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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차례 노동교양을 당하고 집이 있어도 돌아가기 어려운 여 약사가 장쩌민 고소

[밍후이왕] 구수룽(顧淑榮)은 원래 헤이룽장성 지시(雞西)시 광무국 정신병원의 약사였다. 그녀는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 질병이 없이 온몸이 가벼웠다. 그녀는 대법 사부님의 가르침에 따라 ‘진선인(眞善忍)’의 표준대로 자신의 심성을 수련해 병이 든 전 남편에 대해 과거의 나쁜 감정을 잊고 그가 완쾌될 때까지 보살펴주었다.

하지만 장쩌민이 발동한 파룬궁에 대한 광적인 박해 중 구수룽은 세 차례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당해 각종 시달림을 당했다. 지금도 그녀는 여전히 외지에서 떠돌아다니며 집이 있어도 돌아오기 어렵다.

다음은 구수룽의 고소장 중 일부 내용이다.

대법을 수련해 심신이 거대하게 변해

나는 예전에 뇌동맥경화, 두통, 신경쇠약, 경추 골극, 요추 골극, 류머티즘, 허리와 다리가 아픈 증상, 배가 부어오고 혹이 가득 생겨나는 등 여러 증상을 앓았는데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심했다.

1996년 12월, 친구가 나에게 ‘전법륜(轉法輪)’ 한 권을 선사했고 이 때부터 나는 파룬따파 수련에 들어섰다. 몸은 매일매일 좋아졌는데 정말 질병 없이 온 몸이 가벼웠다. 수련해서부터 지금까지 약 한 알 먹지 않았다. 대법을 수련한 후 나는 ‘진선인(眞ㆍ善ㆍ忍)’의 표준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좋은 사람으로 됐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에 마주치면 먼저 다른 사람을 위해 고려하며, 또 때려도 되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말대답하지 않도록 요구하셨다. 나는 이렇게 자신을 요구했다.

나와 손아래 시누이가 수년간 쌓이고 쌓인 원망은 수련 중에서 풀렸다. 그녀의 아이가 우리 집에서 1년 동안 먹고 입고 거주했으나 나는 전혀 원망하지 않았다. 이것은 과거에는 해낼 수 없었던 일이었다. 시어머니와 쌓이고 쌓인 원망도 자발적으로 풀었다. 시어머니는 임종 전에 우리 가족 앞에서 나에 대해 “이 몇 해 동안 자네에게 미안했네”라고 말씀하셨다.

수련 전 남편은 술주정을 부리고 술을 너무 마셔서 알콜중독, 알콜성 간염, 환청 환시 증상이 나타났으며 정신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에게 성심으로 인과 관계를 이야기하며 그에게 만약 술을 끊지 않는다면 아이와 이 가정에 대해 모두 책임지지 않는 것임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1995년에 이혼하게 됐다.

1998년 9월, 전 남편이 신장병, 장결핵, 간경화 등 여러 질병에 걸려 입원했다. 아들은 나에게 아버지를 보살펴 줄 사람이 없다고 했다. 나는 과거의 나쁜 감정을 잊고 자발적으로 병원으로 가서 그를 보살펴 주었다. 밤낮으로 혼자서 돌봤는데 3일 동안이나 잠을 못잔 적도 있다. 나는 그를 위해 모든 입원비를 냈고 퇴원 후 그를 나의 셋집으로 데리고 와서 보살펴주었다.

그도 나의 큰 변화를 보고 수련하기 시작했고 술도 끊어 몸과 정신 상태도좋아졌다. 그러나 1999년에 천지를 뒤엎을 듯한 공포적인 박해가 발생한 후 그는 두려워 연마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그의 원래의 병은 또 도졌다. 나는 수련을 포기하지 않아서 한 차례 또 한 차례 납치, 노동교양처분을 당했다. 이것도 그에게 시시각각 큰 공포를 느끼게 했는데 불행하게도 결국 2007년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박해를 당해 세 차례 노동교양처분을 당하다

1999년 9월 초, 나는 베이징으로 가서 파룬궁을 위해 공정한 말을 했다가 10월 20일에 베이징의 모 여관에서 경찰에게 납치돼 베이징 싼허(三合) 파출소와 베이징주재 사무처 지하실에 일주일 감금됐다. 10월 2일에 지시(雞西)구치소로 끌려가 족쇄를 차고 1개월 넘게 감금당했다. 그런 다음 완자(萬家) 노동교양소로 납치돼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당했다.

