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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후이왕] 랴오닝성 마싼자(馬三家) 노동교양소(노동수용소)는 이른바 중공(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하는 죄악의 표지 중 하나다. 그럼 중공은 왜 이 같은 죄악의 간판을 세웠는가? 우리는 마싼자의 전신과 중공이 그것을 택한 이유를 통해 그것이 파룬궁 박해 중에서 일으킨 작용 등 방면에서 연구해 봐도 좋겠다. 아마도 더욱 쉽게 마싼자 노동교양소의 죄악 및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한 본질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선양(沈陽) 마싼자노동교양소 정문
1. 마싼자 노동교양소의 전신 및 ‘여2소(女二所)’의 창설
마싼자 노동교양소는 랴오닝성 선양시 위훙구(於洪區) 마싼자진(鎭)에 위치해 있다. 중공이 ‘계승’하는 관례에 따라, 노동교양소 경찰은 일반적으로 모두 노동교양소 각급 경찰 자녀들이고 가까운 친척 중에서 내부 초빙을 한다. 그러나 1978년 외지로 보냈던 ‘지식’청년들이 도시로 되돌아오는 중에, 랴오닝성 각지 청년은 아직도 2백여 명이 남아 도시로 들어오지 못했다. 이들이거나 혹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거나, 혹은 무엇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면 인품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직장을 찾을 수 없었으며 ‘남은 찌꺼기’가 됐다. 당국은 임시로 전 성에서 도시로 되돌려 보내다가 남은 이 2백 명 청년들 가운데서 마싼자 노동교양소 경찰을 뽑기로 결정했다.
초빙 시험은 정치, 어문, 수학 세 개 과목만 쳤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수준이 너무 낮았기에 당국에서는 그들에게 시험 답안을 미리 나눠주었다. 그러나 이들 청년들은 확실히 수준이 너무 낮아 평균성적이 60점을 넘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마지막에 방법이 없어 거듭 점수를 낮췄는데 줄곧 마지막에 총 점수를 기준을 1백 20점까지 올려서야 이들을 뽑을 수 있었다. 이들도 이로 인해 ‘1백 20명 간부’로 불렸다.
마싼자 노동교양소는 1999년 이전에는 해마다 손해를 봤으며 전기요금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파룬궁 박해가 시작되자 중공은 파룬궁수련생들의 신앙을 강제로 ‘전향’하기 위해, 1999년 10월 말에 마싼자 노동교양소 ‘여2소’를 세웠다.
그 때 중공은 파룬궁 박해을 이미 3개월 지속했다. 베이징 구치소와 구류소는 이미 파룬궁수련생을 불법 감금을 한 이유로 꽉 찼는데 납치를 당한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중공은 여전히 처리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당시 장쩌민은 또 프랑스를 방문할 때 파룬궁을 모함했다. 파룬궁수련생들은 중공이 들고 있는 도살용 칼 앞에서 조금도 뒷걸음을 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중공으로 하여금 더욱 악독한 수단을 써서 그들을 대하게 했다. 이 때문에 악독한 손을 쓰는 경찰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랴오닝 당국에서는 노동교양소 경찰 중에서 한 차례 ‘선발’을 진행했다. 그리고 각 직장, 각 부서, 각 과에서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도덕이 부패하며 남녀관계가 난잡하고 뇌물을 요구하며 갈취하는, 거의 보는 사람마다 싫어하는 인간 찌꺼기들을 집중해서 파룬궁을 박해하는 전직대대(專職大隊)를 조직했다. 당연히 원래 마싼자교양소의 ‘1백 20명 간부’가 비교적 인기있는 선발 인원이 됐다.
물론 ‘선발대’를 말하면 그의 배후에서 칼자루를 쥔 자가 바로 랴오닝성 ‘610’사무실이다. ‘610’의 책임은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전향’ 박해를 하는 것이다. 파룬궁수련생들이 신념이 확고하자 곧 독창적인 방법으로 원래 마싼자교양소의 기초에서 전문적으로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하는 장소인 ‘여2소’를 세운 것이다. 이 불법 장소를 세운 목적은 바로 더욱 잔혹한 방법으로 파룬궁수련생을 학대하기 위한 것이다. 때문에 그가 선발한 경찰은 바로 매우 악독한 사람이다.
