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1997년 5월 대법을 얻어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수련 전, 시댁에서는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시어머니와 시누이 등 온 가족이 저를 깔보고 갖은 괴롭힘과 학대를 일삼았습니다. 결혼할 때 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단 하나 조건만 내걸었는데, 바로 어머니를 모시고 결혼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혼 후, 시댁 식구들은 이미 밥이 다 된 것을 보고(돌이킬 수 없음을 보고) 태도를 바꿨습니다. 저는 그들을 매우 원망했고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 있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몸과 마음이 병들었고 불치병까지 얻었습니다.
1997년 5월, 이웃의 소개로 저는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이 공법을 접하자마자 참으로 좋고 사람을 선하게 가르친다고 느껴, 단호히 수련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글을 몰라 처음에는 책을 볼 수 없어 듣는 것밖에 할 수 없었지만, 나중에 수련생들의 도움으로 조금씩 글자를 익혀 책을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저는 사부님의 가르침에 따라 진실하고, 선하며, 인내하는 사람이 되려 했고, 온몸의 병이 다 나았으며 시댁 식구들도 용서하게 됐습니다. 시댁 식구들은 제가 대법 수련으로 건강이 신기하게 회복되고 성격까지 변한 모습을 보고, 모두 “이 공법은 참 좋다. 사람을 좋게 변화시킨다”고 말했습니다. 남편과 온 가족도 차례로 수련을 시작했고, 그 후 온 가족은 ‘진선인(眞·善·忍)’을 기준으로 자신을 요구하고 서로 포용하고 참으며 화목하게 지냈습니다.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런 날은 고작 2년 남짓 유지됐고 중공(중국공산당)의 박해가 시작됐습니다.
박해 속에서 굳건히 수련하다
1999년 ‘7·20’ 중공은 대법을 광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대법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저와 수련생들은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진상 자료를 인쇄하고 배포하며, 사람들에게 파룬궁이 불가(佛家) 대법이자 정법(正法)임을 알렸습니다. 또한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고, 고상한 사람이 되며, 나아가 더 높은 경지의 사람이 되는 동시에 심성이 승화되면서 건강한 신체를 얻게 됨을 알렸습니다.
2001년, 저와 남편은 대법을 실증했다는 이유로 연이어 납치돼 불법 구류됐습니다. 2002년 말, 수련생이 진상을 알리다 납치됐는데 그 수련생이 저희 집 차를 사용했기에 경찰이 저희 집까지 찾아왔습니다. 남편은 또다시 납치됐다가 나중에 구치소에서 탈출했지만,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경찰은 계속 집에 와서 소란을 피우고 위협하며 남편의 행방을 캐물었지만 저는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에 그들은 “남편을 못 찾으면 당신이 대신 책임져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저는 2003년 8월 납치돼 불법으로 1년간 강제노동 처분을 받았습니다.
당시 파출소에서 덩치 큰 사내 10여 명이 저를 고문하며 자백을 강요했고, 남편이 어디로 갔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남편이 당신들 이곳에서 없어졌으니 내가 도리어 당신들에게 남편을 내놓으라고 해야겠는데요”라고 말했습니다. 한 경찰이 정면으로 주먹을 날려 입안 가득 피가 고였습니다. 다른 경찰이 또 주먹을 휘두르려 할 때 저는 마음속으로 ‘사부님 저를 구해주세요, 사악이 제자를 박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 경찰은 손을 든 채 한참이나 내리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그들 몇 명은 몸을 돌려 나갔습니다. 그때 저는 사부님께서 그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 후 그들은 더 이상 저를 다그치거나 때리지 않았습니다.
