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온 길 (6)

글/ 중국 대법제자 리리(李莉)

[명혜망](전편에 이어) 진정으로 수련에 들어서자 난(難)도 잇따라 왔습니다. 우선 신체 소업(消業)이었습니다. 오후에 학생들에게 강의해야 하는데 오전에 배가 너무 아팠습니다. ‘오후 수업을 어떻게 하지? 안 가면 안 되는데, 그 많은 학생 수업을 펑크 낼 순 없잖아?’ 강의하러 가는 길 내내 아팠는데, 교실에 들어가 강의를 시작하자마자 거짓말처럼 안 아팠고 수업도 잘했습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다시 배가 아파 얼른 집으로 뛰었는데, 아는 사람을 만나도 인사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파 6층 집까지 기어 올라가 비오듯 땀을 흘리며 화장실로 갔습니다.

저는 속으로 말했습니다. ‘사부님, 오늘은 제가 이겼습니다.’ 이것이 소업임을 알았고 또한 사부님이 저를 위해 정말 잘 배치해주셔서 수업은 정상적으로 하게 하시고, 이런 특수한 방식으로 병이 아님을 깨우쳐 주신 것임을 알았습니다. 예전의 편도선염은 목이 붓고 곪을 뿐 아니라 열도 났습니다. 이번에도 특이했는데, 목이 곪았지만 열은 없었습니다. 어떤 때는 고열만 나서 앉지도 못했지만 목은 안 아팠습니다. 한번은 꼬박 이틀 열이 났고 미음만 조금 마셨는데, 사흘째 되니 일어나 정신이 맑아졌습니다. 저는 이런 병 같지만 병이 아닌 초범적인 반응을 아주 잘 알았습니다. 오랫동안 병통에 시달려온 저는 이런 것을 무슨 고비로 여기지도 않았고 자연스럽게 넘겼습니다. 아마 속인일 때 몸으로 겪은 고통이 워낙 많아서인지 수련 후 신체 소업은 그리 많지 않았고, 주로 심성(心性) 측면에서 왔습니다.

루는 어머니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우한에서 급히 왔는데, 와 보니 아무 일도 없고 어머니가 이미 다 나으셔서 빨리 집으로 가시게 했습니다. 저는 원래 시어머니 치료비로 쓰려던 3천 위안을 시어머니께 드렸는데, 루는 제가 어머니께 이 돈을 줬다고 크게 싸웠습니다. 저는 수련인이니 그와 싸우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돈은 별거 아니며 시어머니께 드린 거니 잘못이 없다고 생각해 아주 담담했습니다. 수련 전이라면 이렇게 대하지 않았을 겁니다. 어머님께 돈을 드리긴 했겠지만 “당신 어머니께 돈을 드리는 게 잘못이야?”라며 억울해서 못 견뎠을 겁니다.

