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헤이룽장성 통신원) 하얼빈시 파룬궁수련자 리훙메이(李洪梅)가 ‘진선인(眞·善·忍)’ 신앙을 견지한다는 이유로 1999년 7월 중국공산당(중공)이 파룬궁 박해를 시작한 이래 여러 차례 억울하게 납치됐다. 그녀는 두 차례 강제노동 처분을 받았으며 하얼빈 완자 노동수용소에서 잔혹한 고문을 당해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그녀의 심신이 한계까지 파괴됐을 때 어머니와 오빠 두 명의 소중한 혈육마저 대법 신앙을 수호하다 박해로 사망해 리 씨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어야 했다.
2025년 8월 하얼빈시 아청(阿城)구와 솽청(雙城)구에서 파룬궁수련자 20여 명이 집단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리훙메이도 그중에 포함됐다. 이는 그녀의 다섯 번째 납치다. 그녀는 현재까지도 불법 감금돼 있다.
1. 대법 수련으로 절망 속에서 살아나다
리훙메이는 하얼빈시 아청구 허핑가에 거주하고 있다. 파룬궁을 수련하기 전 그녀는 양손이 심하게 갈라지고 통증이 심해 의사로부터 아장풍(鵝掌風, 손바닥 무좀) 진단을 받았으나 여러 병원에서 치료해도 효과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하지에 반점이 생기기 시작해 허리까지 번지면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가 됐다.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허약해 병이 잦았고 남편은 요추 디스크와 척추관 협착증으로 무거운 짐을 들 수 없어 온 가족이 질병과 곤궁에 짓눌려 있었다. 절망한 그녀는 세상을 떠나거나 출가할 생각까지 했다.
1995년 7월 그녀는 우연히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하는 행운을 얻었고 운명은 반전됐다. 짧은 시간 안에 그녀의 병증이 사라졌고 아이와 남편의 건강도 좋아져 온 가족이 혜택을 입었다.
리훙메이의 어머니 원징톈(溫景田) 노인은 대법을 얻기 전 반신불수로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하지만 파룬따파를 수련한 지 불과 7일 만에 모든 병증이 기적처럼 사라졌다. 리훙메이의 아버지는 몸이 늘 좋지 않아 어머니가 오랫동안 수발을 들었다. 그녀는 자녀들의 집안일에 어떤 문제가 생겨도 늘 먼저 나서서 도와주며 원망 한마디 하지 않는 현모양처였다.

리훙메이
2. 남매는 박해받고 어머니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나다
1999년 7월 20일 이후 파룬궁에 대한 비방 선전이 뒤덮이자 직접 혜택을 입은 리훙메이는 진실을 알리기 위해 베이징으로 청원을 가기로 했다. 이는 헌법이 보장한 시민의 합법적 권리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그녀는 여러 차례 납치와 강제노동 박해를 당했다.
1999년 9월 25일 리훙메이는 청원을 갔다가 현지로 끌려와 아청 구치소에 115일간 불법 감금됐다. 가족이 그녀를 데리러 가자 아청 공안국은 1만 위안을 갈취한 뒤에야 풀어줬다. 당시 가계가 이미 어려웠던 가족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빚을 내야 했다. 하지만 가족과 재회한 지 7일 만에 설을 준비하던 중 그녀는 허핑 파출소에 다시 납치돼 아청 제2 구치소에 갇혔다. 이번에는 113일간 불법 감금됐고 나올 때 경찰은 다시 가족에게서 1천 위안을 갈취했다.
아청 구치소에 있는 동안 리훙메이는 경찰과 수감자들에게 수시로 구타를 당했다. 한번은 그녀가 형사구류 통지서에 지장을 찍지 않자 류이(劉義) 등 8~9명의 감옥경찰이 떼로 몰려와 주먹과 발로 구타하며 강제로 지장을 찍게 했다. 그날의 구타로 그녀는 혈뇨를 보았다.
당시 70세에 가까웠던 원징톈 노인도 베이징 청원을 갔다 잡혀와 딸과 함께 갇혀 있었다. 노인은 딸이 아무런 죄 없이 매 맞는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온몸을 경련하며 공포에 떨었다. 극심한 공포와 무력감에 밥도 못 먹고 잠도 자지 못해 심신이 무너진 후에야 석방됐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농기계 공장 인원들이 수시로 찾아와 교란하고 협박했으며 파출소와 가도(街道, 주민센터)에서도 압박을 멈추지 않았다. 노인은 수련하지 않는 가족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이곳저곳 숨어다니며 집에도 돌아가지 못했다. 오랜 공포와 옥중 박해가 겹쳐 노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흔히 ‘모자연심(母子連心)’이라 해 어머니와 자식은 마음이 이어진다고 한다. 원징톈 노인은 임종 전 여러 날 혼수상태였으나 숨을 거두지 못했는데 현지 말로는 가족을 기다리는 것이라 했다. 그녀가 어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었겠는가? 당시 아들 훙빈(洪斌)과 딸 훙메이는 수련한다는 이유로 감금돼 비인간적인 고문을 당하며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어머니로서 아들과 딸의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었겠지만 지척에 두고도 끝내 만나지 못했다.
