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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을 내려놓으니 수련이 수월해지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사부님께서 ‘대만법회에 보냄’ 중에서 말씀하시기를 “여러분은 이번 법회를 통해 모두 부족한 점을 찾아, 더욱 정진하며, 법회를 배움을 견주고 수련을 견주며 세인을 향해 정법(正法)을 펼쳐 보이는 성회(聖會)로 열 수 있기를 희망한다.”[1]라고 하셨다. 최근 나의 수련 체득을 써내 사부님께 보고하고 수련생과 교류하고 싶다.

1. 시시각각 심성을 닦는 미묘함을 깨닫다

우리 수련하는 사람은 누구나 안으로 찾아야 함을 알고 있다. 나는 진정으로 마음을 써서 시시각각 법의 표준으로 자신을 가늠해야만 안으로 찾음을 진정하게 해낼 수 있고, 자신의 집착심을 찾을 수 있으며, 제때 자신을 바로잡을 수 있고, 수련의 길을 바르게 걸어갈 수 있음을 깨달았다.

아래는 자신이 최근 부딪힌 몇 가지 작은 일 중에서 안으로 찾은 깨달음이다.

1) 사부님께서 샤오바오(小寶)를 이용해 점화해주시다

샤오바오는 사촌 남동생의 막내딸인데 올해 두 살이 지났고 총명하며 말을 잘한다. 샤오바오와 나는 인연이 깊다. 그 아이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친척 중에서 나와 가장 친하다. 아이가 나를 보기만 하면 달라붙는다. 아이는 내가 발정념하는 것을 보고 가부좌를 배웠으며 나는 또 훨씬 전에 아이에게 “쩐싼런하오(真善忍好: 진선인은 좋습니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아홉 글자 진언(真言)을 가르쳐줬다.

한번은 집에서 친척 모임이 있었다. 샤오바오가 나를 보더니 달려와 내 손을 끌며 가서 놀자고 했다. 내가 조금 이따 가자고 하자 아이는 지금 가자고 했다. 나는 어린 마음을 알고 있었다. 첫째는 밖에 나가 놀자는 것이고 다른 목적은 슈퍼마켓에 가서 맛있는 것과 장난감을 사달라는 것이었다.

샤오바오가 내가 자기를 데리고 나갈 뜻이 없어 보이자 ‘파룬따파하오’를 외우기 시작했는데 처음 스스로 외운 것이었다. 매번 내가 먼저 “쩐(真)”하고 먼저 말해야 뒤따라 “쩐싼런하오, 파룬따파하오”하고 말했었다. 오늘은 목적이 있어 내 앞에서 외운 것인데 내가 자기를 데리고 나가 달라는 것이었다. 아이에게 말했다. “샤오바오야, 네가 ‘파룬따파하오’하면 고모가 기뻐하며 너를 데리고 나가 놀아 줄 것이고 마트에 가서 좋은 물건을 사 줄 것이라고 알고 있지?” 하자 아이는 머리를 끄덕였다.

샤오바오는 정말 영리하지만, 영리함을 이런 데 이용했다.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이에게 “대법은 매우 신성하단다. 고모가 너를 데리고 나가 놀아주게 하려고, 고작 고모가 듣고 기뻐하라고 외우면 좋지 않단다. 대법은 너를 더 총명하고 철이 들게 할 것인데 반드시 진심으로 외워야 한단다.”하고 말했더니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머리를 끄덕였다.

