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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5’ 경험, 위대한 업적이 세상에 빛나다

글/ 베이징 대법제자 퉁신(童欣)

[밍후이왕] 1999년 4월 25일, 저는 운이 좋게도 유명한 중난하이(中南海) 청원에 참여했습니다. 벌써 22년이 흘렀지만 중요한 장면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기억으로 여전히 생생합니다. 구치소, 노동교양소, 감옥에 있을 때나 떠돌아다닐 때도 이맘때가 되면 저는 모두 그 일을 떠올립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의미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제 인생에서, 그것은 위대한 도덕의 공적입니다. 지금에 와서 보니 ‘4.25’ 중난하이 청원은 파룬따파(法輪大法)의 아름다움과 완벽함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이고, 중화민족 상하 5천 년 문명역사에서, 무한히 넓은 우주에서 세계를 빛낼 영원한 위대한 공적입니다.

1. ‘4.25’ 중난하이 평화청원을 몸소 경험하다

1) 4월 24일 저녁, 법공부 팀에서 소식을 듣다

1999년 4월 24일 저녁, 우리는 집에서 법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집은 대략 10명 정도가 법공부를 하는 학습장입니다. 보도원은 톈진에서 대법 제자들이 붙잡혀 내일 수련생들이 중난하이로 청원하러 갈 것이라고 알려주어 저와 아내 수련생은 그 소식을 듣고 중난하이에 가기로 했습니다. 이튿날은 마침 일요일이어서 회사에 휴가를 낼 필요가 없었습니다. 저는 일 년 전에 이미 베이징 TV의 일을 겪었기에 대법 제자의 선량하고 순정함은 정말로 ‘진선인(真·善·忍)’대법이 세상에서의 아름답고 훌륭한 체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알기 어려울 것입니다. 수련생들은 ‘뿌리를 캐다(挖根)’,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爲誰而存在)’ 등 사부님의 경문을 함께 읽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상황에 따라 중난하이에 청원하러 갈 것인가를 결정했습니다.

2) 4월 25일 새벽 3시 30분에 자전거를 타고 중난하이로 출발하다

중난하이는 우리 집에서 약 40㎞입니다. 제지를 받지 않고 도착할 수 있도록 저와 아내 수련생은 차를 타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가기로 했습니다. 새벽 3시 30분에 출발해서 날이 밝을 무렵에 성에 도착하여 간단히 아침을 먹고 서둘러 중난하이로 갔습니다. 우리가 비교적 일찍 가서 푸유제(府右街) 북쪽 어귀에 도착했을 때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타지에서 일찍 도착한 수련생들은 서로 길을 물어보았습니다. 인근에 파출소가 하나 있었는데 아무런 기척도 없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중요한 곳에는 감시카메라가 있어서 만약 당시 경찰들이 막았다면 대법 제자들은 중난하이를 에워쌀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누군가 분쟁을 일으켜 갈등을 격화시키고, 영향력을 확장하여 파룬궁을 전면적으로 진압하기 위한 음모를 꾸며낸 술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계획은 하늘의 뜻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대법 제자들의 높은 경지의 행동은 나쁜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갈수록 많아졌고,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를 때, 정말 경찰들이 인파를 앞으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부우가 북쪽 어귀에서 남쪽으로 가다가 멈추었는데, 맞은편이 바로 중난하이의 서쪽 문이었습니다. (북쪽에 작은 서문이 있었다.)

3) 4월 25일 아침, 푸유제(府右街) 서쪽에 조용히 서 있다

모두가 조용히 매우 질서정연했습니다. 도로 한가운데는 시각장애인 전용도로가 있었는데 대법 제자들은 도로의 3분의 2를 차량이 통행할 수 있도록 뒤편에 섰습니다. 처음에는 버스가 잘 다녔는데 나중에 경찰이 양쪽 길목을 봉쇄했습니다. 모두 조용히 서서 우리는 시위하는 것이 아니라 정황을 반영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표시했습니다. 간식을 먹거나 지친 사람들은 조용히 뒤쪽에 앉았습니다.