완자 노동교양소에서 나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각종 고문 학대를 당했다. 예컨대 벽을 향하고 세워두는 고문을 가했는데 머리칼을 잡아당겼고, 파룬궁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하 30여 도인 겨울에 경찰은 밖에서 겉옷을 벗기고 3시간 넘게 방치했으며, 내가 단식을 진행한 기간에 교도관은 여러 차례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을 진행했다. 그리고 매일 핍박해 5시에 일어나 6시 반부터 노역을 시켰다. 슬리퍼를 만들 때 경찰은 우리에게 밤중 12시까지 하도록 핍박했다. 어떤 이는 새벽 2시까지 했다. 점심시간은 단지 30분밖에 주지 않았고 저녁 10시에야 일을 끝마칠 수 있었다. 치치하얼(齊齊哈爾)의 파룬궁수련생 장샤오메이(張曉梅)는 연공을 한 이유로 복도에 꼬박 하룻저녁을 세워두는 고문을 당했다. 교도관이 그녀에게 연공하지 않는다는 보증을 쓰도록 하자 그녀는 보증할 수 없다고 했다. 교도관은 그녀가 잠을 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2000년 12월 하순, 완자 노동교양소의 박해가 심화되어 우리 수련생들은 핍박에 못 이겨 단식으로 박해를 반대했다. 우리 8명 수련생들은 완자 노동교양소에서 자무쓰(佳木斯) 시거무(西格木) 노동교양소로 옮겨져 강제로 이쑤시개를 고르고, 팥, 황두 종자를 고르는 노예 노동을 했다. 마지막에 나는 불법적으로 1개월 기한을 연장 당했다.

2001년 5월 25일, 나는 지시시 지관구(雞冠區) 지강(雞鋼) 파출소의 한즈창(韓志强), 경찰 린(林) 모씨에 의해 불법적인 가택 수색을 당한 뒤 납치됐다. 경찰은 내가 그들의 관할 지역인 지관구 발전소 가속루에서 거주함을 허락하지 않았다.(당시 나는 아이의 공부를 봐주었음). 이 박해는 아이의 대학시험 성적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2001년 6월 25일, 나는 거듭 지시시 노동교양 위원회에 의해 불법 노동교양 처분 1년을 당했다. 완자 노동교양소에서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고 감방의 위생 조건은 극히 좋지 않아 대다수는 모두 참기 어려울 정도로 아프고 심하게 가려운 옴이 생겨났다. 나는 학대로 꼬박 7일 동안 잠을 잘 수 없었고 눈앞이 똑똑히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온몸에 오한이 났는데 신체는 극한까지 감당했다. 3개월 후 출소해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도 집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어

2008년 7월 31일, 나는 세인에게 진상을 알리다가 지시시 청쯔허구(城子河區) 공안분국 국가보안대대 양훙바오(楊洪寶), 진시둥(金希東)과 바이스(白石) 파출소 등 경찰에게 납치됐다. 그들은 나에게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했다. 청쯔허 국가보안대대 양훙바오, 진시둥은 나에게 수갑을 채워 괴롭혔고 정신적으로 압력을 가했는데 말로는 얼마든지 판결할 수 있다고 했다. 2009년 9월, 나는 1년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받아 하얼빈 헤이룽장서 여자 노동교양소로 납치됐다. 노동교양소에서는 여전히 우리에게 파룬궁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라고 핍박했다. ‘전향’하지 않으면 벽을 마주해 세워두기 고문, 장시간 동안 작은 의자에 앉히기 고문, 화장실에 가는 것 허락하지 않기, 잠을 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등 고문으로 괴롭혔다.

长时间罚坐小凳子
장시간 동안 작은 의자에 앉히기 고문

문장발표: 2015년 9월 14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9/14/31558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