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후난성 통신원) 후난성 웨양시에 거주하는 75세 파룬궁수련자 차이구이자오(蔡桂姣)가 시민들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렸다는 이유로 2024년 10월 29일 경찰에 납치돼 구금됐다. 이후 웨양시 핑장현 법원은 그녀에게 9개월 징역과 벌금 2천 위안을 불법 선고했다. 이는 차이구이자오 노인이 ‘진선인(眞·善·忍)’ 신앙을 고수했다는 이유로 중국공산당(중공) 법원으로부터 받은 세 번째 불법 판결이다.
차이구이자오는 2025년 3월 25일 후난 여자감옥으로 끌려갔다. 억울한 형기를 마쳤을 때 그녀는 걸을 때 두 사람의 부축이 필요했고, 기억력이 쇠퇴했으며 정신이 흐릿했다. 체중은 원래 57.5kg에서 40kg 정도로 줄었다.
차이구이자오 납치 및 억울한 판결 과정
2024년 10월 29일 오전 7시경, 차이구이자오는 웨양 기차역 광장에서 러우구 공안분국 국보(국내안전보위대: 파룬궁 탄압 담당 공안기구) 경찰의 미행과 사진 촬영을 당했다. 8시경 그녀가 웨청 채소시장에서 세 번째 진상 자료를 배포하던 중 미행하던 두 명의 경찰에게 납치됐다.
경찰은 그녀에게 웨청 채소시장의 어떤 수련자를 지목하라고 요구했으나 실패하자, 그녀를 웨양시 러우구 공안분국 국보대대로 끌고 가 심문하고 가방을 뒤져 진상돈 140위안을 빼앗았다. 국보대대 주요 책임자 셰 모는 흥분한 어조로 “우리가 파룬궁을 잡은 지 오래됐다”고 말했다.
오후 8시 경찰은 그녀를 웨양시 광지 병원(공안 지정병원)으로 데려가 신체검사를 받게 했다. 검사 결과가 부적격으로 나오자 경찰은 두 차례나 그녀를 병원으로 왕복시켰다. 다음 날 새벽 3시, 경찰은 강제로 차이구이자오를 웨양시 제2 구치소(윈시 여자 구치소)에 가뒀다.
셋째 날 차이구이자오의 몸에 심각한 증상이 나타났다. 눈을 뜰 수 없고 어지러우며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심장, 뇌기능, 혈당, 혈지방 모두에 문제가 생겼다. 구치소는 책임을 우려해 수사기관에 그녀를 데려가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수사기관은 그녀를 집으로 보내거나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곧바로 웨양시 광지 병원 감시병동에 구금했다.
11월 7일 웨양시 러우구 검찰원이 차이구이자오를 불법 체포했고, 2024년 12월 17일 핑장현 검찰원이 불법 기소했다. 핑장 법원은 당시 75세였던 차이구이자오에게 9개월 징역과 벌금 2천 위안을 불법 선고했다.
2025년 3월 25일 차이구이자오는 후난 여자감옥으로 끌려가 박해를 받았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감옥까지 100여 리를 가는 도중 그녀는 십여 차례 설사를 하고 구토를 했다고 한다.
감옥에 도착한 후 차이구이자오는 엄숙히 선언했다. “저는 진선인을 수련하는 사람이고 좋은 사람이 되려는 사람입니다. 첫째, 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둘째, 전향하지 않겠습니다. 셋째, 서명하지 않겠습니다.”
첫 달 입감대에서 차이구이자오는 연공하고 법을 외우며 정념을 발하는 것을 고수했고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둘째 달 차이구이자오는 파룬궁수련자를 전문적으로 박해하는 7감구 엄관대로 옮겨졌다. 그녀가 보고하기를 거부하자 감옥경찰은 양치질, 세수, 머리 감기, 목욕을 허용하지 않았는데, 가장 긴 기간은 40일에 달했다.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작은 의자에 앉게 했는데, 양손을 넓적다리 위에 평평하게 놓고 몸을 곧게 펴서 한 자세로 16시간을 앉게 했다. 하루, 이틀, 사흘… 노인은 꼬박 두 달을 앉았다.

감방에는 여섯 명의 죄수가 전문적으로 차이구이자오를 감시했다. 감실장 왕 모는 경제범으로 대학원을 졸업했고 이전에 한 기관의 당위서기였다. 그녀는 악당에 아부하기 위해 파룬궁수련자에게 거짓 친절과 악독함을 동시에 보였다. 처음에는 오트밀과 달걀노른자 수프 등 음식으로 차이구이자오를 매수하려 했지만, 노인이 넘어오지 않자 협박했다. “우리 여섯 명이 당신을 사무실로 끌고 가서 손을 잡을 사람은 손을 잡고, 머리를 누를 사람은 머리를 누르고, 어깨와 목, 목덜미를 꼬집을 사람은 꼬집어서 당신이 삼서(3가지 수련 포기 각서)를 쓰게 하고 서명하게 할 것이다.”
