에 왔다. 사부님께서는 매우 열정적으로 병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편으로는 창문을 열고 손으로 환자의 병이 있는 곳을 한번 잡은 후 창문 밖으로 던졌다. 그리고 나서 사부님께서는 과일접시를 들고 들어오시면서 바나나 한 개를 병자에게 주면서 먹으라고 하셨다. 병자가 “감히 먹지 못합니다. 이미 7일 동안 아무것도 안 먹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수련생이 “사부님께서 먹으라고 하면 당신은 먹어요. 겁내지 마세요.”라고 말하였다. 환자는 하나를 먹었는데 아프지 않았다. 또 하나를 먹어도 아프지 않았다. 이때에야 친척의 아내가 깨달아 급히 꿇어앉아 절하면서 사부님의 생명을 구해준 은혜에 감사를 표시하였다. 사부님께서 친척의 아내를 일으켰다. 친척이 사부님께 돈을 드려 감사를 표시하자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한 푼의 돈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집에 가서 연공을 많이 하세요.” 집에 돌아간 후, 환자는 식사가 모두 정상이었고 걸을 수도 있었고 자전거도 탈 수 있었다. 은사님께 감격하는 마음으로 친척의 집안식구들이 모두 사부님의 장춘에서의 5기 설법전수반에 참가하였다. 한 차례의 학습반을 거쳐 심신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고 세계관 역시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후에 이 수련생은 온 몸과 마음을 사부님을 도와 법을 널리 전하고, 연분 있는 사람을 구도하며 법을 얻어 이득을 얻게 하는데 투입하였으며 무료로 대법서적을 보내주어 고향의 많은 사람들이 법을 얻게끔 이끌었다. 수련의 길에서 대법을 확고히 믿고 사부님을 확고히 믿었다. 사부님 따라 대법 중에서 수련하면서 사부님께서 생명을 구원해 주시고 제도해 주신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다.

1993년 6월, 사부님께서 장춘으로 돌아와 제6기 학습반을 꾸렸다. 나의 이 친척이 여동생을 외지에서 장춘으로 데리고 와서 이번 학습반에 참가하려고 준비하였다. 여동생이 심근막(心肌膜)이 탈락하여 길을 걷기가 아주 곤란하였다. 또 회사의 그 수련생이 사부님께 그 여동생이 학습반에 참가하기 곤란한 정황을 소개하였다. 학습반을 꾸리기 하루 전 사부님께서 친히 택시를 타고 나의 친척집에 도착하여 여동생의 신체를 정화시켜 주어 스스로 걸을 수 있게끔 하였다. 병원에서 심근막을 바꾸려면 몇십만 위안의 돈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부님께서 신기하게 치료하니 친척의 집사람들은 경탄해 마지않았다. 사부님께서 미소를 지으시면서 친척에게 말씀하시기를 “믿지 못하면 병원에 가서 검사해 보세요.” 너무나 놀라고 감격한 감정으로 친척의 여동생이 병원에 가서 검사하였다. 심근막은 보충되어 있었고 일체는 정상적이었다. 그 후에 친척이 걸을 수 있는 여동생을 데리고 사부님의 설법 학습반에 참가하였다. 10일 학습반이 끝나자 몸의 병증은 전부 없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후 생활을 자립할 수 있었고 간단한 집안일도 할 수 있었다. 한 장의 입장권이 10여 만 위안의 돈을 절약하였고 환자는 어떠한 고통도 없었고 신기하게 좋아졌다. 이 일을 통해 여동생의 친척과 친구들이 찬탄을 하면서 “파룬궁은 너무나 신기하다!” 잇따라 표시하기를 기회가 있으면 이 대사님의 설법을 듣고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겠다. 후에 정말로 ‘깨달음’이란 경문 “과연 연분(緣分)이 있고 능히 깨닫는 자들이 잇따라 모여 와서 입도(入道)하여 법을 얻노라.”와 같이 많은 사람이 수련의 길을 걷게 되었다.

92년부터 93년 말까지 사부님께서는 북경에서 ‘동방건강 박람회’에 참가하시어 회의기간 동안 연분이 있는 지사들의 신체를 조절해주고 병을 치료해 주시면서 사회에 파룬궁을 보급하셨다. 친척이 소식을 듣고 옆집의 암 환자와 친구들을 데리고 북경에 와서 출판사의 주소만 가지고 북경에서 한 주일 찾은 후에야 스좌좡(左家庄) 회의 장소를 찾았다.


93
년 북경동방건강박람회에서 리훙쯔 선생님은 박람회 최고상인 주변과학진보상과 대회의 특별금상’, 아울러 군중에게 환영 받는 기공사란 호칭까지 얻으셨다. 이 박람회에서 리훙쯔 선생님은 가장 많은 영예를 누린 기공사였다.

사부님께서 박람회 기간 많은 기적을 창조하셨다. 예를 들면 고향에 암에 걸린 이 친구는 이미 걷지도 못하여 집 식구들이 들어서 회의 장소에 들어왔다. 사부님께서 신체를 조절하고 청리하고 정화(淨化)한 후에 즉시 신기하게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또 한 분이 있는데 차를 타다가 급정거하여 넘어져 장애인이 된 북경 여성 쑨보룽(孙宝荣)은 병원에서 1년을 누워있었는데 집 식구들이 업고 회의 장소에 왔다. 사부님께서 그녀를 조절한 후 신기하게 자리에서 일어섰으며 길도 걸을 수 있었다. 이로부터 사부님께서 어디에서 학습반을 꾸리든지 막론하고 그녀는 빠지지 않고 따라다니면서 들었다. 사부님께서 장춘에서 7기 학습반을 꾸릴 때, 나는 만났는데 그녀의 신체는 건강하였고 아주 젊어 보였다.

또 한 남자 수련생이 있었다. 30여 세인데 허리가 90도로 굽었다. 사부님께서 현장에서 그의 신체를 조절하였는데 등골뼈가 탁탁하고 소리 나더니 천천히 허리를 펴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이 되였다. 사부님의 법력과 공력은 신기하기로 비할 바 없었다. 이렇게 위중한 병자, 고치기 어려운 환자도 박람회기간에 치료되는 것이 무수히 많아 광대한 군중의 호평을 받았다. 그러므로 93년 동방건강박람회 기간 최고상장인 주변과학진보상과 군중이 환영하는 기공사의 칭호를 수여 받았다. 사부님께서는 제2회 보고회의 수입 전부를 중화견의용위기금회(中华见义勇为基金会)에 기부하셨다.


