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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온 길을 회상하고 수련하면서 귀로에 오르다

[밍후이왕](밍후이 기자 선룽 취재보도) 인생의 기회는 늘 자신의 생각과 선택에 달려있다.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순경(順境)과 역경(逆境)에 임하고 생애에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는 사실 자신의 일념에 달려있다.

인연

대만 타오위안(桃園) 농가에서 태어난 쉬원하이(徐文海)는 9남매 중 장남으로서 농사를 짓고 동생들도 보살펴야 했다. 쉬원하이는 “그땐 아주 바빴습니다. 김매기, 모내기, 벼 베기 등 많은 농사일을 했습니다. 매일 학교 수업이 끝나면 소를 끌고 풀을 뜯어 먹게 하고 하늘을 보면서 ‘인간 세상은 정말로 고생스러운데, 천상의 신선들은 다 행복하겠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도 훗날 쉬원하이의 인생에서 반본귀진(返本歸眞)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일념 때문일 것이다.

부모님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히 일하셨다. 매일 황토에 얼굴을 마주하고 하늘을 등지고 부지런하게 일하시며 하루에도 함께 몇 마디 하지 못했고 얼굴도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소박하고 선량한 말과 행동으로 쉬원하이에게 모범이 무엇이고, 길이 무엇인지 깨우쳐줬다. 가정 형편이 어렵고 집안일과 농사일로 대부분의 휴식 시간을 채우는데도 그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갔다. 늦은 밤 어두운 불빛 아래서 밤낮 열심히 공부했다. 일하면서 공부하고 자립한 뒤에도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혼자 힘으로 전문학교와 대학까지 졸업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순조롭게 국가 특별 고사를 통과한 쉬원하이는 재무부 소속 기관으로 배치됐다. 재직 기간에 영어 작문반에 다닐 때 과제 하나하나를 꼼꼼히 타이핑하고 점검하다 일단 잘못이 있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과제가 깔끔하고 훌륭했으며 태도가 성실해 성적 1위로 이 기관의 영문 비서로 초빙됐다.

몸과 마음이 지친 힘든 여정에 어느 날 대법을 얻어 빛을 보다

하지만 빈틈없이 일해 온 그는 몇 년째 불면증에 시달렸다. 밤이 깊어지면 머릿속엔 고민하던 사소한 일들이 그의 마음을 짓누르는 큰 산과 같아져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새벽이 오기 전에야 잠들었고 얼마 못 자고 일어나 지룽(基隆)에서 1시간 동안 타이베이까지 버스를 타고 출근해야 했다.

“저는 침대에 오래 누워있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곤 했습니다. 그땐 별의별 생각이 다 나서 국가 대사에서부터 사소한 일, 상관없는 것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아 잠들지 못했습니다. 수면제를 먹어도 효과가 없었습니다. 관자놀이는 누르면 아팠고 하품하며 눈물을 흘리고 신경이 곤두서고 심장이 압박하듯 무거웠습니다. 몸은 피곤하지만 아침에 버스에 올라타면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점심시간에 책상에 엎드려 있어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악순환에 시달려 아주 고통스러웠습니다.”

하루하루 버티기 힘든 이런 나날들을 쉬원하이는 몇 년을 버텨내면서 심신이 피로하고 우울해 각종 기공 공법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 “건강을 위해 저는 초급반, 중급반, 고급반에서 다양한 공법을 배웠습니다. 비용은 한 반에 몇만 위안(몇백만 원)이었습니다. 건강은 좋아지지 않았지만 점심시간을 이용해 건물 회의실에서 동료와 함께 모여 연공을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앞장서서 연공을 하던 직장동료가 더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1998년의 마지막 날이 돼서야 그녀는 저에게 더 좋은 것을 찾았다고 말했습니다!”

오랜 세월 쉬원하이는 마치 천 리 길을 달려가는 나그네 같았다. 밤낮으로 길을 가는 중에 비틀거리며 감당하지 못해 그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의 고통은 심신의 피로와 무거움만이 아니라 방향과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일종 무력감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쉬원하이는 눈부신 기쁨을 만났다. 효과도 보지 못하고 수만 위안의 수업료를 내야 했던 기공을 즉시 포기하고 동료들과 함께 무료로 파룬궁(法輪功)을 배우게 됐다.

쉬원하이는 연마하면서 점차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져 편안함을 느꼈고, 마침내 생명의 존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달았다!

