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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춘시 파룬궁수련생 위융쥐안이 생전에 박해당한 과정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지린성보도) 다년간, 지린성(吉林省) 창춘시(長春市) 파룬궁수련생 위융쥐안(于永娟)은 납치, 노동교양소의 감금 및 교란박해를 당해, 심신이 아주 큰 상해를 입었다. 결국 2011년 4월 11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아래는 창춘시공안국과 웨이싱로(衞星路)파출소에서 위융쥐안을 박해한 사실이다.

위융쥐안은 1952년 6월에 출생했고, 지린성 창춘시 자오양구(朝陽區) 웨이싱로 헝광(朝陽區衞星路恒光) 주택단지에서 살고 있었다. 1997년에 ‘요독증’에 걸려 40여 일간 몸져누웠다. 여러 방면으로 병치료를 받았으나 완쾌되지 않아 매우 위급했을 때 파룬궁을 만나 법공부를 시작했고 성심으로 대법을 인정했다. 파룬따파 사부님은 위융쥐안의 몸을 청리해주셔서 아주 빨리 건강한 몸으로 회복되었다.

1999년 7월 20일에 대법이 중공(중국 공산당)에게 모함을 당한 후, 위융쥐안은 여러 차례 베이징으로 가서 대법을 실증했고 세 번 불법 감금을 당했다. 2003년 11월에 창춘시공안국에게 납치돼 가택수색을 당했고, 1년의 노동교양을 선고받았다.

2004년 11월에 석방되기 전, 노동교양소에서 ‘총결’을 쓰도록 했는데 위융쥐안은 협조하지 않았다. 그 후 노동교양소에서는 가족을 찾아 가 “만약 쓰지 않으면 노동교양 형기를 늘이겠다.”고 위협을 주며 말했다. 풀어주기 전에 흉악한 경찰은 다 써놓은 자료에 그녀가 손도장을 찍도록 했다. 그녀가 협조하지 않자, 몇 명의 경찰들은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손도장을 억지로 찍게 했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었는데 팔마저도 비틀려 시퍼렇게 부어올랐고, 실랑이를 벌이는 통에 서류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위융쥐안은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확고한 정념으로 끝가지 손도장을 찍지 않았고, 한글자도 쓰지 않은 채 풀려 집으로 돌아갔다.

노동교양소에서 돌아온 후부터, 거의 매번 중공의 ‘민감일’이면 파출소의 경찰들은 모두 그녀의 집으로 가서 소란을 피우고 가택수색을 감행했고, 집 전화는 감시(웨이싱로 파출소의 전임 소장 왕마오린(王茂林)이 그녀 집으로 갔을 때 스스로 말했음)를 당했다.

2008년 원단전에 위융쥐안이 집에서 10여 달 되는 외손녀를 돌봐주고 있는데, 시 공안국과 ‘610’의 10여 명의 경찰이 문제를 확인한다는 이유로 집안에 들어와서 가택수색을 감행했다. 동시에 위융쥐안을 끌어가면서 “이삼 일이면 사람을 풀어준다.”고 말했다. 가족이 “당신들은 매번마다 모두 이삼 일이면 풀어준다고 말했는데, 언제 풀어준 적이 있습니까?”고 질문했다.

경찰이 그녀 남편에게 “당신은 여전히 그녀가 연마하게 지지하는가?”고 묻자, 그녀 남편은 “당연하지요. 그녀는 이전에 병이 있었는데 연공을 해서 나아졌어요.”고 말했다. 경찰은 무슨 병인지를 물었다. ‘요독증’이란 말을 들은 흉악한 경찰들은 서로 쳐다볼 뿐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하고, 끝내는 사람을 끌어갔다. 위융쥐안은 자백을 쓰지 않고 정념에 의거해 7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2010년 10월에 위융쥐안은 또 가택수색을 당했다.

2011년 ‘양회(兩會)’기간, 웨이싱로 파출소의 부소장 장즈궈(姜志國), 구역 경찰 추이(崔)씨를 우두머리로 한, 몇 명의 경찰들은 또 가택 수색을 했고 소란을 피웠다.

위융쥐안은 이런 장시간 동안의 상해 하에, 2011년 4월 10일에 갑자기 뇌출혈증상이 도져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문장발표: 2011년 05월 04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5/4/长春市法轮功学员于永娟生前受迫害经历-24009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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