루가 사사건건 트집 잡고 툭하면 화내는 데는 이유가 있어 보였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우리가 오랫동안 화합하지 못해 생긴 결혼 위기로 가정이 늘 위태로웠기 때문입니다. 1991년, 즉 법을 얻기 전 저는 그에게 너무 시달려 붕괴 직전이라 이혼을 요구했고 그도 동의했습니다. 한번은 그가 우한대학에서 돌아와 증명서를 가져와 이혼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수속할 때 증명서 하나가 부족해 우한대학에 가서 다시 떼와야 했는데, 이 일이 제 직장 동료들에게 알려져 사무실에서 우리를 중재했습니다. 나중에 루는 자신이 곧 졸업하니 졸업하고 다시 얘기하자고 했습니다. 이 일은 잠시 미뤄졌고 이후 생활에서 당연히 앙금이 남았는데, 이제 저는 수련하니 이 문제에서 자신을 바꾸려 했습니다. ‘이제부터 내 입으로 이혼 얘기를 꺼내지 말고 매사를 잘해서, 그가 나 때문에 파룬궁이 안 좋다는 말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이번에 집에 와서 며칠 내내 화를 내는데 저는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는 자꾸 아래층에 가서 전화를 받았는데 좀 이상하다고만 느꼈을 뿐 더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제가 멍하니 아무것도 모르는 걸 보고 하루에 조금씩 자기 얘기를 흘리더니, 우한대학에서 연수 온 동창을 알게 됐는데 사이가 좋다고 했습니다. 나중에는 아예 다 털어놓으며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됐고 깊은 사이이며 상대는 가정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지? 무슨 자격으로 이렇게 상처를 주나?’ 곧바로 수련인임을 상기하고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억지로 눈물을 참았습니다.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마음이 괴로웠고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습니다! 그를 위해 모든 걸 바쳤고 지금 제 생명 전체를 대가로 그를 성공시켰는데, 돌아온 게 이런 배신이라니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때 헤이룽장성에 있던 남동생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뇌종양에 걸렸고 악성 같으니 어쩌면 좋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기에 동생의 병은 아버지께 큰 타격이었습니다. 동생은 우리 리(李)가네 외동아들로 셋째였고, 하얼빈 사범대를 졸업하고 고향의 한 사범전문학교에서 외국문학 교사로 일했습니다. 33세에 학교 최연소 부교수가 됐고 막 일본 방문 연구를 마치고 돌아온 유망주였습니다. 5~6살 된 예쁘고 귀여운 딸도 있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동생과 정이 제일 깊었고 업어 키웠으며, 동생도 누나인 저를 특별히 믿고 존경했습니다. 동생 소식을 듣고 만사를 제치고 전력으로 돕기로 했습니다. 저와 아버지, 여동생들이 동생을 데리고 베이징으로 검사받으러 갔는데 1993년 여름이었습니다. 이때 루는 우한대학을 졸업하고 베이징 최고검찰원 국가검찰관대학 교수로 배치되어 헌법학을 강의하고 있었는데, 아직 집이 없어 대학 기숙사에 살았습니다. 루가 베이징역으로 마중 나와 바로 톈탄(天壇) 병원으로 가서 검사했는데 동생은 결국 악성 종양으로 진단받았고, 가족들은 몹시 슬퍼했으며 아버지는 몰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수련하니 마음가짐이 그들과 같으면 안 되고, 이번 고비를 잘 넘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생은 톈탄 병원에서 개두 수술을 받아 종양 대부분을 제거했습니다. 얼마간 회복 후 아버지는 재발을 우려해 산둥성 쯔보(淄博)시에 가서 감마나이프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번에 저는 따라가지 않고 베이징에 남아 루와 계속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 여자가 루에게 학교로 계속 편지를 보냈는데, 저도 학교 기숙사에 살고 있었습니다. 루는 숨기지 않고 이 ‘연애편지’들을 제게 보여주고 녹음테이프를 들려줬습니다. ‘이런 일이 어디 있지? 왜 이런 걸 다 알게 하는 거지?’ 때로는 그들이 함께 있을 때의 구체적인 내용까지 제게 말해줬는데, 정말 제 마음을 겨냥해 온 것 같았습니다. 마치 바늘로 찌르듯 하나하나 찌르며 어떤 반응인지, 어떻게 대하는지 보는 것 같았습니다. 동생 문제와 그가 제게 하는 짓이 거의 동시에 닥쳐와 번갈아 진행됐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수시로 저를 욕했고 제 가족 앞에서 저를 욕했습니다. 저는 그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속으로 ‘참아야 해, 참자. 나는 이제 일반인이 아니야. 그가 나를 도와주는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당시엔 눈물을 머금고 마음이 씁쓸했습니다. 동생 일이 잠시 일단락된 후 베이징에서 며칠만 머물다 다시 창춘으로 돌아왔습니다. 제 수업은 다른 선생님이 대신하고 있었기에 계속 수업해야 했고, 수업 외 시간에는 자주 쉬 씨 집에 가서 그 집에서 수련생들과 함께 가부좌하고 교류했으며, 가끔 사부님을 뵙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사부님이 비디오테이프 ‘석가모니전’을 가져오셔서 우리 몇몇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외국에서 제작한 것으로 석가모니가 법을 전하고 사람을 구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영화는 길었는데 석가모니가 왕위를 버리고 출가해 깊은 산 속에서 고행하다가 나중에 보리수 아래서 개공개오(開功開悟)하여 어떻게 사람을 제도했는지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처음 본 부처님 관련 영화였습니다. 보고 며칠 뒤 사부님께서 오셨고 우리 몇몇 수련생은 사부님 곁에 둘러앉았습니다. 사부님이 “어땠습니까?” 하고 영화 본 소감을 물으셨습니다. 저는 당시 불교 지식이 적어 알 듯 말 듯 했지만 한 가지 느낌이 강해 사부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수련 시기는 너무 고생스러웠습니다.” 저는 우리가 지금 하는 수련은 고생스럽지 않고, 거의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밥 먹고 옷 입고 할 일을 다 하면서 한다는 걸 체득했습니다.

창춘의 초기 제자들 다수가 가정 관(關)을 넘고 있었습니다. 막 수련을 시작해 관 넘기가 힘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 연구실 동료의 남편은 그녀가 수련하기 전에는 아주 잘해줬는데, 수련 후 태도가 돌변해 늘 싸웠습니다. 한번은 그녀가 남편이 칼을 꺼내 자기를 죽이겠다고 했다고 했습니다. 당시 참으며 남편을 달랬지만 마음속으로 넘기지 못해 너무 괴로워했습니다. 그녀는 제게 “리리, 나중에 우리 둘이 나가 살면 이런 일 없을 거야. 우리 서로 돌보며 살자”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건 안 돼. 그런 게 아니야”라고 했습니다. 한번은 저와 몇몇 수련생이 또 사부님을 뵈었는데, 동료가 같은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저는 그때 불쑥 “모순을 회피하면 안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사부님께서 제 말에 찬성하신다는 걸 알았습니다.

