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하며 업 갚고 법 얻길 기다려, 굳건히 수련해 사부님 따라 집으로 돌아가다

글/ 랴오닝성 대법제자(본인 구술, 수련생 정리)

[명혜망]

쓰디쓴 나날들

나는 산둥(山東)성 농촌에서 태어났고, 위로 언니가 한 명 있다. 우리집은 몹시 가난했다. 생후 9개월 때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셨고, 여섯 살 때 새어머니가 들어왔다. 그때부터 우리집에는 평온한 날이 사라졌고, 나와 언니는 온종일 맞고 욕을 들으며 살았다.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새어머니는 보내주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학교를 빼먹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내가 문에 들어서기만 하면 때렸는데, 정말이지 매일같이 때려서 숨을 곳도 피할 곳도 없었다. 그때 나는 아직 어렸지만 하루 종일 새어머니가 낳은 아이를 안고 있었고, 아이가 똥오줌을 자주 내 몸에 싸곤 했다. 한번은 아이를 제대로 안지 못해 땅에 떨어뜨렸는데 얼굴이 까졌다. 너무 놀랐다. 이 일을 새어머니가 알면 맞아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입술 연지로 얼굴이 다친 곳을 발라 가렸다. 하지만 새어머니가 이를 알아채고는 우리 자매를 죽도록 때렸다. 언니는 맞다가 견디지 못해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했고, 나 역시 맞아서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나는 열 살 때부터 어른들을 따라 밭농사를 지었다. 일손이 빨라서 어른들보다 노동 점수(工分)를 더 많이 받기도 했다. 언니는 열아홉 살이 되자 새어머니가 시집을 보냈다. 내가 열아홉 살이 됐을 때도 새어머니는 나를 시집보내려 했다. 오랜 세월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고생을 많이 한 탓에, 열아홉이었지만 키도 작고 아직 몸이 다 자라지 않았으며 생리도 시작되지 않았다. 나는 시집가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새어머니는 억지로 나를 시집보냈다.

나는 늑대 굴을 벗어나자마자 다시 호랑이 굴에 빠진 셈이었다. 내가 왜소했기에 마을에서 형편이 가장 나쁜 집으로 시집을 갔다. 남편은 폐기종을 앓아 늘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고, 시아버지는 형이 셋 있었는데 모두 늙은 노총각들이었고 다들 어리숙했다. 나는 배불리 먹지도 못하고 따뜻하게 입지도 못한 채 그들까지 먹여 살려야 했다. 정말 마음 편할 날 없이 너무나 고달픈 삶이었다.

한번은 남편의 병세가 아주 심각해져서 내가 그를 데리고 병원에 가던 중이었다. 작은 숲길을 지나는데 남편이 숨을 쉬지 못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그때 한 노인이 다가와 남편을 살릴 방법이 하나 있다며, 집에 돌아가 닭 한 마리를 키우되 반드시 내가 직접 먹이를 주고, 섣달그믐에 제물로 올린 뒤 남편이 혼자 다 먹게 하라고 했다. 나는 그의 말대로 했는데 정말로 영험했다. 남편은 닭을 먹고 난 뒤 병세가 호전됐다. 세 노인은 모두 내가 장례를 치러 드렸다.

나는 스물한 살이 돼서야 처음으로 생리가 시작됐고 임신을 해도 알지 못했다. 이상한 것은 아이가 뱃속에서 자라면서 내 키도 함께 자랐다는 점이었다. 유난히 작았던 내 키가 눈에 띄게 한참이나 커졌다.

스물여섯 살 때 둘째를 임신했고 곧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새어머니는 자기 친자식을 위해 나를 속여 동북(東北) 지방으로 데려갔다. 산후조리 기간에 나는 거의 굶어 죽을 뻔했는데 옥수수쌀조차 먹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내 목숨도 참 질겼다. 어떻게 시달려도 죽지 않고 고생 끝에 낙이 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이후 우리는 동북에 정착해 아주 외진 작은 산촌에서 살게 됐고 또 딸 하나를 낳았다.

고생하며 업 갚고 법 얻기를 기다리다

1997년,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가 우리 진(鎭)에 널리 전해졌고, 그때 많은 사람이 파룬궁을 배우고 연공했다. 어느 날 나는 산길을 걸어 장에 가다가 실수로 넘어져 팔이 분쇄성 골절이 됐다. 오랫동안 낫지 않아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 무렵 마을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있었고,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우리집에 와서 나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하며 나를 교회로 데려가 6일을 머물게 하고, 기도도 해주었지만 내 팔은 전혀 호전되지 않았다.