구치소에 있을 때 경찰은 저와 수련생 몇 명을 난방도 없는 창고에 가두고 이불 한 장만 던져줬습니다. 밤에 우리는 나무 몇 개를 걸쳐 놓은 판자 위에서 잤는데, 당시는 북방의 추운 겨울이라 경찰이 모든 창문을 열어놓자 뼈를 깎는 듯한 찬바람이 창고 전체를 얼렸고, 아침에 일어나면 몸의 온기와 차가운 공기가 엉겨 서리가 되면서 침대와 이불이 얼어붙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매일 쉬지 않고 ‘논어(論語)’를 외웠습니다. 그곳에서 매일 먹는 음식은 썩은 채소 잎이었고, 그 위에는 날개 달린 작은 벌레가 한 층 떠 있었으며, 옥수수죽은 얼음처럼 차가운 수돗물에 타서 마셔야 했습니다. 얼음 조각이 있는 물로 씻었는데, 이 기간에 저는 고문으로 자궁이 탈출돼 걷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경찰에게 알리라고 했지만 저는 동의하지 않았고, 대법을 굳게 믿으며 사부님께서 반드시 저를 돌봐주실 거라 믿었습니다. 매일 법공부하고 연공하자 보름 정도 지나 회복됐습니다.
나중에 우리는 끊임없이 경찰에게 진상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곳 경찰 중 단 2명만 빼고 모두 탈당(공산당 탈퇴)했고, 그중 한 경찰은 자기 자녀들까지 탈퇴시켜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형사범들도 많이 탈퇴했습니다.
노동수용소에서 감옥경찰들은 끊임없이 저를 ‘전향’시키려 했고 대법 수련을 포기하라고 강요했지만, 저는 이 기회를 이용해 끊임없이 그들에게 대법 진상을 알렸고, 결국 그들은 저를 ‘전향’시키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감옥경찰은 형사범들에게 “너희들은 대법 사람들을 보고 좀 배워라, 저 사람들이 어떻게 사람이 됐는지 봐라”라고 말했습니다.
가정의 시련 속에서 명리정(名利情)을 닦아버리다
남편이 떠돌이 생활을 하고 제가 불법 강제노동을 당하는 동안, 시어머니, 시누이들은 두려움 때문에 모두 수련을 포기했습니다. 어느 날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함께 왔는데 시누이가 제게 말했습니다. “언니 동수(同修) 중 한 명이 이미 오빠(내 남편)와 함께 살고 있대요.”(사실 남편은 한 여수련생과 함께 자료를 만들고 있었을 뿐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아니에요, 우리는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입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선인(眞·善·忍)의 표준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고 도덕이 고상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기에 그런 짓은 하지 않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2년 동안 계속 그렇게 말했지만 저는 이 한 가지 생각을 굳게 지켰고 나쁜 생각도 품지 않았습니다. 저는 가족들이 마(魔)에게 이용당해 제 정념을 교란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악한 마는 제 마음을 흔들지 못하자 또 다른 방식으로 바꿨습니다. 어떤 부부 수련생이 자주 저를 도와줬는데, 시어머니는 저와 그 남자 수련생의 관계가 정상적이지 않다고 말하며, 제 양말 한 켤레를 꺼내 그 수련생 집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그 수련생들은 모두 아저씨뻘로 저보다 스무 살 이상 많으니 저는 그분을 존경합니다. 저는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대법에 먹칠하지 않습니다.” 시어머니는 또 그 수련생의 아내를 찾아가 모함했고, 그녀는 시어머니 말을 믿고 우리집에 와서 저를 욕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교란받지 않고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 수련생의 아내 A가 때때로 집에 와서 욕을 퍼부은 지 2년이 됐는데, 나중에 그녀가 와서 욕할 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니, 앉아서 욕하세요. 서 있으면 힘들잖아요. 저를 믿으세요. 저는 그런 짓 안 합니다. 우리는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제가 수련을 아주 잘하지는 못해도 대법에 먹칠은 안 합니다.” 한번은 A가 또 와서 욕하자 이웃이 문을 닫으라고 했지만 저는 말했습니다. “닫으면 안 돼요. 닫으면 사실이 돼버리잖아요? 욕하고 싶으면 욕하게 두세요.” 저는 또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나를 욕하고 오해하니 그녀 스스로 업을 짓는 게 아닌가?’ 그래서 몇 번 A를 찾아가 밥을 먹으며 이야기했습니다. “언니, 우리는 수십 년 된 좋은 친구예요. 사람으로서도 저는 언니를 속이지 않아요. 게다가 언니네 남편이 월급을 적게 가져다줬나요? 비록 제가 돈이 없고 아이들에게 돈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비열한 방법으로 돈을 벌지는 않아요.” 결국 A는 조금씩 감동하여 제게 사과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잘못했어. 아직도 연공을 가르쳐 줄 수 있어?” 저는 “그럼요, 언니가 수련하고 싶다면 사부님께서 받아주실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시어머니는 또 우리집 온돌에 이불 두 채가 깔린 것을 봤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돌아오면 쓰려고 펴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시어머니는 또 A에게 일러바쳤고, A가 와서 제가 대법에 먹칠했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제 심장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듯했습니다. 2년 동안 늘 욕을 먹었지만 저는 시종일관 굳건한 일념을 가졌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신다.’ 나중에 A도 자신이 잘못했다며 제게 사과했습니다.
