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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정, 주하이시 제2구치소 고문으로 2002년 사망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광둥보도) 위안정(袁征)은 2001년부터 2002년까지 주하이시(珠海市) 제2구치소에 불법 감금당한 기간에 이름을 말하지 않아 내내 ‘무명’으로 알려졌다. 2002년 6월, 구치소에 수감당한 사람이 말하길 ‘무명’은 ‘아마 영원히 나오지 못하는 곳’으로 보내졌을 것이라고 전했다. 더는 그녀를 본 사람이 없다.

2007년, 가족이 아주 고생하며 어렵게 민간인을 찾아다니며 조사했는데 위안정(‘무명’)이 2002년 6월 17일, 38세 나이에 주하이시 제2구치소의 고문 박해로 사망했음을 확인했다. 2007년 12월 29일에야 가족은 사망 증명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袁征

위안정(袁征)

위안정은 모스크바에서 다년간 유학했고, 그 후 무역을 했다. 99년 초, 귀국해 친척을 방문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파룬궁을 배웠다. 위안정은 아름답고 우아하며 살결이 곱고 말이 많지 않았다. 언행도 수련생의 풍모가 배어 있었고 사람에게 일종의 성결하고 청순한 감각을 주었다.

2001년 9월 10일, 위안정은 길가의 모 복사가게(그때 주민들은 모두 컴퓨터와 복사기가 없었음)에서 ‘파룬따파(法輪大法)는 정법이다!’ 등 480부의 자료를 복사했다. 불행하게 악의의 신고를 당해 주하이시 제2구치소에 불법 감금됐다.

주하이시 제2구치소의 파룬궁수련생 ‘무명’

주하이시 제2구치소에 갇혔을 때, 위안정은 불법 감금에 항의하며 죄수복을 입지 않았고, 인원보고를 하지 않았으며, 이름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도관에게 혹독한 구타를 당했다. 교도관은 그녀를 ‘무명’이라고 불렀다.

그곳에 불법 감금당한 파룬궁수련생과 죄수는 단지 ‘무명’은 북방 사람의 말투며 제2구치소에서 박해를 가장 심하게 당한 파룬궁수련생이라는 것밖에 모른다.

위안정은 사악에 협력하지 않고 믿음을 견지하며 연공을 견지했다. 악독한 경찰은 악독한 죄수와 졸개들에게 지시해 ‘꽃가지(花枝條)’(철선 겉면에 테이프를 감았음)로 극히 야만적인 폭력을 행사해 구타했다. 위안정이 단식으로 항의하자 또 야만적인 수단을 취해 강제로 음식물을 주입했는데, 그녀의 등에는 온통 욕창이 생겨났다.

파룬궁수련생 천진(陳勁), 장칭윈(張清雲), 왕즈쥔(王志君)이 그곳에 감금당했을 때, 어느 한 번은 35창(三十五倉)에서 ‘무명’을 혹독하게 구타하는 소리를 들었고, 동시에 “박해를 멈추시오, 대법제자는 무죄입니다!”하고 높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酷刑演示:坐飞机,将法轮功学员整个身体抬起来,平着身子,将头撞向墙

고문 재연: 비행기 타기-파룬궁수련생의 몸 전체를 들어서 몸을 평평하게 하고 머리를 벽에 부딪친다

교도관은 ‘무명’이 믿음을 견지하자 다른 사람[예컨대 칭화(清華)대학 학생 파룬궁수련생 리춘옌(李春燕) 등]에게 영향을 줄까 두려워하며 ‘무명’이 다른 사람과 말하지 못하게 했고 또 계속해 호실을 바꿨다. ‘무명’에 대한 고문 박해의 죄악을 덮어 감추기 위해, 또 임시로 34창(三十四倉)을 열고 단독으로 감금해 ‘비행기 타기(坐飛機)’고문, ‘사인침대에서 늘리기(抻死人床)’ 등 고문을 자행했다. 어떤 파룬궁수련생은 34창에서 악독한 경찰이 혹독하게 구타하고 욕하는 소리를 늘 듣곤 했는데, 그들 모두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酷刑演示:死人床

고문 재연:사인침대(死人床)

어느 날, 1999년 7월 20일 이전에 시내에서 단체 연공할 때 위안정을 알았던 한 사람이 (옥중에서) 멀리 ‘무명’을 보고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다. “저 사람은 위안정이 아닌가!” 그녀는 위안정이 고문 학대로 그 꼴이 된 모습을 보고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그러나 위안정을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

주하이시 샹저우구(香洲區) 검찰원은 위안정이 박해로 정신이 심각하게 혼미해진, 사망하기 4일 전인 2002년 6월 13일 기소서류를 꾸며 위안정을 불법적으로 공소했다. ‘죄증’은 복사 가게에서 ‘파룬따파는 정법이다’ 등 8종 480부의 전단을 복사했다는 것이다.

2002년 6월 어느 날, 수감된 자가 ‘무명’이 들려가는 것을 보았는데, 당국에서는 6월 15일 샹저우구 인민병원으로 갔다고 말했다. 소식에 따르면, 병원에서 위안정은 이미 매우 혼미했고 혈소변(血性尿液)에 전신이 쇠약하였으며 사지와 얼굴은 심각한 부종 상태가 나타났다고 한다. 게다가 전신이 혈반이고 상처투성이였으며 욕창으로 문드러졌었다.

위안정, 이 젊고 생생하던 생명이 주하이시 제2구치소에서 9개월 동안 불법 감금당하며, 잔인무도한 경찰에 의해 고문과 혹독한 구타 등의 시달림을 당했다. 결국 2002년 6월 17일 사망했다. 사망 원인을 경찰은 ‘심각한 영양 결핍’이라고 썼다. 주관자인 여 악경 우×펀(吳×芬)은 수감자들에게 “‘무명’을 매우 특별한 곳으로 보냈습니다!”고 말했다.

위안정 다년간 ‘실종’, 가족은 고생하며 찾다

위안정이 납치, 불법 감금당한 후, 이름을 말하지 않았던 까닭에, 가족은 줄곧 위안정이 실종된 줄로 여겼고 찾아도 효과가 없었다. 위안정이 박해로 사망한 후에도 당국은 ‘무명’이 위안정임을 승인하지 않았다. 심지어 지문, 사진, 몸 특징 등 법률적으로 유효한 증거가 있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무명’이 위안정임을 승인하지 않았고 가족이 확인하고 인수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며, 가족에게 친자 감정을 하도록 했다.

친자 감정을 하자, 결과는 완전히 부합되었고 2007년 말이 되어서야 박해로 사망한 위안정의 사망 증명을 발급했다.

그러나 위안정은 억울하게 사망했다. 당국은 줄곧 (위안정이) ‘유죄’라고 규정하고 합리적인 처리를 해주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가족은 골회(화장한 시신)를 받지 못했다. 가족은 억울한 누명을 깨끗이 벗을 그 날을 기대하고 있다.

문장발표: 2016년 7월 21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박해사망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7/21/33162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