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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의 청춘 회고록

글/ 허베이(河北) 대법제자 연자(燕子)

[밍후이왕] 1996년 1월부터 저는 대법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는 20살이었고 매우 운 좋게 여러 해 동안 학교에 다니고 직장을 다니며 결혼을 하고, 사회의 큰 염색 항아리 속으로 발을 들여놓아도 시대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확고하게 걸어 지나온 것을 매우 다행이고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이 한 길을 걸어옴에 있어서 모두 사부님의 자비로우신 보살핌과 보호 그리고 가지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아래에 저는 23년 동안의 수련 과정을 간단히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996년부터 1999년까지 개인 수련 단계에서 저는 비교적 정진하는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 무렵 우리 집은 연공 거점이었습니다. 매일 밤, 주변 마을과 현지 마을의 사람들은 모두 우리 집에 와서 법공부를 하고 연공을 했습니다. 매주 일요일 아침이면 우리는 모두 현성의 농산물시장에 가서 연공하며 홍법 했습니다. 겨울의 아침이면 날씨가 매우 추워 많은 수련생은 모두 장갑을 착용했으며 일부 사람들은 착용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추위를 타지 않아서 착용하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연공을 마친 후, 손이 얼어서 두 개의 땅콩만 한 커다란 물집이 생겼습니다. 저는 이것은 사부님께서 저에게 소업하게 해주시는 것이고 더러운 물질을 모두 깨끗이 제거하는 것이며 나를 보게 해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번에도 저는 여전히 장갑을 착용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저를 확고하고 강하다고 칭찬했습니다.

여름이면 저는 혼자 마당 안의 나무 아래에 앉아 가부좌를 했습니다. 그곳에는 몇 그루의 꽃나무가 있었습니다. 저는 어떤 종류의 꽃 아래에서 모기에 물렸는지 몰랐고 앉은 지 십 여분 만에 몇 군데나 물렸습니다. 저는 참으면서 마음속으로 그들이 저를 도와 소업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연공을 마친 후, 세어보니 몸에는 빼곡하게 몇십 군데 물렸습니다. 어떤 때에는 일부러 고생을 찾아서 했으며 또 그 나무 아래에 가서 연공했습니다. 그런 다음 지난번보다 더 많이 물렸는지 적게 물렸는지 세어보곤 했습니다. 그때 저는 결가부좌로 한 시간 할 수 있었으며 전혀 아프지 않았습니다. 단체 연공 외에도 저는 혼자 가부좌를 했습니다. 한번은 억지로 참으면서 3시간 넘게 연공했습니다. 그때 저는 ‘홍음’을 외우는 것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지금 기억하고 있는 ‘홍음’은 모두 그때부터 잊지 않은 것입니다. 그 시절 수련에 대한 개념은 바로 연공하는 것과 심성을 닦는 것이었습니다. 심성을 닦는 것에 있어서는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실하고 선해야 한다는 개념이 매우 얕았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기분 나쁘게 하면 참아야 하며 화를 내지 않으면 시험을 넘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자연히 매우 선량해졌습니다.