모두 단정한 자세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서 있었습니다. 제 옆의 세 사람은 정말 유달리 저를 감동하게 했습니다. 한 명은 같은 여성의 젊은 엄마로 몇 개월밖에 안 된 젖 먹이 아기가 엄마와 떨어질 수 없어 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법을 수호하고 많은 사람이 혜택을 받게 하려고 온종일 함께 서 있었습니다. 또 어느 젊은 부부는 남방에서 온 대법 제자인데, 아마 항저우(杭州)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침 베이징에 일을 보러 왔다가 소식을 듣고 온 것이었습니다. 톈진에서 사람을 잡아간다는 말을 듣고 왔다면서, 아내 되는 사람은 임신 7개월쯤 되었는데, 부른 배로 온종일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정말 천지를 감동하게 했습니다. 어느 집 아이가 귀하지 않고, 어느 집의 임산부가 중요한 보호 대상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진정으로 혜택을 받지 않고 자신만 생각한다면 누가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파룬따파가 나라와 국민에게 백 가지 이로움이 있고, 한 가지 나쁜 점도 없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사당(사악한 공산당)이 얼마나 독하고 잔인합니까? 89년 ‘6.4(6월 4일)’가 바로 피비린내 나는 사례인데 그들이 어떤 일을 못 하겠습니까? 감히 중난하이에 간 사람들은 정말로 사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사심이 없었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나쁜 사람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22년이 지났지만, 대법 제자들은 이렇게 사심이 없이 대선(大善)을 지켜왔는데 아직도 이 점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너무나 어리석은 것입니다.

바로 이런 한 무리의 사람들, 톈진에서 붙잡힌 사람들은 모두 사심이 없는 좋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사회의 희망입니다! 국가 정부가 반드시 지지해주고, 격려해주며, 홍보해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지적이지 못하게 사람을 붙잡으며 정규적으로 출판하던 책도 금지했습니다. 이것은 악랄하고 심각한 위법 위헌 행위인데 이것을 마땅히 반영시켜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수련생들은 정말로 더 많은 국민이 장래에 혜택을 보게 하려는 희망을 품고 간 것이었습니다.

4) 4월 25일 오전, 주룽지(朱鎔基) 총리가 중난하이 문으로 걸어 나오는 것을 직접보다

주룽지는 키가 크고 체구가 좋았으며, 경호원도 없이 혼자 대문으로 걸어 나오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이런 당당함은 속이 좁고 생쥐처럼 겁이 많은 장 두꺼비(장쩌민)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도 파룬궁을 잘 알고 이런 단체를 몹시 신임했을 것입니다. 그는 길을 건너 대법 제자들 앞으로 와서 일부 대법 제자들과 간단하게 대화를 나눴으며, 파룬궁에 대해 이미 지시를 내렸다고 말했는데, 수련생들은 듣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외부 손님을 접견해야 하기에 우선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대표 몇 명을 들여보내라고 말했습니다. 몇 사람이 자진해서 들어갔고, 나중에 그들이 나와서 또 다른 몇 명이 바꿔서 들어갔습니다.

오전에 많은 경찰차가 와 많은 경찰이 내렸습니다. 10m 정도 간격을 두고 한 명씩 섰으며, 임시로 보내온 것으로 보였으며, 그들은 처음에는 긴장한 것 같았습니다. 상급에서 분명 그들에게 매우 중대하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긴장을 풀었습니다. ‘진선인(真·善·忍)’을 수련하는 선량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모였으니 얼마나 평화로웠겠습니까, 또 함께 와서 대법을 수호하니 그 장면은 얼마나 신성하고 순정하겠습니까. 그 현장에 있던 경찰들 모두 복이 있는 것입니다! 경찰은 나쁜 사람을 상대하거나 격렬하게 충돌하는 현장이 많지만, 이곳에서는 공격성이나 위험성은 전혀 없고 오로지 편안하고 평온한 분위기뿐이었습니다.

어떤 수련생들은 경찰과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기도 했는데, 그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더욱 명백해졌습니다. 당시 파룬궁에 대한 소문은 정부와 민간에게 모두 대단히 좋았기 때문입니다.

