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래전, 우리는 신(神)의 광환(光環)을 버리고 삼계(三界)로 내려왔습니다. 대법(大法)에 동화하고, 사부님을 도와 정법[助師正法]하고 중생을 구하는 사명을 완수해 새로운 우주로 돌아가기 위해서입니다. 1998년, 저는 전 우주에서 제일가는 칭호를 갖춘 생명―대법제자가 되어 자신의 오래전 서약을 실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고통도 있었고 미망(迷茫)도 있었으며 기쁨도 있었지만,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 하에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걸어왔습니다. 이제 저의 27년간 주요 경험을 사부님께 보고하고 수련생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1. 수련을 다그치다
1998년 봄, 제 몸은 무척 좋지 않았습니다. 불면증, 비염, 만성 기관지염, 위장병, 치질, 치열, 습진, 관절염 등 몇 가지 병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위장병이었는데, 당시 정말 식욕이라곤 조금도 없었습니다. 출근해야 했기에 억지로 두어 숟가락 뜨는 정도였습니다. 퇴근하고 나면 기운이 없어 침대에 누웠고, 아내(수련생)가 밥을 차리면 일어나 두어 숟가락 뜨고는 다시 눕곤 했습니다.
아내는 계속 제게 성(省) 병원에 가서 검사받으라고 재촉했습니다(우리 부부는 모두 의사입니다). 저는 “위장병인데 검사할 게 뭐 있어, 어차피 치료약도 없는데”라고 했습니다. 결국 아내를 이기지 못해 성 제3병원에 가서 위 내시경을 받았는데 위염, 십이지장염에 궤양도 두 개나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궤양 부위에서 병리 검사까지 했는데 아내는 깜짝 놀랐지만 다행히 결과는 정상이었습니다. 당시 가장 좋은 처방으로 약을 썼고, 아내의 감독하에 매일 식전에 약을 먹었습니다.
그전에 아내는 이미 법을 얻은 지 일주일 정도 됐는데, 집에 가져온 대법서적을 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책을 보게 됐는데, 열흘 정도 만에 당시 출판된 사부님의 저작을 모두 읽었습니다. 책을 보는 동안 저는 약 먹는 것을 잊었고, 아내도 감독하는 것을 잊었습니다. 문득 어느 날 아내가 “약 먹었어요?”라고 물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며칠 동안 안 먹었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내는 “그런데 당신 안색이 훨씬 좋아졌어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당신 매일 저녁에 나가던데, 오늘 당신들이 뭘 하는지 같이 가봐야겠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아내를 따라 법공부 팀에 갔고, 그때부터 반본귀진(返本歸眞, 진정한 자신의 본원으로 돌아감)하는 대법 수련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이전에 저는 불면증으로 잠들기 힘들었는데, 그날 밤 돌아와서 11시 30분에 불을 끄자마자 꿈나라로 갔습니다. 꿈속에서 저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에 갔는데, 무척 고요했고 내려다보이는 경치는 지금껏 본 적 없는 녹색으로 너무나 아름답고 편안했습니다. ‘중국의 좋은 곳도 좀 다녀봤지만 어디도 이렇게 좋은 곳은 없었어, 여기가 어디지?’ 즉시 입체감이 매우 강한 목소리가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여기는 파룬(法輪) 천국이다!”
저는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아, 꿈이었구나.’ 다시 잠들었는데 똑같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수련을 다그치라.” 저는 또 깼고 시계를 보니 11시 40분이었습니다.
10분 동안 두 번의 꿈을 꿨는데 무척 선명했고 중간에 한 번 깨기까지 했습니다. 지금 회상해도 마치 어제 일 같습니다.
이튿날 아침 연공을 마치고 보도원에게 이 일을 말하자 그가 물었습니다. “목소리가 누구 같았어요?” 제가 “모르겠어요”라고 하자, “연공 음악의 구령 소리와 같지 않아요?”라고 했습니다. 아, 생각해보니 정말 똑같았습니다. 바로 사부님이셨습니다. 보도원은 “당신 인연이 얕지 않군요”라고 했습니다.
중국공산당(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한 후, 저는 직장에서 면직됐지만 제 사무실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게 구체적인 업무를 배정하지 않았기에 저는 출근해서 문을 닫고 책을 보며 법공부를 했습니다. 나중에야 깨달았는데 사실 이것은 제가 조속히 제고하도록 사부님께서 세밀하게 배치해주신 것이었습니다.
우리 몇몇 수련생은 상의하여 현지에 몇 개의 법공부 팀을 만들었고, 1999년 ‘7·20’ 이전의 그런 단체 법공부 상태를 회복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전체가 제고하는 데 가장 빨랐습니다.
