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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 파룬궁 박해 전담기구 ‘610 사무실’ 초대 주임 왕마오린이 저지른 죄행

[밍후이왕] 중국공산당(중공)의 파룬궁 박해가 22년간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 7월 14일부터 37개국의 파룬궁 수련자들이 파룬궁 박해에 연루된 최신 가해자 목록을 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 뉴질랜드 및 유럽연합의 23개국을 포함한 각국 정부에 제출했다. 아울러 해당 국가에 이들 인권 침해자들의 입국 금지와 자산 동결을 포함한 제재를 요구했다. 전 중공 중앙위원회 ‘610 사무실’ 주임 왕마오린도 제출된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가해자 정보

가해자: 왕마오린(王茂林, Maolin Wang)
성별: 남성
국적: 중국
생년월일: 1934년 12월
출생지: 장쑤(江蘇)성 치둥(啟東)시
직위:
1998년 9월~2002년 10월: ‘중앙 선전 사상공작 지도 소조’ 부조장.
1999년 6월~2001년 9월: ‘중공 중앙 파룬궁 문제 처리 지도 소조’ 구성원 및 ‘중공 중앙 파룬궁 문제 처리 지도 소조 사무실’ (중공 중앙 ‘610 사무실’) 주임.

주요 범죄행위

1999년 6월 10일, 중공 중앙위원회는 파룬궁 박해 전담 조직을 설립했다. 정식 명칭은 ‘중공 중앙 파룬궁 문제 처리 지도 소조’였고, 그 상설 사무기구가 ‘파룬궁 문제 처리 지도 소조 사무실’이었다. 설립 날짜를 기준으로 약칭 ‘610 사무실(이하 ‘610’)’이라 칭하게 됐다.

왕마오린은 ‘610’의 초대 주임으로 이 조직의 우두머리였다. 왕은 전국적인 파룬궁 탄압의 일상적인 운영을 전적으로 진두지휘했다. 1999년 7월 20일 중공 장쩌민 정권에 의해 파룬궁 탄압이 시작된 후, 중앙에서 각 지방정부에 이르기까지 중국 전역에 ‘610’이 만들어졌다.

중공은 파룬궁 박해에서 ‘610’ 조직을 중심으로, 사법 체계 및 당과 정부 기관을 통제해 박해를 실행하는 한편, 비방과 중상모략으로 파룬궁의 명예를 훼손함으로써 사람들이 파룬궁을 적대시하도록 선동했다. 그 결과 박해로 인해 많은 수련생들이 박해를 당해 상해를 입거나 사망했다.

밍후이왕이 보도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현재까지 신원이 확인된 파룬궁 수련생 사망자 수는 4476명이고, 이 중 740명이 2001년 말 이전에 살해됐다. ‘610’ 초대 주임인 왕마오린은 박해 초기 단계에서 모든 박해 정책, 프로그램 및 조치를 공식화하고 시행함으로써, 이후 중국에서 이어지는 파룬궁 박해 정책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고, 부인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 따라서 그 모든 결과에 대해 왕은 피할 수 없는 책임을 져야 한다.

특정 범죄 행위

1. 파룬궁을 비방하고 증오를 선동하다

2000년 1월 29일, 중공 중앙선전부는 다른 부서와 연합으로 ‘2000년 음란물 소탕 및 불법 타격 운동’을 수행하기 위해 전국 원격 회의를 개최했다. 이 캠페인의 리더인 왕마오린은 ‘파룬궁 출판물 소각 운동’을 주제로 한 전국적 회의에서 모든 지방 정부에 대해 자신의 ‘행동 계획’을 확고히 수행하고 단호한 조치를 취해 모든 파룬궁 출판물을 압수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왕마오린은 2000년 7월 초 마싼자(馬三家) 노동교양소(노교소) 시찰 시 파룬궁 수련생들을 박해하는 데 마싼자 노교소가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고 칭찬했다. 그는 장쩌민에게 상세한 보고를 했고, 장쩌민은 600만 위안의 특별 기금을 할당해 왕에게 ‘마싼자 사상 교육 전향 기지’의 신속한 건설을 명령했다.

당시 마싼자 노교소는 수련을 포기하지 않는 18명의 여성 수련생들의 옷을 벗기고 남자 감옥에 가두었고 그곳에서 남자 죄수들에게 임의로 성폭행을 당하게 했다. 수련자에게 고문과 잔혹한 형벌을 사용했기 때문에, 마싼자 노교소는 파룬궁 수련자를 ‘전향(강제적으로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시키는 임무를 맡은 모든 시설의 본보기가 됐다. 중국 전역에서 ‘610’ 직원들이 박해 경험에 대해 배우기 위해 잇달아 마싼자를 방문하는 일이 벌어졌다.