“저는 수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주 빨리 잠들 수 있었고 날이 밝고는 제가 이렇게 잘 잘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도움이 되지 않는 수면제와 양약도 점점 잊어버리게 돼서 이러한 변화가 아주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쉬원하이는 배부르게 먹을 수 있고 달콤하게 잘 수 있었으며, 안색이 불그스레하고 활력이 넘쳐 파룬궁의 신성함과 비범함을 직접 실증했다.

“‘전법륜(轉法輪)’을 읽으면서 예전에 옳다고 생각했던 많은 이치가 그릇됐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면 전에는 제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했지만, 우주에는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는 법리가 있습니다. 많이 얻을수록 타인을 많이 해치게 되며 잃는 덕도 많아집니다.” 그는 사부님의 대법은 박대정심(博大精深)하며 ‘전법륜(轉法輪)’의 한마디 한마디에 감개무량해 마음속으로 마땅히 이런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쉬원하이는 자신의 심성과 수련 경지가 제고된 후 부정맥, 불면증, 위궤양, 부비강염 등의 문제가 개선됐을 뿐만 아니라, 마음이 낙관적이고 평온해져 삶의 질은 천지개벽의 변화가 있었다.

'图:文海感慨于师父的每一句法理,打从心底觉的做人就是应该这样。'
쉬원하이는 사부님의 모든 법리에 감개무량해 하며, 마땅히 이런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쉬원하이가 사회에서 오랜 세월 고민하면서 답을 찾지 못했던 과거의 문제들을 깨닫자 변화가 생겼다. “이전에 저는 불같은 성격에 참을성이 없었지만 수련 후에 일이 생기면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면 고속도로나 길거리에서 자동차 사고가 몇 번 있었는데, 뒤쪽에서 차로 들이받는 바람에 ‘펑’ 소리가 났습니다. 예전 같으면 큰일로 여겼을 것입니다. 저는 수련인이고 상대방도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며 너무 피곤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차에서 내리지 않고 배상을 청구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진선인(真·善·忍)’의 원칙에 따라 타인을 위해 생각하다

쉬원하이는 대법 ‘진선인(真·善·忍)’ 원칙을 지도로 불같은 성격을 고치고 남을 배려하는 것을 배웠다. 그는 “제가 사는 아파트는 7세대가 엘리베이터 한 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집집마다 신발, 신발장, 잡동사니, 천장까지 높은 신발장을 문밖이나 엘리베이터 문 옆에 두고 있습니다. 수련 전에는 저도 그랬지만 수련 후에는 공공 공간에 제 물건을 놓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집 앞을 깨끗하게 비워놓고 신발 한 켤레, 우산 하나도 놔두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쉬원하이는 불만이 생겼을 때 자신보다 남의 어려움을 배려할 수 있었다. 그는 말했다. “제가 구입한 지하 주차장 자리 옆에는 늘 다른 사람의 차량 3~4대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원래는 한 번에 후진하면서 주차할 수 있었는데 두세 번, 심지어 네 번을 이동해야 출입이 가능했습니다. 예전에는 화가 났었는데 지금은 수련인으로서 다른 주민들이 주차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신경 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 차를 벽에 좀 가까이 대서 다른 사람들이 편하게 주차할 수 있게 했습니다.”

공무 기간, 그는 중국어와 영문 원고, 공문서를 모두 재차 검증하고 검사해 가능한 한 완전무결하게 처리했다. 배우고 물어보는 과정에서 번잡하고 난해한 일을 하며 최고의 영어 선생님이 됐다. 쉬원하이가 근면하고 부지런해 장관, 서장의 해외방문 수행 비서로 발탁돼 대만을 위해 5대주를 방문했었다. 그는 원고 작성과 번역 외에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장관 수행비서로 임명돼 APEC 심포지엄의 공동의장과 연설자로도 활약했다.

그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용량이 커지면서 얻는 것도 많아졌다. “예전엔 동료가 영어 질문을 하고 협조를 구할 때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련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할 수 있었습니다. 이해하고 검증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최선을 다해 완성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제가 영어를 잘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다른 사람이 많이 질문해서 향상된 것입니다. 남을 돕는 것이 자신을 돕는 것입니다.”