1993
1227일 공안부 소속 중화견의용위기금회가 리훙쯔 선생님께 수여한 영예증서

벌써 10년이 지났다. 내가 겪은 매 한 건, 매 한 가지 일들은 기억이 생생하다. 사부님께서 자비롭게 중생을 구도하시고 인연 있는 매 한 사람을 보호해 주시며 정말로 너무나 많은 것을 주셨다. 그렇지만 사부님께서는 수련생들에게 한 점의 보답도 요구하지 않으시고 단지 제자들의 하나의 수련하는 마음만 요구하시며 우리를 구제하고 보호하여 매 일보를 잘 걷게 하셨다. 비록 수련의 길에서 우리가 광풍과 거센 파도를 만났지만, 모두 사부님을 바짝 따라 집으로 돌아가려는 결심을 동요시키지 못했으며 신념을 더욱 더 확고하게 했다.

청백을 인간에 남기다 (3)

글/동북 대법제자 왼루(缘路), 수련생정리

[명혜망 2004년 8월 5일] 1994년 봄 나는 기쁘게 파룬따파(法輪大法)와 인연을 맺었다. 나는 행운이 있어 사부님께서 꾸린 장춘 7기 학습반에 참가하였다. 학습반에 참가하는 인원수가 특별히 많아 3천여 명이 나 되어 학습반을 낮과 밤으로 꾸렸는데 10일간이었다.

첫날 우리는 무궤도 전차를 타고 회의 장소를 가다가 중도에서 정전이 되어 우리는 차에서 내려 도보로 걸었다. 대략 3km를 걸어야 회의 장소인 길림대학에 도착할 수 있다. 시간이 긴박하여 우리는 늦게 도착할 것을 고려해 다급히 길을 걸었다. 그중 경추증생(颈椎增生)으로 뇌신경이 압박당해 머리가 아픈 한 환자는 장춘에 온 지 한 달이 넘었고 병원에서 천여 원을 써도 치료하지 못했는데 돈도 다 써버렸다. 이번에 사부님께서 전수반을 꾸린다하여 따라왔다. 말하자면 아주 신기하다. 머리가 아파 참지 못하는 이 환자는 여러 사람과 함께 빠른 걸음을 걸었고 머리도 아프지 않았다. 일체 적응되지 않던 증세도 모두 없어졌는데 회의 장소에 들어선 후에는 다 좋아졌다. 원래는 사부님께서 이미 몸을 조절하여 주신 것이었다. 열 번째의 강의를 듣고 완전히 건강한 사람과 같았다.

학습반에서 매번 휴식 시간에 우리 일부 수련생들은 사부님 주변에 둘러서서 사부님을 보았다. 사부님의 기질은 비범하여 다른 사람과 달랐다. 몸에는 회색 나는 양복을 입으시고 흰 적삼에 특별히 젊어 보였다. 사부님께서는 언제나 미소로 수련생들과 말씀하셨다. 매번 강의가 끝나도 우리는 오랫동안 나가기 싫어했다. 언제나 사부님의 주변에 더 있고 싶어 하였고 사부님을 한 번 더 보려고 하였다. 매 번마다 사부님께서 차에 오르셔야 우리는 그제야 회의 장소를 떠났다.

5월 1일 오후, 주최한 회사는 수련생들의 요구로 사부님과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고 사부님께서는 흔쾌히 대답하셨다. 매 개 지역의 수련생이 순서대로 서자 사부님께서는 한 조, 한 조씩 우리와 사진을 찍었다. 빈허(滨河)지역의 그 조와 찍을 때 한 60여 세의 수련생은 흰머리였다. 그가 앞자리의 작은 의자에 앉아있자 사부님께서 다가와서 왜 의자에 앉아 있는가 하고 물었다. 그 수련생이 서 있지를 못한다고 말하자 사부님께서는 뒤에 가 서라고 하였다. 사진을 다 찍은 후 사부님께서 걸어와 그 수련생과 손을 잡으면서 그보고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였으나 그 수련생이 깨닫지 못하자 그의 아내가 지팡이를 던져버렸다. 사부님께서는 그보고 앞에서 걸으라고 하여 그는 어린 아이와도 같이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 디디고 웃으면서 그 장소를 몇 바퀴 돌았다. 그날부터 다시는 지팡이를 쓰지 않았다. 매일 자기 스스로 회의 장소에 왔고 생활도 자립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너무나 많았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생각에, 내가 공을 전하고 설법하는 것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장래에 당신은 알게 될 텐데, 당신은 이 시간이 매우 보람찼다고 여길 것이다.” 그렇다! 이러한 평범하지 않은 경력이 있기 때문에 나는 사부님의 자비로 중생을 고생스럽게 구도하는 것과, 위대한 인격과 공적, 각자의 흉금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잊지 못할 경험은 수련의 길에서 용맹정진하도록 부단히 격려하였고 나의 매 한 발자국을 잘 걸어 사전의 염원(大願)을 완성하기를 격려한다.

청백을 인간에 남기다 (4)

글/동북 대법제자 왼루(缘路), 수련생정리

[명혜망 2004년 8월 6일] 기억하라! 뼈에 새기고 마음에 새기다! 1998년7월 26일이었다. 나는 보도원이며 노수련생의 신분으로서 특별히 영광스럽게도 사존의 《/span>장춘 보도원법회에서의 설법에 참가하였다. 사존의 보도원과 노수련생에게 대한 기대와 무한히 깊은 가르침을 직접 들었다. 나는 그때로부터 수련의 길에서 자기를 잘 수련할 뿐만 아니라 더욱이 나의 책임이 중대함을 느꼈다. 매번 《/span>장춘 보도원 법회에서의 설법을 볼 때마다 심금을 울리는 장면들을 잊을 수 없다. 그럴 때마다 귀에는 사부님의 가르침이 떠오르고 언제나 뜨거운 눈물을 흘리곤 한다.

회의 장소는 장춘 샹그리라(香格里拉) 국제식당의 강당이었다. 26일 오후 법회에 참가하는 수련생들이 4면 8방에서 속속 입장하였다. 우리는 순서대로 제일 먼저 입장하였다. 내가 대청 예배당에 들어서니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주석대 앞과 주위의 아름다은 꽃들이고 회의 장소는 장엄(肃穆)하고 온화하며 상서로워 이전의 다른 법회와 달랐다. 당시 나의 머리에는 ‘부처님이 오셨다. 아름다운 꽃은 부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내가 격동되어 옆의 동수에게 “사부님께서 친히 회의장소에 오신다.”고 말하자 옆의 수련생은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는 이미 미국에 정착하고 계셨고 이번 법회의 내용은 누구도 몰랐다.) 내가 “기다려봐! 내 말이 맞을거야! 꼭 그럴거야!” 입장이 끝나자 회의장은 아주 조용해졌는데 빈자리라고는 없었다. 우리는 조용히 기다렸다.

