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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생명을 승화시켜 더욱 많은 중생을 구도

글/중국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2009년 11월 16일】

존경하시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동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나는 1998년 6월에 법을 얻은 대법제자로, 지난 10여 년간의 수련의 길을 되돌아보면 나의 매 한 걸음은 모두 대법 속에서 법리를 깨달았다. 하지만 마치 사부님께서 법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돌이켜보면 방금 자신이 말한 법이 모두 맞지 않았다.”(《전법륜》)뿐만 아니라 많은 때에 구세력이 배치한 길을 걸었고 박해를 당하면서도 반 박해를 했고 심지어 어떤 때에는 박해를 승인하기도 했다. 사실 이런 법리에 대해 사부님께서 『전법륜』및 99년 이전의 설법에서 모든 말씀을 하신 적이 있지만 내가 제대로 깨닫지 못해 많은 고생을 했고, 있지 말아야할 손실 또한 많이 조성해 사부님께 과분한 근심걱정을 안겨 드렸다. 말로만 표현할 게 아니라 오직 최후일수록 정진하고 자신을 잘 수련하여 세 가지 일을 잘 하는 것으로 사부님의 은혜에 보답할 것이다.

1, 시간에 대한 집착을 닦아 버리다

98년에 가격을 매길 수 없는 보물 『전법륜』을 얻은 후, 나의 생활은 많이 변화되었다. 이전에 가졌던 일체 흥취 모두 버리고 매일 법공부의 희열 속에 빠져 있었다. 온 몸의 각종 병들이 감쪽같이 사라져 날것처럼 가벼웠는데, 당시 이런 감성적인 인식이 나를 정진하게 했다.

하지만 협조인이 나에게 “당신은 지금 이렇게 따라 공부해 보세요, 99년 정법이 가능하게 결속할 것 같아요”고 이야기 했다. 협조인의 그 말은 나로 하여금 단번에 시간에 대한 집착을 생기게 했다. 나는 사부님의 설법에 근거해 손을 꼽으며 1년 내에는 어떻게 해도 출세간법 할 수 없다고 여겨 당시 법을 늦게 얻었다는 생각에 너무도 상심했다. 하루 저녁 꿈을 꾸었다. 꿈에서 아파트 층계를 오르는데 곧 아파트 옥상에 도착해야 하는데 너무도 힘들었다. 그 때 한 목소리가 나에게 “빨리 집에 도착한다.”고 했다. 머리를 들어 보니 두 층만 더 올라가면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시 정말 격동되어 나도 집에 돌아 갈 수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잠에서 깨어난 후, 나는 이것은 사부님께서 나를 점화하시어 시간에 대한 집착을 없애라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는 시간을 틀어쥐고 침식을 잊어가며 법공부와 연공을 했다. 98년 6월부터 99년 7월까지 근 1년간 출근하는 외, 나의 손에서 법이 떠나지 않았고 법이 나의 손을 떠나지 않았다. 매일 『전법륜』을 통독하는 외 또 다섯 번이나 베꼈고 사부님의 설법비디오를 보고 매일 연공을 하여 부단히 층차를 돌파하는 느낌이 들만큼 매일 모두 변화했다. 하지만 그때는 모두 감성적인 인식이었으나 점차 시간에 대한 집착에서부터 담담해 졌다.

얼마 안 되어 99년 ‘7.20’이 왔다. 당시 중국 매체에서는 모든 프로그램을 중지하고 전부 사부님과 대법을 모함했다. 당시 나는 집에 있으면 끊임없이 눈물이 나서 마음속으로 줄곧 “사부님! 사부님! 억울합니다. 억울합니다.”고 말했다. 그날 나는 동수 집에 달려가 우리가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나? 제자로서 사부님을 중상 모락하는 상황을 이렇게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동수는 사부님께서는 두렵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면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 나는 더는 앉아 있을 수 없어서 한 동수를 찾아 북경은 어떤지 구경하자고 했다. 그렇게 되어 99년 ‘7.20’이 후 나는 세 번이나 북경에 갔고, 그 후 반년 간은 거의 북경에서 지냈는데 그 과정은 간고하기 그지없었다. 그중 우리 가정을 포함해 사회 및 일체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더 이상 하지 않겠다. 당시 나는 감성상의 견정함에만 머물러 있었을 뿐 이성적으로 구세력의 배치를 타파하지 못했고, 두 번째로 북경에 갔을 때는 사악의 박해로 직장을 잃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북경에 갔을 때 사악의 박해로 가정마저 잃었다.