이후 경찰들은 매우 느긋해져 어떤 경찰은 차에 가서 잠을 잤고, 어떤 이들은 대화하며 똑바로 서지도 않은 채 담배를 피우며, 담배꽁초를 아무 데나 버렸는데 그것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습관적인 동작일 뿐이었습니다. 비교해보면 대법 제자들은 온종일 흐트러짐 없이 모두 바르게 서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특별하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정말로 하나도 힘들지 않았고, 오히려 가뿐했던 것 같습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가지에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이 또한 대법제자가 장기적으로 연공한 기초가 있었고, 가부좌하고 포룬 하면서 정력이 생겨 마음도 모두 순정해졌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 집에서 법공부 할 때, 한 노 수련생이 말했습니다. 그녀의 딸은 공안 ○○처의 경찰인데, 어제 그곳 활동에 참여했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남자 동료들에게 “파룬궁 사람들의 본질을 보세요. 당신들은 마땅히 따라 배워야 해요!”라고 했고, 그들은 모두 그녀의 말에 인정하며 동의했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한 사람에게만 그런 말을 들은 것이 아니라 현장에 있던 경찰과 버스를 타고 지나가던 사람들도 현장에서의 양호한 질서와 파룬궁 수련생들의 높은 수준에 탄복했다고 했습니다.

한참 동안 베이징 정부의 통지를 반복하여 방송하며, 모두에게 돌아가라고 권했고, 어떤 사람이 인쇄한 통지를 나누어 주는 것 같았으나 수련생들은 아무도 받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단지 상황을 반영하고 있을 뿐, 어떠한 위법의 언행이 없었으므로 마음이 태연했습니다. 좋은 사람을 잡는 상황을 반영시키는 것이야말로 중대한 인권 침해 행위이며, 마땅히 즉시 저지해야 하는 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오후에는 연이어 다른 승용차 몇 대가 서서히 지나가며 창으로 카메라를 내놓고 녹화했고, 저는 여러 수련생과 마찬가지로 몸을 꼿꼿이 세우고 본래 광명정대한 일이니 녹화하려면 하라고 정정당당하게 카메라 렌즈를 마주했습니다. 사당 무리는 다음에 장부를 계산하는 그런 수법을 쓴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76년 톈안먼(天安門) 4월 5일 사건, 89년 6월 4일 사건 모두 그들이 그렇게 했지만 우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법 수련자이기 때문에 파룬따파의 아름답고 훌륭함을 깊이 알고 있어서, 우리는 오직 더 많은 사람이 이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얻을 기회가 있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일부 외신기자들이 아마 소식을 듣고 온 것 같은데 정부 기관 직원들이 그들을 내쫓았습니다. 어떤 기자는 우리 속으로 숨었고, 모두가 그들에게 나가달라고 설득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상황을 반영하러 온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와 함께 섞여서 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또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일부 사람들이 수련생들 속으로 섞여 들어왔다가 발각되어 모두에게 청리되어 나갔습니다. 사당 무리는 모래를 섞어 침투하는 방법으로 혼란을 조성하여 섞여 들어가 기회를 찾아 박해의 빌미를 만듭니다. 89년 6월 4일, 작년의 중국 홍콩침투가 모두 이렇지 않았습니까? 기탄없이 나쁜 사람과 기타 외부인은 정말 대법 제자 속으로 섞여들기 어렵습니다. 수련자의 자비롭고 선량함과 순정함은 긴 시간을 들여 착실하게 수련해낸 것이고, 일반 사람들은 치장한 척하기 어렵습니다. 꿍꿍이를 품고 음모를 꾸며 혼란을 조성하려는 나쁜 사람이나 사당 특무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5) 저녁이 되어도 해결되지 않으면 떠나지 않고 다음 날 휴가를 내려 하다

대부분 사람이 먹을 것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온종일 서 있다 저녁이 되어서야 우리는 교대로 먹을 것을 사 왔고, 나중에는 호떡과 셴빙(餡餅-밀가루 반죽에 참깨를 뿌려 구운 음식) 등 먹기 편리한 음식은 모두 사 왔습니다. 마침내 이렇게 많은 사람이었지만, 선량한 대법 제자들은 물건을 사도 고르지 않았고, 온화한 얼굴에 매우 평화로워 사람을 녹이는 하나의 장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선량한 무리를 보며 상인들은 마음에서 우러나와 특별히 토마토, 오이 등을 깨끗이 씻은 다음 대법 제자들에게 “당신들 주려고 모두 깨끗하게 씻었으니 바로 먹을 수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공용화장실에도 갔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갔지만, 매우 깨끗했습니다. 부근에 사는 수련생들이 집에서 청소도구를 가지고 와서 깨끗하게 청소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한참 동안 많은 사람이 하늘을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만, 아내 수련생은 하늘에 많은 파룬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대단히 아름다웠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수련생에게 들었는데 하늘의 많은 신이 계셨고, 장엄하고도 엄숙하게 사부님께서 오셔서 정법 하시기를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모인 대법 제자들이 좀 적다고 했습니다.