다섯 시 정각이었다. 자비로우신 사부님께서 갑자기 입장하는 문어귀에 모습을 드러내시자 동시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부님께서는 얼굴에 상화한 미소를 띄시고 온건한 걸음으로 법회장에 들어오셨다. 사부님께서 지나시는 양쪽의 수련생들은 사부님과 분분히 악수하고 사부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제자들은 동시에 허스하여 사부님께 불가의 예를 올렸다. 어떤 수련생들은 사부님께 아름다운 꽃을 드렸다. 사부님께서 강의대에 오르시어 단수입장하시며 수련생들과 제자들에게 인사를 하셨다. 긴 박수소리가 끝난 후 사부님께서는 수련생들에게 앉으라고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사부님을 똑똑히 보려고 하는 제자들의 심정을 아시고 자리를 높이어 앉으셨다. 우리는 비할 바 없는 존경과 기쁜 심정으로 정신을 집중하여 사부님의 매 한마디 말씀을 가슴깊이 새겨들었다.

나에게 감촉이 제일 큰 것은 “이 자리의 보도원․노수련생 당신들은 허다하게 당신들이 아직 인식하지 못한 위대한 일을 했는데 진정으로 위대한 일이다.”, “당신들이 느끼기에 당신들이 한 일이 마치 비교적 간단하고 또한 속인의 영도의 일처럼 일부 보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당신들은 완전히 모두 자신의 열정과 대법에 대한 인식에 의거하여 하고 있는데 보아하니 간단하며 천지를 놀라게 하는 어떤 일이 없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에게 알려주는데 속인 이 쪽에서의 표현이 평범한 것일수록 아마 당신들은 보지 못할 것이고 당신들이 수련한 이 경지 중에서의 표현은 오히려 정말로 굉장한 것이다. (박수소리) 다시 말하여 당신들은 당신들의 일을 그렇게 간단하게 보지 말아야 한다. 당신들이 기왕 이 일을 하였으므로 그것을 잘해야 한다. 왜냐하면 고층 생명도 나와 항상 말하는바 당신들이 여기에서 대법을 위하여 공헌을 할 수 있는 이것은 당신들 장래의 생명이 상당히 긴 이후의 역사시기에 하나의 아주 좋은 기초를 다졌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들었을 때 한가닥 뜨거운 기류가 전신을 통과하고 나의 보도원 일의 신성한 책임감을 불러 일으켰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때 사람의 협애한 관념으로 사람을 대하고 일처리를 하기도 하였다. 어떤 모순에 부딪치면 심성을 지키지 못하고 사존께서 요구하신 대선(大善), 대인(大忍)으로 하지 못하였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흔히 우리 수련 중에서도 어떤 요란한 것이 없으며, 모두 속인의 각종 모순의 표현 중에서 우리의 心性(씬씽)을 연마(魔煉)한다.”(창춘보도원법회 설법) 그러므로 나는 이 몇 년간 사부님의 가르침대로 일하고자 노력하였다.

법회중간 10여 분 휴식시간에 제자들이 사존 주위를 둘러싸고 사부님께 수련 중에 부딪친 각종 각양의 문제를 물었다. 사부님께서는 시종 미소를 띄시며 끈기있게 해답해 주셨다. 법회는 5시간이나 하였으나 수련생들은 그래도 더 듣고 싶어 하였다. 이미 밤10시였지만 제자들은 피곤하지도 배고픈 줄도 몰랐다. 법회가 결속되고 수련생들과 제자들은 아쉽게 사부님을 배웅하였고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했다. 모두 행복과 기쁨 속에 잠겨 있었다. 후에 주최한 제자의 말을 들어보니 이번 법회를 연 강당을 빌린 비용은 사부님이 내셨고 수련생과 제자들의 돈은 한 푼도 쓰지 않았다고 하였다.

신주대지(江南塞北)를 진동한 성회, 창춘 파룬따파 서화·사진 작품전을 회상하다

글/랴오베이 대법제자

[밍후이왕] 1997년 음력 4월 초파일, 이날은 우리 지역 대법제자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이날은 은사(恩師)께서 법을 전수한 지 5주년 되는 날이며 또한 은사님의 인간 세상 46세 탄신 기념일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사부님의 고향 창춘 난링 체육관에서 고금중외에도 없었던 천상인간(天上人間)의 홍법성회 ‘창춘 파룬따파(法輪大法) 서화·사진 작품전’이 개최됐다. 아래에 참관 과정에서 몇 가지 잊을 수 없는 장면을 서술해보려 한다.

은사님의 탄신일 아침부터 점심까지 봄비가 잔잔하게 내려 만물이 생기가 넘쳤고 풀꽃들은 감로수를 마음껏 마시고 향기를 뿜어내며 다소곳이 머리를 숙여 은혜를 내려주신 것에 예를 다했다. 이 전에 오랜 가뭄으로 동북지역은 모래바람으로 해가 가려졌고 묘목이 말라갔으며 산천수목은 생기가 없었다.

우리 지역의 대법제자는 새벽에 일어나 버스로 랴오베이에서 창춘으로 달렸다. 체육관으로 가는 길이 익숙하지 않았던 기사가 방향을 잃었다. 사람들이 조급해할 때 팀을 이끌고 있던 보도원이 조용히 사부님께 도움을 청했다. 신기한 일이 갑자기 나타났다. 차 앞에 금빛으로 빛나는 큰 파룬이 나타나 방향을 이끌어가며 체육관 앞에 도착해서야 사라졌다.