샤오바오를 데리고 나가는 길에 나는 자신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오늘 아이가 왜 이런 모습을 보일까? 수련의 길에는 어떤 우연한 일도 없는데 나에게도 대법을 이용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이때 불현듯 “대법(大法)은 훔칠 수 없다”[2]라고 하신 다섯 글자가 떠올랐다. 사부님은 일찍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나는 형식을 중시하지 않는다. 나는 각종 형식을 이용하여 아주 깊이 은폐된 당신들의 마음을 폭로하게 하여 그것을 제거해 버린다.”[3] 라고 알려주셨다. 나는 무척 놀랐다. ‘나에게 이 방면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분명 그랬다. 샤오바오의 표현은 나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자세히 생각해 보니 단번에 생각났다. 요 몇 년 사이 교류원고를 쓸 때 간혹 사부님 설법을 인용했으나 그리 엄숙하지도 겸손하지도 못했는데 어떤 때에는 사부님의 법을 인용한다는 것이 의외로 자신이 깨우친 법리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사부님의 법을 인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며 당시의 사고방식과 동기가 어떠했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법을 실증했는가 아니면 대법을 이용해 자신의 깨우침이 옳다는 것을 실증하기 위해 법을 이용했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자신도 깜짝 놀랐다. 이렇게 부정한 마음이 오랫동안 은폐돼 있었는데 오늘 사부님께서 샤오바오를 이용해 일깨워주셔서 발견하고 제거해 버릴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우리에게 알려주시기를 “이것은 법을 훔치는 행위이다. 대법(大法)을 이용하려는 생각 자체가 바로 용서할 수 없는 죄다.”[4]라고 하셨다. 당시 나의 이런 심리는 상당히 미묘해 알아차리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작은 차이지만 동기가 다름으로 인한 경지의 차이는 천양지차이다.

이 일을 통해 수련의 엄숙함을 진정으로 느꼈으며 작은 일도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시때때로 일마다 제때에 안으로 찾아야만 사부님께서 정교하게 배치해주신 집착심을 제거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2) 이익심을 버리다

한번은 큰형님 댁에 갔는데 전에 제1장 공법만 가르쳐줬기에 동작을 마저 가르쳐주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큰형님 댁에 도착하니 형님과 형님의 친정어머니가 종묘상에 종자 사러 가려고 서두르고 있었다. 날이 너무 더웠기에 남편에게 그분들을 차로 모시고 가도록 하려고 했다. 그분들이 문을 나서기 전 인터넷에서 구매한 치마를 가져와 내게 보여줬다. 아주 예뻐 보였는데 그분들이 나에게 입어 보라고 해 입어 보니 정말 좋았다. 그들이 치마 가격이 싸다고 하는 말을 듣자 생각 없이 나도 하나 사게 도와달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나는 인터넷 구매를 거의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사고 나서 우리는 종묘상으로 출발했다.

종묘상에 도착하자 남편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나는 그분들과 함께 들어갔다. 종자를 고르며 형님이 걷다가 치마를 걷어 올렸다. 속바지를 입긴 했지만 이런 행동은 보기 좋지 않아 나는 멍해졌다. 평소엔 이러지 않는데 오늘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또 뭐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들이 종자를 다 고르고 주인이 계산을 잘못하여 가격을 적게 계산했다. 그들은 주인이 값을 적게 계산했음을 알면서도 값을 흥정했고 주인은 또 자투리를 깎아줬다. 나는 생각하기를 ‘주인이 잘못 계산했음을 그들도 알면서 아무 소리 하지 않고 거기다 가격을 깎으려고 하다니! 그들은 돈도 많은데 몇십 위안짜리 물건을 가지고 이렇게 계산적인가! 참 욕심이 많구나!’라고 했다. 그때 머릿속에 나에게 이익심이 있는 것인가? 하는 일념이 떠올랐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지나쳤다.

나는 이익을 담담하게 본다고 스스로 생각했고 친척과 친구도 내가 대범하다고 여겼다. 얼마 전 친구가 급히 돈 쓸 일이 있었는데 나는 기꺼이 빌려줬다. 친구는 갚으면서 많은 이자를 줬으나 나는 완곡하게 거절하며 한 푼도 받지 않았다. 다시 이 일에 대해 생각해 보자 갑자기 큰형님네 그분들의 표현은 나에게 보여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이익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탐욕스러운 모습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다. 나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욕심이 많기에 값싼 치마를 보자 바로 샀다. 그때는 수련생과 나가서 진상을 알리려면 옷을 자주 바꿔 입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전을 위해 자주 옷을 갈아입고 나감). 하지만 사실 나는 옷이 많으며 바꿔 입기도 충분하다. 결론을 말하자면 싼 것을 욕심내는 마음이다. 탐욕이 심할 뿐만 아니라 형님이 치마를 걷어 올리는 점잖지 않은 행동에서 자신의 색심도 보게 됐다.