2000년 정월 보름, 나는 법회를 열었다가 납치되어 노동교양 1년을 받았지만 ‘전화’하지 않아 또 불법으로 1년이 가중되었다. 그 악명 높은 노동교소에는 당시 1천명 넘게 수용되어 있었는데, 100분의 98 이상이 강제로 ‘전화’되었다. 당시 사악한 정도는 형용할 수 없다. ‘전화’하지 않은 대법제자에게 수많은 종류의 참혹한 혹형을 가했고 여러 가지 수단으로 세뇌하면서 강약을 결합하였을 뿐만 아니라 매 시각마다 반드시 100% ‘전화’시켰다. 그런 사악한 환경에서 1초가 1년처럼 느껴졌고 그렇게 힘들었다. 그러자 나는 또 시간에 대한 집착이 나타났다. 그때 미관의 사악한 생명이 아직도 발작적이고 필사적으로 사람을 공제하고 있었다. 나는 시시각각 생사의 일념을 놓지 않는다면 걸어 나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사람의 것을 개입시키기만 하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것을 극력 배제하고 마음속으로 부단히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可死).’”(《정진요지》〈법 중에 용해되자(溶于法中)〉를 읽었다. 그럼에도 시간에 대한 집착을 배제하기가 매우 힘들었으며, 나는 사악이 이 집착으로 나를 훼멸하려고 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 위험한 시각에 동수가 자비하신 사부님의 경문 『원만을 향해 나가다』“사악(邪惡)은 머지않아 모조리 제거될 것이고, 인간 세상의 인간쓰레기 역시 마땅히 있어야 할 보응을 받을 것인즉 죄악을 더 지속시킬 수는 없다. 제자들은 원만을 기다리고 있으므로 나 역시 더는 기다릴 수 없다.”를 가져왔다. 집착이 있다 보니 당시 나는 사부님의 시간에 대한 어구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갑자기 희망을 보고 자신에 대한 신심이 충만 되었다. 이어서 또 《최후의 집착을 제거하자》를 보았다. 다 본 후 심태가 완전히 온정 되었고 정념이 이미 아주 족해졌으며 사부님께서 나를 도와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다. 후에 나는 사부님께서 하나의 집착으로 다른 하나의 집착을 타파하도록 하셨음을 깨달았다. 금방 발걸음을 시작한 아이의 손을 잡고 한 걸음씩 앞으로 걸을 수 있도록 부단히 고무격려하면서 우리의 신심을 증강시켰다. 내가 만약 당시 10년 만에 박해가 결속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면 나는 걸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점차 법에서 제고됨에 따라 법에서 인식하고 특히 법에서 대법제자의 거대한 책임과 사명을 인식했을 때 이 집착도 자연스럽게 소실되었다.

이런 것을 쓰게 된 것은 몇몇의 가정을 이루지 않은 중년 동수들이 사부님께서 최근에 발표한 몇 편의 경문을 보고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구도되고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나야 결속될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을 듣고는 응당 직장을 찾고, 또 상대를 찾아 가정을 이루고, 또한 돈을 벌어 집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부님께서 99년 설법에서 시간이 많지 않다고 하여 이미 10여년이 지났고, 아직도 많은 대법제자들이 2012년 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아! 이렇게 많은 대법제자들이 시간에 대해 집착하고 있으니 이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사부님의 정법에 어려움을 더하는 것이 아닌가? 사실 정법은 왜 결속되지 못하는가, 바로 우리가 사람의 마음을 제거하지 못해 집착이 너무 많고 자신을 잘 수련하지 못하고 중생을 구도하지 못했기 때문인바, 우리가 사부님의 정법노정을 끌고 있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자비로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계신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자신도 수련하여 돌아가지 못할 것이고 중생구도는 말 할 여지가 있겠는가? 사부님께서도 우리가 우리를 구하기를 기다리신다! 오늘 써내는 것은 우리가 공동이 법에서 제고하여 시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법 공부를 참답게 하고 자신을 수련하여 빨리 중생을 구도하려는 것이다.

2, 감성적 인식에서 비롯된 견정에서, 이성적 인식으로 법을 원융하고 승화

99년 사당이 갓 파룬궁을 탄압했을 때 나는 모두 감성적으로 법을 인식하여 오직 견정하는 것만 알고 법을 원융할 줄 몰랐다. 그러다보니 다만 진실만 말했을 뿐 지혜를 도용할 줄 몰라 부당한 손실을 많이 조성했다. 두 번째, 북경에서 돌아올 때 현지 경찰이 파출소에 끌고 가서 나에게 “당신은 배고 플 때 이밥 한사발을 주면 당신은 밥을 요구하겠는가 아니면 대법을 선택하겠는가?” 고 물었다. 나는 추호의 고려도 없이 대법을 요구한다고 했다. 경찰은 “끝장이다. 모모보다 더 하다( 그 동수는 2000년에 박해로 죽음).” 그런 다음 그들은 정말 노동교양을 해야겠다고 했다. 그러나 사부님의 가호로 나는 또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집에 돌아 온 후, 양가 친인들은 모두 내가 돌아가기를 기다리면서 모두가 다시는 북경에 가지 말라고 했다. 나는 견결히 불복하면서 “그들이 사부님을 모함하기만 하면 나는 또 갈 것이다.”고 했다. 집사람이 말하기를 “그럼 당신은 우리 가정은 필요 없는가, 당신이 보라 금방 입주한 집이 얼마나 멋진가! 우리 모두 이런 집에 거주한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이 집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위에서 보면 흙무지이다. 당신이 그 개미굴을 보았는가? 바로 그러하다 너의 굴이 크다 나의 굴이 작다고 하면서 쟁투하지만 모두 흙이다. 하늘에 나의 위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의 집이다.” 고 했다. 양가 친척들은 모두 나의 그 말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부끄러운데, 정말이지 이성적이거나 정상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직장에 갔더니 결근이 너무 길다는 이유로 나의 공직을 제명했지만 나는 추호의 고려도 없이 서명했다. 완전히 구세력의 배치한 길을 걸었던 것으로, 당시 법리가 명확하지 못해 극단적으로 나가면서 사악의 박해를 받으며 남편과 가족들의 압력만 크게 해 후에는 이혼까지 초래했다. 또 한 번 구세력이 배치한 길을 걸은 것으로 구세력은 이렇게 배치하여 중생을 훼멸한다. 그러나 당시 나는 자신이 명리정을 놓았다고 착각했다.

정법노정이 추진됨에 따라 사부님께서 끊임없이 설법해 주심에 따라 방향을 수정하고 나는 법리상에서도 부단히 승화하고 있다. 그럼 이전에 가정을 제대로 꾸리지 못하고 직장 및 각 방면의 사람들이 대법에 대해 부면 영향을 반드시 피면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금생과 우리와 연분이 큰 사람을 훼멸할 수 있다.