법공부는 사부님께서 당부하신 ‘세 가지 일’ 중 첫 번째이기에, 저는 줄곧 법공부를 첫 자리에 놓았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법공부를 하고, 법을 많이 공부하며, 법을 잘 공부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깊이 체험했고 법을 많이 공부하는 것의 아름다움도 깨달았습니다.
2. 명혜망과의 인연
박해 초기,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중대한 문제는 반드시 명혜망의 태도를 봐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2000년 6월 15일 명혜편집부 통지 ‘7월 22일 이후 두 번째 진정한 신경문이 곧 발표된다’ 중)
저는 ‘컴퓨터도 없고 인터넷도 안 하는데 어떻게 명혜망의 태도를 알 수 있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법공부를 많이 하고 《명혜주보》를 읽으면서, 저는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명혜망을 봐야 하고 정법 노정을 따라가야 함을 알게 됐습니다. 저 역시 ‘작은 꽃’(자료점) 하나를 피워야 했습니다. 2005년 말, 기술 수련생이 제 요청으로 컴퓨터와 프린터를 구매해줬고 한 번에 인터넷과 컴퓨터 기본 조작법까지 가르쳐줬습니다.
명혜망이 어떻게 생겼는지 당초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나중에 제 컴퓨터가 생겨 매일 명혜망에 접속해 집에 돌아가 보니, 사부님께서 그곳에 앉아 우리를 보고 계신 모습에서 무한한 에너지를 얻었습니다. 동시에 매일 전 세계 수련생들의 교류 원고를 보면서 더욱 호랑이에 날개를 단 격이 됐습니다. 제가 명혜망에 발표한 첫 번째 글은 현지 사악을 폭로한 교류 체험이었습니다. 아마 이것이 제가 훗날 하게 될 주요 과제에 씨앗을 심은 것일 겁니다.
매일 명혜망을 보니 제고가 매우 빠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쓴 원고를 명혜망에 직접 투고하고, 게재된 원고가 수련생(편집자)에 의해 수정된 것을 보며 저는 그 부분을 왜 수정했는지 주의 깊게 봤습니다. 나중에 저는 영광스럽게도 ‘명혜망 통신원’이 됐는데, 압력과 이 업무의 무게감을 느꼈고 동시에 모든 법을 실증하는 업무를 더욱 잘하도록 격려받았습니다. 20여 년간 저는 정법 수련의 길에서 명혜망으로부터 너무나 많은 도움과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때 저는 50대였고, 예전에는 컴퓨터에 대해 전혀 모르는 컴맹이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修在自己), 공은 사부에게 달렸다(功在師父)”(전법륜)고 하셨습니다. 저는 자비로운 사부님의 보호 하에 대법제자는 못 할 것이 없으며 어떤 기적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명혜망에 실린 수련생들의 교류 문장 한 편 한 편은 저의 수련 제고에 지대한 촉진 작용을 했습니다. 동시에 저는 ‘내가 받기만 하고 베풀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20여 년간 저도 자주 명혜망에 수련 체험 문장, 시사 평론, 뉴스류 문장 등을 투고했는데, 편마다 수련생들의 심혈과 지혜가 스며있습니다.
명혜망은 제게 《9평 공산당(九評共産黨)》(공산당에 대한 9가지 평론) 제작법을 가르쳐줬습니다. 《9평》 제작 수량을 늘려야 했을 때, 명혜망에 나무 합판을 이용한 기술이 실렸습니다. 우리는 그림대로 도구를 제작해 효율을 크게 높였습니다. 더 넓은 범위로 《9평》을 제작해야 했을 때, 명혜망에는 ‘자료점에서 수동 제본기 사용 추천’이 나왔습니다. 더 선진적인 ‘무기’가 생기자 우리는 가장 빠른 속도로 수만 권의 《9평》을 만들어 담당 구역의 가구당 한 권씩 빠짐없이 배포했습니다.
정법 노정이 어디까지 왔는지는 명혜망 문장 속에 다 구현되어 있습니다. 어느 단계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역시 명혜망 문장에서 어떻게 정법 노정을 따라가야 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11년 7월 6일, 명혜망 톱기사에 ‘폭죽을 사고 폭죽을 터뜨리자’라는 글이 발표됐는데 주제가 아주 명확했습니다. 저는 즉시 이것이 정법 노정 중에서 대법제자가 시기적절하게 협력해야 할 대사(大事)임을 깨달았습니다. 핵심 문제는 우리가 어떤 일념을 움직이고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련생들과 교류하고 즉시 폭죽을 사고 터뜨리는 행동을 시작했습니다.
