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윈난(雲南)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2015년 파룬따파를 접했고, 지금은 진정한 대법제자가 된 지 꼭 10년이 되었습니다. 제 인생 여정을 돌아보면 마치 큰 꿈을 꾸다 깨어난 것 같습니다. 고통의 심연에서 생을 포기하려던 제가, 수련을 통해 점차 본래의 저 자신으로 돌아왔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이 교류 글을 씁니다.
1. ‘명성’을 잃다
저의 부모님은 의학·제약 분야에서 일하셨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말 잘 듣고 얌전했으며, 공부도 잘했습니다. 부모님이 동료나 이웃 앞에서 저를 자랑하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표정을 볼 때마다, 저는 더 열심히 공부해서 부모님께 체면을 세워드려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내내 성적은 상위권이었고, 대학에도 진학했습니다.
2001년,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순조롭게 한 국유 자산관리 플랫폼에 들어가 투자·융자 업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당시 매우 인기 있는 직장이었고, 돈과 권력을 겸비했으며, 주말이면 고급 요리 대접을 받았고, 출입하는 곳마다 고급 장소뿐이었습니다. 저는 여러 전문 자격증을 따기 위해 노력했고, 업무에서도 고생을 마다하지 않아 핵심 인력이 되었습니다. 또 노래·춤·체육 활동에도 뛰어나 한동안 직장의 ‘인기인’으로 불렸습니다.
업무와 학습 외에도 저는 경제 동향에 관심을 가졌고, 당시 새롭게 등장한 다단계 판매와 전자상거래에도 참여했습니다. 몇 년이 지나자 주업과 부업 모두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외모나 복장, 내면의 기질까지 이미 전형적인 직장 여성 엘리트로 변모했습니다. 게다가 준수한 외모에다 저와 마찬가지로 우수하고 진취적인 남자친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잘 풀린다고 생각할 때, 운명의 업력의 손길이 조용히 저를 향해 뻗쳐왔습니다. 27살 때 제 인생에 큰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어머니가 갑자기 병을 얻어, 수시로 쓰러지고 호흡과 심장이 멎어 120 구급차에 여러 차례 실려 병원으로 갔습니다. 반년 동안 저는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병원에서 어머니를 간호했습니다. 바로 그때 직속상관이 바뀌었는데, 제가 새 상사의 올바르지 못한 의도를 거절하자 정상적인 승진 절차가 중단되고, 괴롭힘과 압박을 받았습니다. 저를 질투하는 많은 사람들은 비웃었고, 심지어 저를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의식주에 부족함은 없었지만, 아버지의 관심을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가난하고 극도로 남아선호가 심한 집안에서 태어나셨는데, 저는 딸이라는 이유로 태어날 때부터 ‘외인’ 취급을 받으며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학업 성적이 아무리 뛰어나도, 직장에서 어떤 성취를 이루어도 아버지는 한마디 언급도 없었고, 저와 대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저의 모든 것이 아버지와 무관한 듯했습니다. 어머니는 위중한 병세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이중의 압박 속에서 저는 결혼을 간절히 원했고, 의지할 수 있는 안식처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결혼을 준비하던 중, 아는 사람으로부터 남자친구가 다른 마음을 품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제 첫사랑이었고, 7년 동안 교제해왔습니다. 저는 분노하여 따지러 갔지만, 남자친구는 부정했습니다. 남자친구는 제가 상사의 성적 괴롭힘을 처리하는 데 세련되지 못해 수년간 쌓아온 성과를 잃었다고 저를 비난했습니다. 우리는 큰 다툼 끝에 결국 헤어졌습니다.
제가 남자친구와 헤어진 것을 알게 된 어머니는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었습니다. 응급 치료에서 깨어난 어머니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죽기 전에 제 결혼식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달 뒤, 어머니의 재촉과 주선으로 저는 세 번밖에 만나지 않은 상대와 결혼했습니다. 결혼한 지 오래지 않아 저는 그 ‘체면 있는’ 직장도 그만두었습니다.