노인이 숨을 거둔 그날은 바로 아들 리훙빈이 하얼빈 완자 노동수용소에 투옥된 날이었다. 참으로 모자의 마음이 이어진 것이었다.
3. 혹독한 고문으로 사선을 넘나들다
2000년 10월 15일 리훙메이는 두 번째 베이징 청원으로 인해 1년의 강제노동 처분을 받았다. 하얼빈 완자 노동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소위 ‘독방’이라 불리는 좁은 공간에 갇혔다. 폭 약 1m, 길이 2m의 좁은 방에는 변기 하나뿐이었으며 식사, 취침, 용변을 모두 그 안에서 해결해야 했고 문은 항상 잠겨 있었다. 감방 안에는 쥐들이 들끓어 사람을 물기도 했다.
2001년 음력 정월 초여덟 노동수용소는 리훙메이와 신앙을 견지하는 다른 파룬궁수련자들을 남자 감방에 던져 넣었다. 옷도 갈아입지 못하게 하고 양치질도 금지했으며 화장실 사용도 엄격히 제한했다. 낮에는 장시간 서 있어야 했고 때로는 침대 난간에 매달리기도 했다. 밤에도 잠을 자지 못하게 온몸을 꽁꽁 묶어 새벽 3시까지 세워두었다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잠시 누워 있게 했다. 소위 ‘전향’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리훙메이는 철제 의자에 강제로 묶여 8박 9일을 보냈으며 입은 테이프로 봉해져 말을 할 수 없었다. 당시 어떤 수련자는 얇은 셔츠 한 장만 입고 있었는데도 혹한 속에 옷을 껴입지 못하게 하는 고문이 20일간 지속됐다.
2001년 5월 20일 불법적으로 형기가 연장된 수련자들이 무죄 석방을 요구하며 집단 단식에 들어갔다. 리훙메이는 많은 남자 경찰이 독방으로 몰려가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인지 확인하려다 잔혹한 보복을 당했다. 경찰 장보(張波)는 죄수들을 시켜 그녀를 회의실로 끌고 가 ‘대괘(大掛)’ 고문을 가했다. 양손을 뒤로 묶고 발끝이 땅에 닿지 않게 한 뒤 밧줄을 창틀 철창에 걸어 몸을 활처럼 휘게 매다는 고문이었다. 리훙메이는 한 시간 넘게 매달려 있었다. 1분 1초가 고통스러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2001년 6월 18일 완자 노동수용소는 대회를 열어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수련자들의 형기를 집단 연장하고 ‘연마하지 않겠다’고 표시한 이들의 형기를 감면해줬다. 회의장에는 무장 경찰들이 가득했고 수련자들 앞뒤로 실탄을 장전한 총을 든 경찰들이 섰으며 감옥 의사까지 대기하고 있어 분위기가 억압적이고 공포스러웠다. 리훙메이는 양손이 뒤로 묶인 채 단상으로 끌려 나갔고 현장에서 형기 1년 연장이 선포됐다. 12팀과 7팀의 수련자 20명이 신앙을 견지한다는 이유로 형기가 연장됐다.
이어 경찰은 리훙메이, 왕원롄(王文連), 리샤오빈(李小彬), 리룽친(李榮芹) 네 명을 회의실로 끌고 가 계속 고문했다. 경찰 12명과 감시원 8명 등 총 20명이 그녀들을 감시하며 낮에는 작은 의자에 꼼짝없이 앉아 있게 했고 밤에는 시멘트 바닥에서 자게 하며 경찰 12명이 3교대로 감시했다. 리룽친은 복부가 부어오르고 종양이 생겨서야 독방에서 풀려났다.
7월 30일 리훙메이, 왕원롄, 리샤오빈은 다시 9팀 독방에 갇혔다. 세 사람이 폭 1m, 길이 2m의 공간에 끼어 있어 어깨를 세우고 자야 했다. 날씨는 무더운데 독방이 식당 화덕 옆이라 견디기 힘들었고 창문조차 없었다. 그녀들은 이 캄캄하고 숨 막히는 독방에 두 달 넘게 갇혀 있었다.