2001년 말, 나는 노동 교양소에서 나와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듯이 사부님의 소유의 설법을 보고 법리상에서 또 새로운 인식이 있게 되었고 문제에 봉착하면 냉정하게 대하여 이지적이고 지혜롭게 진상하고 중생을 구도하면서 법에 원융했다. 나는 당시 친정집에 돌아갔는데 모친은 어려서부터 종교를 믿었다. 그런데 나의 변화와 대법이 나의 신변에서 나타난 신기한 일은 모친으로 하여금 한평생 믿던 종교를 버리고 대법수련의 길에 들어서게 했다( 그러나 후에 박해로 세상을 떠났다).

이어서 나는 또 직장동료들과 일찍 나를 도와준 상사들에게 서신을 써서 내가 당하고 있는 소유의 박해 과정과 정도를 썼다. 나는 그들이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게 바로 내가 북경에 상방하러 간 것과 이혼한 것이며 내가 가정을 버렸다는 것임을 알았다. 나는 편지에서 누가 행복한 가정을 원하지 않고 친인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 않으며, 부모에게 효성을 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바로 강 모모가 파룬궁에 대해 질투하여 파룬궁이 너무 빨리 발전하면 손의 권력을 잃을까봐 두려워 이번의 역사상 전례 없는 박해를 발동한 것이다. 그리하여 수련인에게 각종 압력을 가하고 연공인의 가족까지도 연루되게 했고 아이의 입학, 입대 등에도 국한되게 했으며 박해로 무수한 가정을 파산 시켰다. 파룬궁이 가정을 파괴했다는 말과, 파룬궁을 연마해서 가정을 파산한다는 말을 순전한 모함이이다. 파룬궁은 사람들더러 “쩐, 싼, 런”을 가르치고 일에 부딪치면 안으로 찾고 먼저 다른 사람을 고려하고 선타후아, 사람을 선하게 대하고 누구에게나 모두 잘 대하고 가정으로 하여금 화목하고 사회가 안정되게 하는 고적대법이다. 내가 정정당당할 수 있고 당연히 상방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죄가 없기 때문이고 천리와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익과 정의 앞에서 나는 정의를 선택했고 양심과 생사의 앞에서 나는 양심을 선택했다. 상방은 헌법이 공민에게 부여한 권리이고 신앙 자유는 헌법이 규정한 것이며 파룬궁은 완전히 합법적인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서신을 받은 사람들은 당시 자신들의 견해를 개변했다고 한다. 나는 또 여러 번 나와 동생이 박해당한 사실을 실명으로 주보와 소책자를 제작해 가가호호에 배포했다.

가장 직면하기 어려웠던 것은 바로 가족들이었다. 이번 박해에서 내가 잘하지 못해 가정과 아이들에게 심리적인 압력과 거대한 상해를 입혔기에 그들더러 단번에 진상을 접수시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시어머니 집에 가서 진상하기란 더욱 어려웠는데 나와 남편은 동창으로 이혼한 후 그는 다른 동창과 재혼했지만 혼인신고는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 동창생이 아주 정직한 사람임을 알고 있기에 응당 그에게 진상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여러 번 생각했다가 그만 두었는데 직면하기 싫었다. 안으로 찾아보니 관념과 사람 마음이 저애하고 있었다.

나는 열심히 법공부를 했다. “수련은 곧 이 마난(魔難) 중에서 수련해야 하며, 당신이 칠정육욕을 끊어버릴 수 있는가 없는가, 담담히 여길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본다. 당신이 그런 것들에 집착한다면 당신은 수련해 내지 못한다.” “다른 사람이 만약 잘되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평형을 이루지 못한다.” “사람이 수련 중에서 질투심을 제거하지 못하면 정과(正果)를 얻지 못하는데, 절대로 정과를 얻지 못한다.”(《전법륜》)

법공부를 통하여 나는 자신을 저애하는 사람 마음을 찾았는데 정, 허영심, 명예심과 아주 깊은 곳에 질투심이 숨겨져 있었다. 집착을 찾으니 사람 마음이 단번에 가라앉았고 자신의 수련한 것이 아직도 착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 번째로 북경에 가서 법을 실증하면서 직장을 포기하고 가정을 포기하고 정말 무엇이나 다 없었고 다 포기했다. 동수들도 모두 나에게 명리심을 놓았다고 했다. 그러나 오늘 일에 부딪치니 이렇게 많은 나쁜 마음이 반영되었다. “무엇이 공(空)인가. 집착이 없음이 진정한 공으로, 물질이 빈 것이 아니다.”(《정진요지》〈무엇이 공인가〉)법리가 명석해지자 자연적으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게 되었다.

나는 먼저 이 동창에게 진상신과 진상자료를 보내주었고 매번 명절마다 온 가족이 시어머니 집에 모이면 나도 거기에 갔는데 이 국면을 열기가 아주 힘들었다. 그때 나는 반드시 자아를 놓고 가족들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떻게 나를 이해하지 못하든, 어떠한 언어로 욕하든, 나는 모두 시시각각 자신을 일깨우면서 그들을 이해하고 꼭 쩐, 싼, 런을 실증하려 했다. 매번 갈 때마다 나는 그 동창생이 왔는가를 물어 보았고, 후에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나는 그에게 진상을 이야기했으며, 또한 나의 신고서와 동창생에게 쓴 편지를 그에게 보여주었더니 그는 달갑게 접수하면서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은 모두 좋다고 했다. 후에 만나면 만날수록 관계가 좋아졌고 그는 나에게 당신이 이렇게 좋으니 집에 돌아오라! 그래도 당신들은 한 가족들이다고 했다. 나는 웃으면서 화제를 돌렸다. 후에 시어머니는 “그들 둘이 관계가 저렇게 좋다는 게 정말 불가사의 하다. 파룬궁은 정말 사람을 개변시킨다.”고 이야기 했다.