이들 악경들을 자극해 더욱 흉악하게 파룬궁수련생을 대하게 하기 위해, 현지 정부에서는 성내의 각지에서 파룬궁수련생을 마싼자노동교양소로 압송해 보냈다. 그리고 사람당 1만 위안의 돈을 지급해 주고 경찰은 매달 두 차례 월급을 지급받으며 복리대우도 극히 두둑했는다. 그런데 갑자기 뜻밖에 원래 노동교양소 ‘여1소’(2소가 성립된 후 이전 여소는 자연히 1소가 됐음)의 경찰들이 이를 시기하기 시작했다. 이것도 상당한 정도에서 원래 양심이 조금 남아 있던 경찰들까지 더욱 인성을 포기하도록 자극했다. 이것이 이후 두개 여소에서 서로 다투어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한 주요한 원인이다. 탄압 극성기인 2004년에 이르러 마싼자에 불법 감금된 파룬궁수련생의 총 수는 이미 4천여 명에 달했다.
2. 중공 상급의 지지로 악독한 박해 간판을 만들어
마싼자 노동교양소 ‘여2소’의 창설은 중공 중앙 ‘610’이 직접 지지한 결과다.
동북에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 수가 가장 많다. 중공은 동북 3성에 장소를 골라 본보기 작용을 일으키는 박해 장소를 꼭 창설하려 했다. 이것과 중공이 지난 매번 정치운동의 유형과 일치한 것인데, 마치 지주를 투쟁하는데 선택한 류원차이(劉文彩), 문화대혁명을 꾸미는데 수립한 ‘백권영웅(白卷英雄)’ 및 ‘공업에는 다칭(大慶)을 따라배우고, 농업에는 다자이(大寨)를 따라 배우라’고 수립한 본보기와 마찬가지다.
랴오닝은 지린(吉林)과 하얼빈에 비해보면 상대적으로 중공 지도자와 좀 가깝다. 비록 지린의 파룬궁수련생은 좀 더 많지만 지린은 파룬궁의 전해온 곳으로서 군중들의 기초가 매우 좋았다. 그리고 이 마싼자 노동교양소는 선양시에 위치해 있고 규모 또한 매우 컸다. 그 때 몇 천 명을 수용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조건은 당연히 중공의 마음에 들게 됐다.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첫 시작부터 곧 양난의 처지에 처했다. 그것은 비록 ‘3개월에 파룬궁을 소멸하겠다’고 소란을 피웠지만, 그건 단지 한마디 구호일 뿐이었다. 그것은 파룬궁에 대한 투쟁은 장시기일 것이고 심지어 끊임없을 것임을 매우 똑똑히 알고 있었다. 어떠한 박해 유형으로 파룬궁을 대처할지에 대해서도 중공은 단지 이른바 탐색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마싼자을 선택해 박해 지점으로 삼은 것도 랴오닝성 ‘610’의 직접적인 지시임을 배제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의 일부 활동은 성급 단위에서는 전혀 할 수 없었다. 예컨대 악경(惡警-사악한 경찰)에 대한 대우 문제는 원래 선택한 것은, 이들은 매우 사악한 경찰이었지만 이들 경찰에 대한 후한 대우는 오히려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높았다. 박해 초기에 중공 최상층의 지시가 없었다면 감히 이렇게 할 사람은 없었다.
중공 고위층은 그에 대해 극력 지지했는데 중공이 마싼자에서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하는 본보기를 세우려 했다는 이 말을 완전히 증명했다. 중공 중앙 ‘610’사무실 책임자 왕마오린(王茂林), 둥쥐파(董聚法)는 2000년 7월 초에 마싼자를 시찰할 때 그의 이른바 ‘성적’에 대해 충분히 긍정했으며 아울러 장쩌민에게 상세한 보고를 했다. 장쩌민은 특별비 6백 만 위안을 마싼자노동교양소에 지급해 주었으며 중앙 ‘610’ 두목 류징(劉京)에게 명령해 ‘마싼자 사상교육 전향기지(馬三家思想教育轉化基地)’를 속히 세우도록 했다. 그 후 이 프로젝트 건설비는 1천 만 위안 인데 모자라는 돈은 랴오닝성에서 자체 조달했다.