또 2015년 5월, 대법제자가 악의 수괴 장쩌민을 고소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소장 양식이 나오자 우리는 곧바로 고소장을 최고검찰원에 발송했습니다.
《9평》이 발표된 후, 우리는 법에서 《9평》의 중요성을 이해했습니다. 저는 우리가 책을 만들 뿐만 아니라 《9평》 배포를 한 단계 더 끌어올려야 한다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모두와 함께 검토해 공감대를 형성했고, 누구나 다 참여해 주로 사회 주류 인사들에게 증정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10여 년 전 빠짐없이 배포했던 구역에 새로 늘어난 구역을 더해 가구당 한 권씩 다시 배포했습니다.
또 예를 들어 명혜망 2024년 12월 18일, 19일에 ‘법난 속에서 진정으로 우리의 능력을 사용하자’, ‘정사대전과 또 한 차례의 큰 시험’ 등 세 편의 교류 문장이 실렸습니다. 일독 후 저는 즉시 발정념(發正念) 대열에 합류했고, 동시에 수련생들에게 알려 모두 조속히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3. 자료와의 인연
만사에는 정해진 수[定數]가 있습니다. 아마 제가 사부님을 도와 사람을 구하는 중에서 한 모든 일이 자료와 인연이 있도록 정해져 있었나 봅니다. 2002년, 저는 사악에게 가택수색, 납치, 불법 감금, 갈취, 면직 등 박해를 당했고 나중에 이른바 ‘처분보류(取保候審)’로 석방됐습니다. 당시 ‘두려움’이라는 물질이 아직 매우 짙었습니다. 협조인은 제게 인조 가죽으로 스프레이용 템플릿을 만들라고 했는데,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깨달았는데, 사실 이것도 사부님께서 제게 두려운 마음을 없애는 과정을 안배해주신 것이었습니다.
반년 후, 협조인은 상의도 없이 갑자기 1대3 복사기(CD 복사 타워) 한 대와 공 디스크 네 상자를 보냈습니다. 저는 거절할 방법도 없었고 거절해서도 안 됐습니다. 그는 원본 디스크는 자신이 제공하고 소모품은 제가 직접 구매해야 한다고, 즉 매주 완제품을 내놓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기계 설명서는 온통 영어라 볼 수도 없었고 그도 영어를 몰랐는데, 그는 “당신이 천천히 연구해서 해보세요!”라며 기계만 남겨두고 가버렸습니다.
우리집은 방 세 개에 여섯 식구인데 아이들에게 들키면 안 됐습니다. 이런 복사기를 집에 두는 것이 마치 폭탄 하나를 둔 것 같아 언제 터질지 몰랐습니다. 아내는 저와 먼저 상의도 없이 기계를 집으로 들였다며, 만약 문제가 생기면 어쩔 거냐며 계속 원망했습니다. 저는 “일단 만약은 말하지 말고 우리 천천히 해봐요”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진상 CD 제작 업무가 시작됐습니다. 저는 더듬거리며 조작법을 익혔고 완제품을 만들어냈습니다.
당시 가장 큰 장애물은 ‘두려운 마음’이었습니다. 사실 그때 제 두려움은 여전히 컸는데, 아이들이 모르게 해서 불필요한 심리적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매일 밤 12시 발정념을 마친 후부터 새벽까지 복사했습니다.
기계가 올 때 설정된 복사 속도는 12배속이라 한 번 굽는 데 7~8분이 걸렸습니다. 설명서를 볼 수 없고 물어볼 사람도 없었으며, 복사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것도 몰라 매주 복사 시간이 20여 시간에 달했습니다. 매 정시마다 발정념을 해야 하고 기계도 쉬게 해야 했기에 매일 밤 많이 만들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거의 매일 새벽 3시 넘어서까지 했습니다. 이런 상태는 2006년까지 지속됐는데 기술 수련생이 와서 속도를 조절해준 뒤에야 바뀌었습니다.