당시 상황의 전개를 예측하기 어려웠습니다. 우리는 일이 잘 해결되지 않으면 쉽게 떠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다음날은 월요일로 출근을 해야 하므로 저는 회사에 전화하여 휴가 낼 준비가 돼 있었습니다.

6) 저녁 9시가 넘어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었고 신속히 철수하다

저녁 9시가 넘어서 대표들이 나왔고, 저는 파룬따파 연구회의 리창(李昌)이 대문 맞은편의 수련생들에게 상황을 소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중에야 들었는데 중앙에서 이미 정황을 살펴 알고 있었고, 톈진에서도 이미 사람을 풀어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두 돌아가라고 해서 어떤 사람들은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더 기다렸다가 확실한 소식을 들은 후에야 돌아왔습니다. 누군가 베이징 시내의 수련생들에게 가능한 한 멀리 타지에서 온 수련생들을 도와 숙박 문제를 해결해주도록 해주었습니다. 후에 어떤 사람들은 수련생의 집에 숙박하게 되었는데, 대법 제자는 정말 한 가족처럼 가깝게 지냅니다. 아마도 더 많은 아름답고 훌륭한 이야기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리창을 말하자면, 원래 공안부의 처장급 간부였는데 중난하이 일 때문에 사당으로부터 불법적으로 18년 형을 선고받아 대법제자 중 형을 가장 길게 받은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현재 70세가 넘는 노인이 되었고, 여전히 불법적으로 톈진차뎬(天津茶澱) 전진감옥에 갇혀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느슨한 것 같지만 여전히 감옥에서 핵심 감시 대상입니다. 사당은 그들을 ‘두목’이라고 생각하며, 연구회 사람들이 일호백응(一呼百應-한 사람의 외치는 소리에 많은 사람이 호응하다) 하는 움직임에 대비했습니다. 그것들은 대법 제자는 법을 스승으로 하고, 입문한 선후를 따지지 않으며, 그 보도원들은 모두 의무적으로 모두를 위해 봉사하지만, 대법 제자의 일원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또 모두에게 한 마디 진실한 말을 하자면 대법 사부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똑같습니다. 노제자, 신 수련생, 일반 세상 사람, 심지어 박해자들까지도 마찬가지로 자비롭게 대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것은 매개인 자신의 선택입니다.

처음 리창의 이름을 들은 것은 ‘광명일보’ 사건에서입니다. 그는 직언으로 신문사에 대법을 수호하는 글을 올리고, 연락처에 그의 이름과 직장을 적어 많은 사람이 탄복했습니다. 그가 확실하게 주체자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수련생들에게 한 가지 정황을 말하면 그만이며, 그는 의무를 다하는 자원봉사자로 누구에게 명령할 권한도 없고, 누구를 강요할 방법도 행동도 없습니다. 파룬궁(法輪功) 보도원들은 모두 이러합니다. 오늘날 중국 경찰과 세계 각국 정부를 포함해 이 상황을 다 알고 있습니다. 이 분은 사람들이 존경할만한 정직한 노인입니다. 저는 그와 같은 감옥에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해 ‘4.25’ 아침에 저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고맙다는 말을 그에게 했습니다. 저는 그 날이 되면 많은 친구가 그에게 복을 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사당에게 불법적으로 감금되어 박해당한 시간이 가장 긴 대법 제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아마 정부에서도 많은 버스를 동원했는지 아무튼 사람들 떠나는 속도는 매우 빨랐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정말로 신이 나서 떠났습니다. 인근의 수련생들은 마지막에 떠났는데 공중화장실을 포함하여 길거리를 깨끗하게 청소하고 나서야 떠났습니다. 그 자체로 잘 유지해야 하므로 청원하는 과정에서 대법 제자들은 줄곧 자각적으로 길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우리는 행복에 젖어있었고, 몸이 가벼웠습니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셨고, 다른 공간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새벽 1시 30분에 집에 돌아왔고, 어머니 수련생은 우리에게 따뜻한 상을 차려주셨습니다. 어머니는 비록 중난하이에 가지 않았으나 마음은 대법 제자와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2. ‘4.25’ 평화청원을 되돌아보다