도착하니 황하 이남으로부터 만리장성 이북에서, 그리고 홍콩, 마카오, 대만 지역에서 온 대법제자가 4줄로 길게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 날은 열흘 동안 열리는 작품전에서 세 번째 날이며 매일 만 명만 수용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인파를 따라 가운데 홀에 들어섰다. 자비로운 대법음악으로 삽시간에 인간 세상의 번뇌가 씻겨졌으며 마치 명예와 이익을 다투는 홍진세상에서 초탈한 것 같았다. 홀의 정면에 2m 높이의 사존의 법상이 모셔졌고 앞에 가지각색으로 활짝 핀 생화가 놓였으며 배경은 사철 푸른 송백이었다. 우리는 사존의 법상 앞에서 단체 사진촬영을 했다.(이 사진은 나중에 여러 차례 가택수색으로 잃어버렸다) 측면에는 상전하는 파룬 모형이 있었다. 이어서 8개 전시실이 펼쳐지는데 만여 명이 참관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전시실은 넓고 장엄했다. 이 전시실은 ‘진선인(真善忍)’을 주제로 설계됐고 ‘진선인’이 반짝반짝 빛났다. 네 벽면에는 감사 깃발이 가득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 감사 깃발은 모두 수련생이 직접 자수하여 사부님께 삼가 드리는 것으로 깃발에는 사부님의 시구와 은사님이 사람을 제도하고 법을 전한 것에 대해 칭송하는 좋은 글귀가 새겨졌다.

이어서 몇 개 전시실은 서예, 회화, 수공예로 제작한 현판, 전각, 민간공예품, 각종 활동사진, 컴퓨터로 설계한 작품 등이 전시되었으며 격식에 구애되지 않았다.

체계적으로 진실하게 제자들의 순정한 경법(敬法) 경지가 드러났다. 그중 몇 폭의 그림은 대법제자가 천목으로 본 기이함을 그린 작품이었다. 한 폭의 그림은 다른 공간의 금빛 찬란한 누대와 전각(殿閣)으로, 작은 다리는 깊은 곳으로 통했고, 들쭉날쭉한 정자와 누대에 지은 집은 운치가 있었으며, 물을 머금은 듯 짙푸른 기이한 꽃들과 나무가 있었고, 수승하고 신기한 경물로 보는 사람이 선경(仙境)에 들어선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앞쪽에는 많은 사람이 가부좌했고 위에는 사부님께서 다른 공간에서 법신과 꿍선(功身)의 모습을 한 세 폭의 그림이 걸렸다. 모두 사람의 키 높이였으며 이 역시 대법제자가 천목으로 본 것을 컴퓨터로 제작한 것이다. 이곳의 에너지 마당이 가장 강했고 많은 사람은 이 전시실에서 사존의 법신과 여러 그림에 그려진 사부님의 손에서 파룬이 나와서 제자들의 신체를 조절해주는 것을 보았다. 이곳에서도 많은 신기한 일이 발생했다. 다리에 중상을 입은 사람이 쌍지팡이를 짚고 들어왔는데 나갈 때는 저도 모르게 쌍지팡이를 버리고 걸어서 자유롭게 나갔다.

스토리로 엮어진 그림 전시실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고 그림마다 정진(精進)토록 했다. 제자가 고비를 넘는 이야기, 자신의 수련 체험과 결심을 나타낸 그림, ‘진선인’ 수련을 통해 좋지 않은 습관을 버린 과정, 다른 공간의 교란과 자신의 마성(魔性)을 이겨낸 그림 등으로 다양했다.

우리 지역의 수련생이 삼가 드린 ‘천제(天梯, 하늘에 오르는 사다리)’ 그림은 더욱 깊이 음미할 가치가 있었다. 그림에서 사다리는 삼계 밖으로 직통했고 한 수련자가 일 층으로부터 위로 등반하는데 한 층차 오를 때마다 신체 색상이 바뀌었다. 적등황록청남자 유색무색으로 삼계 밖까지 나가는 이 그림은 하늘로 오르는 수련 과정의 어려움을 나타냈고 또 수련의 앞길은 찬란하여 노력해 등반하도록 하며 끊임없이 정진토록 한다.

이와 대응되는 한 폭의 그림의 대체적인 뜻은 한 수련인이 큰 산을 마주하고 탄식을 하는데, 이 산은 구름을 꿰뚫고 높이 솟았으며 사람이 도저히 넘을 수 없을 정도였으나 사부님께서 갑자기 큰 산을 절반 정도 깎아 버렸으나 하지만 어찌해도 여전히 넘을 수 없자 사부님께서 또 큰 산을 나누어 수련 과정의 고비의 장애물로 변화시켜 제자가 마침내 기쁘게 한고비 한고비 수련의 길에서 전진하는 이야기다. 보고 나서 정말로 깊은 사색에 빠지게 하며 사람에게 깨달음을 줬으며 은사님이 모든 마음으로 고심하여 제도한 것에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었다.

또 한 폭의 그림 ‘마음(心)’은 수련인이 닦아 버려야 할 각종 마음을 보여줘 전시회에서 호평을 받았고 수련생들의 칭찬도 받았다.

마지막 전시실은 서예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대법제자에게 제공한 공간인데 현장에는 필묵과 종이, 다양한 물감들로 모든 게 갖춰졌다. 몇 명의 저명한 노년 서예가들이 현장에서 여러 가지 서체로 ‘진선인’과 ‘경문’의 시구를 썼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이 몇 명의 노년 서예가들은 이번 홍법 전시회를 앞장 서 이끈 사람들이었고 사심 없이 대회에 작품을 바쳤다고 한다. 그들은 지린성 대법제자의 소원을 성사시켰다.

출구에 방명록이 있었다. 많은 수련생과 제자들은 폐부에서 우러나오는 글, 사부님의 제도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라고 남겼다. 이번 전시회를 위해 창춘 대법제자는 연속 7일 동안 밤낮없이 준비했고 그 과정에도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어느 날 깊은 밤, 모두 배고팠는데 즉시 옆에 많은 음식과 음료 등이 놓인 것을 발견하고 함께 배불리 먹은 후 서로 음식이 어디에서 생긴 것인지 물었다. 깊은 밤이어서 누구도 현장에서 떠나지 않았으나 음식은 정말 하늘에서 떨어졌고, 나중에 인근의 매점 사장(수련하지 않음)이 보내주신 것으로 추측하고 그에게 음식값을 지불하려 했는데 사장이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 사부님이 산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 일은 여전히 설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창춘 파룬따파 서화·사진 작품전은 10일간 열리면서 삼산오악을 진동했고 천상과 인간 세상을 놀라게 했다. 참관한 속인 중에 일부는 그때 수련의 길에 들어섰고, 어떤 사람은 연분을 맺었다. 과거에 정진하지 않은 수련생은 이로써 분발하여 향상했고, 법리에 의심하는 태도를 가졌던 수련생은 이로써 대법을 확고히 믿었으며, 전시회에 참관한 사람마다 각기 다른 격려를 받아, 오늘의 반박해, 진상을 똑똑히 알리는데 확고한 기초를 다졌다. 정말로 사부님의 경문 ‘사부를 모시다(拜師)’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았다. “대법(大法)을 널리 전하니, 소문을 들은 자는 찾고, 얻은 자는 기뻐하는바, 수련자가 날로 많아져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오늘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홍법의 장을 펼치면서 정신이 진작됐고 우리에 대한 격려와 스스로에 대한 격려가 된 것 같다. 넘어진 수련생은 어서 일어나고, 길 잃은 수련생은 하루빨리 기로에서 돌파하여 더는 방황하지 말며, 제한된 시간을 다그쳐 사부님의 정법을 따라 새로운 심신 상태로 법정인간의 도래를 맞이하길 바란다.