왕마오린 등은 2001년 2월 6일 ‘전국 청소년 문명 커뮤니티 반(反)사교 행동’ 출범식에 참석했다. 이날, 공산주의청년단 중앙위원회는 전국 100개 대도시의 1000개 가까운 커뮤니티에서 반(反)파룬궁 선전 교육 활동을 시작했다. 당일 파룬궁을 공격하는 선전 포스터가 50만 개 이상 게시됐고, 1천만 개 이상의 명예 훼손 선전물이 배포됐으며, 200회 이상의 반파룬궁 활동이 개최되면서 800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2001년 2월, 베이징 출판사는 2월 12일 학교 개학에 앞서, 신간 ‘캠퍼스에서 사교를 거부하다’를 출판했다. 왕마오린은 파룬궁을 비방하면서 학생들에게 파룬궁을 반대하고 멀리하라고 독려하는 서문을 직접 썼다.

2001년 2월 26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중공 중앙조직부, 중앙선전부, 중앙정치법률위원회, 중앙 ‘610’ 등이 파룬궁 말살 행동에 관한 ‘모범 업적’ 보고 회의를 열었다. 왕마오린은 중앙 ‘610’의 주임으로 참석했다. 3000명의 ‘모범’을 보인 개인과 단체 및 정부 기관 대표와 무장 경찰 관계자가 회의에 참석했다. 랴오닝성 마싼자 노교소 제2 여자교도소 소장인 쑤징(蘇境)은 파룬궁 수련자들을 ‘전향’시킨 경험에 대해 소개했다.

2001년 3월 21일, 왕마오린은 종교인, 종교 전문가, 학자들이 편찬한 ‘파룬궁과 사교’라는 책의 서문을 썼다. 왕마오린은 파룬궁 창시인과 파룬궁의 수련 원칙을 맹렬히 비방했다. 그는 내용이 실제 사실과 완전히 상반되며 전적으로 파룬궁을 공격하는 이 책을 “걸작”이라고 떠벌였다.

2001년 5월, 왕마오린은 ‘신공(神功)과의 결투’라는 특집호 발행 기자회견에서 연설했다. 그는 파룬궁을 비방하고 공격한 이 특집호를 파룬궁과 싸우기 위한 ‘매우 중요한 간행물’이라고 치켜세웠다.

2001년 7월 16일, 베이징 중국혁명군사박물관에서 대규모 전시회가 열렸다. ‘사교를 반대하고 문명을 숭상하다’라는 제목의 이 행사는 중앙선전부, 중앙정신문명건설지도위원회사무실, 중앙 ‘610’, 공안부, 사법부, 중국과학기술협회가 주관했다. 왕마오린이 행사 개막식을 개최했다. 전시회는 대량의 조작된 사실을 인용해 사람들을 속이고 파룬궁에 대한 증오를 부추겼으며 파룬궁을 ‘악마’화했다. 파룬궁을 세계의 주요 사교와 같이 비교하고 논하면서, 파룬궁 수련자들에 대한 중공의 잔인한 세뇌와 전향 박해를 미화했는데, 근본적인 목적은 파룬궁을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2001년 11월 30일, 베이징시 당 위원회와 시 정부는 파룬궁 박해에 가담한 사람들을 위해 파룬궁 제거를 위한 조치를 인정하는 회의를 개최했다. 이번 회의에서는 ‘교육 전향(강제 세뇌를 말함)’을 모범적으로 수행한 200개 단체와 507명의 개인이 수상했다. 왕마오린도 이 표창대회에 참석해 관계자들이 박해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전 중앙음악대학의 학생이었던 파룬궁 수련생 왕보(王博)는 2001년 4월 합법적인 파룬궁 수련의 권리를 호소하기 위해 베이징에 민원을 제기하러 갔다가 체포돼, 베이징 신안여자노교소(新安女子勞教所)에 구금당해 잔인한 고문과 세뇌를 받았다.

2002년 3월, 중앙선전부, 신화통신, 중앙텔레비전방송국(CCTV) 및 왕보가 소속된 시와 성의 ‘610’은 기만적인 질문을 이용해 그녀의 가족을 인터뷰했다. 2002년 4월 8일, CCTV의 ‘초점취재(​焦點訪談)’ 프로그램은 파룬궁의 명예를 실추시키기 위해 완전히 조작되고 편집된 내용으로 왕보 가족의 인터뷰 ‘사기극’을 방송했다. 이후 신화통신 등 언론은 가짜뉴스를 대대적으로 송출해 일반 대중에게 지극히 나쁜 영향을 미쳤다. 전임 ‘610’ 주임으로서 왕마오린은 왕보 일가에 대한 박해 책임과 파룬궁에 대한 전 중국 일반 대중의 증오를 불러일으킨 죄목을 회피할 수 없다.

2. 천안문 ‘분신자살 사건’ 조작

2001년 1월 23일 오후, 중공 장쩌민 집단과 ‘610’은 전 세계 사람들을 기만한 ‘천안문 분신자살 사건’을 조작했다. 5명의 가짜 ‘파룬궁 수련자’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분신자살’을 시도했고, 중공을 대변하는 언론인 CCTV가 황금시간대에 조작된 이 사건을 재빠르게 보도했다.