1) 파룬따파가 좋다는 것을 비교하지 않으면 모른다

만약 우리가 이전에 참여했던 사당조직 활동과 비교해보면 중난하이 평화청원은 특별하고 위대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1984년 사당이 조직한 ‘순국열사’의 날 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정의로(正義路)에 집결하여 기다리는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노동자, 학생, 간부 모두 있었습니다. 그 화장실은 정말 발 디딜 틈이 없었고, 큰 대열이 떠날 때 과일 껍질, 땅콩, 해바라기 껍질, 간식 포장 비닐, 찢어진 신문 등 쓰레기가 거리마다 가득해 더럽고 지저분해서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톈안먼(天安門)에서 사당의 당기 게양식도 마찬가지로 그 ‘애국자’들이 떠난 후 쓰레기 천지로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구평’, ‘해체 당 문화’와 션윈공연을 보고, 아직 전통문화의 어떤 것들이 남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의 마음에 신앙이 있고, 도덕이 있으면, 마음으로 자신을 단속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소양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중난하이에 가서 청원하면서 구현된 문명 질서, 선량하고 상화하며 깨끗한 환경을 유지한 것처럼 사람은 그렇게 해야 하며, 정상적인 문명사회는 본래 마땅히 있어야 할 상태입니다. 사당의 무신론, 폭력공포의 혁명이론, 투쟁 철학이 중국 사람들을 나쁘게 만들었고, 생명을 존중할 줄 몰라 사람을 죽이고 때리는 것을 모두 사소한 일로 여겨 그런 생활 속의 사소한 일은 더더욱 아무 일도 아닙니다. 마치 경찰이 아무 데나 담배꽁초를 내버리고, 침을 뱉는 것처럼 익숙해져 자연히 모든 사람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사악한 무리는 불량배를 양성하는데, 그 지도자를 포함해 모두 이런 사고방식이어서 중난하이 청원과 같은 질서 있고 ‘소양 높은’ 행동을 비정상이고, 조직이 있으며, 어떠어떠하다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스스로 폭력으로 죽음을 위협하고, 기만하여 통치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반드시 사람을 철저히 통제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계속 유지될 수 없어 무너지는데 이것은 사악의 본질이 조성한 것입니다. 비교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지만 서로 비교해보면 중공의 사악하고 악독한 것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법이 바르고 좋다는 것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2) 조카의 생일, 이후의 박해를 생각지 못하다

재미있는 것은 조카의 생일이 4월 25일입니다. 99년 이전 10여 년 동안 매년 이날은 온 가족이 함께 생일 케이크를 먹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1999년의 그 날, 새벽 3시 30분에 출발해서 집에 돌아오니 4월 26일 새벽 1시 30분이었습니다. 조카와 함께 생일을 보내지 못했으나 법을 수호했기에 유감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이후의 날들이 아직 길었기 때문에 사당이 하늘을 거스르는 행동을 할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습니다. 7월 20일부터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었고, 2000년 4월 25일, 저는 톈안먼에 청원하러 갔다가 구치소에 갇혔습니다. 2001년에 노동교양소에, 2002년과 2003년은 불법적으로 지명수배로 추격하여 타지에서 떠돌아다녔으며, 2004년에는 불법적으로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조카와 함께 생일을 보내지 못한지 어느덧 9년이나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에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매번 조카 생일이 돌아오면 마음으로 축복해주었습니다. 물론 이 평범하지 않은 날, 저도 더 아름다운 축복을 전 세계에 보낼 것입니다!

매번 ‘4.25’마다 저는 사당의 박해가 하루빨리 끝나 모든 대법제자가 가족과 함께 모이길 바랐으며, 사람들이 자유롭게 대법 수련을 선택하는 날이 오기를 희망했습니다. 매 순간 외의 ‘4.25’를 저는 ‘내 조카가 제일 행복하다. 공교롭게도 이렇게 위대한 날 생일을 맞았고, 가정의 작은 대가로 우주의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훌륭한 것으로 바꿀 수 있다면 이것은 정말 가치 있는 일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필연적으로 우리가 우주 정법을 따라잡고 있고, 우리는 진선인 우주 대법을 수련하기 때문에 미래는 더욱 아름다울 것입니다.

3) 22년이 흘렀고,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가?

2021년이 되었습니다. ‘4.25’ 중난하이 청원을 다시 돌이켜보니 단순히 개인이나 단체의 어떤 권익을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주 대법의 세례를 통해 정화된 성도들이 근 백여 년 동안 세뇌되어 남을 비방하고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에게 5천 년 문명역사를 가진 소중한 중국인이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려준 것입니다.

