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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에 법을 위해 왔으니 금생에 홍원(洪愿)을 이루리(1)—— 5년간 법을 실증하는 중에서의 수련과정

글 / 지린(吉林)대법제자 밍둬(銘 鐸)

【명혜망 2004년 10월9일】……잇달아 매일마다 아내는 새벽같이 일어나 파룬궁(法輪功)을 익혔다. 뜻밖에도 3개월 후에 기적이 나타났는데 그녀의 원래 싯누런 얼굴색에 홍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여러 해 동안 복용하던 약물도 전부 끊었다. 신체에도 힘이 생기고 아울러 또 나를 도와 집안일을 조금씩 할 수 있었다. 아내의 거대한 변화를 본 후 나도 도대체 무슨 힘이 아내를 죽을 고비에서 살아나게 할 수 있었는지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일기 시작했다. 정신작용인지 아니면 이 공법이 정말로 이렇게 큰 기이한 효과가 있는 것인지?

—–본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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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세요. 여러 동수들 안녕하세요!

나는 밍둬(铭铎, 化名)라고 부르고 남자이며, 올해 39살이다. 지린(吉林)의 모 의학원을 졸업하였고 대학학력이다. 1998년 대법을 얻었으며 그 후부터 나는 진정한 반본귀진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 역경을 겪고서 끝내 대법을 얻다

나는 1989년에 대학을 졸업하였다. 어릴 때부터 노래와 춤에 재능이 있고 체육방면에도 조금 재능이 있으며, 또 글을 잘 쓰고 용모가 단정하였고, 대학에서도 각 방면으로 아주 뛰어났다. 졸업을 앞두고 사람마다 모두 자신의 분배를 고려하였는데, 그 당시 나는 만약 병원에 가서 일을 하게 되면 평범한 의사가 될 것이고 아주 큰 발전 전도가 없겠지만, 기업은 오히려 나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로 이렇게 나는 지린의 어느 제약회사에 취직하여 행정일에 종사하였다.

어릴 적 나는 꿈이 하나 있었는데 관리가 되어 돈을 벌고 남보다 출중해져 조상을 빛내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지니고 나는 사업 중 열심히 일하며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원망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거기에다 남보다 나은 재간과 초인적인 사업능력으로 단기간에 회사의 증견간부가 되었다. 같은 해에 나는 또 모 대학 경제전업을 졸업하고 시위(市委)기관에서 일하는 재능이 뛰어난 동갑내기 위(于 )XX와 결혼하였다.

회사의 동료와 동창생들도 우리가 같은 나이에 뛰어난 사람들이라고 여겼으며 나도 어린 나이에 뜻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가정과 사업에서 일사천리였으니 이치대로 말하면 인생길에서 일체가 뜻대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왜 그런지 기쁨 후의 공허감과 적막감을 느꼈다.

어릴 때 나는 수시로 별들로 가득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묻곤 했다. 사람은 왜 사는 걸까? 생명은 어디에서 오고 또 어디로 가는 것일까?……..