저는 창업을 시작했고, 힘들고 바쁘게 지내며 큰 압박을 견뎠습니다. 그러나 가장 괴로웠던 것은 남편과 전혀 공통 언어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직업도 없었고, 무슨 일이든 힘들다고 불평했으며, 생활 습관도 나빴습니다. 성격도 나빠 조금만 말이 안 맞아도 화를 냈고, 진취심도 책임감도 없었습니다. 저는 이혼을 원했지만, 막상 어머니께 말씀드리려 하자 집에서 요양 중이던 어머니가 충격으로 또다시 120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이가 이런 가정에서 행복을 누리지 못할 것 같아 두려웠습니다. 남편은 내내 할 일 없이 놀고 있으면서도 저를 위해 단 한 끼도 밥을 해주지 않았고, 산전 검사에도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임신 7개월이 되었을 때에도 저는 공사장에서 밤을 새우고 있었습니다. 출산 당일, 남편은 저를 병원에 데려다주자마자 떠나버렸습니다. 아이는 난산으로 이틀 밤낮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여전히 병을 앓고 계셨으며, 제 곁에는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셋째 날 아침, 저는 태아의 이상을 직감하고, 산실에서 뛰쳐나와 의사를 찾아 즉시 제왕절개를 부탁했습니다. 수술은 오래 걸렸고, 아이는 탯줄이 목을 두 바퀴 반이나 감고 있었습니다. 의사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아이가 살아도 뇌성마비일 수 있습니다.” 제 마음은 공포로 가득 찼습니다.
아이는 살아남았지만, 저는 과다출혈로 쓰러졌습니다. 일주일 뒤, 저는 기력이 전혀 없는 몸과, 뇌성마비인지조차 확실치 않은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피가 멈추지 않았고, 남편은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초보 엄마로서 노약자의 도움도 없이 허약한 몸으로 혼자 아이를 돌봐야 했습니다. 아이를 보느라 식사조차 거를 때가 많았습니다. 산후조리를 단 하루도 하지 못했고, 본래 젖이 충분했지만 계속된 피로와 억눌린 마음 탓에 젖도 금세 말라버렸습니다.
밤마다 아이가 젖을 먹지 못해 울부짖으면 저도 함께 울었습니다. 제 삶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절망하며, 아이를 안고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도 여러 번 들었습니다. ‘효도하려고’ 섣불리 책임감 없는 남자와 결혼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울음소리는 저를 계속 현실로 되돌렸습니다. 그동안의 성공적인 경력도 아이 때문에 모두 포기해야 했습니다. 저는 허약한 몸과 껍데기뿐인 결혼 속에서 아이를 돌보며, 새로운 직업을 배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자지 못했습니다.
몇 년 사이에 저는 햇살 같던 소녀에서 점차 시든 중년 여인이 되었습니다. 남편은 여전히 돈도 벌지 않고, 아이도 돌보지 않았습니다. 책임을 피하려고 일부러 고함을 쳐서 아이를 울게 만들고, 심지어 저를 폭행해 몇 차례 뼈가 금이 가기도 했습니다. 제 마음은 점점 시들어갔고, 몸도 더 쇠약해졌습니다. 아이와 가정을 위해 하루하루 버텼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버팀은 10년 만에 무너졌습니다. 우연히 옛 지인을 만나, 저의 첫사랑 남자친구가 헤어진 뒤 제 집을 찾아왔지만, 어머니가 제가 빨리 결혼하길 바라는 마음에 ‘이미 결혼했다’고 거짓말해 돌려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병들었고,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고, 먹으면 설사와 구토를 반복하다 황달까지 왔습니다. 제 몸은 세상과 단절된 듯했습니다. 한 달 만에 키 165cm에 47kg이던 몸무게가 35kg대로 줄었고, 마른 장작처럼 변했습니다. 점차 말도 하지 않았고, 세상 모든 일에 무감각해졌습니다.
어느 날 밤, 제 영혼이 공중에 떠 있는 듯했고, ‘아, 이제 곧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어렴풋이 남편이 어머니에게 제가 정신병에 걸려 정신병원에 보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며 마음속으로 외쳤습니다. ‘세상에! 그들이 날 정신병자라고 생각하다니! 나는 그저 삶이 너무 고통스러울 뿐이지, 미친 게 아니라고! 나는 살아갈 의미를 찾지 못했을 뿐이라고!’