차이구이자오가 “당신 말은 통하지 않아요!”라고 하자 그들은 화장실 가기와 잠자기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화장실에 가야 해요, 잠을 자야 해요”라고 말했다. 차이구이자오가 매일 대법을 모독하는 녹음과 녹화를 듣지도 보지도 않자, 죄수들은 대법을 모독하는 글자를 차이구이자오의 옷 뒤에 썼고, 그녀는 옷을 벗어 씻어 없앴다. 감실장 왕 모가 두 번 쓰자 그녀의 다리가 두 번 아팠고 온몸이 가려웠다.
감옥경찰 리 모, 팡레이 등은 노인이 보고하지 않고 죄를 인정하지 않자 감실장 왕 모의 식사를 금지했다. 차이구이자오는 “먹고 안 먹는 건 내 일이 아니에요. 당신들이 그녀를 못 먹게 한 거예요”라고 말했다. 이 방법이 통하지 않자 그들은 열세 명의 죄수 모두가 밥을 먹을 수 없다고 말해 다른 사람들이 파룬궁수련자에 대해 증오심을 갖도록 부추겼다. 결국 차이구이자오의 정념으로 흐지부지됐다.
차이구이자오는 계속 협조하지 않고 죄를 인정하지 않으며 ‘전향’하지 않고 서명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박해로 병원에 보내져 응급치료를 받았다. 감옥에서는 두 명의 바오자(包夾, 수감자 감시원)를 파견해 병원에서 그녀를 감시했다. 차이구이자오는 병원에 한 달 이틀 입원했다. 억울한 형기를 마쳤을 때 그녀는 걸을 때 두 사람의 부축이 필요했고, 기억력이 쇠퇴했으며 정신이 흐릿했다. 체중은 원래 57.5kg에서 40kg 정도로 줄었다.
차이구이자오가 중공에게 여러 차례 박해받은 경험
차이구이자오는 1950년 11월생으로 웨양시 쥔산구 첸량후진 원자완촌에 거주하며, 원 쥔산구 2분장 직원이었다. 8세 때 홍역을 앓아 토혈과 양쪽 귀에서 고름이 나오는 병을 얻었고, 나중에 류머티즘과 오십견에 걸렸다. 성인이 된 후에는 부인과 질환 등 고질병 10여 종을 앓았는데, 허리 통증이 발작하면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였다. 1998년 차이구이자오는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만났고, 법공부와 연공을 한 지 겨우 3개월 만에 온몸의 병이 모두 사라졌다. 차이구이자오는 파룬따파에 무한한 감사를 느꼈다.
1999년 7월 20일 중공 장쩌민 범죄집단이 공개적으로 파룬궁 박해를 시작하자, 차이구이자오는 파룬따파 수련을 견지했고 중공 인원들로부터 여러 차례 납치와 구금을 당했다.
2000년 2월 차이구이자오는 베이징에 청원하러 가서 파룬궁의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베이징 경찰에게 납치돼 불법 심문을 당했다. 이틀 후 웨양시로 끌려와 여자 수용소에 한 달간 불법 구금됐다. 집에 돌아온 후 ‘610사무실’(중공이 불법적으로 설립한 파룬궁 박해기구) 인원들이 자주 그녀 집에 와서 괴롭혔다. 불법적으로 물건을 뒤지고 가택수색하며 박해했다.
2005년 10월 13일 차이구이자오가 밭에서 목화를 따고 있을 때, 촌서기 쩡진취안(曾金泉)이 진 정법위서기 쉬훙(徐洪), 파출소의 돤더량(段德良), 선청(沈誠) 등 6명을 이끌고 와서 그녀를 강제로 경찰차에 태워 웨양시 610 세뇌반으로 끌고 가 박해했다. 그 기간 그녀는 악인들로부터 장시간 벌서기, 구타, 결박 매달기, 잠 못 자게 하기 등의 고문을 당했다. 한번은 세뇌반 악인들이 양말로 그녀의 입을 막고 이불로 둘러싸 덮어 질식시켜 반응이 없게 만들었다. 차이구이자오가 ‘전향’을 거부하자 610 인원들이 그녀를 1년 강제노동에 보냈다.
2005년 11월 30일 차이구이자오는 주저우 바이마룽 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대법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이른바 ‘삼서’를 쓰기를 거부하자 노동수용소의 각종 박해를 당했다. 화장실 못 가게 하기, 잠 못 자게 하기, 가래 못 뱉게 하기, 매일 장시간 벌서기를 20여 일간 시키기 등이었다. 감옥경찰은 그녀를 엄관구에 가두고 밤낮으로 쪼그리고 있게 했으며, 작은 의자로 그녀의 허리를 때려 심각한 외상을 입혔다. 그녀는 한때 고문으로 정신이상이 됐다.
2007년 12월 22일 차이구이자오가 후베이에 친척 방문을 갔다가 현지 경찰에게 납치돼 하루 동안 불법 심문을 받고 3천 200위안을 빼앗겼다.
2010년 4월 14일 차이구이자오는 경찰에게 납치돼 5일간 불법 행정구류 처분을 받았다.