시어머니는 또 손윗시누이 집으로 가서 제가 자기를 쫓아냈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셨습니다. 수련생이 와서 시어머니를 데려올 수 있겠냐고 물어서 저는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저는 일찍 일어나 채소 묘목을 다 팔고 밥 먹을 새도 없이 손윗시누이 집으로 갔습니다. 그 집 개가 사나워 사람이 나와서 봐주지 않으면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는데, 개가 한참이나 짖고 나서야 시누이의 남편이 나와 개를 봐줘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방에 들어갔는데 슬리퍼가 없어 한겨울에 맨발로 타일 바닥을 걸었습니다. 시어머니가 그때 슬리퍼를 찾아 마당으로 휙 던져버리자 집안의 조카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저는 눈물을 머금고 시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저와 함께 돌아가요. 아들도 집에 없으니 우리 둘이 의지해야죠. 제가 된밥을 먹으면 어머니도 같이 드시고, 죽을 먹으면 같이 드시면 되잖아요.” 손윗시누이가 이어서 말했습니다. “엄마는 안 돌아가. 너희 그곳에 가야만 노후를 보낼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너희들이 모시지 않으면 내가 모실게.” 잠시 보아하니 데려갈 수 없을 것 같아 저는 다음을 기약하고 배고픈 채 돌아왔습니다.
그 후 저는 세 번 더 데리러 갔지만 시어머니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돌아와 울면서 수련생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시어머니를 쫓아냈다고 믿으세요?” 수련생은 “당신은 마음이 움직였네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저는 대법을 굳건히 수련합니다. 어떤 마도 제 마음을 움직일 수 없어요.” 사부님께서는 “명리정(名利情) 닦아버리고 원만 이루어 창궁에 오르네”(홍음-원만공성)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좋은 명성을 얻으려는 그 마음마저 내려놓았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사람 구하는 것을 견지하다
2005년, 저는 남편을 찾을 수 없었고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공안국과 파출소를 끊임없이 찾아다녔지만 모두 모른다고 했습니다. 2006년, 저는 구치소의 한 마음씨 좋은 감옥경찰에게서 남편이 이미 비밀리에 10년형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당시 남편은 감옥 내 집훈대(集訓隊)에 수감돼 있었는데, ‘전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감옥경찰에게 온갖 고문을 당했습니다. 남편의 오른쪽 종아리 살을 터지게 때리고 소금을 뿌린 뒤 약을 주지 않아 무릎 아래가 다 썩었고(지금도 흉터가 남아 있음), 대나무 막대로 눈을 때리고(지금도 눈 안의 흉터가 보이고 시야가 흐릿함), 옷을 모두 벗긴 뒤 온몸의 장기에 전기를 통하게 했으며, 손가락과 발가락을 대나무 꼬챙이로 찌르고, 사지를 벌려 매다는 ‘비행기 타기’, ‘크게 매달기’ 고문을 가했습니다. 또 전신이 나체인 그를 수뢰(水牢, 물 감옥)에 7일간 던져 넣어 인사불성이 된 후에야 꺼냈는데, 깨어난 후에도 계속 각종 형벌을 가했지만 남편은 끝내 ‘전향’하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감옥경찰은 그에게 벼 심기를 강요했는데 남편이 하지 않자 옆에 있는 냄새나는 물웅덩이에 던져버렸습니다. 남편은 10년 동안 생과 사의 경계에서 고통을 견뎌야 했습니다.
