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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둥성 여자감옥에 세 차례 갇힌 비젠훙 수련생 건강상태 심각

[밍후이왕] (밍후이왕 통신원 산둥성 보도) 비젠훙(畢建紅) 여사는 옌타이(煙台)시 즈푸(芝罘)구 파룬궁 수련생이다. 2006년 10월 15일 납치된 후 불법으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산둥성 여자감옥에서 두 차례 박해받고 위독한 상태로 풀려났다. 2018년 11월 초 산둥성 여자감옥에 납치돼 박해받은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이며, 현재 2년이 넘었다. 그녀는 박해받아 휠체어에 앉아있고 매일 세 차례 강제 음식물 주입을 당하고 있다. 가족은 비 씨의 건강상태를 심히 염려하고 있다.

휠체어 신세가 되다

2018년 10월 30일 오전 파룬궁(法輪功) 수련생 비젠훙은 옌타이시 푸산(福山)구 공안분국 허빈로(河濱路)파출소의 악한 경찰(이하 악경)에게 납치됐다. 비 씨는 납치 당일 정오부터 식사를 걸러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비 씨의 신체가 각종 건강 지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옥 경찰은 비 씨를 박해했다. 2018년 11월 초 비젠훙은 세 번째로 산둥성 여자감옥에 납치돼 박해받았다. 그 후 비 씨는 줄곧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했다.

비젠훙(畢建紅)

2018년 11월 22일 비 씨의 어머니가 감옥에 면회 간 당시 감옥 경찰은 비 씨가 다리에 문제가 있어 휠체어를 탄다고 했다. 그러나 비 씨는 휠체어를 밀고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끌려 나왔다.

유리를 사이에 두고 있던 비 씨의 모친은 딸이 질질 끌려 나와 자리까지 다 오지 못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감옥 경찰은 모친에게 “돌아가세요. 이 사람은 지나가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연로한 모친은 칼로 가슴을 도려내듯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딸이 박해당해 이 지경이 되었다. 모친은 “나는 딸과 이야기 할 것이다!”라고 소리 질렀다.

비 씨는 면회석까지 끌려왔으나 움직이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있다가 기운 없이 일어섰다. 모친이 끌어당기라고 소리치자 감옥 경찰이 비 씨를 잡아당겨 의자에 앉혔다. 비 씨는 모친에게, 감옥 경찰들이 자신을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자게 해 다리가 감각을 잃었다고 말했다.

2020년 12월 전 산둥성 여자감옥에서 알려진 바에 따르면, 감옥 측이 비젠훙을 여러 번 감옥 병원에 데려가고 감옥 경찰이 강제 음식물 주입을 매일 세 차례 실시한 지 2년이 넘었다. 비 씨는 여전히 휠체어에 앉아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고 있으며, 그녀를 감시하는 죄수가 아무도 비 씨와 말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 전인 2007년 3월 23일 비젠훙은 불법으로 징역 12년을 선고받은 후, 2007년 4월~2009년 11월, 2011년 1월~5월에 걸쳐 극도의 고문에 시달리고 정체불명의 약물을 주사 당한 후 두 번이나 생명이 위독했다. 감옥은 책임을 회피하며 비 씨를 귀가시켰다.

3년의 억울한 옥살이, 고문으로 생명 위독

2006년 10월 15일 비젠훙은 대법의 진상을 알리는 자료를 제작한 이유로 경찰에게 납치되었다. 경찰은 불법 감금 기간 취침 금지 및 주먹과 발로 구타하는 등 폭력으로 ‘자백’을 강요했다. 또 비젠훙을 의자에 묶어놓고 진한 소금물을 주입했다. 후에 또 두 손을 뒤로 묶어 상부 난방 배관에 매달아 두 발이 땅에 거의 닿지 않게 했다.

中共酷刑示意图:吊背铐
중공 고문 재연도: 등 뒤로 수갑 채워 매달기

2007년 3월 23일 비젠훙은 구치소에 불법으로 5개월 15일간 갇힌 후 옌타이 법원 라이산(萊山) 분국에서 불법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2007년 4월 23일 비젠훙은 산둥성 여자감옥에 끌려갔다. 그날 저녁 비젠훙은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검은 소굴인 집훈대(集訓隊)에서 박해받았다. 그곳에서 감옥경찰 및 지령받은 죄수가 매일 아침 6시부터 밤 12까지 교대로 생억지와 그릇된 주장을 비 씨에게 주입했다. 비 씨가 ‘전향’을 거부하자 이들은 세워둔 채로 잠을 자지 못하게 하고 때리고 욕하는 등 악랄한 수단으로 비 씨를 굴복시키려 했다.

비젠훙이 줄곧 ‘전향’을 거부하자 고문 강도를 높였다.