이 과정에서 사법국은 이미 전에 특별비용 1백 만 윈안을 마싼자에 지급해 환경을 ‘개선’하게 한 적이 있다. ‘여2소’의 소장 쑤징(蘇境)은 적극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는데 참여했기 때문에 사법부로부터 5만 위안의 ‘장려금’을 받았으며 이른바 ‘1급 영웅’으로 평가 받았다. 부소장 사오리(邵麗)는 3만 위안의 ‘장려금’를 받고 각 대대장도 모두 ‘장려금’를 받았으며 전체 감옥경찰들은 이른바 ‘단체 2급 영웅모범’으로 평가 받았다.
이 ‘여2소’는 왜 중앙 ‘610’에서 이렇듯 후한 대우를 얻는가? 이 방면에서는 그가 전력을 다해 파룬궁을 박해한 결과다. 당시 전국 노동교양소에서 파룬궁수련생을 가장 많이 불법 감금한 곳이었다. 다른 노동교양소에서 아직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을 때, 마싼자교양원의 이 여2소는 이미 체계적으로 광적인 고문을 진행했다. 이와 같이 중공 중앙 상부와 일치함을 유지했으니 당연히 박해 원흉의 총애를 사게 됐다. 이것은 중공이 그것을 마음에 들어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다.
중공은 파룬궁을 박해하는 본보기를 세우려 했고, 그 유형도 최대한 중공이 중국인들에 대해 몇 십 년동안 노예로 부린 체험을 계승했는데 그것은 바로 폭력에 속임수를 가한 것이다. 우리는 마싼자의 속임수가 최초에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보도록 하자.
2000년 8월 8일, 중공 ‘610’사무실 두목 류징은 직접 6명 ‘파룬궁수련생’을 마싼자 교양원으로 호송했다. 이 몇몇 이른바 수련생은 수갑을 차고 온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맨 발인 채로 온 사람도 있었는데 마싼자로 와서 며칠 지나지 않아 곧 파룬궁을 포기한다고 표명했으며 아울러 파룬궁의 명목으로 도처로 다니며 거짓말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이 몇몇 이른바 ‘파룬궁수련생’은 호주머니에서 파룬궁 서적을 꺼내고 왜곡된 말로 단장취의를 해서 속일 수 있을 것 같은 파룬궁수련생을 찾았다. 그녀들은 도처로 선전하며 돌아다니고 강연을 하고 보고를 했는데 영향이 지극히 악랄했다. 분명 이 6명은 류징이 직접 베이징에서 데려온 특무(스파이)다.
‘610’ 두목 류징은 늘 중공 정법위원회 서기, 말하자면 파룬궁을 박해하는 가장 주요한 흉수 중 한 사람인 뤄간(羅幹)과 함께 마싼자로 가서 ‘전향’시킨 상황을 알아보러 갔으며 아울러 직접 마싼자에 주둔하며 지키면서 이곳 경찰을 지시해 강제로 파룬궁수련생이 신앙을 포기하도록 했다. 마싼자교양원은 이미 전에 류징이 파룬궁 창시자를 모함하고 파룬궁을 비방한 말을 방송한 적이 있다. 파룬궁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곧 고문 학대를 사용했다. 뤄간, 류징은 마싼자에서 파룬궁수련생을 학대한 흉악하고 잔인한 수단을 아주 빨리 랴오닝성에서 전국에 이르기까지 널리 보급했으며, 랴오닝성 모든 구치소, 구류소, 교양원, 감옥으로 하여금 보편적으로 파룬궁수련생을 야만적으로 박해하게 했다. 마싼자 여자노동교양소란 사악한 간판은 바로 이렇게 중공 상부의 지시 및 그의 자신이 한도가 없이 나쁜 짓을 하는 가운데서 확고하게 세워졌다.