어느 날 큰아들이 야간근무를 하러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었다. 다리 근처까지 가서 보니 멀리서 사람이 무엇인가를 들고 흔드는 것처럼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사람이 아니라 거대한 불덩이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아들은 깜짝 놀라 자전거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다음 날 아들이 출근해 파룬궁수련생에게 전날 밤 큰 불덩이를 보았다고 이야기하자, 그 수련생은 흥분하며 말했다. “아이고! 당신이 본 건 파룬(法輪)이에요! 인연이 정말 큽니다. 우리는 그렇게 오래 공부해도 못 봤는데, 얼른 배우세요.” 다음 날, 보도원이 책을 들고 우리집에 와서 홍법을 했다. 나는 “저는 이미 종교를 믿고 있어요. 파룬궁을 배울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보도원이 말했다. “당신이 믿는 종교는 이미 2천 년이나 됐고, 그 종교의 사부님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파룬궁은 진법(眞法)이며, 대법 사부님은 지금 세상에 계십니다.” 그리고 책을 펼쳐 사부님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나는 사진을 보는 순간 ‘이분이 바로 대법 사부님이구나!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친근하고 익숙하다니’라고 느꼈다. 바로 이 책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나는 기독교를 포기하고 오로지 파룬따파 수련에 전념하게 됐다.

두 아들과 딸도 따라서 파룬궁을 배웠다. 나는 글을 모르기에 법공부 팀의 수련생이 『전법륜(轉法輪)』을 읽으면 들었다. 그중에서 “81차례 이런 주기적인 변화를 거쳤는데, 나는 이를 아직 끝까지 밝히지 않은 것이다 ”라는 구절을 들었을 때, 내 머리가 갑자기 확 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법은 정말 위대하다!’ 곧바로 딸을 데려와 함께 법공부했다. 나는 글자를 모르므로 딸이 읽으면 나는 정성을 다해 따라 읽었다.

1999년, 중공(中共)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하면서 환경이 매우 긴장됐다. 법공부 팀이 해산돼 나에게 책을 읽어 줄 사람이 없었다. 글을 모르는 나는 책을 들고 눈물 흘리며 사부님의 법상(法像) 앞에서 말했다. “사부님! 저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글을 모르는데 어떡해요.” 다시 책을 들고 손가락으로 한 글자씩 짚으며 읽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책 속 글자를 모두 읽을 수 있었다. 급히 딸에게 “내가 읽은 게 맞니?”라고 묻자 딸은 놀라며 말했다. “맞아요, 엄마! 어떻게 글자를 알게 됐어요?” 나는 너무 기뻤다. 사부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임을 알았다. 이어서 나는 다음 페이지도 읽기 시작했고, 보름 만에 『전법륜』의 모든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됐다. 너무 신기했다. 책 한 권에서 겨우 20여 글자만 잘못 읽었을 뿐이었다. 학교에 다닌 적 없는 내가 이렇게 두꺼운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게 정말 꿈만 같았다. 대법의 기적이 드러난 것이었다.

진상 자료를 배포하러 온 마을을 다니다

위에서 박해 명령이 내려지면서 마을 간부들이 끊임없이 날 괴롭혔다. 어느 날, 마을 간부들이 우리집에 와서 책을 빼앗아 갔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다급해졌다. 그 책은 내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맨발로 달려가 책을 되찾으려 했지만 그들은 차를 타고 도망가 버렸다.

나중에 경찰이 나를 파출소로 데려가 물었다. “당신네 파룬궁은 맞아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대꾸하지 않는다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사람을 때리나요?” 그리고 텔레비전 선전에 나온 파룬궁 모함 발언도 했다.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전 세계에 사부님은 한 분뿐이고 대법은 바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수련하는 사람과 거짓으로 수련하는 사람은 다 있습니다. 나라에도 한 명의 주석이 있지만, 부패하고 살인과 방화를 저지르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손가락도 길고 짧음이 있듯이요. 대법제자는 진선인(眞·善·忍)의 기준에 따라 살아갑니다. 텔레비전에서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입니다.” 경찰은 내가 말하는 게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정중하게 말했다. “저희가 밥을 사 드리겠습니다.” 나는 “안 먹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들은 차를 바꿔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어느 날, 정부와 마을에서 사람들이 우리집에 와서 물었다. “아직 수련하나요? 계속 수련하면 총으로 쏴 죽일 거예요.” 나는 말했다. “총으로 쏴도 두렵지 않아요. 사람은 한 번 태어나고 한 번 죽는 게 아닌가요? 반드시 수련해야 합니다.” 그들이 물었다. “수련하면 무슨 좋은 점이 있나요?” 나는 말했다. “제 온몸의 병이 모두 나았고, 예전에는 글을 몰라 차표도 못 읽었는데, 지금은 책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경멸하듯 말했다. “그럼 책 읽어줘 봐요.” 나는 말했다. “다른 책은 안 됩니다. 제가 읽는 것은 불법(佛法)이며, 오직 대법 책만 제가 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또 말했다. “베이징에 가지 마세요. 만약 가면 당신네 집에는 산과 땅을 다 안 줍니다.” 나는 단호히 말했다. “저는 베이징에 갈 겁니다. 아무것도 원치 않아요. 심지어 유골조차 필요 없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는데, 나의 당당한 태도에 모두 감탄하는 듯했다.