루는 박사이자 부교수 명의로 베이징 스징산(石景山)구 융러(永樂)소구 84동 410호에 방 3개 거실 1개짜리 집을 배정받았습니다. 집이 꽤 컸는데 저는 수업이 없을 때 베이징으로 가서 그와 함께 집을 수리했고, 수리가 끝난 후 루는 아들과 시어머니를 새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저는 직장 전근이 아직 안 돼 혼자 창춘에서 계속 수업했고, 루가 가끔 시간을 내서 베이징에서 저를 보러 왔습니다. 이 기간(1년 반) 저는 창춘의 활동에도 참여했는데, 창춘 수련생 제1회 수련 좌담회에 참석했습니다. 수련생들의 발언을 들으며 그중 많은 이가 불교적인 것을 많이 이야기한다는 걸 발견했고, 즉시 이것이 우리 수련의 것이 아니며 ‘불이법문’ 문제임을 인식했습니다. 저는 뼈아픈 교훈이 있어 이 문제에 민감했기에 이 상황을 보도원에게 알렸습니다. 창춘 수련생 전체가 일정 기간 수련을 거친 후 책임자들이 법회(法會)를 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것이 첫 법회였습니다! 당시 수련생들은 모두 이 첫 법회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이번 법회를 ‘파룬궁 제자 제1차 대집결’이라 불렀으며, 우리는 밤을 새워 큰 글자를 오려 ‘창춘 파룬궁수련생 심득교류회’와 사부님의 시 “공(功)을 수련하는 길은 마음이 지름길이라 대법은 끝없나니 고생을 배(舟)로 삼을지니라”[홍음-法輪大法(파룬따파)]를 만들었습니다.

지린대학에서 열린 이번 법회가 기억납니다. 그날 수련생들은 명절을 맞은 듯 얼굴에 웃음을 띠고 아주 일찍 왔습니다. 그날 하늘은 유난히 파랬는데, 저는 지린대학 강당 뒷문 입구에 서서 그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법회에서 수련생들이 단상에 올라 발언했는데, 어떤 이는 준비한 원고를 읽었고, 어떤 이는 아무것도 없이 올라가 파룬궁 수련 후의 변화를 이야기했습니다.

모두가 궈(郭) 노인이라 부르는 한 수련생은 단상에 올라 자기 아내가 어떻게 들것에 실려 선생님 설법반에 들어갔다가 어떻게 걸어서 나왔는지, 또 학습반 참가 후 아내가 어떻게 소업했는지 이야기했습니다. 노부부가 함께 수련하며 고비를 넘을 때 서로 격려했습니다. 궈 노인의 아내가 고비를 넘을 때 아파서 바닥을 뒹굴자 궈 노인이 말했습니다. “당신 어버지는 돼지 잡는 백정이었고 당신이 예전에 그렇게 큰 업을 지었으니, 이렇게 소업하지 않고 어떻게 없애겠소?! 꼭 견뎌야 합니다.” 아내가 학습반 참가 후 그렇게 큰 변화를 겪은 건 자신이 제일 잘 알기에, 궈 노인 역시 나중에 겪은 고비와 어려움도 고통 속에서 걸어 나올 수 있었습니다.

법회는 정말 감동적이었고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전체 법회는 녹화되었습니다. 우리가 돌아와 녹화 테이프를 볼 때 저는 육안으로도 테이프에서 신기한 광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수련생들이 입장하는 과정에서 아주 높은 하늘에서 밀짚모자 모양의 형상들이 줄지어 빠르게 북문으로 날아 들어와 법회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법회장 중심 위치에는 직경이 아주 굵은 큰 빛 기둥이 하늘로 치솟아 있었습니다.

며칠 뒤 사부님이 외지 설법에서 돌아오셔서 법회 녹화 영상을 보셨습니다. 쉬 씨가 제게 말해주길, 사부님께서 영상을 보시며 “이번 법회에 올 것은 다 왔구나. 무엇이든 다 있는데 나만 없었구나”라고 하셨답니다.

쉬 씨 아내가 몰래 제게 “사부님께서 녹화 영상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셨어요”라고 말해줬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매우 감격했고 이번 법회가 지극히 평범하지 않고 매우 신성했음을 느꼈습니다.

그때 우리는 쉬 씨 가족 및 모르는 수련생 두 명과 함께 차를 타고 사부님의 고향인 궁주링(公主嶺)시에 가서 사부님이 예전에 사시던 집을 보러 갔습니다. 그 집은 궁주링시 중심에 있는 회색 기와집이었는데, 안채와 바깥채가 이어진 구조로 그리 크지 않았고 안팎 방에 각각 동북식 작은 온돌(캉)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를 갖고 방 안팎 모든 곳의 치수를 쟀는데, 이것이 이번 방문의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저는 손으로 벽돌을 만져보고 이곳의 모든 것을 자세히 보며 생각했습니다. ‘여기는 사부님이 사셨던 곳이니 장차 이곳의 모든 것이 기록으로 남을 것이고 다 의미가 있을 거야.’ 당시 저는 법리상에서 사부님을 더 높게 인식하지 못했지만, 이 집과 이곳이 장차 얼마나 깊은 함의를 지니게 될지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방 안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현상된 사진을 보니 우리 몸 위에 하얀 빛 고리가 줄지어 있었고, 수련생들은 그것이 다 파룬(法輪)이라고 했습니다.(계속)

 

원문발표: 2021년 4월 1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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