3. 마싼자의 죄악과 그 영향
중공은 첫 시작부터 여자노동교양소 한곳을 선택해 박해하는 본보기로 삼았는데 그 박해의 뻔스럼움과 사악함을 볼 수 있다. 여성은 세계상에서 각 민족과 국가의 관심과 보호를 받는 대상 중 하나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여성 자신의 생리적 특징 때문에 극히 쉽게 중공이 성 학대를 진행하는 대상으로 됐다. 중공 박해의 뻔뻔스러움은 첫 시작부터 바로 충분했다. 마싼자에서 이미 전에 18명 확고한 여 파룬궁수련생을 옷을 벗겨 남자 감옥에 밀어넣어 모욕을 진행한 죄악이 발생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음부를 찌르고 전기봉으로 음도부와 유방에 전기충격을 가하는 고문은 더욱 마싼자 여자노동교양소의 상용하는 고문이 됐다.
우리들은 두 명 파룬궁수련생이 박해당한 사례로 예를 들어 마싼자의 죄악과 뻔뻔스러움이 얼마나 큰지를 보도록 하자.
랴오닝성 진저우시(錦州市) 사람이자, 런주타이(九泰) 약업(藥業)책임공사의 퇴직 직원인 쉬후이(徐慧)가 마싼자노동교양소에 있은 기간에 받은 고문은 다음과 같다. 몸이 늘이는 고문, 매달기 고문, 그네뛰기, 입을 여는 기계로 장시간 비틀어 입을 열었는데 치아가 비틀려 석 대가 빠졌다. 그리고 독극물 주입하기, 뺨 때리기, 발로 차기, 장시간 잠을 재우지 않기, 겨자기름 주입하기, 호스로 위액을 뽑아내 맛보게 하고, 오줌을 참게하며 장시간 사인상(死人床-고문침대 중 일종)에 채워 두었으며 강제로 지장을 누르게 했다. 그리고 또 장시간 서있기, 벌을 주고 작은 의자에 앉히기 벌을 주는 등 고문을 당했다.
하루는 대대장 스위(石宇)는 5~6명 여경과 마싼자 노동교양소의 교도처 처장 마지산(馬吉山)과 결탁했다. 그들은 쉬후이를 두 손으로 수갑을 채워 2층 침대에 매달고 두 다리는 천 조각 두 개로 한데 꽉 묶어놓았다. 스위는 묶은 다리 위의 천 위에 또 하나의 긴 천을 매고는 맞은편 침대 난간 위에까지 연결해두었다. 스위는 또 힘껏 이 긴 천을 잡아당겨 쉬이훠의 몸을 공중에 뜨게 한 다음, 다시 내려놓았다가 재차 뜨게 했으며 다시 내려놓았다. 몇 시간 이후 스위의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에서 어떤 목소리가 “어떻게 됐지?”라고 물었다. 스이훠는 “아무런 낌새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상대방은 “강도를 더 가하라”고 말했다. 몇몇 경찰이 또 덮쳐 와서 쉬의 오른팔을 높이 매달고 두 팔을 힘껏 양측으로 잡아당겨 늘였다 다시 채워놓았다. 스위는 천을 끌어당겨 쉬후이의 몸을 공중에 뜨게 한 다음 또 발로 힘껏 밟았다.
저녁이 되어서 쉬후이가 두 손에 수갑을 채워 10여 시간 동안 매달려진 뒤, 스위는 그녀에게 수갑을 풀어줄 때 혹독하게 쉬후이에게 뺨을 한대 때리면서 “저우(周)소장이 당신을 이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리게 해서 되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또 쉬후이를 쭈그리고 앉게 하는 자세를 취하게 하고 연속해서 그녀의 두 손을 따로따로 침대 양측에 채워놓았다. 이때 쉬후이의 다리는 여전히 묶여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하룻밤을 보냈다.
중국 다른 감옥 안에도 경찰이 직접 파룬궁수련생 박해에 참여하는 일이 있다. 더욱 많은 때는 그들은 죄수를 이용해 고문을 실시했다. 그러나 마싼자처럼 이런 곳은 없었다. 모든 경찰 전부가 거의 모두 박해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전부의 체계적으로 직접 박해에 참여했다. 스위에게 전화를 걸어 박해상황을 물어 본 저우소장의 이름은 저우친(周芹)이다. 그녀는 쉬후이의 박해에 대해 원격 조종하며 지휘하고 있었다.