중공은 이 조작사건을 파룬궁 박해의 탁월한 구실로 삼아 문화대혁명 이후 최대 규모의 정치적 박해 운동을 일으켰다. 각지 ‘610’ 직원들도 이를 예로 들어 파룬궁 수련생들에 대한 박해를 강화했다. 통계에 따르면, 박해당해 사망한 파룬궁 수련자의 수는 173명(‘분신자살’ 조작사건 전의 18개월 동안 박해로 사망한 총 수련자 수)에서 881명(‘분신자살’ 조작사건 후 36개월간에 박해로 사망한 수련자 수는 총 708명)으로 증가했다.

3. 박해로 파룬궁 수련자들을 사망에 이르게 하다

왕마오린은 중공 중앙위원회 ‘610’ 주임으로 재직하는 동안, 전국적으로 파룬궁 수련생들을 박해하는 일을 직접 책임졌다. 2001년 12월, 밍후이왕에서 발표한 정보에 따르면 당시 이미 740명의 파룬궁 수련자들이 박해당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다음은 당시 박해로 인한 사망 사례 일부이다.

2000년 4월 22일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언 존슨(Ian Johnson) 기자의 ‘천 씨는 마지막 날까지 파룬궁 수련은 하나의 권리임을 주장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는 파룬궁 수련생 천쯔슈(陳子秀)가 어떻게 박해로 사망했는지에 관한 진실이었다.

천쯔슈(여, 59)는 웨이팡(濰坊)시 웨이팡구 지역에 살았다. 2000년 2월 16일, 그녀는 길을 가다가 가도[街道, 구(區) 아래 작은 행정 단위, 한국의 동사무소에 해당]의 정부 관리들에 의해 납치됐다. 다음 날 오후, 그녀는 청관(城關) 가도 사무실에 있는 ‘파룬궁 전향 감독 센터’로 이송돼 플라스틱 곤봉과 전기 충격기로 다리, 발, 허리를 구타당했다. 전향 센터에 있는 직원들은 또 소몰이용 뾰족한 곤봉으로 그녀의 머리와 목을 가격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그녀에게 괴함을 지르며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라고 강요했지만, 그녀는 매번 거절했다.

2000년 2월 20일 아침, 박해로 이미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된 천 씨는 여전히 맨발로 눈밭을 걷도록 강요당했다. 이틀 동안의 고문으로 그녀는 다리에 심한 멍이 들었고, 검은 머리에 고름과 피가 묻어있었다. 천 씨는 구토하며 실신했고 다시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천 씨는 2월 21일 오전 9시경 세상을 떠났다.

1968년 6월 28일생인 자오신(趙昕)은 베이징공상대학 경제학부 강사였다. 2000년 6월 19일 공원에서 파룬궁 연공을 하던 중 경찰에 체포돼 하이뎬(海澱) 공안 분국(分局) 산하 간수소(구치소)로 이송됐다. 그녀는 3일간 너무 심한 구타를 당해 목뼈가 골절돼 생명이 위태했다. 그녀는 결국 32세의 나이로 12월 11일 저녁 세상을 떠났다.

추충루이(​初叢銳)는 19세의 파룬궁 수련자였다. 그녀는 2000년 12월 1일 파룬궁을 위한 민원을 제기하기 위해 베이징에 갔다가 천안문 광장에서 체포됐다. 이후 12월 13일 베이징 하이뎬 감옥에서 사망했다. 경찰 측은 그녀가 단식과 탈수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부검 결과 그녀는 얼굴 전체에 피가 흐르고 코가 구타로 함몰돼 골절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은 심한 상처를 입어 변형됐고, 정상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추 씨의 할아버지는 시신 확인을 위해 베이징으로 갔는데, 손녀의 일그러진 얼굴과 부서져 내린 코를 본 할아버지는 손녀의 시신을 끌어안고 대성통곡했다.

2001년 4월 9일, 33세의 리메이(李梅)는 산둥성 라이양(萊陽)시 룽왕좡(龍旺莊) 진(鎭) 정부 관리들에 의해 강제 세뇌센터로 이송됐다. 리메이가 파룬궁에 대한 믿음 포기를 거부하자, 세뇌센터의 직원들은 그녀를 구타해 척추를 부러뜨리고 다리를 마비시켰다.

그녀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진정부 측은 그녀의 입원비 지불을 거부했다. 리 씨는 33세의 나이에 5월 28일 병원에서 사망했다. 범죄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진정부 관리들은 유가족에게 리 씨의 죽음에 대해 진정부가 책임이 없음을 나타내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정부 관리들은 또한 리 씨의 집에서 그녀 생전의 사진을 전부 압수해 갔다.

'王茂林'
왕마오린(王茂林)

 

​원문발표: 2021년 8월 19일
문장분류: 중국소식>악인악행 실록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8/19/429753.html
영문위치: http://en.minghui.org/html/articles/2021/8/22/19474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