점차 가족들도 모두 진상을 접수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진상자료, 소책자,『9평』과 내가 부모와 고향사람들에게 쓴 선을 권하는 편지를 보게 했다. 지금의 중국 사람들은 집집이 모이면 함께 마작놀이를 한다. 나는 진상을 알리려면 기회를 찾아야 했고 그들의 심태와 취미를 알고 발정념을 하여 절대 이전처럼 이지적이지 않아서는 안 되었다. 설이 돌아오면 나는 당신들은 놀아라고 말하고 나는 밥을 짓겠다고 했다. 사실 내가 혼자서 한 것은 아니지만 온 식구들은 모두 기뻐했고 나에게 변했다고 했다. 지금 나는 화려한 언어나 너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오직 우리가 대법의 요구대로 하기만 하면 우리가 하는 행위와 일언일행은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

후에 이 동창생과 남편은 갈라졌다. 지금은 인류의 도덕이 급속히 하강하기에 좀 지나자 그는 또 우리 시의 병원 의사와 재혼했으나 또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온 가족들이 반대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쫓아 버렸다. 2008년 설날 가족들에게 연락이 와서 나에게 집에 와서 설을 보내라고 했다. 이번에는 가족들이 나에게 집에 오라고 했지만 나의 호구와 주민등록증을 99년에 모두 잃어버렸고, 나 또한 사진을 찍지 않았기에 제 2대 주민등록증이 없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가족들에게 “내가 돌아가는 것은 옳다. 나와 가족들은 본래 줄곧 화목하게 지냈고 우리 사부님께서도 파룬궁을 연마하면 가정이 화목하고 사회가 안정된다고 하셨다. 만약 이번의 박해가 없었다면 나는 절대 이혼하지 않았을 것이며 가족들과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가면 반드시 재혼수속을 해야 한다”고 했더니 가족들은 “주민등록증과 호구가 없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빨리 돌아오라. 아이도 결혼할 때가 되었는데 거짓말이 아닌데 무슨 위법인가”고 했다. 나는 “안 된다! 지금 사회상의 성 혼란은 바로 인류사회의 도덕부패가 조성한 것으로 죄가 있다. 당신이 보라 지금 중국 사람들은 어디에 윤리도덕이 있는가? 관원들은 모두 탐오부패하고 성이 난잡하며 경찰이 여자 몇을 거느리지 않으면 능력이 없다고 여기고 영화와 텔레비전에는 황색독소가 뿜어내고 있다고 했더니 가족들도 이것은 정말이라고 했다. 나는 대법은 일체 규정하며 대법제자의 수련은 바로 미래를 개척하는 제일 바른 길인데 내가 어찌 대법에 먹칠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그래 죄를 짓는 것이 아닌가? 사람은 미혹 속에서 모르고 있고 사실 신은 한 남자에게 한 여자를 주어 부부로 되게 했고 기타 다시 찾은 것과 합법적인 수속을 밟지 않은 것은 성이 난잡한 것으로 천법을 어긴 것이라고 했다. 가족은 파룬궁은 정말 진정한 법이라고 했다. 그럼 이후에 사람을 찾아서 수속을 밟자고 했다. 나는 그럼 그렇게 하지고 했고 합법적인 수속을 꼭 밟겠다고 했다.

2008년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친척들이 모두 왔다. 나는 이 기회를 틀어쥐고 그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권퇴 시켰다. 이때 그 의사도 왔다. 가족과, 아이들, 친척들은 그를 환영하지 않고 냉대했지만 그녀는 아주 분주히 일을 돕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자비심이 나왔고 그녀가 매우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이 기회를 비러 그녀에게 진상을 했는데 아이들은 내가 그녀를 잘 대하는 것을 보고 몇 번이나 나를 불렀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들이 어찌 나의 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그때 나는 소유의 모든 사람은 마찬가지로 보였고 오직 구도해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에게 진상할 때 나는 그녀가 파룬궁을 배제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진료하는 당뇨병환자가 바로 파룬궁을 연마하는데, 그렇게 많은 가표가 있는데도 병을 치료한다고 미신한다며, 병이 있으며 반드시 치료해야 한다고 했다. 거기다가 우리가 파룬궁을 연마하여 이혼했다는 것을 알고 더욱 불신했다. 당시 나는 그녀가 더욱 가련했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만난 것도 다 연분이므로 대법은 꼭 그녀를 구할 수 있으므로 나는 반드시 진상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되어 나는 입이 닳도록 장시간 이야기 하여 그녀가 나에 대한 경애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원래 이런 것인가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은 모두 마찬가지나 나는 정말 파룬궁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언니,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다. 나는 당신의 말이 모두 참말이라는 것을 믿는다.” 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당신을 도와 삼퇴를 시키겠다고 했더니 그녀는 쾌히 응하였다. 또 한 생명이 구도되었다. 후에 가족들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그 후 한 번도 오지 않았다고 했다.

지금은 양가의 몇 십명의 가족이 기본적으로 삼퇴를 했지만 나는 늘 매듭이 있었다. 낯선 사람에게 진상할 때는 3~5분이면 아주 전면적으로 진상을 해 그들로 하여금 진상을 명백히 접수하여 백분의 구십 이상의 사람들이 모두 감사하다고 했다. 하지만 식구들에게 진상할 때면 제대로 하지 못하여 어떤 때에는 주저심이 있다. 사람의 것이 더해졌고 분별심과 사심 그리고 정의 요소와 급히 추구한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오늘 써내는 것도 나와 같은 집착이 있는 동수들과 교류하여 공동이 제고하려는 것이다.

다른 한 방면은 이전에 많은 동수들이 부부간에 이혼 수속을 하였거나 후에 함께 살면서 재혼수속을 하지 않고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 방면에서 법리가 명확하지 못하여 후에 교류를 통하여 규정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이런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 동수는 재빨리 규정하기 바란다. 이것은 매우 엄숙한 문제이므로 반드시 바르게 걸음으로서 사악이 틈을 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금후 나는 꼭 법 공부를 잘하여 생명으로 하여금 법에서 승화하고 자신을 잘 수련하여 법을 원융하고 이지적인 지혜로 진상하여 중생을 구도하겠다.

