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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일심을 닦아버리고 더 정진해 착실히 수련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수련하기 전에 나는 때로 이익을 얻은 사람을 부러워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 속에 빠져들지 않았고 이루지 못하는 일은 강요하지 않았다. 이는 주로 내가 명리(名·利)를 담담하게 봐서가 아니라 안일을 추구해서였다. 게을러서 신경 쓰기 싫고 다투기 싫었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해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고 그것으로 만족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내 지식과 능력으로 남을 도와주었고, 그래서 남의 보답을 받았다. 내가 할 줄 모르는 일과 하기 싫어하는 일은 남이 대신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감사하는 마음이 없었다. 나는 서서히 편한 것을 좋아하고 일하기 싫어하는 안일심이 생겼다.

안일심은 때로 적은 노력으로 큰 혜택을 얻으려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남의 힘을 빌려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 하거나, 남에게 해를 끼쳐 자기에게 이롭게 하는 일을 한다. 근본 원인은 모두 ‘사(私)’에서 온 것이다.

옛말에 “천 리 제방이 개미구멍으로 무너진다”라는 말이 있다. 안일심이 바로 이렇다. 특히 수련인을 겨냥한다. 수련인은 안일심이 있으면 미지근한 물로 개구리를 삶듯이 처음에는 편안하지만, 서서히 나태해진다. 나중에는 속인 속에 빠져 최후에는 자신을 망치고 정과(正果)를 얻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고층차에서 인간 세상에 조사정법(助師正法) 하러 온 것이다. 사부님께서 우리를 여기에 남겨두셨다. 우리가 여기 남아있는 것은 누리러 온 것이 아니라 수련하고 사람을 구하러 온 것이다. 정법 수련이 끝난 후 우리는 자신의 천국 세계로 돌아간다. 만약 이 이치를 깨닫지 못하면 사람 속에서 윤회하다가 마지막에는 업력이 커서 소멸될 것이다.

잠시 머무는 곳에 미련을 둘 필요가 없다. 안일심은 나태해지게 하여 사람을 구하는 사명을 완성하지 못하게 하니 결국은 헛수고가 된다. 우리는 이렇게 큰 법을 수련하고 또 사부님께서 직접 제도해주시니 이 얼마나 큰 인연이고 복인가? 정진하고 착실히 수련하면 돌아가는 것은 문제가 없다. 이렇게 진귀한 기회와 인연을 우리는 마땅히 소중히 여겨야 한다.

하지만 최근 1, 2년 사이에 나는 나태해졌다. 올해 74세다. 몇 년 전에는 아들이 막노동을 했고 손자가 어려서 생활이 녹록지 않았다. 지금은 아들이 혼자 장사를 하는데 잘 된다. 우리 노부부의 퇴직금이 한 달에 9천 위안(약 180만원)이고, 손자도 컸다. 상대적으로 정신적 경제적 부담이 줄었고 거의 압력이 없다.

작년에 며느리가 우리 부부의 현재 살고 있는 집에 새로 인테리어를 해줬다. 넓고 고급스럽게 새로 단장한 집에서 살고 아들 며느리도 효도하고 손자도 공부를 잘한다. 아들 세 식구와 남편 모두 대법을 지지한다. 아무런 유감도 없는 듯하다. 이런 마음가짐에서 나도 나이가 많으니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싶어졌다. 안일한 마음이 저절로 생겼다.