2007년 8월 하순, 어느 야밤에 사오(邪悟)한 차오루이메이(喬瑞梅)라는 자가 5, 6명을 대동해 비 씨를 구타해 비 씨는 두 다리에 감각이 없어지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다.

비 씨가 확고하게 ‘진선인(真·善·忍)’을 수련하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잘못이 없다. 감옥의 그런 사악한 환경에서 비 씨는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했다.

중공 고문 재연도: 구타, 머리 부딪치기

그때는 겨울이었다. 이들은 영하 10℃의 추위에 감방 창문을 열어놓고 비 씨에게 솜옷을 입지 못하게 하고 강제로 베란다에 앉혀놓아 몸이 얼게 했다. 비 씨는 단식, 강제 음식물 주입, 혹한까지 감당했다. 감옥경찰 및 지령받은 죄수들은 그런 비 씨에게 구타까지 가했다. 비 씨는 늘 구타로 온몸이 아파서 잘 때 돌아눕지 못했다. 감당하기 힘들었던 비 씨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외쳤다. 감옥 경찰의 지시를 받은 죄수가 비 씨의 얼굴에 냉수를 부어 전신이 젖고 온몸이 얼음장처럼 되었다.

중공 고문 재연도: 냉수 끼얹기

그때부터 비 씨는 매일 아침 5시 반에 베란다에 끌려나가 자정까지 추위 속에 있었다. 비 씨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솜옷도 입지 못하여 얼어 굳었다. 이렇게 날이 거듭되자 비 씨는 서서히 피골이 맞닿고 심장에 문제가 생겼다. 이들은 비 씨가 버티지 못하자 하는 수 없이 병원에 이송했다.

비젠훙이 다소 호전되자 이들은 다시 박해하기 시작했다. 한바탕 구타한 후 비젠훙을 온종일 서 있게 하고 잠을 자지 못 하게 했다. 비젠훙은 쇠약해져 오래 서 있을 수 없었다. 이들은 의자를 사용하여 비젠훙 주위로 사면을 의자로 막고 몇 명을 의자에 앉아 눌러놓게 하고, 의자로 비젠훙의 무릎을 받치는 식으로 종일 서 있도록 강요했다.

비 씨는 장기간 서 있자 종아리가 부어 허벅지보다 굵어져 화장실에 가도 쭈그리고 앉을 수 없었다. 한번은 비 씨가 죄수복을 입지 않자 10여 일 발가벗기고 팬티만 입게 했다.

비젠훙이 ‘전향’을 거절하고 ‘진선인(真·善·忍)’ 신앙을 포기하지 않자 감옥의 지령을 받은 죄수들은 미친 듯이 구타했다. 추슈신(邱秀欣)이 앞장서 구타하고 죄수 10여 명은 비젠훙을 바닥에 쓰러뜨려 입을 발로 차고 머리를 밟고 신발 바닥으로 뺨을 때리고 가슴을 걷어차고 목을 졸랐다. 비 씨의 머리카락을 한 줌 한 줌 잡아 뽑아 몸과 바닥에 온통 머리카락이었다.

한바탕 때린 후 또 비젠훙을 자지 못하게 했다. 죄수 민후이룽(閔惠榮), 허푸샹(何福香), 왕춘옌(王春豔), 쉬융칭(徐永卿), 류슈윈(劉秀雲) 등이 교대로 비 씨를 감시했다. 비젠훙이 졸면 이들은 풍류정(风油精)을 비 씨의 얼굴 전체에 발랐다. 비 씨는 눈이 타는 듯이 뜨겁고 아팠다. 허푸샹은 화장실에서 구정물 한 통을 가지고 와서 비 씨 앞에 놓고는 더 졸면 머리를 구정물에 밀어 넣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먹지도 마시지도 취침도 하지 못한 채 4일을 지속했다. 이들이 보기에 비 씨가 더는 안 될 것 같아 닷새째 병원으로 이송하려 했으나 비 씨가 거부했다. 이들은 비 씨를 바닥에 쓰러뜨린 채로 질질 끌어 차량까지 갔다. 비 씨는 등이 까져 피가 흐르고 왼쪽 눈은 맞아서 어혈이 생기고 멍이 들었으며 물체를 잘 식별하지 못했다.

중공 고문 재연도: 끌고 다니기

병원에 온 후 이들은 아침 6시면 비젠훙을 작은 의자에 앉게 하고 조금이라도 침대 쪽으로 기대면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찼다. 병원에 오던 중 비 씨는 등 전체가 심하게 긁혀 피와 살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날이 더워 땀이 나자 염증이 생기고 화농이 생겨 피고름이 흘러나와 옷이 달라붙었다. 류신잉(劉新穎)은 비젠훙의 달라붙은 옷을 힘껏 떼어내고 등의 상처를 힘껏 두드려 옷이 다시 피고름에 달라붙게 했다.