3, 구세력의 배치를 철저히 부정하고 사부님께서 배치한 길을 걷다

나는 시작에 구세력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못해, 가장 바른 길을 걷지 못해 가정 환경을 개척하였고 가정 자료점을 건립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후의 길이 비교적 어려웠다.

2003년, 모시의 연계 인이 납치되었는데 그가 소재한 자료점의 동수가 나더러 오라고 전화를 했다. 나는 모친의 집을 떠나 모시 자료점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 자료점은 나까지 세 사람이었는데 내가 간 후 우리는 아주 잘 배합했다. 그러나 3개월도 못되어 이 자료점 부근의 한 자료점과 함께 파괴 되었다. 자료점의 소유의 물건을 빼앗아 갔고 4명의 동수가 납치되었다. 나는 그날 저녁 동수에게 자료를 전할 일이 있어서 그곳에 가지 않았다. 이튿날 내가 밀가루 한 포대를 메고 초인종을 울리자 한 무리 경찰들이 나와 나를 집에 가두어 놓고는 바로 당신을 기다렸다고 했다. 나는 집안이 발칵 뒤집힌 것을 보고 당신들은 무엇을 하는가? 고 반문했다. 그들은 당신을 기다렸다고 했다. 나는 당신들이 마음대로 사람을 붙잡는 것은 불법이라고 했다. 그들은 즉시 전화를 걸더니 잠시 후 차에 사람을 가득 싣고 와서 나를 강제로 본 지역 공안국에 데려 갔다. 그들은 여러 가지 수단으로 나의 입을 열려고 했지만 나는 그들을 배합하지 않다. 그들은 반나절이나 신문했지만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이때 몇 명의 경찰이 오더니 한 불법 경찰이 전기 몽둥이를 돌리며 불꽃을 내보냈다. 그것을 나의 앞에 보이면서 이 전기 몽둥이가 아주 세다고 했다. 나는 그를 보면서 마음속으로 누구도 나를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추호의 두려움도 없었다. 그들은 나는 한참 동안 둘러보더니 모두 가버렸다. 나는 점심시간이 되었으니 집에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들은 우리도 당신과 같이 있을 시간이 없으니 당신 남편의 전화번호를 대라. 그더러 당신을 데려가도록 하라고 했다. 당시 나는 법에서 가늠하지 못하여 정말로 믿고 나의 오빠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후에 그들은 나더러 층계로 내려가라고 하여 보니 납치된 두 남성 동수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동수는 평소 아주 견정한 대법제자였는데 얼굴에 모두 상처였고 더는 걸을 수 없어 몇몇 경찰이 그를 끌고 있었다. 나는 금방 그 전기 몽둥이로 그를 때렸다는 것을 알았다. 나와 함께 차에 앉은 경찰이 말하기를 이 사내가 정말 견강하다 어떻게 해도 불복하나고 했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 나는 그들이 여러 가지 혹형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동수가 이렇게 박해를 받은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고통이 있어 발정념으로 “나는 반드시 그것을 없애고 그들의 혹형을 폭로하여 전 세계에 악행을 폭로하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 그들은 나를 구치소에 보냈다. 저녁에 그들은 나와 함께 자료를 하던 동수들은 나와 같은 칸에 보내고는 도청기로 감시했다. 우리 둘은 만나서 매우 냉정하게 서로 말하지 않았고 나는 줄곧 마음속으로 발정념으로 도청기가 성능을 잃도록 했다. 그 동수는 “언니 사부님께서 나를 관할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고 했다. 나는 두려워하지 말라,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시고 있으며 손오공이 여래부처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듯이 사부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고 계신다고 했다.

이튿날 본 지역의 공안이 두 사람을 보내 자백을 강요했다. 나는 그들의 노기등등한 모양을 보면서 아주 냉정했다. 나는 부단히 발정념으로 다른 공간에서 대법제자를 박해하고 중생을 훼멸시키는 사람을 조정하고 있는 일체 사악한 생명과 요소를 철저히 해체했다.

얼마 안 되어 공안국 사람이 와서 나의 이름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나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서 이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라고 했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게 2000년에 노동교양 소에서 얼굴을 망가뜨렸던 그것을 말한다는 것을 알았다. 후에 그들은 나를 감방에 보내고 두 시간이 지난 후 시 공안국에서 몇 사람이 와서 “당신들 공안 분국의 차가 도착했으니 당신을 집에 돌아 보낸다고 했다. 그들은 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금후에 다시는 여기에 와서 연계하지 말라고 했다.

본 지역 공안국의 그 운전사는 “이렇게 먼 곳에서 당신을 집에 데려가다니 당신이 나에게 100위안을 주어야겠다고 했다. 나는 없다고 했다. 그는 당신의 집사람을 데려가는데 돈을 줄 수 없는가? 고 했다. 나는 돈이 없어서 줄 수 없다고 했다. 마음속으로 사악을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럼 하차하라. 당신의 내가 인가가 없는 곳에 당신을 버릴 것이라고 했다. 이 때 이미 날이 저물어 갔고 그는 정말 나를 사람이 없는 곳, 두 편이 산이고 매우 황량한 곳에 갔다. 그러나 그가 어찌 대법제자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위대하신 주불 사부님께서 가호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나는 좀 기다리는데 택시 한 대가 왔는데 40위안을 내고 오는 길에서 그에게 진상을 알리면서 이렇게 순조롭게 집으로 돌아왔다.