남편이 떠돌이 생활을 한 3년과 불법 투옥된 10년 동안, 저는 혼자서 가정을 지탱하며 집안에 팔 수 있는 물건은 다 팔아 집을 텅 비우면서 두 자녀를 대학 졸업 때까지 뒷바라지했습니다. 매달 감옥에 가서 남편을 면회하며 돈과 음식을 넣어줬고, 처음에는 한 달에 두 번씩 방문했는데 제가 가면 감옥에서의 시련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을까 해서였습니다. 감옥경찰은 ‘전향’하지 않으면 면회를 시켜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끊임없이 감옥경찰에게 진상을 알리며 “우리는 좋은 사람이고 법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만나지 못하게 하면 당신들을 고소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매달 꾸준히 면회를 이어갔습니다.
이 기간 저는 혼자 절약하며 살았는데, 굶고 먹기를 반복하며 감자를 삶아 먹거나 밭에 있는 옥수수를 구워 먹으며 아낄 수 있는 대로 아꼈습니다. 집에는 쌀과 밀가루도 거의 없었고 기름병은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매번 감옥에 남편을 보러 갈 때 맛있는 것을 좀 만들어가도 저는 한 입도 먹지 않았고, 제 몸은 바싹 말라 있었습니다. 겨울에는 나가서 막노동을 했고 봄에는 비닐하우스 6개에서 모종을 키워 팔았습니다. 매일 아침 식사도 거르고 자전거로 50km 이상 이동하며 50~100kg의 모종을 싣고 다녔는데 자전거 앞뒤가 꽉 찼습니다. 저는 진상 지폐와 진상 자료를 가지고 다니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자료를 배포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나무 다발을 해 자전거에 싣고 왔습니다. 이웃들은 감탄하며 “역시 파룬궁 수련하는 사람은 다르네”라고 말했습니다.
근처 수련생들의 자료는 모두 제가 전달했고, 10여 년간 대법을 실증하고 진상을 알리는 일을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으며, 매주 다 함께 각 마을을 돌며 진상 자료를 배포했습니다. 한번은 젊은 수련생과 함께 갔는데 그가 개를 무서워했습니다. 밤에 마을에서 진상 자료를 배포하는데 개가 달려오자 수련생은 놀라 제 뒤로 숨었습니다. 저는 개에게 “우리는 너를 구하러 왔다.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개는 짖지 않고 몸을 돌려 돌아갔습니다. 수련생들과 매번 진상 자료를 다 배포하고 나면 12시 발정념 몇 분 전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지난 수년간 많은 일을 겪었지만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 아래 안전하게 지나올 수 있었습니다.