자신이 값이 싼 치마를 보자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샀는데 이것은 이익심의 표현이다. 예쁜 치마를 입고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비춰보며 치장하기 좋아하는 마음은 색심의 표현 아닌가? 사부님은 내가 이 일로 깨닫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그분들의 모습을 이용해 나를 일깨워주셨다. 사부님의 점화에 감사드린다. 이후 이런 면에서 자신은 주의해야 하며, 싼 것이 있다고 바로 살 수는 없다. 이런 이익심과 색심을 철저히 닦아 제거해야 한다.

3) 심태를 바르게 하다

최근 외삼촌 댁에 두 번 갔는데 외숙모의 심리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짜증 부리며, 화를 잘 냈고, 이것 아니면 저것을 불평하며 나이 많은 외숙부를 늘 지적하고 원망하며 좋지 않게 대했다. 처음엔 보기가 좀 딱해서 남편에게 이 일에 대해 말하며 사람 마음으로 가늠했는데 외숙모가 최근 심리상태가 좋지 않으며 외숙부에게 너무 지나치다고 불평했다.

하루는 문득 내 심태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하고 의식했다. ‘왜 내가 외숙모의 이런 모습을 자주 보게 되지?’ 자세히 찾아보니 정말 문제가 있었다. 상가에 가서 물건 산 일이 생각났는데 시간을 아끼려고 나 역시 부산을 떨었다. 종업원이 이런 나를 보고 “몹시 바쁘신 것 같군요” 하고 말했다. 당시 나는 “네, 바빠요” 하고 답했다. 자신의 심태에 문제가 있음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는 자신의 심태가 불안한 표현 아닌가?’ 속인도 알아볼 수 있었다.

또 집안일을 하면서 시간을 지체할까 봐 서두르며 급하게 일을 끝냈고, 아파트에 가서 자료를 배포하면서도 수련생의 동작이 느리다고 불만스러워했는데 말하자면 ‘조급증’이었다. 이것은 조바심이 아닌가? 우린 신의 길을 걷는 수련인이 아닌가? 신이 일하며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성적이고 진중하며 상서로운 표현으로 일해야 하며 그래야만 법을 실증하고 중생 구도하는 일을 더욱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전법륜(轉法輪)’을 다시 읽었다. 사부님은 “당신이 평소 늘 자비로운 마음과 상화(祥和)한 심태를 유지한다면, 문제와 마주쳐도 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충적인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5]라고 말씀하셨다. 사부님의 법에 대조하며 자신의 심태를 전반적으로 살펴보니 사부님의 요구와는 차이가 아주 컸다. 자신의 심태가 좋지 않을 때는 두려워하는 표현이 많았고, 두려움이 심하면 대면 진상도 좋지 못했다. 그러므로 잘하지 못할수록 조급해했고 자주 어쩔 수 없다는 소극적 정서가 나타났는데 이것 역시 시간에 대한 집착의 표현임을 의식하게 됐다. 또 항상 자신의 이전과 비교했는데 이것 역시 법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부님은 “이러한 것은 노제자 중에도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의 가장 뚜렷한 표현은, 그들은 늘 사람과 비교하며, 늘 그들 자신의 과거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법의 각 층차의 요구로 자신을 가늠하지 못합니다.”[6] 라고 우리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법으로 대조해 보니 자신은 법의 요구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으며 이런 것들은 모두 자신의 수련의 길을 가로막는 벽이었다.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하며 법에서 재빨리 승화해야만 그것들을 제거해 버릴 수 있고 세 가지 일을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사부님의 이 부분 설법을 옮겨 적으며 자신을 격려하고 싶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어떤 심태(心態)인가? 바로 관용(寬容)인바, 매우 홍대(洪大)한 관용으로서, 다른 생명을 용납할 수 있고 진정으로 입장을 바꾸어서 다른 생명을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 많은 사람들이 수련과정 중에서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은 점차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도달하려 하고 있다.”[7]라고 하셨다.