공 디스크 200장은 금방 동났고 시내에 가서 사야 했는데, 시장도 모르고 가격은 더더욱 모른 채 멍하니 전자상가를 돌아다니다가 똑같은 도안의 디스크가 보이면 샀습니다. 상인이 부르는 게 값이었고 흥정할 줄도 몰라 물건을 사면 얼른 집으로 왔는데, 무사히 집에 오는 게 당시 가장 큰 소원이었습니다. 다 쓰면 다시 그 집에 가서 샀는데, 시간이 흘러 두려운 마음이 점차 깎여나가자 비로소 전자상가를 돌아다니며 다른 집 가격도 물어볼 수 있었습니다. 물어보니 장당 몇백 위안씩 속았다는 걸 알게 됐는데, 너무 가슴 아팠지만 교훈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9평》 CD가 나온 후, 다른 진상 CD 외에 《9평》 CD(한 세트 6장)까지 더해지자 복사해야 할 수량이 크게 늘었고(당시는 VCD였습니다), 제 업무량도 대폭 증가했습니다. 매주 CD 평균 소요량은 400~500장, 명절 때는 600~700장에 달했고 가장 많을 때는 한 주에 거의 1천 장을 굽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우리집 복사기가 일찍 일어난 아이에게 ‘우연히’ 발견되면서 이 ‘가정의 비밀’은 집안에서 공개됐습니다.
결국 아이들은 모두 진상을 알고 대법을 지지하게 됐는데, 발견하고도 아무 말 없었으며 무척 평온해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저와 아내도 마음이 놓였습니다. 사실 이것도 우리 심성이 위치에 도달해 우리의 ‘두려운 마음’이 없어지고 ‘두려움’의 장(場)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것이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상유심생(相由心生)’(상은 마음에서 생긴다)일 것입니다.
명혜망 웹페이지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지방 정기간행물을 발견했는데 소책자도 있고 전단도 있고 《명혜주보》 지방판도 있었습니다. 당시 머리에 작지 않은 충격을 받았고, 자료를 만들고 싶다는 일념이 스쳤습니다. 하지만 저는 막 타자를 배운 상태라 편집, 조판 등은 전혀 몰랐기에 자료를 만든다는 건 어불성설이었습니다. 그 후 자세히 연구하고 비교해보니 《명혜주보》 지방판이 가장 간단해서, 어떤 텍스트 상자의 내용을 현지 내용으로 교체하기만 하면 되고 다른 건 손댈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성공 후 명혜망에 투고했고 발표됐습니다. 저는 자신감이 크게 늘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각지의 진상 자료를 대량으로 훑어봤는데, 기본적으로 다 현지 악인과 악경(惡警)을 폭로하는 내용임을 발견했습니다.
사부님 말씀을 대조해 보았습니다. “악경(惡警)과 나쁜 사람을 폭로하고 사회에서 그 사람의 악행을 공포(公布)하는, 이런 방법은 이성(理性)이 없는 그런 악인을 두려워 떨게 하는 더할 수 없는 큰 작용을 일으켰다. 동시에 또한 현지에서 진상을 똑똑히 알리는 중에 민중들에게 사악의 박해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폭로와 인식을 불러 일으켰다. 동시에 또 거짓말에 독해되고 기만당한 민중을 구도하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이다. 대륙의 전체 대법제자들과 신수련생들이 모두 이 일을 잘하기를 희망한다.”(정진요지3-수련생 문장에 대한 평어) 저는 마치 단번에 방향을 찾은 듯했습니다. ‘바로 이거다!’
협조인 수련생을 찾아가 말하니 그도 동의했지만, 관건은 반드시 소재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즉 모두가 사악에게 박해당한 자신의 경험을 쓰도록 격려해서 명혜망에 투고하고, 발표된 후 현지 진상 내용을 편집해야 했습니다. 소재는 비교적 까다로운 문제였는데, 당시 많은 수련생이 악인, 악경의 보복을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해내려면 반드시 저부터 돌파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최단 시간에 제가 사악에게 박해당한 경험을 써서 명혜망에 투고했고, 또 가장 빠른 속도로 현지 진상 창간호를 편집해 명혜망에 발표했습니다. 그러자 잇따라 거의 모든 악당의 박해를 받은 우리 지역 수련생들이 자신의 박해 과정을 썼고, 우리 지역의 ‘현지 사악 폭로’ 업무가 큰 발걸음을 내디디게 했습니다.
‘가장 빠른 속도’로 창간호를 편집해냈다고 했지만, 저는 편집, 조판 등 이런 기본 조작조차 할 줄 몰랐고 물어볼 사람도 없어 자료 수집, 집필, 편집에서 지면 디자인, 조판까지 한 달 넘게 걸렸습니다. 오직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확고한 마음 하나로 억척스레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때 저는 컴퓨터 옆에 앉아 마우스를 누르고 끊임없이 두드렸는데,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게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어떤 방법과 과정은 다시 반복하려 해도 할 수 없었고, 단지 당시 한 번만 성공한 것이니 참으로 불가사의했습니다. 이 순간, 저는 무엇이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修在自己), 공은 사부에게 달렸다(功在師父)”(전법륜)인지 진정으로 명백해졌습니다. 또 왜 모든 근본적인 것은 사부님께서 해주시고 사부님께서는 단지 우리의 이 마음만 보신다고 하는지 진정으로 알게 됐습니다. 이렇게 한 것이 오늘까지 20년 가까이 됩니다.