사부님의 광저우 설법반에서의 나날을 회상하다

[밍후이왕] 나는 십여 세에 왜 2,500년 전 고대 인도에서 태어나 불법(佛法)을 직접 만나지 못했을까, 지금의 모든 일체는 삼계를 벗어날 수 없으니 그렇다면 계속 이렇게 육도윤회만 해야 하는가 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1994년 11월 중순 ‘파룬궁(法輪功)’(수정본)을 읽었는데 월말에 누군가 사부님께서 광저우에서 설법반을 개최하신다고 알려주면서 참가 여부를 물었다. 나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급히 참가하겠다고 말했다. 그 당시 어렴풋한 느낌으로 이것이 나의 미래에 매우 중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94년 12월 사부님께서 광저우에서 설법반을 개최하기 며칠 전 우리 일행은 광저우에 도착했다. 그때 모든 호텔과 여관에 빈 객실이 없어서 우리 네 명은 숙박할 수 있는 작은 방 하나를 얻었다. 아래 위층으로 침대 2개인데 한 침대에 2명이 자야했으나 우리는 이런 정도에도 매우 만족했다.

우리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학습반이 열리는 장소로 이동했다. 그 며칠, 광저우 전체는 상화로운 분위기에 감싸였다. 사부님께서 설법을 시작해서 며칠은 전체 체육관 내는 어렴풋했으나 며칠 후 특별히 청량하게 밝아졌고 투명도가 특별히 높았다. 사부님께서는 일부 원인으로 학습반 개최일이 계획보다 며칠 늦어졌다며 우루무치, 베이징, 동북에서 온 수련생은 도착해서 수일이 지나서 남은 돈도 얼마 남지 않아 어떤 사람은 라면만 먹고 있다면서 이번 설법반을 며칠 단축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나는 사부님의 뒷면에 앉아 뒷모습만 볼 수 있었는데 사부님께서 늘 머리를 뒤로 돌려 “뒤에 앉은 사람도 빠뜨리지 않을 것이며 뒷면에 앉은 사람은 나와 좀 더 가깝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일부 수련생은 입장권을 구매할 수 없어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관련 스태프와 논의하여 그들 중 일부는 체육관에 입장해 바닥에 앉거나 통로에 앉아서 설법을 들었고 일부는 부회의장에서 영상으로 시청했는데 사부님께서 특별히 그들을 보러 가셨었다.

매일 사부님께서 회의장에 입장하실 때마다 수련생들은 언제나 뜨거운 박수로 환영했으며 마지막 설법날 설법을 마치고 수련생들의 질문에 해답해주셨다. 그리고 수련생들이 사부님께 생화, 감사 깃발을 드렸다. 그 장면은 매우 상화로웠고 매우 좋아 형용할 방법이 없었다. 사부님께서 떠나시면서 출구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다시 장내로 돌아오시어 공중에서 큰 파룬을 회전시켜 수련생들에게 주셨다. 그때 수련생들은 이번이 마지막 설법반인 줄을 몰랐다.

이 나날을 회상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매우 행복감을 느끼며 법광에 녹아든 감수는 정말로 그러했다. “미묘하기 그지없어 형언키 어렵나니”(홍음-파룬쓰제)

사존의 가르침

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1994년 4월 대련 제1회 학습반에서 사부님께서는 “대련 보도소 소장에 가오츄쥐(高秋菊)를 임명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학습반이 열린 기간 중, 대련시 기공협회의 요청으로 여유시간을 이용해 사부님과 함께 빈하이로(濱海路), 라오후탄(老虎灘) 등 해변경치를 유람했다.

유람에 동참했던 가오츄쥐가 한 쪽에서 천목이 열린 기공협회 사람과 흥분해서 말했다. “저쪽을 보세요, 용이 물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신녀(神女)가 용의 코를 꿰어 끌고 따라오고 있습니다. 하늘에는 또 많은 보물들이 있습니다…….” 츄쥐는 옆에서 사진을 촬영하며 즐겁게 말했다. “이는 저의 사부님을 환영하러 온 것입니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으신 사부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고 조용히 해변 백사장에 시 한 줄을 쓰셨다. “공능은 본디 작은 재간이요 대법만이 근본이로다(功能本小術大法是根本)”

사부님께서 지난(濟南)에서 설법하실 때의 몇 가지 이야기

[명혜망 2004년 9월 27일] 1994년 6월 21일, 나는 다행스럽게도 지난 황팅(濟南皇亭) 체육관에서 사부님께서 설법하시는 것을 경청할 수 있었다. 나는 잊을 수 없는 그날을 회상하면서 깊은 감회와 동수들이 알려준 일부 정경들을 써내려고 한다.

1. 고생은 자신이 감당하시고 자비를 수련생들에게 보내주시다.

강의를 시작한 이틀째 되던 날 오후, 사부님께서는 수련생들과 함께 황팅체육관에서 사진을 찍으셨다. 사진을 찍는데 두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하나는 그날이 하지(夏至)라 날씨가 너무 더운 것이었다. 지난은 너무 무더워 불가마라고 소문이 난 곳으로, 그날 예상 기온은 37도였는데, 오후 제일 무더울 때 사진촬영을 했을 뿐만 아니라 마당 안의 햇볕에 지지는 듯한 콘크리트 계단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과거 기타 기공반에서는 일반적으로 백 명에서 이백 명, 적으면 몇십 명 정도밖에 안 되어도 한 번 사진을 찍으려면 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나마 빨리 사진을 찍어야만 한 시간 내에 끝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몇천 명이나 되는 인원이었다. 저녁에는 사부님께서 설법을 하셔야 하는데 남은 시간이 겨우 네 시간도 안 되었다. 그러니 회의를 돕는 수련생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한단 말인가?