사부님께서 나의 이런 상태를 보시고 조급해하셨다. 수련생의 입을 빌려 일깨워주셨다. 어느 날 수련생 집에 법공부를 하러 갔는데, 집에 들어서자마자 패딩을 벗고 얇은 옷만 걸치고 있었더니 수련생이 날 보고 말했다. “아름답게 움직이는(動) 사람이네요.” 내가 이해하지 못하자 그녀가 덧붙여 말했다. “제가 말한 ‘동’은 움직이다(動)가 아니라 춥다는 ‘동(凍)’이에요. 당신 집은 새로 인테리어를 해서 바닥 난방이 되지만 우리집은 안 되니까 좀 있으면 추워질 거예요. 패딩을 입는 게 좋겠어요.” 잠시 쉬었다가 그녀는 말했다. “지금 당신 집이 조건이 좋다고 안일심이 생기면 안 돼요.” 나는 “알았어요”라고 대답했지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또 어느 날 법공부를 할 때 내가 가부좌하지 않고 법공부를 하자, 수련생이 일깨워줬다. “법공부는 엄숙해요. 되도록 가부좌를 하세요.” 나는 이어서 한마디 했다. “각 공간에서 모두 보고 있겠지요.” 이번에는 나는 깜짝 놀랐다. ‘맞다. 나는 엄숙하지 않았구나.’ 이것은 사부님을 존경하지 않고 법을 존경하지 않는 행동이다.

최근 자신이 법공부할 때의 자세를 돌아보았다. 가부좌를 좀 하다가 다리를 풀거나 혹은 가부좌를 하지 않는다. 어쨌든 편안한 자세로 법공부를 하는데, 어떻게 앉는 것이 편안하면 그렇게 앉아서 법공부를 한다. 자신에게 물었다. ‘너는 대법제자인가? 경사경법하고 있는가?’ 나는 안으로 찾아보았다. ‘이것이 바로 안일심 아닌가?’

또 찾아보니 자신이 발정념을 하는 상태도 문제가 있었다. 연화수인을 할 때 두 손을 곧게 펴지 못해서 전체 손 모양이 꽃 모양이 아니라 꽃봉오리 같았다. 심지어 두 손이 완전히 합쳐질 때도 있었다. 그 근원을 파고들어가 보니 역시 안일심이었다.

법공부와 발정념은 사부님께서 대법제자에게 요구하신 세 가지 일 중 두 가지다. 나는 안일심에 이끌려 중시하지 않았고 나태했다. 사부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조사정법을 할 수 있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한 사람의 수련과정은 바로 한 수련인의 역사로서 무수하고 무량무계(無量無計)한 신들이 모두 대법제자의 매 한 생각, 매 한 행위를 지켜보고 있다. 수련자로서 원만으로 향해 나아갈 결심이 있으면서 왜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는가?”(미국동부법회 설법)

나는 깨달았다. 수련하면서 큰 관도 있고 작은 관도 있다. 흔히 우리는 큰 관을 넘길 때는 심성 수련을 중시한다. 시시각각 안으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이런 관은 잘 넘긴다. 하지만 작은 관에서는 흔히 개의치 않고 중시하지 않으며 안으로 찾는 것을 소홀히 하는데, 심성을 높이는 것을 소홀히 한다. 때로는 작은 난을 넘긴 것인지도 분명치 않다. 그러므로 수련은 작은 일이 없고, 작은 안일심도 수련의 폐해가 되어 최후에는 수련인을 망칠 수 있다.

과거에는 수도해서 수련 성취한 사람이 아주 드물었다. 안일심이 그중 한 가지 원인이다. 대법 수련은 원만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사람마다 성불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련생이 선의로 일깨워 준 것에 감사드린다. 우리는 모두 수련은 고생스러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정법수련의 최후시각에 나는 안일심을 제거하고 정진하며 착실히 수련해서, 나태하지 않고 게으르지 않게 세 가지 일을 잘하겠다.

현재 나는 시간을 빈틈없이 짜놓았다. 매일 법공부 팀에 가서 법공부를 하지 않으면 수련생과 함께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한다. 집에 있는 시간은 법공부하고 법을 베끼고 연공하고 발정념을 한다. 충실한 일과다. 집도 나의 수련 장소다. 수련하지 않는 남편이 내게 심성을 높이게 해줄 때, 심성을 지키고 다투지 않고 변론하지 않는다.

 

원문발표: 2022년 4월 1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2/4/10/4407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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