공직 생활에서 승진을 추구하고, 성적에 대한 좋고 나쁨을 평가하는 것은 공직자의 성취 여부에 대한 중요한 잣대가 된다. 사람들 간의 화합이 이루어져야만 정치가 잘 이루어진다는 것을 잘 아는 쉬원하이는 직장 내 부서 간의 갈등에 대해 ‘진선인(真·善·忍)’의 원칙으로 처리하면서 자신의 권익을 먼저 포기했다. “관리자의 가장 처리하기 어려운 문제는 성적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우등은 정원 제한이 있어 항상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몇 번은 자발적으로 부하 직원에게 양보했지만 결국 상관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1급 부서 관리자일 때에도 쉬원하이는 마찬가지로 공로를 남에게 돌렸다. “회사에서 특수사건 수사로 보너스를 지급할 때, 제 이름을 공문서 명단에서 삭제했습니다. 가장 고생한 것은 제일선의 요원들이기에 포상금과 영예는 그들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직장동료에게 포상금 리스트에 제 이름을 올리지 않게 했습니다.” 쉬원하이는 42년 공직 생활에서 공적을 따지지 않고 어려움을 말하지 않았으며 매사에 타인을 위했다.

매체에 참여해 진상을 알리다

1999년 중공 정권은 ‘진선인(真·善·忍)’을 수련하는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하고, 언론을 통해 파룬궁을 모함하고 비방했다. 파룬궁에 대한 진실을 은폐하고 차단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국내외 민중이 파룬궁을 오해하고 증오하게 했다. 세인들에게 진상을 알리기 위해 해외 파룬궁수련생들은 에포크타임스, NTD, 희망지성 등 언론 매체를 만들어 중공의 거짓 선전을 타파했다. 그 결과 많은 파룬궁수련생은 자신의 전문적인 배경, 지식 및 능력을 활용해 매체에 참여해 진상을 알렸다. 쉬원하이도 그 일원이다.

쉬원하이는 말했다. “여러 해 동안 저는 1000편이 넘는 영어 문장이나 자료를 쓰거나 번역했습니다. 저에게는 매 한 편이 시험이자 도전이었습니다. 문장을 더 의미 있고 더 매끄럽게 더 감동적으로 쓰기 위해 인터넷에서 몇 번이고 확인해야 했습니다. 때로는 한 명사나 용어의 정확한 번역을 검색하려면 반나절 또는 그 이상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글 한 편을 번역하는 데 하루나 일주일이 걸릴 때도 있습니다. 어려운 과정이지만 아직도 중국어에 능통하지 못한 수십억 중생이 진상을 알기 위해 기다리는 것을 생각하면 정념이 나와 어려움과 과중한 부담은 아주 순조롭게 해결됐습니다.”

쉬원하이는 문장 하나하나에 충실하면서 사진 기술과 영상 편집을 배웠다. “영상 제작에 대해 전혀 몰랐는데 공부를 한 뒤 무료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해 혼자 모색하다 보니 영상을 만들고 자막과 음악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거의 고희의 나이지만 귀와 눈이 밝아 그는 영상을 편집할 때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있었다. 그는 말했다. “마우스로 수없이 누르기, 끌기, 스크랩, 복사 등의 동작을 반복하다 보니 저는 한밤중에 팔꿈치와 손가락 관절이 아파서 깨곤 했습니다. 그래서 왼손이 아프면 오른손으로 바꾸고, 오른손이 아프면 왼손으로 바꾸고, 검지가 아프면 중지, 중지가 아프면 다시 검지로 바꿨습니다. 결국 엄지손가락, 약지, 새끼손가락도 이 성스러운 일을 함께하게 됐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평생 일하고 은퇴하면 종종 여행을 떠나 인생을 즐긴다. 그러나 쉬원하이는 은퇴 후 진상을 알리는 사명에 전념했다.

수련 후 지금까지 22년, 수련의 길을 걸으면서 쉬원하이는 나쁜 마음을 내려놓은 후의 건강과 순수함, 심성이 승화된 후의 충만함과 자유로움을 절감했고, 더 많은 사람을 돕기 위해서는 스스로 용량을 늘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진심으로 말했다. “글을 쓰든 영상을 제작하든 그것은 제 능력으로 쓰고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대법과 사부님께서 주신 지혜로 가장 중요한 시기에 최선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더욱 많은 사람이 진상을 이해하도록 돕고 밝은 미래를 향해 가겠습니다. 제자는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20년 12월 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0/12/2/41585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