후에 4명의 동수가 납치되어 10년 이상의 판결을 받아 손실이 매우 컸다. 돌아 온 후 자신을 찾았다. 금방 자료점에 와서 몇 편의 문장을 연이어 발표하고 환희심이 나와 사악이 틈을 탔고 사부님더러 우리를 위해 과도한 걱정을 하게 했다. 이번에 곤두박질하고서야 깨달게 되었는데 관건은 우리가 반드시 법리를 바르게 깨달아야 하고 근본적으로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오늘까지 정법을 하면서 정법제자는 반드시 전력으로 중생을 구도하여 사부님을 협조하여 정법하며 어떠한 교란도 모두 범죄이며 우리에게 얼마나 큰 누락이 있더라도 사악은 박해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선 자신을 부정하고 관건적인 시각에 오직 우리자신이 사악의 배치를 승인하지 말고 기점을 중생을 구도하고 진상을 명확히 하는데 둔다면 자비하신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도와 마난을 넘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후 반드시 안으로 찾고 집착을 버리고 법에서 규정해야 한다.

지금 사악의 요소가 이미 아주 적어져서 아무것도 아닌데 왜 박해가 아직도 매우 엄중하고 병업 형식의 박해로 세상을 뜨는 일이 연이어 나타나는가. 개인의 층차에서 생각하건데 가장 근본적인 점은 모두 구세력의 배치를 승인하고 박해를 당한 동수들이 법리가 명확하지 못해 자신이 부정하지 못해서라고 본다. 또 밖에서 구출하는 동수들도 승인하면서 먼저 박해를 당한 동수의 부족한 점과 구멍을 찾는데 동수가 이런 상태로 박해를 받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할 수 없다는 소극적인 상태가 나타난다. 정법이 오늘에 이르러 사부의 법리는 이미 아주 명확하다. 우리는 반드시 법에서 정체적인 승화를 해야만 근본적으로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하고 박해를 결속 짓고 사부님을 협조하여 정법 하여 법정인간에 이르러야 한다.

4, 의뢰심을 버리고 자신의 길을 걷다

99년부터 나는 사해를 집으로 삼았는데 이것도 내가 잘 수련하지 못하여 조성한 것이다. 당시 호적을 올릴 때 주민등록증도 오빠의 집에 두었는데 이상한 것은 후에 모두 잃어버렸고 어떻게 찾아도 없었다. 2001년 내가 노동교양소에서 나와 모친의 집에 돌아 왔을 때에 입은 옷 외에 아무것도 없이 물질 상에서 정말 아무 것도 없었고 생각하면 참 우스웠다. 2002년 이혼한 남편이 나에게 사회보험을 했다. 당시 나는 법리가 명확하지 못하여 그와 배합하지 않았고 그는 아무런 문건이 없는 상황에서도 순리롭게 일처리를 했다. 후에 나는 사부님께서 이 못난 제자를 도와주셨기에 나로 하여금 지금 안정 된 수입으로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하셨고 최대한도로 속인 상태에 부합되어 안심하고 수련하면서 자신의 사명을 이행할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03년 모시 자료 점이 파괴된 후, 나는 본 지역에 왔다. 당시 고향의 자료점도 많이 파괴되어 진상자료가 매우 모자랐고 그때에는 가정자료점이 거의 없었다. 나와 본 지역의 협조인은 연계하여 자료 점을 건립했다. 7년간 정말 비바람 속에서 취산하면서 놀라기도 하고 위험도 있고 고생도 있고 근심도 있었지만 여기에서 더는 상세히 서술하지 않겠다.

금방 자료점을 건립하여서 얼마 안 되어 우리는 당시 세 사람이었고 또 두 협조인이 자료를 가져다가 동수들에게 주거나 우리에게 종이를 구입하였다. 한번은 나의 모친의 신체가 사악의 박해를 받아 나는 집에 가서 4일간 숙박하고 돌아와 보니 집안이 텅 비고 오직 두 동수가 거기에서 발정념을 하고 있고 다른 한 동수는 친척집에 갔다. 내가 원인을 물으니 그들이 일이 생겼는데 어제저녁에 집주인이 발견하고 불안전하다고 하면서 이사준비를 하라고 했다. 나는 금방 돈을 주었으니 낭비하지 말자고 하면서 이것은 다른 공간의 사악이 우리의 두려워하는 마음을 겨냥하여 온 것이니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므로 우리는 응당 법공부를 많이 하고 발정념을 하여 주동적으로 사악을 청리하여 사악에게 쫓겨나지 말아야 한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니 빨리 설비를 운반하여 동수들의 정상적으로 자료를 가져가는 것을 지체하지 말자고 했다. 저녁에 우리 셋은 또 설비를 운반하여 왔다. 나와 다른 동수는 자료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여왔다. 나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발정념으로 사악의 교란을 청리하였다. 이렇게 되어 우리는 제때에 자료를 동수들의 손에 전했다.

그 사건 후 두 명의 동수들은 늘 이사하자고 의논했고 나는 매번 외출시 모두 사부님의 법상 앞에서 발정념으로 “이것은 나의 집이므로 누구도 움직이지 못한다. 법기가 어디에 있으면 어디가 나의 집이다. 누가 움직인다면 누구에게 죄가 있다. 후에 환경이 점차적으로 온정 되면서 우리는 반년간 합작했다. 한번은 나에게서 자료를 가져가는 동수가 납치된 후 다른 동수가 다른 곳에 가고 나와 함께 거기 외지에서 유리걸식하던 동수가 집에 전화를 걸다가 발견되어 당지 공안국과 우리 본 시 공안국과 연합하여 사람을 붙잡았다. 그녀는 자료점을 떠나려고 해서 나는 그녀에게 가지 말라고 권했지만 그래도 가고 최후에 나 혼자 남았다.

