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벌써 7·20이 또다시 다가오고 있다. 1999년 7월 20일 공산당 우두머리 장쩌민(江澤民)이 광란에 빠져 대법을 박해하기 시작한 지 26년이 흘렀다. 과거를 되돌아볼 때마다 가슴이 무겁기만 하다. 오늘 나는 펜을 들어 그 피바람의 법을 수호한 역정을 기록하고자 한다.
1999년 4·25 사건 직후, 어떤 사람들이 공원에 나타나 우리를 내쫓으며 더는 연공을 하지 못하게 했다. 1999년 7월 20일 밤, 우리가 법공부 팀에서 막 법공부를 끝냈을 때였다. 한 수련생이 급하게 달려와 알려줬다. “중국공산당(중공)이 파룬궁을 금지했습니다. 현(縣)의 수련생들은 어제 베이징에 청원하러 떠났고, 돈이 없는 분들은 성 정부로 갔어요. 여러분도 가시겠어요?” 우리는 한목소리로 외쳤다. “갑니다!” 그 자리에 있던 남자 수련생이 내게 말했다. “당신과 아무개는 교류 원고를 가져가세요.” 나는 그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며칠 전 우리 법공부 팀과 농촌 수련생들이 함께 연 심득교류회에서 내가 발표했던 원고를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딸과 연공장의 10여 명 수련생들과 함께 몇 리를 걸어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던 수련생이 우리 몇 명을 택시 승합차에 태웠는데, 중도에 신분증 검사에 걸려 되돌아오고 말았다. 한밤중이 되자 함께 탔던 수련생들도 뿔뿔이 흩어졌고, 밤새 시달리다 날이 밝았다. 하지만 나는 그냥 돌아갈 수 없었다. 딸에게 택시를 타고 집에 가서 신분증을 가져오라고 시키고, 나는 정류장에서 기다리며 버스편을 알아봤다. 그러고 있는데 평소 우리 법공부 팀에 자주 오던 농촌의 한 남자 수련생이 나타났다. 연공장에 갔는데 아무도 없어서 이곳을 지나다 나를 보게 됐다고 했다. 내가 사정을 설명하자 그는 감격해하며 말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사부님께서 당신을 시켜 여기서 저를 기다리게 하신 거군요.” 나 역시 눈물을 흘리며 답했다. “무슨 차를 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어요. 저는 멀리 나가본 적이 없어서 길을 모르거든요.” 그가 차편을 알아본 덕분에 오후 3시, 우리는 성도행 버스에 몸을 맡겼다. 차는 밤새 달렸다. 길 곳곳에는 검문이 이어졌고 신분증 검사가 계속됐다. 분위기가 극도로 삼엄했다. 다음날 새벽 5시에야 성 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밤에 가랑비가 내려 우리는 물이 있는 곳에서 대충 세수를 했다.
택시 한 대가 다가왔다. 올라타서 성 정부로 가달라고 하자 운전기사가 “아이고!” 하며 탄식했다. “당신들도 파룬궁수련자시군요? 어제도 성 정부에 가는 분들을 태웠는데, 모두 체포됐어요. 계엄령까지 내려져서 정말 무서웠습니다. 겁주려는 건 아니지만 가지 마세요.”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갈 수는 없었다. 차는 성 정부 인근에서 멈췄다. 내리자마자 성 정부청사 앞 인도변에 경찰들이 기세등등하게 총을 손에 쥔 채 지붕 없는 차량에 일렬로 서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적군을 맞이하는 듯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앞쪽 행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남자 수련생에게 조용히 일렀다. “오라버님, 함께 가지 마시고 거리를 두고 따라오세요.” 딸의 손을 잡고 성 정부청사 쪽으로 걸어가니 두 명의 경찰이 정부 마당에서 튀어나와 우리 신분증을 확인했다. 어디 가느냐고 묻기에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이 외할머니댁에 갑니다. 오늘은 왜 이러는지, 차에서도 검사하더라고요.” 그는 반신반의하며 나를 바라보더니 “가세요”라고 했다. 한참을 걸어 뒤를 돌아보니 남자 수련생이 따라오고 있었다.
큰길은 성 정부를 에워싸고 있었다. 우리가 반 바퀴 이상 돌고 있을 때, ‘이른 아침인데 참 조용하네’라고 생각했다. 길 끝에 다다르자 갑자기 서쪽에서 많은 수련생들이 몰려왔다. 그중 서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수련생은 목에 흰 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자신이 성 보도원이라고 소개하며 주머니에서 생수와 소시지를 꺼내 내 딸에게 건넸다. “어제 체포된 수련생들은 대형 차량으로 체육관에 이송됐습니다. 우리 보도원들도 모두 잡혀갔어요.” 내가 “그들과 차근차근 대화해보시지요”라고 하자, 그는 답했다. “누구하고요? 말도 못 하게 하고, 정부 근처에만 가도 바로 체포해버려요.” 계속해서 오는 수련생들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이분들은 기차역에서 밤을 새기도 하고, 다리 밑에서 노숙하기도 했어요.”