그사이 형기가 불법 연장된 수련자들이 다시 단식하며 석방을 요구했다. 리훙메이 등 세 명도 독방에서 내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일주일 후 그녀들은 야만적인 음식물 강제 주입을 당했다. 과정은 극도로 고통스러웠다. 여러 명의 남자 경찰과 죄수들이 그녀들을 누르고 고무호스를 콧구멍을 통해 위장까지 강제로 밀어 넣었다가 다시 뽑고 넣기를 반복했는데 호스를 뽑을 때 피가 묻어 나왔다. 주입하는 것도 정상적인 음식이 아니라 소금물에 술을 섞은 것이었다. 경찰은 수련자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술을 부었고 소금물을 넣어 극도의 갈증을 느끼게 했다. ‘강제 주입’은 사람을 살리려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주어 신앙을 포기하게 하려는 수단이었다. 결국 야만적인 강제 주입을 더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생명이 위태로워지자 그들은 손을 뗐다.
4. 노동수용소에서 다시 겪은 잔혹한 고문
노동수용소에서 돌아온 후에도 리훙메이는 단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교란, 미행, 감시가 끊이지 않았고 경찰은 심지어 아이까지 괴롭혔다. 한번은 아청 610(중공이 불법적으로 설립한 파룬궁 박해기구), 허핑 파출소 및 가도 인원들이 납치하러 와 문을 두드렸으나 그녀가 끝까지 열어주지 않고 대치하자 그제야 물러갔다.
2002년 3월 13일 아청 허핑 파출소 왕원광(王文廣) 등은 미리 복도에 매복해 있다가 남편이 점심을 먹으러 귀가하는 틈을 타 문을 부수고 들어와 리훙메이를 잡아갔다. 불법 가택수색 중 한 경찰은 귀걸이 한 쌍을 슬쩍 훔쳐 가기도 했다. 그는 “어쩔 수 없다. 위에서 새 시장이 부임해 파룬궁 체포 인원을 할당했다. 네 달 동안 미행했는데 위법 행위를 발견 못 했다. 우리도 지쳐서 그냥 널 집어넣고 편해지련다”라고 말했다. 소위 ‘미행하기 힘들다’는 것이 납치와 강제노동 3년의 이유가 된 것이다.
리훙메이가 두 번째로 완자 노동수용소에 보내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에 옴이 돋고 심하게 부어올라 눈이 실낱처럼 작아졌다. 2002년 7월 말 남자 감옥경찰들이 여자 감방에 들어와 수련자들에게 전향을 강요했다. 거부하는 이들은 모두 독방으로 보내 밧줄로 뒤로 묶어 거꾸로 매달고 발끝만 닿게 한 뒤 전기봉으로 충격을 가했다. 리훙메이는 온몸에 전기 충격을 당했다. 한 남자 경찰은 그녀의 눈꺼풀, 얼굴, 입술, 몸 곳곳을 지졌고 마지막에는 신발을 벗겨 발바닥을 지졌는데 양말에 구멍이 뚫리고 발이 즉시 부어올랐다. 전기 충격은 30분 넘게 지속됐다. 동시에 다른 독방에서는 전기 충격을 당하는 수련자들의 비명이 뼈저리게 울려 퍼졌다.
얼마 후 그녀는 다시 수용실로 돌아왔다. 경찰은 수련자들에게 가혹한 강제노동을 시켰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자동차 시트 짜기, 해바라기씨 고르기 등을 시켰는데 1인당 하루 50kg의 할당량을 채워야 했다. 자주 밤 11~12시까지 일해야 했고 못 채우면 잠을 자지 못했다. 나이에 상관없이 똑같이 일해야 했다. 장시간 노동으로 온몸이 쑤시고 손가락엔 물집이 잡히고 갈라졌으며 관절은 늘 부어 있었다. 더 잔인한 것은 일하면서 사부님과 대법을 욕하도록 강요받은 것이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선서를 해야 했고 조금이라도 따르지 않으면 ‘소반(小班)’이라 불리는 고문 장소로 보내졌다.
박해에 저항하기 위해 수련자들이 박해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썼으나 대장 창수메이(常淑梅)에게 들켰다. 그녀는 작성자를 찾기 위해 ‘단호한’ 수련자들을 13대대 3층 ‘집훈대(集訓隊)’로 끌고 가 고문했다. 매일 작은 의자에 촘촘히 붙어 앉아 장시간 고정된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마등자(碼凳子)’라는 체벌을 당했다.
