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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본 것만이 사실’이라고 믿는 관념을 타파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요즘 들어 사람의 관념이 내 수련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갈수록 분명히 느낀다. 사람의 관념을 타파해야만 우리는 사람에서 벗어나 신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어제 법공부할 때 사부님의 말씀을 보았다. “현미경 아래에서 보는 인체는 바로 이러한데, 우리가 눈으로 보는 인체와는 뚜렷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것은 사람의 이 한 쌍의 눈이 당신에게 일종의 가상(假相)을 조성해 주어 당신으로 하여금 이런 것들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1] 그래서 생각했다. 만약 사람의 눈으로 본 것이 모두 가상이라면 지금 내가 받들고 있는 이 ‘전법륜’도 눈으로 보기에는 흰 종이에 검은 글씨로 쓴 속인 공간의 책에 불과하며, 그것의 진실한 체현이 아니다. 그럼 그것의 진실한 체현은 무엇인가? 그 순간 한 층의 물질 관념이 벗겨진 것 같았다. 이 ‘전법륜(轉法輪)’이 나에게 보여준 것은 한 권의 책이 아니라 무궁무진한 층층첩첩(層層疊疊)의 불(佛), 도(道), 신(神)이며, 계속해 보면 사부님의 법신, 또 계속해 보면 모두 층층첩첩의 진선인(真・善・忍)이었다.

그 순간 나의 모든 것이 텅 비었고, 법공부할 때 잡념이 하나도 없었다. 자그마한 잡념도 모두 법에 대한 불경이라는 걸 느꼈다. 나는 법공부할 때 구하는 바가 없이 무위(無爲)의 마음가짐으로 솔직하게 봐야 하고, 사부님에 대해 지극히 공경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부님 말씀의 표면 뜻만 알면 되지 ‘이 말씀의 내포를 보아내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구하는 마음이며, 법의 내포는 마음가짐과 심성이 위치한 층차에 따라 법의 배후에 있는 불도신(佛道神)이 점화해주시기 때문이다.

법공부를 마친 후 한 가지 문제를 깨달았다. 나에게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하나의 관념, 바로 눈으로 본 것만이 사실이라고 믿는 관념이 존재한 것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현재 어떤 사람은, 이 한 쌍의 눈은 우리 이 세계 중의 어떤 물질, 어떤 물체든 볼 수 있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일종의 고집스러운 관념이 생겨서 그는 눈을 통해 본 것만이 확실하고 확실한 것이라 여기며, 그가 보지 못하는 것은 믿지 않는다. 과거에는 줄곧 이런 사람을 오성(悟性)이 좋지 않다고 여겼는데, 일부 사람은 역시 왜 오성이 좋지 않다고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다.”[1]

예전에 이 단락 법을 배울 때 여태껏 자신은 오성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다른 공간과 신불의 존재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야 내가 바로 이런 오성이 좋지 않은 사람이며, 이 관념이 나의 수련, 그리고 내가 법에 동화되고 대법을 실증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많은 경우에 나는 이 관념의 지배하에 수련 중의 문제를 인식했고, 두 눈으로 보고 인식한 사람의 이치와 이 공간의 가상으로 수련 중의 문제를 대했다.

대법제자가 대법을 실증하는 것을 가로막는, 겉으로 보이는 주된 사람마음은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가장 주요한 것은 박해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마음이다. 누가 대법제자를 박해하는가? 경찰과 세인이 아니라 그들 배후의 사악이다. 대법제자는 다른 공간의 사악을 두려워하는가? 물론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사악이 병업 가상으로 수련생을 박해할 때 대부분 수련생은 모두 두려워하지 않으며 정념이 확고하다. 사악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고생을 많이 해도 모두 정념으로 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악이 경찰을 통제해 박해하는 형식으로 나타날 때, 어떤 수련생은 두려워 숨어버린다. 그럼 우리가 다른 공간의 사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대체 누구를 두려워하는가? 속인 중의 경찰이다! 그럼 왜 경찰을 두려워하는가? 왜 박해 전에는 경찰을 두려워하지 않다가 박해가 발생한 후에 경찰을 두려워하게 됐는가? 박해 후에 ‘눈으로 본 것만이 사실이라고 믿는’ 관념이 경찰이 대법제자를 박해한다는 새로운 관념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즉 이 관념이 반응한 것이지 진정한 자신의 생각이 아니다. 마치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말씀하신 “학생이 식물을 짓밟은” 예처럼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건 식물 자체가 아니라 조금 전에 식물을 짓밟는 과정에서 형성된 관념이 반응한 것이다. 진정으로 대법제자를 박해한 것은 경찰 본인이 아니라 그 배후의 사악이며, 경찰은 우리가 구도해야 할 생명이다. 그 배후의 사악이 없다면 어느 경찰이 감히 대법제자를 박해할 수 있겠는가! 배후의 사악이 없다면 경찰의 명백한 일면은 자발적으로 대법제자를 찾아와 진상을 듣고 구도 받으려고 할 것이다.