그때 아까 나를 심문했던 두 경찰이 다시 기세당당하게 달려왔다. 수련생들은 순식간에 흩어져 자취를 감췄다. 경찰이 떠나자 수련생들이 다시 서쪽에서 나타났다. 매번 나는 몇 발자국 물러났다가 다시 돌아왔다. 마음속으로 ‘이런 식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이번에는 물러나지 않겠다. 기회가 되면 반드시 청원서를 제출하자’고 다짐했다. 큰 바위에 앉아 딸에게 물었다. “너는 뭘 하러 왔니?” 딸이 시원하게 대답했다. “정법하러 왔어요.” “무섭지 않니?”라고 묻자 “안 무서워요”라고 했다. 그때 딸은 겨우 11살이었다.
근처에서 3위안짜리 큰 빵을 사서 모녀가 배불리 먹었다. 그런데 그 두 경찰이 또다시 기세당당하게 와서 우리 모녀를 내쫓았다. 내가 웃으며 “여기는 성 정부 안도 아니고 밖이잖아요? 잠깐 쉬는 것도 안 되나요?”라고 하자, 그는 포악하게 소리쳤다. “너 파룬궁이지! 파룬궁 중에 좋은 놈이 하나도 없어.” 나는 말했다. “사실 당신들은 파룬궁을 제대로 모르세요. 그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고 선량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온갖 병이 다 나았고, 사회에도…”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는 화를 내며 “나한테 그런 소리 하지 마!”라고 했다. 그러고는 파룬궁을 모독하는 말들을 한바탕 쏟아냈다. 그가 무리한 말을 하며 우리 사부님을 모욕하는 것을 보고, 나는 엄숙하게 말했다. “우리 사부님을 욕하지 마세요. 진선인(眞·善·忍)이 좋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나쁜 사람입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고함쳤다. “한 마디만 더 해봐!”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러자 그는 “오늘 내가 나쁜 놈이 돼 주지, 따라와!”라고 하며 내 옷깃을 붙잡고 청사 안으로 끌고 갔다. “가면 가지요. 저야말로 당신들 책임자와 이야기하고 싶었거든요”라고 했다. 그는 한 손으로 나를 끌고, 다른 손으로 전화를 걸며 “또 한 명 잡았다. 차 가져와!”라고 했다. 차가 오자 내 팔을 힘껏 움켜쥐고 억지로 차 안에 밀어 넣으려 했다. 나는 타지 않겠다며 큰 소리로 외쳤다. “경찰이 좋은 사람을 잡아가요!” 그는 나를 억지로 밀어 넣으면서 추악한 욕설을 퍼부었다. 솔직히 그때 인민경찰의 입에서 그런 더러운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릴 때 교과서에서 ‘경찰 아저씨는 인민을 사랑한다’고 배웠고, ‘경찰 아저씨’를 자랑스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추악한 현실이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차에 탄 후에도 경찰은 계속 욕설을 퍼부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그만 욕하고 좀 쉬세요. 제가 가져온 청원서를 한번 읽어드릴까요?” 그가 “읽어봐”라고 하자 청원서를 읽어줬다. 이때 운전기사 청년이 딸에게 생수를 건넸는데, 딸은 정중하게 말했다. “고마워요, 아저씨. 저는 목마르지 않아요. 우리 연공인은 함부로 남의 것을 받지 않거든요.” 운전기사는 웃으며 “이 꼬마 참 귀엽네”라고 했다. 차는 오랫동안 달렸고,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마침내 차가 멈춘 곳은 문패에는 어느 시의 주재 사무소라고 적혀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경찰이 사무소 직원에게 귓속말을 하고는 급히 떠나려 했다. 나는 서둘러 청원서를 경찰에게 건네며 성 정부 책임자에게 꼭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알겠다고 하며 사무소 직원에게 넘겼다. 내가 “그 사람에게 주면 안 돼요!”라고 했지만, 이미 두 경찰은 떠난 뒤였기에 어쩔 수 없이 맡길 수밖에 없었다.