남편의 억울한 감옥 생활이 끝나는 날이 되어 저는 수련생들과 어떻게 데려올지 상의했습니다. 감옥경찰들이 ‘전향’하지 않으면 날짜가 돼도 집에 갈 수 없고 계속 세뇌반으로 가야 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날 수련생들은 차량 3대에 사람을 가득 태우고 왔고, 집안 사촌 동생도 차 한 대를 몰고 아들딸과 가족들을 태우고 왔습니다. 감옥 문 앞에 도착하자 수련생들은 감옥 정문 좌우로 각각 한 줄씩 서서 정념을 발했고, 오지 않은 수련생들은 집에서 정념을 발했습니다. 저는 가족들을 데리고 감옥 안으로 사람을 찾으러 들어갔는데, 그 순간 자신이 매우 크게 느껴졌고 하늘과 땅, 천병천장(天兵天將)이 보호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때 현지 ‘610’ 요원들도 도착해 저를 보더니 “당신을 찾고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저도 장쩌민(江澤民)을 고소한 상태였는데, 그들은 저를 위협하며 남편이 ‘전향’하지 않아 집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과 이치에 근거해 논쟁하며 가족들에게 차를 안으로 몰고 들어가게 했습니다. 이때 ‘610’ 차량이 와서 우리 차 앞을 막고 머리를 감옥 정문 쪽으로 향했는데, 남편이 나오면 바로 끌고 갈 태세였습니다. 남편은 그때 감옥 문 안쪽에서 감옥경찰에게 ‘전향’ 서명을 강요받고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풀어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9시에 도착해 정오까지 대치했지만 아직 사람을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제 가족들은 계속 그들과 교섭했고, 저도 그들의 차 앞을 막고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의 한 여경에게 진상을 알리며 중공과 함께 이런 좋은 사람들을 박해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창 말하고 있을 때 아들과 딸이 감옥 정문 안으로 밀고 들어가는 것이 보였고, 마침 남편이 나왔습니다. 강력한 정념의 장(場) 속에서 정법위 사람들도 타협했고, 오후 1시가 넘어서야 우리는 남편을 구출해 올 수 있었습니다. 정념을 가지(加持)해주신 수련생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남편은 감옥에서 100여 명의 삼퇴(중공의 3가지 조직 탈퇴) 명단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사부님과 법을 믿어 병업 고비를 해소하다
2017년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보니 왼쪽 몸 절반을 쓰지 못하고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저는 즉시 사부님께 빌었습니다. “사부님, 사악이 사부님의 제자를 박해하도록 둘 수 없습니다. 저는 일어나야 합니다. 대법에 먹칠할 수 없습니다.” 이 일념으로 저는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걸을 때 여전히 비틀거렸고 다리는 원을 그리듯 움직였습니다. 저는 제 다리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 너는 나의 입자다. 내가 아무리 수련을 잘하지 못했더라도 법 안에서 바로잡을 것이고 사부님께서 관할하신다. 누구도 날 교란할 수 없고 누구도 나를 박해할 수 없다.”
당시 딸이 산후조리 중이라 제가 장을 봐서 밥을 해줘야 했는데, 시장까지는 1km 거리였고 딸의 집은 5층이었습니다. 계단 앞에 서서 ‘어떻게 올라가지?’라고 생각하며 난간을 잡고 올라갈까 하다가 곧 생각을 바꿨습니다. ‘안 된다. 나는 대법제자다. 다른 것에 의존하려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번에 저는 그 의존심을 완전히 제거하고 걸으면서 정념을 발했습니다. 6~7명이 먹을 채소를 사서 왼손에 한 봉지, 오른손에 한 봉지를 들고 손에 감았습니다. 당시 제 손은 젓가락조차 잡을 수 없었기에 손을 향해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천천히 걸어서 돌아왔습니다.
밤에 잠을 자려는데, 사악한 마가 제가 잠든 사이에 박해하면 안 되니 잠을 자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밤새 법공부하고 정념을 발하며 사부님께서 가르쳐주신 선해(善解)하는 법을 외웠습니다. 이렇게 이틀이 지나자 말하고 걷는 것이 정상으로 회복됐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중공 감옥 같은 억압 속에 있지만, 사부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대로 노력하며 진선인의 표준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고 있습니다. 주변의 모든 파룬궁수련자는 중공의 박해 속에서도 진선인을 실천하고 있으며, 사람마다 한 권의 피눈물 나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대법제자가 중생을 구하는 발걸음을 막을 수 없고, 대법제자가 진선인의 법광을 전 세계에 널리 전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원문발표: 2025년 11월 2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11/26/49799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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