그때 사악의 요소가 아직 매우 커서 늘 하루건너 문을 두드리고 호구복사를 했지만 이런 것들은 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지만 고독감이 나를 습격했다. 혼자서 바삐 보낼 때는 괜찮았으나 심지어 식사할 때에도 동수와 함께 있던 정경이 생각났고 일종의 고독감을 참기 어려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곳에서 그 동수가 또 납치되어 많은 혹형에 시달리고 불법노동교양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마음이 괴로웠다. 후에 법공부를 통해 자신을 찾고 안전문제 상에서 잠복해 있는 것이 있고 동수와 단선 연계할 때 핸드폰으로 연계하는 등 부주의 현상이 존재했고 더욱 주요한 것은 의뢰심, 안일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었고 일에 부딪치면 협조인을 찾고 기술문제에 부딪치면 기술이 있는 동수를 찾고 물건을 구입할 때에는 남성동수를 찾는 등으로 사람이 많이 움직이고 빈번함을 조성했고 법의 요구에 부합되지 않았다.

내가 독립적으로 자료점을 하는 기간에 비록 노정이 간고했지만 점차적으로 이런 의뢰심과 고독한 마음을 닦아 버렸다. 이 기간에 매번 비바람에 봉착할 때 곤란을 막을 수 없을 때마다 나는 정념으로 했고 사부님께 가지를 빌었다. 당시 비록 매우 간고했지만 모두 걸어 나왔다. 후에 나는 또 두 동수와 합작했지만 늘 취산했고 그 과정에 놀라기도 하고 위험도 있었으며매 번마다 나의 그런 수련해 버리지 못한 사람의 마음을 자극했다. 착실한 수련과정에서 나도 부단히 대법의 법리를 보고 대법의 신기함을 나타났기에 나로 하여금 신사신법에 가배의 신심을 갖게 했다.

대륙의 이런 엄혹한 환경에서 최대한 속인의 상태에 부합해야 하는데 만약 사람의 마음으로 대한다면 정말 매우 힘들다. 예를 들어 자료점의 소모품을 구입할 때 곳곳에 피우지 못했으므로 소모품 용량이 비교적 커서 한번은 종이를 구입하는데 낮에 가서 값을 정하고 저녁 8시에 차를 운전하고 한번에 15상자를 구입했다. 7시 30분에 아래층에 가보니 사람이 가득했는데 날씨가 덥고 여름철이라 낮이 길어서 8시가 되어도 아직 어둡지 않고 행인이 많았다. 베란다에서 밥을 먹는 사람도 있고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우리 옆 단원 아래에는 지역사회 사람이 옆에 주차하고 있었다. 그때 사당중앙에서 회의를 열고 있었고 거기다가 이 단원의 아이가 학교에서 주는 콩물을 먹고 중독되어 죽었기에 당국에서는 가족이 북경에 상방하러 갈까봐 전문 인원을 배치하여 지키고 있었다. 이때 나는 발정념으로 이 장소를 청리하려고 반시간이나 발정념을 했지만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차가 도착했다. 나는 그들더러 길옆에서 기다리라고 하고는 또 발정념을 했다. 이때 갑자기 맑던 하늘에 천둥이 치면서 바람이 불기시작하고 아주 맹렬하게 덮쳐들더니 사람들이 즉시 헤어졌다. 내가 시간을 보니 몇 분이 안 되는 8시였다. 문 앞의 차도 갔고 오직 베란다에서 밥을 먹던 몇 사람만 남고 모두 돌아갔다. 나는 차를 운전하여 들어오라고 했다. 이때 천둥 소리만 들릴 뿐 비가 오지 않았는데 내가 종이를 집안에 전부 가져오고 차가 간 후에야 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당시 눈물이 용솟음 쳐서 사부님의 넓은 은혜에 감사했다!

2005년 후, 우리시 대다수 자료점이 파괴되고 협조인은 납치되었고 불법 판결을 받았다. 비록 동수 자신의 문제이지만 대다수 동수는 의뢰심. 기다림, 의거하는 등에 관계된 것이 아닌가? 나 자신을 놓고 말할 때 이런 의뢰심이 있다. 예를 들면 어떤 때에는 사악을 폭로하는 원고를 쓸 때 모두 기타 자료점 동수 혹은 협조인이 보내온 자료로 하는 것이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되었다. 이런 동수들은 박해당한 후, 당지에서 아주 긴 시간에 사악을 폭로하는데 따라가지 못하며 이 의뢰심은 사람을 해친다.

이때 우리 시에서 박해로 첫 번째 동수가 세상을 떴다. 그녀의 박해안건은 국제에서 입안했고 사당 공안은 국제적으로 영향이 미칠까봐 가족을 협박해 비밀리에 사체를 화장하였기에 반달 간이나 소식을 몰랐고, 소식을 들은 후에도 정확한 소식을 몰랐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반드시 걸어 나가야 한다. 이때 사부님께서 한 사람을 배치하여 일찍 그와 함께 있던 동수와 만나게 했다. 우리들은 함께 그의 고향에 가서 그의 고향동수를 찾았지만 동수는 아주 난처해하면서 그의 식구들의 상태가 나빠 접촉하려 하지 않을 것이므로 안전에 주의하라고 했다. 우리는 함께 발정념을 하여 교란을 없앴더니 과연 박해로 희생된 동수의 언니 집을 찾아 천천히 소통한 후, 내력을 설명하고 하루 밤 숙박하면서 진실한 자료를 얻어냈다. 이튿날 돌아 올 때 차에 앉아서 이전에 내가 손을 내밀어 얻은 자료가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동수들이 다 자신을 포기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가져온 것이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 법공부를 하고 10시에 컴퓨터를 열어 원고를 완성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배가 갈로 에이는 듯이 아파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입장했지만 법리상에서 명확한 것은 사악이 폭로하는 것을 두려워서이고, 사상에서 거대한 일념이 나오면서 사부님께 가지하여 내가 사악을 폭로하는 것을 교란하는 사악을 해체하고 신체를 박해하는 사악한 생명과 요소를 해체하도록 빌었다. 십 여 분이 지난 후 통증이 없어졌으나 땀에 흠뻑 젖었다. 또 컴퓨터 앞에 앉았을 때 온 몸이 무력했고 피곤하여 어리어리하여 즉시 잘 것만 같아서 또 일어나 발정념을 하고 오늘 저녁에 반드시 원고를 완성하여 발송해야 한다. 점차적으로 청성하여 이튿날 아침에 순리롭게 발송했다.