이때 사람들 앞에 커다란 모습이 나타났다. 바로 사부님의 모습이었다. 사부님께서는 여러 사람들이 줄서는 것을 지휘하고 계셨다. 사람이 많아 통제도 잘 안 되고 시간이 긴박한 상황이었지만 사부님께서는 확성기조차 사용하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큰소리도 내지 않으셨다. 다만, 쉴 새 없이 수신호로 사람들을 좌우 전후로 이동하게 하였다. 그 당시 나는 사부님을 어찌 저런 일을 하도록 배치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설법을 하러 오셨고 국가적으로 여러 차례 검증하여 표창을 받고 승인을 받은 초고급 대사라 할 수 있는데, 원칙대로라면 함께 사진을 찍을 때 사부님께서는 응당 전문가들이 계시는 에어컨과 음료와 빈틈없는 서비스가 있는 곳에 계시다가 여러 사람들이 줄을 다 섰을 때까지 기다려 중간 빈자리에 오셔서 앉으시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찌는 날씨에 사람을 태울듯한 콘크리트 계단의 열기 속에서, 사부님께서는 땀에 흠뻑 젖은 여러 사람들을 지휘하여 줄을 잘 서게 했다. 그리하여 빠른 지휘 하에 단번에 사진을 찍어 나갈 수 있었다. 그런 다음 사부님께서는 “다음 팀도 빨리 찍읍시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느 한 제자가 선생님께서는 저녁에 또 강의를 하셔야 하는데 이처럼 피곤해서 되겠는가 하고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오후 시간 내내 단체 사진이 끝날 때까지 이렇게 무더운 날씨 속에서 바쁘게 보내셨다. 그렇게 하시고도 저녁에는 제시간에 설법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에게 천천히 식사를 할 수 있게끔 여유시간을 주셨다. 베이징(北京), 싼둥(山東)과 뚱베이(東北) 등지의 노수련생들은 경험이 있어 얼른 밥을 먹고 먼저 가서는 담벽 구석 등 좋지 않은 곳을 먼저 차지하고 앉아 좋은 자리는 신수련생을 위해 남겨두었다. 예닐곱 살 되어 보이는 한 남자애는 당연한 듯 제일 뒤 인도 옆의 좋지 않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나는 그에게 “여기 자리가 있으니 네가 앉으렴”하고 말했다. 그 아이는 “나는 노수련생이에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그의 어깨만 다독였는데 감동하여 목 메인 소리가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사부님께서 강의를 시작하셨다. 그러나 실내가 너무 더워 많은 사람들은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사부님께서는 “여러분 부채를 내려 놓으셔도 됩니다.”라고 하셨다. 조금 후 미풍이 얼굴을 스치며 불어왔다. 사부님의 자비를 감수한 수련생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2. 상징적인 수업료

사부님의 설법반은 수업료가 특히 낮았다. 그동안 나는 여러 차례 기공반을 조직하는 일에 참가했으며 여러 번의 기공반의 강의를 들었는데, 내가 알고 있는 정황은 사회상 기공반의 수업료는 1주일 과정에 120~200위안을 받으며 더 많이 받는 곳도 있다. 사부님은 10일 강의에 50위안, 어떤 때는 더 할인하였다. 무엇 때문에 수업료가 이처럼 적은가. 당연히 강의 내용이 높지 못해서가 아니다. 비록 나는 이 우주대법이 내포한 내용을 똑똑히 꿰뚫고 보지는 못하지만 사부님께서 단도직입으로 말씀하신 “진정하게 고층차로 사람을 이끌다.”, “사람을 제도함이라, 당신은 진정으로 수련하는 것이지, 단지 병을 제거하고 몸이나 건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전법륜》中) 이것이 곧 장기간 수련계에서 병을 제거하고 신체를 건강하게 하는 층차를 뛰어 넘을 수 없던 것을 해결한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몇 마디 말씀으로 천기, 비밀 중의 비밀, 현관, 묘유주천, 천목 등 많은 것을 갈파하셨다. 그리하여 천하를 다 다니시면서 도를 구하지 못했던 사람들로 하여금 경탄을 금할 수 없게 하셨고 탄복의 극치를 자아내게 하셨다. 대법 수련자들은 손에 대법을 받쳐 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 전에는 쇠로 만든 신발이 떨어지게 걸어다녀도 찾을 곳이 없었는데 지금은 사부님께서 대법을 문 앞까지 보내주셔서 전혀 힘들지 않고 얻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미 부단히 법을 학습하고 심성을 닦은 제자들은 이 《전법륜》책은 값으로 가늠할 수 없는 천법(天法)임을 깊이 알고 있었다. 속인의 물건과 어떻게 비할 수 있단 말인가! 오직 사부님의 자비로 수련생들의 부담을 경감하게 하기 위하여 수업료를 제일 낮은 데까지 내려놓은 것이다. 대법제자는 물론 대법제자가 아닌 사람도 이는 상징적인 수업료라 말했다.

3. 어머니의 몸을 정화해 주신 이야기

나는 이번 사부님의 설법반에 원래는 한 동업자와 함께 참가하기로 약속되었었다. 그래서 준비하여 온 입장권은 내가 보관하였다. 그런데 강의를 듣기 며칠 전 동업자는 자동차사고로 사망하였다. 갑자기 찾아온 이 재난은 사람들을 하여금 비통에 잠기게 했다. 그러나 비통 끝에 사람들의 운명을 개변시키는 수련의 기연(機緣)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게 됨을 느꼈다. 그런데 그 한 장의 수강증이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나에게로 되돌아왔다. 마지막 되돌아 왔을 때는 강의를 시작하기 3시간 전이었다. 나는 가능한 인연이 있는 사람이 이 입장권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일찍이 회의 장소에 가서 입장권을 처리하려고 하였다. 이 일을 처리하기 전에 나는 반드시 먼저 어머니께 한 번 가봐야 했다.