1992년 기업의 경제 이익이 내리막길에 이르고 거기에 복잡한 인간관계로 인해 나는 골치가 아팠다. 재삼 고려한 끝에 나는 스스로 사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장사가 비록 어려웠지만 나는 빠른 판단 능력과 넓은 의약전업의 지식, 상업방면의 판매기술에 힘입어 아주 빨리 극히 짧은 시일 내에 약품판매업에서도 발을 잘 붙일 수 있었으며 잇달아 이윤을 올렸다. 간고한 사회 경제 불황의 환경 속에서도 잘 걸어 나왔다고 자축할 때 아주 큰 불행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25살 난 젊은 아내가 어릴 때부터 신체가 극히 허약했는데, 또 시위기관의 인간관계가 어려운 데다, 그녀는 또 천성적으로 승부욕이 강하여 모든 면에서 일등을 다투기 때문에 이런 긴장된 사업 환경 속에서 그녀의 건강 상태는 갈수록 나빠졌다. 선천적인 정신쇠약, 류머티즘, 위염, 위하수, 십이지장궤양, 심장병 등의 병 증세에 또 여러 종류의 류머티즘, 부속품 염증, 골반내 염증, 복막염, 심근염, 심장 간헐성 멈춤 등 질병이 겹쳤다. 이렇게 하여 원래 재능이 꽃필 나이에 아내는 여러가지 병에 시달리며 곳곳으로 치료하러 다녀야 했고, 일 년 중 8개월 동안을 모두 병원의 침대에서 보냈다. 회사 간부마저 여러차례 그녀를 찾아와 이야기하며 그녀에게 일찍이 사퇴하라고 권하였다…… 회사가 해마다 그녀를 위하여 의료비를 몇 만 위안 지불하는 것도 모자라 우리 집도 해마다 아내를 위하여 수 만 위안의 의료비를 써야 했다. 가정에서 갓 시작되던 즐거운 노랫소리와 웃음소리는 아내가 매일마다 탄식하고 통증에 신음하는 소리로, 그녀의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차츰차츰 바뀌어 버렸다.

아내는 신체가 허약하고 병이 많아 집안일을 하지 못하자 가정의 중임은 모두 나 한 사람에게 떨어졌다. 나는 매일 장사하는 것을 제외하고 많은 시간 동안을 집에 있었지만, 가정의 따뜻함을 얻지 못하고 보살핌을 받지 못하였기에 다른 것에서 정신적인 위안을 찾기 시작했다. 매일마다 술을 마시고 주식을 사고 며칠씩이고 밤낮으로 마작을 하며 놀았다…… 가정에 낀 불행은 아내와 나의 결혼생활이 깨어질 듯한 위험을 수시로 불러일으켰으며, 나는 우리 가정의 곳곳에 위기가 도사리고 있음을 느꼈다. 어떤 때에는 밤이 깊었지만 전혀 잠을 이룰 수 없던 나는 곤히 잠든, 허약하고 병이 많은 아내를 내려다보며 마음속에서는 악념이 생기기도 했다. 나는 무슨 방법을 찾아서 “당신을 도울 것이고”, 당신도 해결될 것이다. 안락사 시킬까 아니면 다른 방법을 취할까… …

아내는 병 때문에 의사를 함부로 찾으며 각종 비싼 한약 양약을 복용하였다. 각 유형의 의학전문의를 무수히 찾았지만 근본적으로 효과가 없었다. 우리가 결혼하고 1990년에 산 선풍기는 아내의 각종 류머티즘이 바람을 쐬면 안 되므로 5년 동안 한번도 사용하지 못하였다. 그녀는 의사를 찾는 데 희망이 없자 불교를 믿기 시작하며, 여우 족제비, 늑대(狐黄白柳) 등 난잡한 각종 이른바 치료방법을 찾았지만 효과는 미약했다. 아내는 또 각종 기공을 배우는 가운데 신체는 좋았다 나빴다 했는데 근본적으로 병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처음에 아내가 각종 공법을 배울 때 나는 또 극력으로 반대하였다. 그것은 내가 의학을 배웠기에 실증과학이 나의 전반 대뇌를 점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내가 고통스러워하고 나 또한 도울 방법이 없자 나는 아내가 무엇을 배우고 싶어 하면 무엇을 배우게 하자! 죽은 말을 산 말로 여기고 치료하는 셈 치자! 라고 생각했다.

1997년 8월의 어느 날 아내는 지린시의 어느 관광구역으로 회의하러 갔다가 돌아와서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나에게 말했다. “저는 파룬궁의 책 한권을 보았는데 파룬궁이 불가(佛家)였어요.” 이런 정경을 나는 일찍이 습관처럼 보아왔기에 생각없이 말했다. “배우고 싶으면 배워요. 반대하지 않으니 병을 치료할 수 있으면 돼요.”

잇달아 매일마다 아내는 새벽같이 일어나 파룬궁(法輪功)을 익혔다. 뜻밖에도 3개월 후에 기적이 나타났는데 그녀의 원래 싯누런 얼굴색에 홍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여러 해 동안 복용하던 약물도 전부 끊었다. 신체에도 힘이 생기고 아울러 또 나를 도와 집안일을 조금씩 할 수 있었다.