금년 중순에 나는 새로운 환경에 갔는데 8,9월에 호구복사를 하느라고 가도, 지역사회, 파출소에서 부단히 교란했다. 말로는 사당의 국경절을 맞이한다고 하면서 며칠에 한 번씩 내가 거주한 아파트와 옆의 아파트의 벽보에 대법을 모함하는 표어가 붙었고 낙관은 지역사회였다. 이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정념을 함과 동시에 자신을 찾았는데 머리에서 단번에 “우리가 법을 실증(證實)할 때 장애가 있는 것을 보았을 때 피해 가지 말아야 하며, 그것을 향해 진상을 똑바로 알리고 가서 생명을 구도(救度)해야 한다.”(《각 지역설법2》〈2002년 워싱턴 DC 법회 설법〉)。나는 즉시 자신을 찾았다. 응당 진상편지를 써서 부쳐야 하고 최근에 세 가지 일을 하는데 해이했다. 이전에 나는 매주에 적어도 몇 십 통의 진상편지를 써서 우편번호, 주소, 설명까지 찾은 후 부동한 직업의 사람을 선택하여 부동한 내용의 진상편지를 합당한 한 장의 내용을 덧붙여 『명혜주보』혹은 『각성』,『종관천하』등에 함께 매여 내용을 배합한 후, 협조하여 자료점에 보내어 동수들이 가져가게 하고 매 개인이 몇 부씩 가지고 자신이 편지를 써서 함께 부치도록 했다. 이렇게 되면 필체가 다르기에 정체배합의 속도가 빠르고 또 잠시 걸어 나오지 못하는 동수들이 걸어 나오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도리어 잘하지 못하고 있다.

깨달은 후, 나는 즉시 환경에 익숙한 동수를 찾아 우리 둘은 오후 한 시에 지역사회와 가도를 찾고 돌아오니 한 시가 되었다. 안일심이 나와 잠시 누웠는데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갑자기 몇 번의 천둥소리가 나를 깨웠다. 내가 보니 한 시 삼십분이 되었다. 이때 밖에서 큰 비가 내려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우산을 들고 내려가 보니 동수가 이미 왔다. 비바람이 거세 우산이 거꾸로 뒤집혔지만 나와 동수는 비바람을 무릅쓰고 앞으로 걸어 얼마 안가서 정말 지역사회가 길옆에 있었다. 이때 폭우가 쏟아져 길을 걸을 수 없었다. 우리 둘은 갑자기 명확해졌다. 복도에 사회지역 인원들의 명단이 걸려 있었다. 나는 급히 이름을 적고 몇 번이나 지나가던 사람은 비를 피하러 온 사람인 줄로 알았다. 후에 우리 둘은 또 가두를 찾았고 두 곳에서 몇 십 명의 이름,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어왔다. 돌아 올 때 비가 멎었다. 돌아온 후, 다시 보니 우리 집 근처의 표어가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흔적조차 없어졌다. 옆 아파트의 표어는 떨어지지 않아서 저녁에 내가 가서 없애버렸다. 며칠이 지나 문명성시의 표어가 붙었다. 그 후 우리는 즉시 진상편지를 부쳤다. 동수의 남동생이 우편국에 있어 동수가 동생에게 몇 통 주어 지역사회 사람들에게 주었더니 그들은 왜 며칠동안 편지가 이렇게 많은가? 고 했다. 나는 그들 모두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편지을 보낸 후, 아파트 벽보는 깨끗해 졌고 한 글자도 다시 쓰지 않았고 환경도 교란 받지 않았다.

사실 우리 매개 착실히 수련하는 제자가 정법수련 중에서 대법이 나타낸 신기한 일은 헤아릴 수 없다. 제자의 매 하나의 발자국은 모두 사부님의 심혈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진상자료로부터 인터넷, 다운로드, 원고쓰기, 프린트, 조판, 소모품구입까지 모두 기본적으로 독립적으로 한다. 의뢰심을 놓고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

10년 동안 걸어온 정법수련노정을 다시 생각해보면 처음 시작에는 법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대법에 대해 세인에 대해 부면 영향을 조성했다는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특히 후에 동수와의 배합에서 안으로 찾지 않고 자신을 수련하지 못하여 자아에 집착하고 자아를 실증하고 현시하고 환희심이 생겼다. 이렇게 되어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해 고생스럽게 배치한 심성을 제고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환경을 파괴했고, 또 신변의 많은 동수들이 납치되고 불법노동교양을 받고 불법판결을 받아 박해로 세상을 뜨게 했다. 이 여러 가지 손실을 미봉할 수 없고 잃어버린 것들은 다시 찾아 올 수 없다. 유일한 것은 최후일수록 더욱 정진하고 가배로 세 가지 일을 잘하여 동수지간에 묵묵히 원융과 배합하고 공동하게 법에서 제고하여 정체적인 승화에 도달함으로써 더욱 많은 중생을 구도하는 것으로 사부님을 대하고 중생에 보답해야 한다.

허스

(밍후이왕 제6기 중국대륙 대법제자 수련심득교류회)

문장발표: 2009년 11월 16일

문장분류: 정법수련 >대륙인터넷법회글 >6회

문장위치: http://minghui.org/mh/articles/2009/11/16/21222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