이상 몇 가지 가족과 함께 살며 안으로 찾은 깨우침을 통해 나는 사부님께서 최대한도로 속인 상태에 부합되게 수련하라고 하신 법에 대해 더 깊은 깨달음이 있게 됐다. 어떤 수련생은 속인(가족 또는 친척과 친구)과 접촉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법학습을 하거나 나가 진상을 알리는 것만 못하다고 여긴다. 특히 이미 진상을 말했거나, 삼퇴한 가족, 친구, 동창생들과는 한데 모여 시간을 함께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의 이해로는 우리의 수련은 고리마다 단단히 연결돼 있으며 모두 사부님께서 정성으로 배치하신 것이다. 매일 나타나는 일도 우연한 것이 아니며 모두 우리의 심성을 제고하게 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인위적으로 자신의 수련의 길을 배치하거나 속인 사회를 피해서는 안 된다. 그 일은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것일 수 있는데 누군가를 시켜 당신을 괴롭게 하고 당신이 심성을 지키며 제고해 올라올 수 있는가, 어떤 마음을 버릴 수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거기에다 속인과 접촉하는 중에 당신은 대법을 실증해야 하며 대법제자의 풍모를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류사회는 수련하기에 좋은 장소로 이는 이 속의 일체가 모두 사람으로 하여금 집착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걸어 나와 인류사회에 대한 일체의 집착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비로소 위대하며 비로소 원만할 수 있다.”[8] 라고 하셨다.

2. 위타(爲他)의 경지를 수련해내다

사부님께서는 대법 수련자가 무슨 일을 하려면 먼저 다른 사람을 생각해야 하며 위타의 생명이 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최근 발생한 작은 일에서 ‘위타’의 미묘함을 체험했다.

며칠 전 남편과 차를 타고 은행에 일을 보러 갔다. 도착하니 점심때가 다 될 무렵이었는데 아직도 10여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기다리면서 보니 한 사람의 일 처리시간이 최소 20분 이상 걸렸다. 이곳은 본점이라 비교적 복잡한 일을 보는 사람이 많았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나는 여기서 기다릴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오후에 남편은 집에서 할 일이 있는 데다 그는 또 낮잠 자는 습관이 있어 잘 시간도 주어야 했기에 먼저 나가 식사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내 일은 예약이 돼 있어 꼭 처리하게 돼 있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말하기를 우선 기다리지 말고 나가서 밥을 먹자고 했고 밥 먹고 와서도 은행에 기다리는 사람이 많으면 당신은 먼저 집에 돌아가서 오후에 할 일을 하고 나는 버스를 타고 가겠다고 했다.

나는 남편과 얼른 식사를 마쳤다. 은행에 와서 보니 창구 한 곳에서만 처리하고 있었는데 예상 밖으로 두 개 창구에서 업무를 하여 일을 빨리 마칠 수 있었고 남편 차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해 봤다. 방금 분명히 10여 명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떻게 많은 사람이 일을 빨리 끝냈지, 그럴 리가 없는데? 바꿔 생각해 보니 아, 오늘은 내가 남편만을 위해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먼저 남편을 식사하게 하고 다음 집에 가서 낮잠을 자게 하려고 했는데 전혀 자신을 먼저 생각하지 않았다. 이전 같으면 남편을 잠시 기다리게 했을 것이다. 더운데 버스 타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먼저 자신이 편안하고 고통을 겪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년 동안 습관이 돼 대개는 남편이 내게 양보했으며 무슨 일이든 내가 우선이었다. 오늘 이 작은 일에서 나는 수년에 걸쳐 형성된 관념을 바꿨다. 먼저 남편을 위해 생각할 수 있었기에 사부님께서 나를 격려해주셨다. 사부님께 감사드린다.