2004년 5월 12일 집훈대 경찰 20~30명이 수련자들에게 사부님과 대법을 욕하는 선서를 강요했다.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전기봉 충격, 대괘, 철제 의자 등의 고문을 가했다. 당일 20여 명이 전기 충격을 당했다. 리훙메이는 사부님을 모욕하는 말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대괘 고문을 당했다. 양손에 수갑을 차고 1인용 침대 두 개 사이의 철창에 매달린 뒤 침대를 양옆으로 벌려 수갑이 살을 파고들게 했다. 그 찢어지는 고통 속에 경찰 리샤오제(利小傑)는 왼손을, 우훙쉰(吳宏勳)은 오른손을, 야오푸창(姚福昌)은 얼굴을 동시에 전기봉으로 지졌다. 그녀의 얼굴은 부어올라 변형됐고 입술에는 물집이 가득 잡혔다. 그런데도 경찰 자오위칭(趙餘慶)은 그녀의 뺨을 두 차례 세게 때렸다. 오후 내내 그녀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고문을 당했다.
매달린 것이 풀려난 뒤에는 바로 ‘벌 세우기’가 이어졌다. 저녁 식사 후 5시부터 작은 타일 한 장 안에 쪼그려 앉아 선을 넘지 못하게 했는데 넘으면 즉시 구타가 이어졌고 밤 11~12시까지 계속됐다. 화장실도 하루 아침저녁 두 번으로 제한됐다. 이런 체벌이 두 달 가까이 이어져 심신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줬다. 수련자 장훙(張宏)은 집훈대에 투옥된 지 열흘도 안 돼 박해로 사망했다. 장 씨가 죽자 리훙메이 등은 다시 노동 현장으로 보내졌다. 이후 그녀는 12팀으로 옮겨져 매일 아이스크림 막대 320판을 찍어내는 강제노동을 했고 다 못 채우면 잠을 자지 못했다.
리훙메이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오빠 리훙빈이 집훈대로 끌려오는 것을 보았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던 남매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각각 감옥에 갇혔다가 이 ‘인간지옥’ 같은 곳에서 재회한 것이다. 지척에 두고도 말을 할 수 없어 그들은 단지 두 손을 모으는 합장(合十)으로 서로의 안녕을 빌며 훗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몰랐다. 얼마 후 리훙빈이 박해로 사망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강철 같던 리훙메이도 잇따른 충격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녀는 철창 앞에 서서 목놓아 울었다. 밤하늘을 가르는 그 울음소리에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천지에 호소하는 무력감, 비창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오빠는 떠났고 아이는 아직 어린데 몸이 약한 새언니는 앞으로 어찌 살 것인가? 이렇게 좋은 공법을 왜 못 연마하게 하는가? 이토록 선량한 사람을 왜 때려죽이는가?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그날 밤 고문 앞에서도 머리를 숙이지 않았던 리훙메이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셌다.
파룬궁수련자들이 겪은 매 순간의 박해와 찢어지는 통증, 그리고 그 수호의 과정을 짧은 글에 다 담기는 어렵다. 정법 수련자의 인내와 비장함은 천 마디 말로도 다 서술하기 부족하다.
5. 오빠 리훙빈, 박해로 사망
리훙빈은 1959년생으로 아청구 민주가에 거주했다. ‘진선인’을 믿는다는 이유로 중공의 박해를 받아 두 차례 강제노동 처분을 받았다. 2002년 7월 초 리훙빈은 하얼빈시 창린쯔(長林子) 노동수용소에서 고문과 불명예스러운 약물 강제 주입으로 인해 4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감옥 투옥 후 리훙빈 영정 사진
투옥 전 리훙빈 생전 사진
2000년 11월 3일 리훙빈은 법에 따라 파룬궁을 위해 베이징 청원을 갔으나 베이징 경찰과 사복 경찰들에게 구타를 당했다. 고무 곤봉에 맞은 후 입가에서 피가 흐르고 호흡이 곤란해졌다. 하얼빈 베이징 연락사무소로 끌려간 후 아청 공안국 부국장 장 씨에게 욕설과 구타를 당했고 ‘몸수색’을 빌미로 158위안을 강탈당했다. 이어 아청 구치소로 압송돼 15일간 불법 감금됐으며 민주 파출소 경찰이 가족에게서 3천 위안(영수증 없음)을 갈취한 뒤에야 풀려났다.