‘4.25’ 중난하이 청원은 사람들에게 많은 소중한 정신적 재부를 가져다주었고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량하게 보고 만약 ‘4.25‘로 되돌릴 수 있어서 중국 사람들이 파룬따파를 지지하고 존중을 선택했다면 똑같은 22년이지만 오늘의 중화민족, 세계, 무한한 우주는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중국 사람들의 선택이 아니고, 중공(중국 공산당)과 장쩌민(江澤民)의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중공 사당이 대법 박해를 선택하여 반드시 해체될 운명으로 정해졌으며, 장쩌민이 대법 박해를 선택하여 지옥으로 떨어질 운명입니다. 이 두 가지는 날이 벌써 정해졌습니다. 천멸중공(天滅中共), 구이저우핑탕(貴州平塘)의 장자석이 ‘중국공산당망(中國共產黨亡)’이라고 한 것은 더없이 명백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22년 전, 모든 사람은 어떻게 선택했을까요? 어느 정도의 사람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단호하게 배척하고, 박해 반대를 명확하게 했을까요? 어느 정도의 사람들이 박해에 참여하지 않았나요? 얼마만큼의 사람들이 수동적으로 자기보호를 위해 서로 다른 형식, 다른 정도를 선택하여 박해에 가담했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사익을 위해 박해에 가담했습니까? 22년 전에 당신은 피동적인 선택이었고, 22년 동안은요? 수만에 달하는 중국 사람들이 지장 찍고, 서명하여 파룬궁 박해를 반대한 것도 일종의 선택이고 3억 7500만 명의 용감한 사람들이 마교(魔教)를 포기하고 사당에서 탈퇴한 것도 일종의 선택입니다. 22년이 지난 지금, 세상 사람들이여, 자신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기회는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으니 만고의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3. 영원히 빛나는 업적

벌써 22년이 지났습니다. 동서고금의 모든 사악함을 집결한 파렴치한 박해 속에서 파룬따파는 장쩌민이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갈수록 무한한 빛을 발했습니다. ‘4.25’ 중난하이 청원에서 보여준 순수하고 선량한 이성적인 커다란 인내는 22년 동안 지속하여 왔습니다. 해고에 직면하고, 납치, 가택수색, 세뇌반, 노동교양, 판결, 고문 심지어 생체장기적출 앞에서도 대법 제자들은 여전히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되받아치지 않았으며 전과 다름없이 중생들에게 진상을 알리는 것을 조금도 느슨히 하지 않고 끝까지 견지했습니다. 현재 중공을 포기하고 공산당을 탈퇴한 중화 용사들이 3억 7500만 명에 달합니다. 중공 사당은 ‘진선인(真·善·忍)’ 대법을 박해하면서 스스로 파멸로 몰아갔지만 파룬따파는 잔인한 박해 속에서 오히려 더 강대해졌으며 세계 백여 개 나라와 지역에 널리 전해졌습니다. 순정하고 선량하며 아름다운 션윈공연은 매년 전 세계를 순회하며 수백 차례 공연했고, 많은 호평을 받았습니다. 황음(荒淫)하고 사악한 악당 내부에는 투쟁과 치욕이 끊이지 않고, 지리멸렬(分崩離析) 속에 법정 인간이 바로 눈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애석한 것은 많은 중국인, 특히 각급 정부, 정치법률, 공안계통의 공직자들이 사당에 납치되고 휩쓸려 말려 들어가 죄악이 깊고 무겁다고 가히 말할 수 있습니다.

‘4.25’를 돌아보면 바른 것과 사악한 것, 선한 것과 악한 것이 더 뚜렷하게 보입니다. 더 많은 사람이 이 마지막 기회를 잡아 사당에서 탈퇴하기를 희망합니다.

‘4.25’를 돌아보면서 건곤을 다시 만드시는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존께 경의를 표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진상을 알려 세상 사람들을 일깨워주고 있는 대법 제자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감히 사당을 버린 중화의 용사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대법을 지지해주는 전 세계 선량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4.25’를 되돌아보면서 친구들이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1999년 ‘4.25’ 중난하이 평화청원의 위대한 공적은 영원불멸하며, 온 세상에 빛나리라!

 

원문발표: 2021년 4월 2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4/22/42366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