아내의 거대한 변화를 본 후 나도 도대체 무슨 힘이 아내를 죽을 고비에서 살아나게 할 수 있었는지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일기 시작했다. 정신작용인지 아니면 이 공법이 정말로 이렇게 큰 기이한 효과가 있는 것인지? 아내와 함께 연공하는 동수 두 명이 늘 우리 집에 와서 단체 법공부를 하였다. 그 날이 1998년의 어느 날이었는데 그 두 명의 여동수가 나의 집에 와서 나에게도 법공부하고 연공하라고 권하였다. 나의 아내와 두 명의 동수는 항상 함께 법리상에서 교류하였다. 수련에 대하여 전혀 이해가 없는 나는 이날 갑자기 그녀들에게, “나도 수련하겠습니다. 아울러 여래불로 닦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그녀들 세 명이 놀라며 나에게 물었다. “어째서 여래불을 닦으려고 합니까?” 나는 그녀들에게 여래불이 사람을 제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을 한 후 나마저 놀랍게 느껴졌는데 나는 무엇이 여래불인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후에 나는 수련한 후 알게 되었는데 그 말은 아마도 나의 진념에서 나온 것이었고 아마도 나의 멀고 먼 사전(史前)의 홍원이었을 것이다!

이어서 1998년 8월 나도 정식으로 수련자의 행렬에 들어섰다. 나와 아내는 5살 난 딸도 데려와 우리 세 사람은 매일마다 법공부하고 연공하고 함께 교류하였는바, 온 가족은 수련의 낙이 샘솟듯 했다. 생활 속에서 우리 세 사람은 대법표준에 따라 엄격하게 자신을 요구하였고 아이마저 똑같았다. 비록 우리의 가정생활 조건이 비교적 좋았지만 돈 한 푼 헛되이 쓰지 않았다. 아이에게 사 줄 새 옷과 간식을 사는 돈도 아끼고 대법서적을 사서 인연이 있어 법을 얻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때 나는 매일마다 최소한 《전법륜》 3강의를 읽었고 그 외에 사부님의 해외에서의 설법 한 권을 읽었다. 그 당시 매일마다 법공부하는 것은 정말로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는 것과 같았다. 일년이 안 되는 사이에 《전법륜》을 백번이 넘도록 읽었다. 아울러 사부님의 해외에서의 설법 녹음, 비디오에서의 매 한가지 문제를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외울 수 있었다. 매일마다 법공부하고 연공한 시간이 모두 16~17시간이었고 이것은 또 나의 이후의 정법수련에서 견실한 기초를 닦아주었다.

* 대법의 신기함을 느끼고 후천관념을 타파하다

나는 의학을 배운 출신이고 어릴적부터 받은 교육 영향으로 실증과학이 나의 대뇌를 완전히 점거하고 있었다. 나는 보면 믿었고 보지 않으면 믿지 않았다.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 특히 과학연구를 하고 일부 현대과학기술에 종사하는 지식인들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내가 파룬다파를 배운 초심은 수련이었지 신체를 튼튼히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책 속에서의 일부 높고 깊은 법리에 대하여 반신반의하였다. 그러나 끊임없이 법공부하고 수련하는 가운데 대법의 신적(神迹)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홍지 사부님께서 <<전법륜>>책에서 말씀하신 연공 중에서의 일부 감수를 나는 모두 직접 느끼었다. 관정, 왠선(元神)이 위치를 바꾸는 것과 5조공법을 연마할 때 계란껍질 속에 앉은 것과 같은 미묘함, 2조 공법을 연마하면서 포룬할 때 다른 공간의 신체가 비할 바 없이 거대해지며 무한히 큰 천체를 뚫고 나가는 것… … 각종 신기한 감수는 나로 하여금 이 한부의 우주대법 앞에서 진심으로 탄복하게 하였다. 아울러 이홍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매 한마디가 모두 진실하고 모두 진리임을 차츰차츰 느꼈다.