2010년 10월 11일 차이구이자오의 큰딸이자 파룬궁수련자인 천민(陳敏)이 쥔산 분국 국보대대, 량신바오 파출소 경찰에게 납치돼 웨양시 구치소에 불법 구금됐고, 10월 29일 주저우 바이마룽 노동수용소로 끌려가 3년 강제노동을 당했다. 차이구이자오는 딸을 구하기 위해 사람에게 부탁해 ‘천민이 불법 강제노동당한 것에 대한 신청서’를 작성해 2010년 11월 18일 웨양시 공안국 쥔산 분국 국보대대에 보냈는데, 그 결과 국보대대 경찰 샹웨화(向嶽華), 리쥔(李軍)에게 주먹과 발로 구타당했다. 신청서를 쓴 사람과 자료를 내놓으라고 강요했으며, 그녀 집에 침입해 이른바 ‘종합자료’를 빼앗아간 후에야 손을 뗐다.
2012년 2월 26일 차이구이자오가 화룽현 완겅진에서 고향 사람들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리다가 누군가의 악의적 신고로 친구 집에서 화룽현 국보 경찰에게 납치돼 화룽현 마안산에 구금됐다. 3월 12일 웨양시 제1 구치소로 끌려가 9개월간 불법 구금됐다. 그 기간 차이구이자오는 단식으로 항의해 박해에 저항했는데, 구치소에서 5~6명의 악인들이 그녀에게 강제로 음식을 먹여 치아를 부수고 구강을 찢어 피를 흘리게 했다. 악인들은 또 ‘반카오’ 고문으로 그녀를 이틀 하룻밤 고문했다. ‘반카오’는 수갑과 족쇄로 사람을 한 판자에 묶어 대(大)자 형태로 만들어 움직일 수 없게 하는 것인데, 판자 가운데 구멍이 하나 있어 대소변을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2012년 10월 30일 차이구이자오는 화룽현 법원에서 불법적으로 3년 징역을 선고받았고, 2013년 1월 후난 창사 여자감옥 입감대로 끌려가 박해를 받았다. 3일 후 차이구이자오는 파룬궁수련자를 전문적으로 박해하는 6감구 세뇌반으로 옮겨져 감구 감옥경찰이 강제 ‘전향’ 박해를 시행했다. 그녀는 아침 6시부터 자정까지 18시간 벌서기를 26일간 당했는데, 그 기간 차이구이자오는 여러 번 땅에 쓰러졌다. 감옥경찰은 또 죄수들을 이용해 교대로 그녀를 감시했고, 발로 짓밟고 무릎으로 뒤허리를 가격했으며, 군자세로 쪼그리기를 9일간, 연속 4일 4박 동안 잠 못 자게 했다. 차이구이자오는 2015년 2월 26일 3년 억울한 감옥살이를 마치고 창사 여자감옥에서 나왔다.
2015년 11월 18일 차이구이자오가 화룽현 다차오에서 시민들에게 진상을 알리다가 역에서 경찰에게 납치돼 화룽 구류소, 웨양시 윈시 구치소에서 차례로 41일간 불법 구금됐고 2015년 12월 29일 집에 돌아왔다.
2016년 11월 14일 오전 10시경 차이구이자오가 자기 집 밭에서 유채를 심고 있을 때, 화룽현 공안국 국보대장 바이쥔핑(白君平) 등 6명이 갑자기 경찰차를 몰고 와서 차이구이자오를 강제로 경찰차에 태워 웨양 윈시 구치소로 끌고 가 구금했다. 11월 25일 차이구이자오는 화룽현 법원에서 불법적으로 7개월 징역과 벌금 2천 위안을 선고받았다. 차이구이자오는 2017년 5월 1일 억울한 감옥살이를 마치고 창사 여자감옥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2024년 10월 29일 차이구이자오는 웨양시 공안국 러우구 분국 국보 경찰에게 납치돼 불법 형사구류됐다. 핑장 법원이 그녀에게 불법적으로 9개월 징역과 벌금 2천 위안을 선고했다.
이상은 차이구이자오가 중공 박해를 당한 일부 사실에 불과하다. 26년에 걸친 박해 과정에서 그녀는 수없는 괴롭힘을 당했고 유리걸식해야 했으며, 2016년 불법 판결을 받은 이후 지금까지 그녀의 연금이 모두 불법적으로 박탈됐다.
옛말에 “차라리 천 개의 강물을 휘저을지언정 도인의 마음은 어지럽히지 말라”고 했는데, 이는 수련인을 박해하는 죄업이 너무 커서 생생세세 갚아도 다 갚을 수 없을 정도라는 뜻이다. 파룬궁은 진정한 불가 고덕대법이고 진선인은 보편적 가치인데, 파룬궁을 박해하는 것은 하늘같이 무거운 죄를 짓는 것으로 진정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사람이 다스리지 않으면 하늘이 다스릴 것이다. 지금까지도 중공의 거짓말에 속아 중공 전제정치에 끌려 박해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진상을 알고 빨리 중공이라는 죽음의 열차에서 뛰어내려 박해를 중단하고 참회해 새로워져서, 중공과 함께 멸망하는 운명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원문발표: 2025년 9월 10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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