또 하나는 수련생 한 분이 우리 팀의 A 수련생을 찾아와 말하기를 부근에 사는 C 수련생은 법학습팀이 없는 데다 상태가 매우 좋지 못하며 두 눈이 거의 실명 상태로 법을 볼 수 없고 단지 들을 수만 있는데 우리가 그를 도울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A는 우리 팀에 건의하기를 C의 집에 가서 그와 함께 법공부하자고 했다. 듣고도 나는 가고 싶지 않았는데 C를 모르는 데다 그의 집안 상황과 가족의 태도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A에게 B 수련생과 가라고 했고(B가 이전에 C를 알기 때문) 나는 가려고 하지 않았다

집에 와서 나는 이 일을 생각해 봤다. 오늘 내가 왜 이렇지, 수련생이 곤란하면 도움이 필요한데 나는 왜 이처럼 냉랭한가, 모두 사부님의 제자가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한 사람의 제자도 소중히 여기시는데 나는 왜 수련생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고 도울 수 없는가? 게다가 특별한 일도 없는데 가서 수련생과 법공부하지 못하는가? 이것은 이기적인 마음이 남김없이 폭로된 것이 아닌가? 이 일은 나를 제고시키기 위해 나타난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대법제자는 하나의 정체이다”[9]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일이 곧 나의 일인데 나는 왜 기뻐할 수 없는가? 기뻐하지 않는 배후는 위사위아(爲私爲我)의 사심이 아닌가? 이건 즉시 제거해버려야 한다. 인식하자 나는 즉시 자신을 바르게 되돌렸고 다음 날 C의 집에 가서 법공부했다.

C와 함께 법공부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 토론하고 교류했다. C도 안으로 자신의 부족을 찾아 현재 상황의 원인을 찾아냈고 또 많은 집착을 버렸다. 눈이 보이지 않아 답답하고 초조한 상태가 많이 좋아졌고 심정도 훨씬 편안해졌다.

어느 날 법공부할 때 나는 C에게 “오늘 당신 심태가 아주 좋아졌네요. 이런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탁 트이고 개운합니다. 앞으로 최대한 이런 심태를 유지하십시오”하고 말했다. C도 마음속 답답함이 사라졌다고 했다. 수련생들은 그 말을 듣고 아주 기뻐했다.

이 일을 통해 나는 자신의 수련상태를 자세히 살펴봤다. 왜 그런 이기심을 없애지 못한 것인가? 사부님의 요구와는 차이가 너무 크다. 얼마 남지 않은 수련시간 동안 사부님의 말씀을 따르며 잘하려고 노력하겠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또 당신들에게 알려주겠다. 사실 당신들 이전의 본성(本性)은 위아위사(爲我爲私)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당신들이 앞으로 일함에 먼저 남을 생각해야 하고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앞으로 어떠한 일을 하든지, 어떤 말을 하든지, 역시 남을 위하고 후세 사람을 위하는 데 이르기까지 고려해야 한다! 대법(大法)의 영세불변(永世不變)을 위해 고려해야 한다!”[10] 라고 하셨는데 나는 이 가르침을 소중히 기억하겠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2-대만 법회에게’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대법(大法)은 훔칠 수 없다’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뿌리를 캐다(挖根)’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대법(大法)은 이용당할 수 없다’
[5]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6]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시간과의 대화’
[7]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2-2002년 미국 필라델피아법회 설법’
[8]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2-정치가 아니다(不政治)’
[9] 리훙쯔 사부님 저작: ‘미국중부법회 설법’
[10]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불성무루’

 

원문발표: 2020년 12월 1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0/12/18/41561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