나의 어머니는 80여 세로, 우리 형제들은 윤번으로 저녁에는 어머니를 돌봐드려야 하는데 그날 저녁은 나의 차례였다.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간단히 밥을 지어 먹으면서 강의를 듣는 문제를 이야기했다. 또 어머니에게 그 입장권이 여러 나라를 돌아보았던 과정을 이야기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순간 어머니가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병이 너무 중했다. 심한 심장병, 심부전, 신장기능 부전으로 병원에서는 이미 위독하다고 통보를 내린 상태였다. 반드시 의사의 지시에 따라 침대에 가만히 누워서 휴식해야만 하였다. 때문에 강의를 듣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짧은 한마디 말에 의해 사태가 변할 줄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어제 저녁 내가 꿈을 꾸었는데 당승(唐僧) 차림을 한 사부가 나에게 연공을 가르쳤다. 여윈 남자애를 데리고 왔더라.”라고 말했다. 나는 삽시간에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부처를 믿고 부처를 공경했으며 마음이 선량하고 고통을 이겨내셨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이것이 고인(高人)의 점화가 아니란 말인가. 우리는 토론하여 어머니께서 한 번 가서 강의를 듣는 것을 시험해 보자고 결정했다. 나는 동수에게 부탁하여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는 택시를 빌려서 어머니와 함께 황팅 체육관으로 달렸다. 강당에 들어서서 어머니가 사부를 보는 순간 나의 손을 꼭 잡으며 “이분이 곧 내가 꿈에서 본 그 사부님이시다.”라고 말했다. 나는 어머니의 눈물이 이미 입가에까지 흘러내리고 있음을 보았다. 목소리마저 모두 변하였다. 어머니의 신체가 지탱할 수 없을까봐 강의 중 나는 마냥 근심이 되었고,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걱정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사부님의 말씀을 몰두하여 들었는데 조금도 위독한 환자 같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가 연분이 대단히 크다고 생각했다.

나의 깨달음이 너무 부족하고 또 번거로운 게 두려워서 둘째 날 사부님께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사진을 찍을 때, 어머님을 모시고 가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는 더 있을 수 없는 기회를 잃게 되었다. 삼일째 되던 날은 정원 문앞에까지 와서 차에서 내릴 때 동수들이 어머니가 너무 힘들어 하시는 것을 보고는 어머니를 업고 한 구간 걸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 더 업고 갈 수가 없어서 우리 두 사람이 어머니를 부축하여 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심장병 외에도 심한 풍습, 관절의 통증으로 하여 걸을 수 없었다.

온몸이 부은데다가 6살 때 전족을 하였었기 때문에 무거운 머리에 비해 다리가 부실한 상태였다. 우리 두 사람이 어머니를 부축하여 앞으로 움직였는데 너무 힘들어 거의 지탱할 수 없는 정도였다. 그러나 더욱 근심스러운 것은 어머니께서 강의를 들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일어나는 것마저 어머니에게는 매우 힘든 일인데 정말 그의 심장이 사부님의 강의를 받아낼 수 있을지를 알 수가 없었다. 이때 나는 이런 모험을 하지 말아야 했는데 만일의 사태를 상상키 어렵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정말 후회가 되었다. 그런데 머리를 드는 순간 갑자기 사부님의 그 커다란 모습이 나의 앞에 나타났다. 온건하게 걸어오시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함께 사부님을 불렀다. 그러나 사부님께서는 대답하시지 않고 마치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 것 같았다. 사부님은 걸으시면서 주목하시는 눈길로 우리 어머니의 신체를 보시는 것이었다. 걸어 지나가신 후 우리는 머리를 돌려 사부님을 보았다. 사부님은 또 같은 눈길로 어머님의 등 뒤를 보고 계셨다. 그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강당에 들어가셨다. 이때 정원 안에 있던 수련생들은 이미 모두 강의실에 앉아있었는데 오직 사부님께서만 혼자서 정원에 계셨던 것이다. 무슨 일이 있구나. 급한 일이 있구나. 나는 많이 생각할 사이 없이 강의실에 들어갔다.

다음날 어머니 신체는 매우 큰 변화가 나타났다. 소변량이 많이 증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피오줌이 나왔다. 어머니는 소변을 본 후 전신이 가벼워졌고, 증세도 없어졌으며 부은 것도 가라앉았다. 이때 나는 비로소 문득 어제 사부님께서 어머님의 신체를 정화해 주셨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사부님께서 강의하실 때, 여러 사람들에게 신체를 정화시켜 주시는데 왜 급하게 어머니에게만 단독으로 하셨을까? 자비하신 사부님께서는 어머님의 병이 위험하고(그때 어머니는 수시로 심장이 갑자기 멈출 위험성이 있었음) 와서 강의를 듣기도 매우 힘들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어머님을 따로 정화시켜 주셨을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매일 앞당겨 회의 장소에 오셨기에 만약 우리가 앞당겨 갔더라면 사부님께서 어머님의 신체를 정화해 주실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매일 수련생이 퇴근한 후 바삐 우리 집에 오는 것을 기다려서야 비로소 어머님을 부축하여 가야했기 때문에 그냥 일찍 가기란 무리였다. 오히려 사부님께서 정원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다가(오직 강의하시기 전 약간의 시간을 이용할 수 있었음) 우리가 문에 들어서면 급히 오셔서 정화해 주시곤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아무 말도 없이 하셨기 때문에 우리들마저도 느낄 수 없었다. 어머님의 신체에 격렬한 변화가 있을 때에야 비로소 알아차렸다. 사부님께서 강의시간에 하시는 것은 이미 어머니에게 도움이 안 되는 것이라 강의하기 전 아주 잠깐 동안의 시간을 이용하셨음을 알게 되었다.

사부님께서 제때에 오셨기에 어머니 생명은 비로소 구원될 수 있었고, 동시에 어머니의 신체를 근본적으로 정화시켰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후에 두려워 온몸에서 식은땀이 났고 마음속에는 사부님에 대한 감격으로 충만하였다. 자비하신 사부님께서는 일체를 통찰하시고 어머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명을 빼앗아 갈 뻔한 재앙을 선해시키셨다. 사부님께서는 “사실 나는 당신 자신들 보다도 더욱 당신들을 귀중히 여깁니다!”라고 하셨는데 여기에서 이미 입증되었다. 사부님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당신이 배우려고 한다면 나는 곧 당신에 대해 책임질 수 있습니다”라고 하셨다.《미국 제 1차 설법》

4. 악담으로 남을 해치는 일에 부딪혔을 때

어느 날은 사부님과 한 제자가 작은 음식점에서 국수를 드셨다. 식당주인이 국수를 들고 왔을 때, 사부님은 낮은 소리로 “이 국수에 소금을 너무 많이 넣은 것 같군요.”라고 한마디 말씀하셨다. 주인은 듣자마자 화를 내면서 “당신은 흠을 잡으려고 하는가, 먹어 보지도 않고 당신이 어떻게 소금이 많다는 것을 아는가?”라고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아무 말도 없이 국수를 드시기 시작하셨다. 식당 주인은 마치 자기가 옳은 것처럼 훈계를 늘어놓았다. 사부님께서는 다 드실 때까지 한마디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다.