그 순간, 저는 딸이 떠올랐습니다. 만약 제가 정신병원에 보내진다면, 정말 정신병자가 될 것이고, 그럼 아이는 어떻게 될까?! 절대로 안 된다. 아이를 무책임한 아버지와 체면만 중시하는 외할머니 손에 맡길 수 없다. 그러면 딸의 미래는 내 인생보다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나는 일어나야 한다. 병을 치료하고, 아이를 위해 반드시 살아야 한다. 저는 남편에게 전 재산을 주고 이혼했습니다.
제 병세는 심각해 보였지만, 여러 병원에서 장과 위 검사를 받아도 아무런 문제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 혈소판 수치는 급격히 떨어졌고, 빈혈이 생겼으며, 몸에는 자반이 생겼습니다. 혈액 응고 수치는 언제든 대출혈이 일어날 정도로 위험했습니다. 의사는 저에게 입원해 골수 검사를 포함한 일련의 검사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저는 두려움에 휩싸였고,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소연할 곳도, 제 마음을 이해해 줄 사람도, 도움을 줄 사람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2. 대법을 수련하여 새 생명을 얻다
어느 날 새벽, 위통이 너무 심해 더는 견딜 수 없는 절망 속에서 저는 집을 뛰쳐나갔습니다. 아마도 운명의 인도였을 것입니다. 발길이 멈춘 곳은 오래전 친구가 소개해 준 한의원이었습니다. 저는 별다른 기대 없이 늘 하던 대로 두툼한 진료 기록과 검사표를 의사에게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볼 필요 없습니다. 병이 아니라 마음의 병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치 벼락을 맞은 듯했고 저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수년간 마음속에 쌓였던 억울함을 한꺼번에 쏟아내듯 흐느껴 울었습니다. 이미 뼈만 남을 만큼 수척해진 저는 의사에게 말했습니다. “인간 세상은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저는 여기서 떠나고 싶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요?” 그러자 의사가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수련뿐입니다.”
그날부터, 그 인연의 순간부터 저는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 수련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수련을 막 시작했을 때 저는 법리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지 않았고, 온갖 집착과 마음, 정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련생들의 도움 속에서 저는 한 걸음씩 사부님과 대법을 굳게 믿게 되었고, 더는 원망하지 않으며 매일의 일을 제 자신의 수련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병업은 허상이라 여기고 부정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병을 고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수련하려고 온 것입니다.”
차츰 몸은 10kg이나 늘었고, 얼굴빛도 몰라보게 좋아졌으며, 예전의 젊고 밝았던 저처럼 다시 정정한 기운이 넘쳤습니다. 사람들은 제 얼굴이 부드럽고 온화하게 변했다고 말했습니다. 과거의 고통스러운 감정적 상처도 법공부를 통해 원망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대법은 우리에게, 태어나는 순간 이미 인생 과정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법리를 깨닫고 나니, 저는 어머니를 더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에 대한 집착을 버리도록 도와주신 어머니께 감사드렸습니다. 마음의 매듭이 풀린 뒤에도 저는 여전히 어머니를 공경하고 효도하며, 생활 속에서 한결같이 세심하게 돌보았습니다. ‘공산당에 대한 9가지 평론’을 읽은 후, 아버지의 사고방식이 당문화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음을 분명히 알게 됐습니다. 아버지도 사실 불쌍한 분이셨습니다. 이를 깨닫고 나자, 아버지가 여전히 예전처럼 대하셔도 제 마음에는 조금의 원망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는 저를 향상시키기 위함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수련은 제가 하므로 저는 안으로 찾고, 진선인(真·善·忍)의 기준에 비추어 제 부족한 점을 찾아야 했습니다. 아버지와 따지지 않고 오히려 먼저 잘 대해 드렸습니다. 어느 날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아버지가 제게 먼저 차 한 잔을 따라 주셨습니다. 저는 그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질 만큼 감동했습니다. 제게는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전 남편은 이혼 이후 단 한 번도 아이를 보러 오지 않았고 양육비 한 푼 낸 적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이혼 뒤에 파렴치한 수단으로 제 돈을 빼앗아 갔습니다. 친척과 친구들은 모두 그를 고소해 소송을 제기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수련을 통해 제 마음속에는 조금의 원망도 남지 않았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미움 또한 정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를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저에게 관문을 넘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에게 빚진 것을 갚는 것이라 생각하고, 동시에 제 마음성품도 제고되었으니 일거양득이었습니다.