내가 두 번째로 베이징에 법을 수호하러 갔을 때 톈안먼광장 분국(分局)으로 납치됐다. 경찰들은 오늘만 파룬궁 수련생들이 광장에 오지 않아 한가했는데 마침 내가 또 왔다고 했다. 그들은 수갑으로 내 두 손을 긴 의자에 채운 후 “계속 말하지 않으면 본때를 보여줄 테야!”라고 협박했다. 그리고는 발로 나를 한 번 걷어찼다. 이건 경찰 배후의 사악이 한 말이라는 것을 알기에 엄숙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국가 경찰로서 이렇게 하는 것은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알려주겠는데, 이번에 올 때부터 살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경찰은 즉시 웃는 낯으로 대하면서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 배후의 사악이 해체됐다는 것을 알았고, 그 후에 그는 떠나갔다.

많은 경우에 ‘눈으로 본 것만이 사실이라고 믿는’ 이 관념이 우리를 속였다. 현실 공간의 소위 표현에 현혹되고, 사람의 이치에 구속돼 걸어 나오지 못했다. 우스갯소리를 하면, 만약 당신이 다른 공간의 사악이 경찰들을 오리 쫓듯 당신 곁으로 보내고, 꼭두각시처럼 경찰들을 조종해 당신을 박해하는 것을 본다면 그래도 경찰을 두려워하겠는가? 전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 수련이란 속인의 명(名), 리(利), 정(情)을 내려놓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수련생은 명, 리, 정을 내려놓기 어려워한다. 왜 어려워하는가? 나는 ‘눈으로 본 것만이 사실이라고 믿는’ 관념에 지배당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실공간에서 명, 리, 정의 표현을 너무 사실로 여기기에 이것의 진상을 보아내지 못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현실 이익 중에서 그것을 내려놓기가 아주 어렵기 때문이다. 당신이 말해 보라. 이 이익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이 마음을 어떻게 내려놓겠는가? 그는 어렵다고 여기는데, 실제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1]

2000년에 내가 베이징에 법을 수호하러 가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동의하지 않으셨다. 어느 날 갑자기 노발대발하며 모든 화분을 바닥에 던진 후 바닥에 누워 뒹굴었다. 또 칼을 들고 만약 내가 베이징에 법을 수호하러 간다면 죽어버릴 거라고 협박했다. 나와 여동생이 아무리 설득해도 듣지 않았고, 울며불며 죽어버릴 것이라고 소리 질렀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어머니 방에서 나와 북쪽 방에 가서 ‘전법륜(轉法輪)’ 책을 펼쳤다. 마침 “당신의 元神(왠선)을 낳은 그 어머니만이 당신의 진정한 어머니다.”[1]라는 말씀이 보였다. 당시 몹시 격동돼 속으로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사부님, 저는 모두 다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책을 들고 회사에 가서 보았다. 저녁에 돌아오니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은 것 같았다. 어머니는 여동생을 시켜 내게 저녁을 먹었냐고 물어보게 했는데 직접 오기 쑥스러웠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떤 수련생들이 “아들에 대한 정을 내려놓기 어렵습니다.”, “손자에 대한 정을 내려놓기 어려워요.”라고 하는 것은 사실 이때의 기점이 사람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찌 내려놓을 수 있겠는가? 사람은 마땅히 이런 것을 누려야 한다. 그래서 내려놓을 때 몹시 고달프고 힘들다. 사실 이것은 천천히 닦아 없애는 것이다. 하지만 대법수련은 이렇게 수련하지 않는다. 우리는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법에서 수련”[2]하기에 ‘눈으로 본 것만이 사실이라고 믿는’ 관념을 타파해야 한다. 그러면 법에서 진상을 볼 수 있고, 법리를 통해 왜 수련에서 정(情)을 없애야 하는지 명백히 알 수 있다.

사람에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후천적으로 형성된 관념을 타파해야 한다. 하지만 ‘눈으로 본 것만이 사실’이라는 이 근본적인 관념을 타파하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새로운 후천적 관념들이 형성될 것이다. 오직 후천적 관념을 형성하는, ‘눈으로 본 것만이 사실’이라는 관념을 제거해야만 비로소 새로운 후천적 관념이 형성되지 않게 된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2] 리훙쯔 사부님 시사: ‘홍음3-수련형식’

[편집자 주: 본문은 글쓴이 개인의 현재 인식을 대표하므로 수련생들이 서로 교류하여 ‘비학비수(比學比修)’하시기 바란다.]

 

원문발표: 2021년 7월 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발표: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7/5/42771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