4. 꾸준히 현지 사악을 폭로하다
명혜망을 탐독하며 저는 깨달았습니다. 사악을 폭로하는 것은 정법시기에 해야 할 주제 중 하나입니다. 현지 사악을 폭로하는 중요성에 대한 제 인식 역시 수련 중에서 점차 제고되어 올라온 것입니다. 2003년 《수련생 문장에 대한 평어》가 발표된 후, 당시 저는 그 특수한 의의를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2004년 1차 대법서적 글자 고치기(的, 地, 進)를 할 때, 사부님 설법 시간 전후 순서에 따라 글자를 고쳤습니다. 다 고치고 나서야 사악 폭로에 대해 좀 인식이 생겼는데, 당시는 정말 진지하게 한 글자 한 문장씩 통독하며 고쳐야 할 글자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글자 고치기였지만 느낌이 무척 좋았고 법공부가 마음에 쏙 들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우리 지역은 아직 악인 개인에 대한 폭로를 시작하지 않았고, 당시 제가 한 것도 공개 서신 같은 종합적인 박해 폭로 문장과 악인들의 업보 소식 등을 쓰는 정도였습니다. 진정으로 사악 폭로 항목을 시작한 것은 제가 직접 컴퓨터를 사고 직접 인터넷에 접속해 매일 명혜망이라는 이 ‘집’에 돌아와 본 뒤부터입니다. 명혜망의 방대한 교류 문장과 각지의 박해 폭로 문장 및 각지 진상 자료 등은 제가 사악 폭로, 특히 현지 사악 폭로에 대해 진정으로 질적인 비약을 하게 했습니다.
우선 저는 현지 사악 폭로 인식에 대한 체험 문장을 써서 명혜망에 발표했습니다. 이어서 현지 주요 박해자들의 대법에 대한 범죄 사실과 그들이 업보를 입은 문장을 써서 명혜망에 투고했습니다. 그날 밤, 우리 지역에는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리며 비바람이 몰아쳐 오랫동안 지속됐습니다. 4월 하순, 북방의 기후는 따뜻해지다가도 추워지는데 통상 이런 날씨가 나타날 리 없어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이튿날 사람들이 수군거렸습니다. “어젯밤 번개와 천둥에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정부 청사 2층 소회의실에 불이 나서 소방차까지 요란하게 출동했대.” 오후에 명혜망을 열어보니 제가 투고한 원고가 실려 있었습니다. 저녁에 협조인 수련생과 우리가 세 든 집에서 만났는데, 갑자기 방이 환해졌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셋방살이 1년 넘게 한 번도 켜진 적 없던 100촉짜리 전구가 켜진 것이었습니다. 저는 전날 밤 번개와 천둥, 비바람과 소회의실(중공 악당이 이곳에서 여러 차례 파룬궁 박해를 밀모하고 배치함) 화재의 원인을 단번에 알았습니다. 그것은 다른 공간 정(正)과 사(邪)의 대결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번도 켜진 적 없던 전구가 갑자기 켜진 것은 우리에 대한 격려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저는 조판을 할 줄 몰라 시내의 기술 수련생에게 부탁해 이 문장을 진상 전단으로 만들어 현지에 광범위하게 배포했습니다. 모두 현지의 실제 인물과 실제 사건이라 국민들이 다 알고 볼 수 있어서 피드백된 정보가 무척 좋았습니다. 민중이 진정으로 현지 악인, 악경이 파룬궁을 박해해 업보를 입은 진상을 보게 했고, 이들이 파룬궁을 박해한 비참한 말로를 보게 했으며, 동시에 그 악인, 악경들을 크게 떨게 했습니다.
이어서 수련생들과 교류하며 모두 두려운 마음을 닦아버리고 현지 사악을 폭로하도록 격려했습니다. 일정 시간이 지나자 수련생들의 박해 폭로 문장이 점차 많아졌고, 제가 편집하는 현지 진상 간행물에 비교적 많은 원고 소스를 제공했습니다. 이 20년 가까이 현지 진상 보도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저의 수련 제고는 매우 컸습니다.(계속)
(명혜망 제22회 중국법회 원고)
원문발표: 2025년 11월 2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11/25/502647.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5/11/25/502647.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