아이를 대하는 데 있어서도, 저는 점차 속인의 교육 개념과 조급함을 벗어나, 더 많이 법리에 따라 인도하고 가르쳤습니다. 제 마음은 무척 평온하고 안정되었습니다.
2023년, 친척이 자신의 약점으로 인해 사업이 난관에 부딪혔을 때, 저를 그의 작은 기업에서 일하도록 진심으로 요청했습니다. 저는 숙고 끝에 친척의 성의를 느끼고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제 수련의 문턱을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됐습니다.
1년 동안 저는 친척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일의 틀을 세워 바로잡았습니다. 그런데 친척은 배은망덕하게도 저를 하루아침에 내보내, 저는 갑자기 실업자가 됐습니다. 하지만 저는 수련자로서 줄곧 진선인을 지켰습니다. 저는 친척의 사업을 제 일처럼 여기며, 진심으로 그의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애썼습니다. 친척이 비열한 수단으로 저를 내칠 때도, 저는 한마디 다투지 않았고, 심지어 법적으로 정해진 보상금조차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일을 정리해 메모를 남기고는 말없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참지 못하며 말했습니다. “너무 순하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도 힘든데, 친척이 널 이용해 안정된 직장까지 잃게 만들다니, 사람도 아니다. 크게 욕이라도 해서 분풀이해야 한다.” 솔직히 제 마음에 파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년에 실업자가 되어 홀로 아이를 키우고, 노부모까지 계시니 어찌 압박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내심으로 이번 역시 큰 시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안으로 찾아야 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좌선하며 제 마음을 하나하나 살펴보았습니다. 저 자신에게는 미련이 없었고, 부모님께도 후회할 만한 일이 없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도 빚진 바가 없었습니다. 오직 아이에게만은 미안했습니다. 수입이 없어 아이의 성장에 필요한 것을 보장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마련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 마음 아팠습니다. 눈물이 쏟아지며 딸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그러나 곧 다시 생각했습니다. 이것 또한 정이구나. 아이에 대한 과도한 걱정도 정이니 내려놓아야 한다.
이렇게 깨닫고 나자 저는 끊임없이 정념을 강화하며 마음속 깊이 숨어 있던 두려움과 정에 대한 집착을 더 철저히 내려놓았습니다. 이번 관문을 넘으며 사람 마음에 대해 더욱 깊이 느꼈습니다. 미혹 속의 사람들은 욕망과 명리 때문에 본래의 순수한 본성을 잃고, 인과를 믿지 않으며 우주의 진리를 알지 못한 채 죄업을 쌓으면서도 자각하지 못하니 참으로 가엾은 존재입니다.
저는 이렇듯 고통스럽고 힘든 체험을 거치며, 수련이 깊어질수록 속인의 많은 관념과 집착을 벗어 버리고, 범부에서 신성한 길을 점차 걷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이 생길 때마다 저는 끊임없이 안으로 찾으며 제 사람 마음과 집착을 발견했습니다. 내려놓을수록 더욱 불성(佛性)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실업 중 저는 매일 법공부와 연공을 하며 집안일을 했습니다. 삶은 단순해졌지만 한결같이 기쁘고 평안했습니다. 전례 없는 여유와 안락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꿈에, 저는 황홀한 곳을 보았습니다. 나무에는 황금빛 꽃이 피어 있었고, 연꽃은 연못에서 활짝 피어 있었으며, 오색 보석으로 된 물고기들이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아름다움 그 자체였습니다.
영화 ‘우리는 원래 신이었다’를 보았을 때, 저는 마치 제 걸어온 길을 보는 듯하여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렀습니다. 공명이 많았고, 깊은 감동이 있었습니다. 미혹 속에서 후천적 관념의 지배 아래 명·리·정에 집착하여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심지어 삶을 포기하려 했던 제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파룬따파를 만나 구원받아, 미혹에서 깨어나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제 영향으로, 저의 어머니와 아이도 대법 수련에 들어섰습니다. 동시에 저는 더 많은 미혹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돕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수련이라는 것을 알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미몽에서 깨어나 우리 본래의 참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비롭고 위대한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인내심으로 저를 도와주신 수련생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25년 8월 2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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