2000년 12월 19일 아청시 민주 파출소 부소장 장칭쩡(張慶增)이 경찰과 신원 미상의 인원들을 데리고 리훙빈의 집 문을 부수고 침입했다. 장칭쩡은 다짜고짜 그를 때려 눕힌 뒤 세뇌반으로 납치했다. 이튿날 경찰 청원쿠이(程文奎)가 그를 민주 파출소로 속여 데려가 불법 심문을 했다. 소장 왕헝셴(王恒賢)은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하며 폭력을 휘둘렀고 리 씨의 입에서는 피가 터졌으며 머리카락이 뽑혀 사방에 흩어졌다. 왕 소장은 철제 의자를 가져오게 해 그를 처넣으며 “지장을 찍든 안 찍든 구류와 강제노동을 시키겠다”라고 소리쳤다. 그렇게 리훙빈은 1년의 강제노동 처분을 받았다.
2002년 리훙빈은 진상 자료를 배포하다 악인의 모함으로 다시 하얼빈시 창린쯔 노동수용소에 납치됐다. 6월 말에서 7월 초 노동수용소는 박해를 강화하기 위해 두 차례 강제노동 처분을 받은 이들을 3대대에 몰아넣었는데 대장은 왕잔치(王占啓)였다.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작은 의자에 꼼짝없이 앉아 있게 하는 ‘마좌(碼坐)’를 시켰고 조금만 움직여도 구타를 가했다. 이에 수련자들은 박해에 항거해 단식을 시작했다.
어느 날 경찰이 리훙빈을 독방으로 끌고 가려 하자 그는 단호히 저항했다. 이미 10여 명의 수련자가 독방에 갇혀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야 가족에게 인계됐고 집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사망한 상태였다. 노동수용소는 ‘사망 할당량’을 피하고자 생명이 위태로울 때 풀어주곤 했다. 경찰은 리훙빈이 협조하지 않자 죄수들을 시켜 그를 독방으로 끌고 가 ‘대괘’ 고문을 가했다. 낮에는 잔인하게 두 차례나 음식물을 강제 주입했고 밤낮없이 거꾸로 매달아 두었다.
감옥 의사는 매우 잔인했다. 강제 주입 시 리훙빈의 양손을 의자에 묶고 죄수 두 명을 시켜 꼼짝 못 하게 누른 뒤 새끼손가락 굵기의 3m가 넘는 흰색 호스를 콧구멍을 통해 위장까지 1m 넘게 밀어 넣었다. 그 고통은 형언할 수 없었다. 의사는 그것도 모자라 호스를 넣었다 뺐다 반복하며 고의로 고통을 가중했다.
함께 강제 주입을 당했던 목격자의 회상에 따르면 주입한 액체는 짙은 갈색에 약 냄새가 났으며 매우 시고 썼다. 전혀 음식이 아니었다. 그것을 주입받으면 온몸에 열이 나고 설사가 멈추지 않았다. 그 목격자는 거꾸로 매달리지는 않았기에 감방으로 돌아와 일부를 토해낼 수 있었지만 리훙빈은 주입 직후 다시 거꾸로 매달려 몸 안의 이물질을 토해낼 기회조차 없었다.
목격자는 리훙빈이 알몸으로 거꾸로 매달려 있거나 너무 기력이 없어 반쯤 쪼그려 앉은 채 매달린 모습을 보았다. 그렇게 며칠간 고문이 지속됐다. 7월 초 어느 날 심야 리훙빈은 이미 의식을 잃었으나 여전히 매달려 있었다. 몇 사람이 그를 메고 나간 후 그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며칠 뒤 이 목격자 역시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완자 노동수용소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는 의료진으로부터 “며칠 전에도 창린쯔 노동수용소에서 수련자 한 명이 실려 왔는데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망했다”라는 말을 들었다. (시간상으로 볼 때 리훙빈임이 분명하다.) 사망한 후에도 병원 측은 호스를 꽂고 링거를 맞히는 등 ‘응급 처치 중 사망’한 것처럼 꾸며 진상을 은폐하려 했다. 창린쯔 노동수용소와 완자 노동수용소 병원이 공모해 범죄를 덮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이치는 분명하다. 의료진이 무심코 진상을 흘렸고 사선을 넘나들던 목격자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리훙빈이 박해로 사망한 사실을 세상에 공표했다.
리훙빈은 생전 10여 년간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부부 금실이 좋았다. 그의 죽음으로 집안의 기둥이 뽑히자 아내는 남편을 잃은 충격에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정신이 무너져 혼자 있을 때면 혼잣말을 하곤 했다. 어머니와 아들은 오랫동안 의지하며 살았지만 이 일은 꺼내기만 해도 감정이 격해져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한다.
이 박해로 인해 얼마나 많은 잉꼬부부가 흩어지고 얼마나 많은 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잃었는지 알 수 없다.
원문발표: 2026년 1월 12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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