그날 밤 나는 아주 또렷한 꿈을 꾸었다. 사부님께서 오셨는데 주머니를 하나 메고 계셨고 그 안에는 모두 법이 들어 있었다. 그때 경찰들이 몰려와 사부님을 끌고 갔다. 잠에서 깬 뒤 나는 깨달았다. ‘베이징에 가서 법을 증명해야 한다. 사부님과 대법을 위해 누명을 씻어 드려야 한다.’ 나는 먼저 자료를 인쇄해, 중공의 나팔수가 거짓말을 하며 파룬궁을 모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민중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집에 있던 유일한 돈 4천 위안을 꺼내 두 아들과 딸을 데리고 복사집을 찾았다. 마침 한 수련생을 만나 그가 우리를 데리고 가 일부 진상 자료를 인쇄해 주었다. 그날 밤, 우리 모자 네 사람은 집집마다 다니며 문에 자료를 배포했다. 그때만 해도 진상 자료를 배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 일로 경찰과 정부가 놀라 움직였고, 누가 자료를 배포했는지 조사하러 우리집에 왔다. 나는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은 결국 별다른 소득 없이 돌아갔다.

나는 두 번째 자료를 인쇄하기 시작했다. 다른 촌(村)과 진(鎭)에도 배포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걸어 다니기엔 무리였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택시를 잡았다. 기사에게 우리가 자료를 배포하는 데 하룻밤 동안 400위안에 운전해주겠냐고 물었다. 기사는 400위안이라는 말을 듣자 흔쾌히 동의했다. 낮에 자료를 인쇄하고, 밤이 되자 18살 된 딸을 데리고 연속으로 4일 밤에 걸쳐 자료를 배포했다. 도중에 몇 번이나 넘어졌지만 일어나 다리를 절며 계속 배포했다. 그렇게 많은 지역에 자료를 전할 수 있었다.

주변 지역에 자료를 거의 다 배포하자 나는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산둥 고향에도 가서 배포해야겠다.’ 나는 또 자료를 인쇄하고 딸과 함께 차를 타고 산둥 고향으로 돌아갔다. 가지고 간 자료를 모두 배포한 뒤, 나는 종이를 사서 딸에게 “대법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라고 쓰게 했다. 밤새도록 마을 곳곳에 붙였다. 어느 날 밤, 딸과 함께 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이유 없이 너무 졸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우리는 다리 옆에서 발을 맞대고 누워 잠시 쉬었다. 10분도 채 되지 않아 마을 순찰자들이 곳곳에서 포스터를 붙인 사람을 찾고 있었다. 우리가 막 쉬고 있을 때 바로 그곳을 지나갔다. 사부님께서 항상 우리 곁에서 보호해주신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마을이 순식간에 난리가 났다. 공고를 붙이고 현상금을 내걸었다. “파룬궁수련생 한 명 잡으면 1만 위안 지급.” 언니는 우리 둘이 밤새 돌아오지 않자 걱정했고 나를 보자 급히 말했다. “어머나, 너는 목숨이 아깝지 않아도 어린 조카딸은 살아야지.” 경찰은 두 번이나 언니 집에 와서 우리가 파룬궁수련생인지 물었지만, 언니가 적당히 얼버무려 넘겼다. 결국 우리는 다시 동북으로 돌아갔다.

베이징에 가서 법을 실증하다

2001년 어느 날, 나는 우리집 산기슭 나무 위에서 ‘파룬따파는 좋습니다(法輪大法好)’라는 현수막이 떨어진 것을 보았다. 나는 딸에게 주워 오게 하고 베이징에 가져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베이징에 갈 차비가 없었다. 고민하다 나는 집에 있는 소 한 마리를 1500위안에 팔았다. 남편이 이 사실을 알고는 가지 못하게 했다. 돌아오지 못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며 그를 안심시켰다.