* 풍운이 돌변하여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다

1999년 7월19일 우리 일가족 세 명과 동수 6명은 중앙의 소수 악인들이 파룬궁을 금지하기로 결정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후 대법제자로서 우리는 마음이 조급해졌는데 날개를 꽂고 베이징으로 날아가 중앙 지도자에게 대법의 진실한 정황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그 당시 우리 9명(어른 6명, 아이 3명)은 가장 빠른 방법으로 베이징에 들어가 호법하기로 결정하였다. 우리는 그 당시 함께 제다(捷達) 승용차 2대를 빌렸는데 비용은 4천 위안이었다. 가장 빠른 속도로 지린에서 하루 하고 반나절동안 1200킬로를 달려 7월21일 저녁 11시에 베이징 톈안먼에 도착하였고 후에 무사히 돌아갔다.

돌아온 후 우리는 현지에서 몇 차례 단체교류를 하였고 후에 또 수많은 대법제자들이 계속해서 베이징에 가서 대법을 실증하였다. 1999년 9월 6일 나와 세 명의 동수(그들 세 명은 이미 박해로 사망함)는 또 다시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였다. 10월11일 지린시의 북경주재 사무실의 악경에 의해 압송되었다.

나와 아내는 현지의 신문과 방송국에 의해 파룬궁의 “우두머리”로 모함되었는데 먼저 지린시 구치소에서 3일간 구류된 후 제3 간수소에 보내져 불법으로 구류되었다. 제 3간수소에서 나는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 전에 재소자들이 있는 곳에 머문 적이 없었고 거기에 접촉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회상의 찌꺼기들이라, 매일 하루가 일년과 같이 길게 느껴졌다. 내가 시 간수소에 있는 기간 집안의 가족이 사람에게 부탁하여 4,5만 위안의 돈으로 나를 “사서” 나오게 하였다. 그러나 전제 조건이 내가 입으로 수련을 포기하겠다고 보증하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려는 마음이 급하여 추세에 따라 마음을 어기고 대답하였다.(편집자 주: 서명한 엄정성명은 유형별로 발표함)

* 갑절로 보완하여 자신의 언행으로 대법을 실증하다

집에 돌아왔으나 아내는 여전히 불법으로 제1간수소에 수감되어 있었고 아이도 장모께서 데려갔기에 나는 친척 한 명을 고용하여 약품도매부의 경리로 임명하였다. 마음을 어기고 간수소에 돌아온 후 나는 내심에서 수련의 엄숙성을 느꼈다.

1999년 7월 20일 이전에 내가 입에 항상 걸고 있었던 한마디가 바로 “나는 잘 닦지 못하였다”였다. 그럼에도 또한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단호하게 수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고험이야말로 나의 진실한 심성의 표현이었던바, “생사란 큰소리 쳐서 될 일이 아닌지라”(<<심자명>>)였다! 관건적인 때에 법을 실증하지 못하여 나는 사부님과 기타 대법제자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 당시 나는 이미 잘못했으니 끝까지 잘못해보자! 라고 생각했다. 나는 수련을 포기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장사관계로 나는 술집, 사우나, 나이트클럽, 호텔 등의 장소에 빈번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홀몸으로 아내가 곁에 없는 터라 마음 속으로 닦지 않으면 사회의 유행에 따르자고 생각했다. 나는 주관적인 생각으로 수련을 포기하였지만 행위에서도 사회를 따라 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회의 금전, 지위, 미녀를 마주하였을 때 나는 또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이때 나는 인생의 길을 이미 끝까지 간 것임을 느끼었다. 나는 마음을 조용히 하고 자세히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힘이 나를 물결 따라 흘러가지 못하게 하는가? 후에 나는 끝내 알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파룬다파(法輪大法)의 쩐싼런(眞善忍)이었다. 이 한 부의 대법은 나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싹이 트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그 후부터 한 가지 생각을 하였는데 그것은 어떠한 외재적인 힘도 더 이상 나의 금생의 수련의 길을 개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명백해진 후 나는 새롭게 대법의 서적을 보기 시작하였다. 이 기간에 아내는 여러 차례 간수소에서 나에게 서신을 보내 내가 잘못을 고치고 계속 수련해나가는 것을 격려하였다. 매번 아내가 나에게 쓴 편지를 보면서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거의 모든 눈물이 매마를 정도로 울었다. 사람들이 대법을 포기한 그 한 단락의 고통스러운 경력을 말할 때마다 나는 아주 후회스러웠다. 나는 한 대법제자로서 관건적인 시각에 법을 실증하지 못함에 대하여 평생 유감을 느낄 것 같았다.