류신잉은 때로 발로 비젠훙을 힘껏 차며 살기를 띠고 말했다. “나는 널 고통스럽게 하고 생고생을 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하고 사는 것이 죽느니만 못하게 할 것이다.……”

류신잉은 때로는 때리다 지치면 발로 비 씨의 발가락을 힘껏 밟았다. 비젠훙의 왼쪽 셋째 발가락은 류신잉에게 밟혀 피부가 짓물렀다. 류신잉은 짓눌린 셋째 발가락을 밟으며 표독하게 말했다. “열 발가락은 심장과 연결되어 있다. 우린 널 혼낼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네가 나를 어떻게 하겠는지 보겠다.……”

후에 치료할 때 의사는 비 씨 등의 피부가 상해 퍼렇게 되었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링거를 맞으며 몸이 호전되자 셋째 발가락의 상처는 반년이 넘자 회복되었으나 흉터가 남아 있다.

2009년 11월 비젠훙은 박해로 생명이 위독해졌다. 산둥성 여자감옥은 책임이 두려워 비 씨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4개월 수감 박해에 재차 위독

비 씨는 집으로 돌아온 후 법공부와 연공을 통해 거의 건강을 회복했다. 옌타이 ‘610’(파룬궁 박해 전문 불법 기구)은 비젠훙의 건강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산둥성 여자감옥과 결탁해 비젠훙을 가둬 계속 박해하려고 시도했다. 비젠훙은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 유랑했다.

2010년 12월 30일 저녁 비젠훙은 진상 자료를 배포하던 중 옌타이시 즈푸구 공안분국의 얼마로(二馬路)파출소 악경에게 납치되었다. 2011년 1월 1일 오전 산둥성 여자감옥 악경은 차를 몰고 옌타이시 즈푸구 공안분국의 얼마로(二馬路) 파출소로 달려가 비젠훙을 ‘수감’하려고 했다. 그들은 비 씨를 산둥성 여자감옥으로 끌고 가 박해했다.

집훈대(集訓隊)에 도착한 후 쉐옌친(薛彥勤), 쉬위메이(徐玉美), 쑨샤오리(孫曉莉)의 선동으로 지령을 받은 죄수는 비젠훙에게 온갖 고통을 가했다. 비젠훙은 단식으로 항의하면서 박해를 저지했지만,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을 당했다. 박해로 사경을 헤매자 그들은 비젠훙을 병원으로 옮겼다.

병원이 비 씨에게 약물을 주사한 뒤 비 씨는 전신이 괴롭고 걷지 못했다. 2011년 1월 26일 가족이 비 씨를 보러 갔을 때 비 씨는 이미 실신했다. 비 씨가 몸이 다소 호전되자 감옥은 다시 박해했다.

酷刑演示:打毒针
고문 재연: 독물 주입

2011년 3월 17일 감옥은 갑자기 가족에게 전화로 비 씨가 위독하며 지난(濟南) 경찰병원에서 응급처치 중이라고 통지했다.

그 시각 비 씨는 이미 물조차 들어가지 않는 상태로 몸 전체가 쇠약해져 생명이 위독했다. 가족이 석방을 요구하자 감옥 측은 이미 옌타이 ‘610’에 문의했으나 ‘610’이 동의하지 않으면서 병원에다 비 씨에게 계속 주사를 놓으라고 지시했다고 전했다.

비 씨의 어머니는 산둥성 정부, 성 사법청, 성 감옥관리국에 서신을 보내 산둥성 여자감옥이 딸을 박해한 정황을 폭로했다. 비 씨의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고발하는 서신에 “나는 매일 눈물로 지새우며 딸이 감옥에서 매 1분 사이에도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정말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나는 선량한 사람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면 좋겠습니다. 나는 선악에는 반드시 보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특히 파룬궁을 박해한 사람은 이미 많은 악한 응보가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나는 딸을 잃을 수 없습니다. 나의 외손녀도 어머니를 잃을 수 없습니다. 선량한 사람이 나의 자식을 구해주기를 바랍니다!”라고 썼다.

2011년 5월경 산둥서 여자감옥은 비 씨가 생명이 위독해지자 그대로 옌타이에 있는 집으로 돌려보냈다.

비젠훙이 ‘진선인(真·善·忍)’을 확고히 수련한 것은 잘못이 없다. 파룬궁 진상 자료를 제작하고 배포해 사실을 밝힌 것은 중국 헌법에 부합된다. 현재 선량하고 정직한 비젠훙은 세 번째로 산둥성 여자감옥에 끌려가 박해당해 휠체어 신세가 되었고 휠체어에 앉아 하루 세 차례씩 2년간 관식을 당하는 고통을 받고 있다. 감옥이 소식을 봉쇄해 현재 비젠훙이 박해당한 자세한 정보는 더 조사해야 한다.

관련 박해 기관과 박해자의 정보는 원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원문발표: 2021년 3월 5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3/5/42171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