방 안에는 TV를 보고 있는 청년이 있었는데, 분명히 잡혀온 수련생이었다. 그가 뭘 보는지 궁금해 TV를 보니 대법을 비방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충격을 받아 급히 다른 채널로 돌렸지만 모든 채널이 똑같은 거짓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렇게 조작된 걸 어떻게 볼 수 있어요!”라며 TV를 껐다. 사무소 직원이 와서 왜 껐냐고 물으며 다시 켜면서 “파룬궁이 도대체 어떤 건지 봐”라고 했다. 나는 “파룬궁수련자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에요. TV에서 말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에요. 안 봅니다!”라고 했다. 그는 급히 그 청년을 데리고 나갔고, 나는 다시 TV를 껐다. 잠시 후 사무소 직원이 돌아와서 나는 그에게 말했다. “경찰이 왜 사람을 욕해요? 그렇게 난폭하게 굴고… 제 팔 좀 보세요. 그에게 잡혀서 온통 멍이 들었어요.” 그는 길게 탄식하며 “그들은 우리와 달라요”라고 했다. 그리고는 마치 가정사를 묻듯 딸에게 어디서 왔는지, 이름이 뭔지,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 공부는 잘하는지 물었다. ‘논어’ 한 구절을 외워보라고 하며 가부좌도 틀어보라고 했다. 한참을 묻고 난 뒤 위층으로 올라가서는 다시 내려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우리에게 말을 유도해 파출소에 전화로 우리집과 딸의 학교를 조사했던 것이다.
오후에 내려와서 집에 돌려보내면 갈 것인지 물었다. 나는 “안 갑니다. 지금 TV에서 파룬궁에 대해 이렇게 거짓 보도를 하는데, 저는 반드시 베이징에 청원하러 가서 상황을 설명해야 해요”라고 했다. 그가 “돈은 있어요?”라고 묻자, “없어요. 걸어서라도 갈 겁니다”라고 했다. 그는 “베이징만 안 가면 집에서 어떻게 연공하든 상관없고, 아무도 간섭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보장합니다”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믿었다. 차에서 내리자 두 사람이 우리 모녀를 장거리 터미널까지 데려갔다. 그는 기사에게 우리를 지켜보라고 하면서 표를 사주겠다고 했다. 그제야 우리를 돌려보내려는 것임을 깨달았다. “집에 갈 돈은 충분하니까 제가 살게요. 저는 연공인이고, 정부에 문제를 일으키러 온 게 아니라 파룬궁이 좋다는 걸 알리러 온 겁니다”라고 했다. 우리 모녀가 차에 오른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들은 떠났다.
집에 도착하자 집주인 언니가 황급히 알려줬다. “어제 파출소 사람들이 와서 당신이 여기 사는지 조사해갔어요.” 아침을 막 먹고 있는데 파출소 사람들이 서둘러 와서 가택수색을 했다. 내 모든 대법 서적과 연공 테이프, 설법 테이프, 녹음기, 사부님 법상과 향로, 방석 등을 모조리 빼앗아갔다. 그리고 협박했다. “다시는 파룬궁을 수련하지 마라. 국가에서 이미 취급했으니 집에서 해도 안 된다. 또 하면 잡아갈 거야.” 나는 멍해진 채 울고 또 울었다. 슬프게 울었다. ‘정부 사람들은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거지?’
그때부터 내 생활은 평온할 날이 없었다. 오늘은 파출소에서, 내일은 시청에서, 모레는 부녀회에서 왔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당신은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물을 권리가 없어. 우리는 당신을 관리하러 온 거야”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법공부 팀의 모든 수련생이 납치당해 가죽벨트로 구타당했고, 집도 몇 번이나 수색당했는지 모른다. 딸도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청원서를 제출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공산당의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사악한 당의 눈엣가시가 됐다. 가택수색·공갈·협박·괴롭힘이 계속됐고, 여러 차례 납치·구금·불법 강제노동·유리걸식을 겪었다. 매번 구사일생이었고 박해로 여러 번 죽을 뻔했다. 우리 모녀는 늘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다. 사악한 중공은 지금까지도 나를 놓아주지 않으며, 마귀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어 끝없이 괴롭히고 있다.
함께 청원하러 갔던 남자 수련생은 내가 체포되는 것을 보고, 몇몇 수련생들과 바로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 그는 두 차례 베이징에 갔다가 불법 강제노동에 끌려가 박해로 몸이 쇠약해졌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26년이 흘렀다. 내가 오늘까지 굳건히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진정으로 사존(師尊)의 자비로운 보호를 느꼈기 때문이다. 걸어온 한 걸음 한 걸음이 모두 깊은 발자국이었다. 비록 험난했지만 원망도 후회도 없다. 나는 이 만고에 다시없을 대법과 사존에 대한 감사를 더욱 소중히 여기며, 끝까지 수련해 사명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원문발표: 2025년 7월 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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