이런 후회와, 갑절로 보완하겠다는 심리를 안고 나는 수련에서 더욱 정진했으며 사업에서도 더욱 열심히 일하였다. 나는 수하의 매 한명의 직원들을 선하게 대할 수 있었고, 업무에서도 생활에서도 그들을 도와줄 수 있었으며, 게다가 대법의 법리를 생활 속의 일언일행에 관통시킬 수 있었기에 도매부는 과거 혼란하던 관리 상태에서 아주 빨리 정상적인 궤도에 들어섰고 경제적 효과도 매달 차츰 향상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회사 전체의 인간관계가 마치 한 가족처럼 그렇게 화목하고 한데로 뭉치게 된 것이다. 회사의 동료와 관련부문 사람들마저 대법제자의 고상한 품격과 뛰어난 업무능력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얼마 안가서 회사에서 또 세 명이 계속 법을 얻었다.

그때는 2000년, 매일 매일 사업은 아주 바빴고, 나는 일체의 시간을 다그쳐 법공부하고 연공하였다. 나는 사장과 간단한 규정을 약정하였다. 즉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 6시까지는 나의 근무 시간이고 6시 이후는 나의 개인 시간이므로 특수한 정황과 무슨 일이 없으면 나의 수련을 방해하지 말라고 하였다. 나는 매일마다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서류가방을 끼고 다녔지만 속에는 대부분 각종 대법서적이었다. 몇 분 동안을 가는 길에서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사부님의 설법 카세트를 들었다. 가끔씩 “바쁜” 정황 하에서는 연속 한 달 동안 밤마다 1, 2시간만 잤다. 매일마다 시간이 날아가는 듯이 재빨리 흘러감을 느끼는 속에서 비록 아주 충실했지만 내 마음 속에는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관건적인 시기에 나는 대법을 실증하지 못하였는데 원만할 수 있겠는가?였다. 이 문제는 줄곧 나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아주 오랫동안 맴돌고 있었다.

어느 날 새벽 3시가 조금 넘어서 나는 다리를 틀고 제 5조 공법을 하였다. 갑자기 칠흙같은 방안에서 빛이 나며 금빛 찬란하였다. 내가 눈을 뜨고 보니 원래 가부좌한 내가 하나의 금체(金體)였으며 금빛 찬란하게 하나의 빛 테두리 속에 앉아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당시 잘못 보지 않았나 하여 자세히 보았지만 여전히 그러하였다. 이런 장면은 10여 분 동안 지속되었다. 공법 연마를 마치고 다리를 내릴 때 나는 전혀 희열을 느끼지 못하고 반대로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나는 참을 수 없는 눈물을 끝없이 쏟았다. 이것은 자비하신 사부님께서 내가 지금 끝까지 수련을 견지하기만 하면 여전히 원만할 수 있다고 점오해 주신 것이다……

2000년 7월 나는 몇 명의 대법제자들과 함께 교류하다가 현지의 사악에게 체포되었고 또 한번 간수소에 보내졌다. 이번에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모두 사악을 제지하고 법을 실증하고자 했기에, 사악의 혹독한 매질로 나는 허리에 중상을 입고 걷지 못하였으며 28일 이후 무죄 석방되었다.

(계속)

문장완성:2004년 09월16일
문장발표:2004년 10월09일
문장갱신:2004년 10월09일 02:51:47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4/10/9/84354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