2003년 초, 랴오닝성 파룬궁수련생 왕윈제(王雲潔)는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싼자노동교양소 경찰에게 여러 시간 동안 유방을 전가충격을 당해 전 유방이 완전히 헐어서 곪았다. 이튿날 경찰 궈톄잉(郭鐵英) 등은 또 강제로 왕윈제에게 두 다리를 쌍가부좌하게 하고는 천 조각으로 왕을 수구리게 하고는 손, 발, 머리를 꽉 한데 묶었는데 사람 전부가 공모양으로 묶여졌다. 또 수갑으로 두 손을 몸 뒤에서 매달아 채웠으며 7시간 동안 묶여 매달렸다. 그로부터 왕윈제는 곧게 서서 걸을 수 없고 정상적으로 앉을 수도 없었다.
2000년 6월, 18명 여성 파룬궁수련생은 옷을 전부 벗기고 남자 감옥에 집어넣어져 경찰이 선동한 남자 죄수들에게 강간당했다……
이러한 죄악은 뜻밖에 중공에 의해 박해의 본보기로 추천됐는데 당연히 중국의 모든 감옥에서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박해의 드높은 기세를 불러일으켰다. 후베이(湖北) 허완(何灣)노동교양소에서 부르는 구호가 바로 ‘북쪽에는 마싼자가 있고, 남쪽에는 허완이 있다’이다. 그리고 마싼자 노동교양소의 죄악과 비할만 한 곳도 바로 허베이 사양(沙洋)노동교양소다. 그곳도 중공 ‘교육하여 전향’하는 다른 한 면의 사악의 본보기인데 ‘북쪽에 마굴 마싼자가 있고, 남쪽에 소굴 사양소(沙洋所)가 있다’로 불리고 있다.
마싼자의 체험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이 바로 고문이 아니겠는가? 예를 든다면 마싼자의 고문 ‘작은 의자에 앉히기’를, 2005년 윈난성(雲南省) 제2여자감옥에서 전문적으로 마싼자노동교양소로 사람을 파견해 파룬궁수련생을 ‘전향’시키는 수단을 학습했다. 감옥에 돌아온 후 보기엔 문명한 것 같지만 오히려 매우 사람을 괴롭히는 ‘작은 의자에 앉히기’를 끌어들였으며 아울러 그것으로 파룬궁수련생을 괴롭혔다. 강제로 그녀들에게 매일 약 30cm 되는 작고 네모난 나무 의자에 앉게 했다.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서부터 저녁 11시까지 그렇게 줄곧 앉아 있게 했으며 게다가 몸은 반드시 곧게 유지해야 했는데 조금만 움직이면 곧 혹독하게 구타했다. 줄곧 파룬궁수련생의 둔부가 마찰로 헐고 고름이 흐를 때까지 앉게 했다……
중공도 목적있게 다른 지방에서 확고하게 신앙하는 파룬궁수련생을 마싼자 노동교양소로 납치해 박해를 진행했다. 또 무슨 영창실, 특수 관리실을 설립했으며 수시로 무슨 난관을 돌파한다(攻關)는 따위의 박해를 꾸몃다. 마싼자 노동교양소의 악경은 한차례 한차례씩 그것들 자신이 세운 죄악의 극한을 돌파했다……
마싼자 노동교양소는 중공 체재 내의 하나의 대단히 큰 악성 종양이다. 중공의 사악한 체제가 이런 것들을 번식하게 했다. 중공이 세운 이 사악한 간판은 중공의 끝이 없는 죄악을 숨기고 받아들였는데 바로 중공의 사악한 본성의 체현이다.
하지만 파룬궁수련생은 중공의 고문에 놀라 뒤로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들은 11년 동안의 고난을 겪고 중공의 죄악을 폭로해 내고 있다. 중공의 본질이 중국인들에게 차츰 알려지는 과정인데 바꿔 말하면 그것이 해체되는 과정이다. 극히 악명이 높은 마싼자 노동교양소는 이미 사람들이 중공의 본질을 똑똑히 알게 되는 경로 중 하나다. 중국 역사는 지금 중공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추진시키고 있다!
문장발표:2010년 09월 11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9/11/229477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