2001년 말, 나는 딸을 데리고 베이징에 갔다. 천안문(天安門) 광장에서 우리는 ‘파룬따파는 좋습니다’라는 현수막을 펼쳤고, 곧바로 베이징 천안문 경찰에게 납치돼 공안 분국으로 끌려갔다. 경찰은 우리에게 강제로 몸수색을 했다. 인간성을 잃은 경찰들은 스무 살 된 내 딸의 옷을 모두 벗기며 무언가 숨긴 것이 있는지 확인하겠다고 했다. 딸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자 흉악한 경찰이 주먹으로 딸의 콧대를 내리쳐 코를 함몰시켰고 아이는 아파서 울기 시작했다. 나는 딸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울지 마! 우리는 대법을 실증하러 온 거야!” 그리고 나는 외쳤다. “우리 사부님의 결백을 회복시켜 주세요! 대법의 결백을 회복시켜 주세요!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그러자 경찰이 달려와 내 옷을 벗기고 옷 속에 숨겨 두었던 ‘파룬따파는 좋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빼앗았다. 이어서 나를 바닥에 쓰러뜨리고 코에 암모니아수를 들이붓고 수건으로 입을 막았다. 나는 그 즉시 숨을 쉴 수 없게 됐다. 잠시 후에는 또 내 눈에 암모니아수를 붓고, 라이터로 내 손가락을 지졌으며, 입에 무엇인지 모를 것을 들이부었다. 엉덩이에는 독주사를 놓았다. 고문이 끝난 뒤에는 날 철창 안에 가두었다. 그날 밤, 경찰은 같은 방법으로 또다시 날 고문했다.

집으로 돌아온 뒤 파출소와 진 정부는 내가 베이징에 가서 청원한 일을 이유로 나를 납치하려 했다. 박해를 피하기 위해 나는 집을 떠나 유랑하며 8년을 살았다. 그동안 진 정부와 파출소는 여러 차례 남편에게 나를 넘기라고 압박했고, 7500위안의 벌금까지 부과했다. 남편은 어쩔 수 없이 집과 산지, 농사용 소를 헐값에 팔아 겨우 7500위안을 마련해 진 파출소에 전달했다. 파출소는 연좌제 수법을 사용해 내가 속한 마을의 촌장에게 1000위안, 마을 서기에게 1000위안, 회계에게 500위안을 벌금으로 부과했다. 촌장 등은 벌금을 맞았다는 이유로 자주 우리집에 와서 괴롭히며, 그들이 낸 벌금 돈을 요구했고 주지 않으면 나와 딸의 배급용 논밭을 회수하겠다고 협박했다. 남편은 더 이상 방법이 없자 5무(畝, 1무는 약 200평)의 식량을 팔아 겨우 2500위안을 마련해 마을 간부에게 건넸다.

최근 몇 년 동안에도 마을 사람들과 파출소 직원들이 가끔 와서 괴롭히며, ‘제로화(淸零)’ 소동을 벌였다. 나는 절대로 서명하지 않았다. 겁먹지 않고 당당하게 그들에게 말했다. “대법을 끝까지 확고히 수련할 것이며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

이제 나는 깨달았다. 내 전반생 동안 겪은 고난과 업보는 모두 법을 얻을 날을 기다리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지금 나는 배부르게 먹고 따뜻하게 입으며 새어머니에게 원망도 없다. 모든 일이 인연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 나는 대법을 수련하며 매우 만족스럽게 지내고 매일 즐겁다. 내 자녀들도 모두 잘 살고 있다. 74세인 나는 몸이 건강하고 어떤 일도 할 수 있으며, 매년 옥수수를 팔아 번 돈을 다 쓰지 못한다. 나는 부귀를 추구하지 않는다. 대법을 배운 것이 바로 재산이다. 사부님의 보호와 대법의 지도가 있어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매일 법공부하고 연공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글을 모르는 문맹이었던 내가 지금은 300페이지가 넘는 『전법륜』을 통독할 수 있고, 외우기까지 했다. 내가 확고히 대법을 수련하니 사부님께서 끊임없이 나에게 지혜를 주신 것이다. 박해를 받는 동안 사부님께서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감당하셨는지 알 수 없다. 나에게는 아직 닦아 버리지 못한 사람 마음이 있다. 앞으로 더 잘 수련할 것이며 정념정행(正念正行)으로 사부님과 끝까지 함께할 것이다.

전반생의 내 인생은 황련(黃連, 매우 쓴 한약재)보다 더 쓰디썼다. 하지만 지금은 대법이 내 마음속에 있어 내 삶은 꿀보다 달콤하다.

가장 위대하신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25년 12월 1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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