제자가 그릇을 거두어 주인에게 가져다줄 때, 사부님께서 쓰셨던 그릇 밑을 손으로 찍어서 맛을 보고는 주인에게 “확실히 소금을 많이 넣었습니다. 너무 짠데요.”라고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대꾸하지 않는’ 모범을 보여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태연하셨다.

5. 석불사(石佛寺) 문을 지키는 노인의 이야기

사부님께서는 어느 하루 석불사에 가셨다. 소식이 빠른 일부 보도원과 수련생들이 급히 서둘러 가서 사부님을 만나 뵈려고 기다렸다. 오랫동안 기다려도 사부님께서는 오시지 않으셨다. 점심때가 되자 여러 사람들은 사부님께서 오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각자 돌아갔다. 그들이 금방 가자마자 사부님께서 오셨다.

우선 사부님을 먼저 본 사람은 절에서 문을 지키는 노인과 그의 어린 손자였다. 사부님과 그 노인은 서로 인사를 나눈 후 이야기를 하였다. 후에 사부님께서는 파룬궁에 대해 이야기를 하시면서 그에게 소개해 주셨다. 노인은 “나는 나이가 많고 배운게 없어 수련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사부님께 본인과 전 가족들의 심병(心病)을 말했다. 그것은 그의 손자의 일인데 그 애는 머리가 좋지 않아서 학교에 가기 싫어하고 점점 더 보통 아이들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부님께서는 친절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사탕 하나를 꺼내 주었다. 그 애는 기뻐하면서 먹었다.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지키는 노인의 집에서 기쁜 소식이 전해져 왔는데, 손자가 완전히 변했다는 것이었다. 총명해졌으며 학교에 가기를 좋아하고 말도 잘 들으며 성적도 좋다는 것이었다.

문지기 노인은 “이 파룬궁 사부님의 마음씨는 너무 좋습니다. 사탕 한 알로 우리 손자를 변하게 하였습니다. 사부님께서 가르치시는 파룬궁은 꼭 좋은 공법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노인은 마을의 많은 사람들을 인솔하여 파룬궁을 수련하였다.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회상

글/ 장춘 대법제자 정련(淨蓮)

[명혜망 2004년 5월 5일]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신 지 12주년을 맞아 나는 사부님과 함께 했던 아름다운 시간을 회고하며 몇 가지 일을 써내어 동수들과 행복을 나누고자 한다.

1. 사부님의 강연 원고

장춘 제3기 파룬따파 전수반 기간에 주최자는 나더러 사부님께 물을 따라드리는 일을 맡으라고 했다. 때문에 나는 영광스럽게 늘 사부님 신변에 있을 수 있었다.

강의하시는 첫날 사부님께서 강당에 들어오실 때 수련생들은 사부님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일어나 우레와 같은 박수로 가장 존경하는 사부님을 환영했다. 사람들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사부님이 강단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으며 박수 소리는 여전히 끊이지 않았다. 사부님은 미소로 답하고 사람들에게 앉아서 법을 들으라고 하셨다.

나는 즉시 사부님께 물을 따라드렸다. 사부님을 보니 양복 주머니에서 32절지 크기의 작은 백지 한 장을 꺼내셨는데 그 위에는 크기가 다른 몇 글자와 부호같은 각종 표기가 있었다. 나는 종이를 주시하며 사부님께서 무엇을 강의하실지 생각하려 했으나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이 종이가 바로 사부님이 법을 강의하실 때 사용하는 원고였다.

대법 전수반 10일 동안 마지막 날 사부님께서 수련생들의 질문에 해답해 주시는 외에 나머지 9일간 나는 사부님께서 줄곧 이 원고로 수련생들에게 설법하시는 것을 보았다. 당시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부님은 저렇게 높고 깊으며 내포가 풍부한 법을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이 한 장의 종이만 사용하실까?’

나중에 법공부, 수련을 통하여 나는 명백히 알게 되었다. 대법은 사부님의 것이며 법은 사부님 마음속에 있음을. 이 한 장의 원고는 사부님의 무량한 지혜의 상징이었다.

2. 쥐죽은 듯 조용하다

한번은 사부님께서 강의하시는 도중 교란을 받아 정전이 되었다. 강당 책임자가 급히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원인을 조사했는데 이때 녹음을 맡은 제자가 지혜가 떠올라 녹음기에 전지를 넣고 확성기로 대신해 사부님의 강의 음성을 확대했다.

일천여 명이 있던 회의장은 질서가 정연했고 개미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사부님께서는 매우 침착하고 냉정하셨으며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계속 강의하셨다. 사부님의 맑은 음성이 회의장에 우렁차게 울렸으며 정전되지 않은 것과 완전히 마찬가지였다. 사부님께서는 강의하시는 한편 교란을 제거하셨다. 약 20분 쯤 지나자 전기가 들어왔다.

강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말했다. “정전이 되어도 강의를 멈추지 않았고 녹음기에서 나는 소리가 그렇게 뚜렷하며 회의장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다니 이런 일은 우리도 처음 겪는다. 정말 신기하다!”

3.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해 연공장을 정해주시다

사부님 고향의 수련생들은 일찍이 사부님의 특수한 관심을 받았는데 이는 장춘 수련생들의 행운이다.

장춘 제3기 파룬따파 전수반이 끝난 후 우리 몇 명은 상의하여 연공장소를 골라 연공장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몇 군데를 보았으나 모두 어떤 사람들이 새벽에 나와 연마하고 있었으므로 걱정하고 있을 때 존경하는 사부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장소를 정해주셨다. 이곳은 지세가 평탄하고 환경이 아름다워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었다. 장소를 정해주신 후 연공하는 사람들의 수자가 날로 증가해 1년도 안 되어 원래 수십 명에서 수백 명으로 증가했다.

막 법을 전한 그 2년간 사부님이 장춘에 계실 때는 늘 각 연공장에 가셔서 수련생들이 법공부, 마음을 닦고 연공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지도하셨다. 어느 날 새벽 수련생들이 아름다운 연공음악과 함께 연공하고 있는데 사부님께서 오셨다. 사부님께서는 사람들이 연공하는 것을 보시고는 몇몇 수련생들 옆으로 가볍게 걸어가셔서 수련생 머리 위를 힘 있게 잡으신 후 힘껏 뿌리쳐 신체를 청리해주셨다.

사부님과 함께 했던 아름다운 시간을 회억하니 정말 행복하다!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4/10/6/8560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