그 시절 가장 기쁜 일은 일요일마다 총 보도소에 가서 법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몇십 명의 사람들이 함께 법공부를 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게다가 몇 명의 또래 어린 수련생들과 함께했습니다. 그곳에 가기만 하면 매우 흥분되었습니다. 1999년 4.25부터 7.20 사이에 정부에서 파룬궁(法輪功)을 금지시키며 수련하지 못하게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와 아버지 그리고 많은 수련생은 함께 진(鎭) 정부에 가서 평화청원을 했습니다. 아버지와 두세 명의 수련생이 들어가 정부의 책임자들에게 진상을 알렸습니다. 우리 몇십 명의 수련생은 밖의 큰길가에서 줄을 잘 맞춰 조용히 서 있었습니다. 7.20 이후 수련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리의 법공부 팀도 해체됐습니다. 우리는 베이징으로 가서 청원하기로 했습니다. 가정적인 이유로 나와 아버지는 둘 중 한 사람만 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나서서 가게 됐고 다른 수련생과 함께했습니다. 결국 중도에 돌아왔습니다. 그때 나이가 어리고 돌아온 후에 다시 가는 것도 몰랐습니다. 이것은 내 생에 가장 큰 유감으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법에 대해 동요된 적이 없었고 그런 개념이 전혀 없었습니다. 박해가 가장 심했던 그 몇 년 동안 나와 아버지는 밤에 나가서 자료를 배포했습니다. 한번은 경찰차가 쫓아왔고 우리는 무덤까지 달려갔습니다. 우리는 무덤 위에 납작 엎드려 꼼짝하지 않았고 사부님의 보호로 경찰관은 우리를 보지 못하고 차를 운전해 지나갔습니다. 또 한번은 아버지와 저는 밤에 진상 스티커를 붙이러 나갔습니다. 우리는 다 붙이고 나서 이웃 마을로 갔습니다. 우리 마을과 이웃 마을의 중간쯤 도로에서 뒤 차량이 라이트를 멀리까지 비추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고 서둘러 되돌아갔습니다. 그 경찰차는 우리가 붙인 방향을 따라가다가 앞에 더 붙인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재빨리 차를 돌려 우리 두 사람을 의심했습니다. 그때, 큰길가 양쪽에는 집이 없고 땅만 있어 우리는 숨을 곳이 없었으며 앞으로 내달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달려서 마을 입구에 이르자마자 맞은편에서 두 사람이 걸어왔습니다. 그때 경찰차도 도착했습니다. 라이트가 밝게 비추고 있어 우리 네 사람은 동시에 그곳에 서 있었습니다. 경찰관이 네 사람인 것을 보고 곧장 앞을 향해 운전해갔습니다. 우리 네 사람이 서 있던 그곳도 묘지였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어 묘지를 하나씩 지나면서 작은 길로 마을까지 되돌아갔습니다. 정말 놀라움은 있었지만, 위험은 없었습니다. 또 한 번 사존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저는 고향으로부터 2백여 리 떨어진 도시에 가서 2년 동안 중등 전문학교를 다녔습니다. 나의 점수는 고등학교에 갈 수 있어서 고등학교에도 등록하고 학비도 냈지만, 나중에 또 다른 사람의 권유를 듣고 중등 전문학교에 다니게 됐습니다. 사실 모두 운명 속에 배치된 것입니다. 그곳에서의 첫 수업에는 자기소개가 있었습니다. 저는 제일 잘했고 학생들은 모두 나를 위해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선생님도 몹시 좋아하며 우리 반의 최고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전법륜’을 학교에 가져갔습니다. 이튿날 기숙사의 한 친구가 발견하고 담임선생님께 보고했습니다. 담임선생님은 그 친구에게 나를 감시하게 했고 무슨 상황이 있으면 즉시 선생님께 보고하도록 했습니다(저는 1년 후에야 이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반장, 학습부장, 각 교과 대표와 같은 학급의 책임을 담당하는 일에 있어서 나의 몫은 없었습니다. 저는 당시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도 나를 위해 왜 학습부장을 내가 맡지 않고 교과 대표마저도 내가 맡을 수 없느냐며 그들은 모두 공부를 나보다 잘하지 못한다며 불평했습니다. 당시에 저는 심성에 관한 시험을 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학교에서 저는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자신을 요구했습니다. 1년 후, 선생님은 저에게 여러 임무를 겸해서 맡게 했습니다. 수학과 대표, 영어과 대표, 무용과 대표,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지부 서기(그때에는 아직 공산당, 공산주의 청년단, 소년선봉대를 탈퇴하라고 하지 않음), 학습부장을 맡았고 학급 회의도 모두 제가 사회를 진행했습니다. 그들은 대법을 배우는 사람은 알고 보면 이렇게 좋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2년 후, 저는 그 도시의 어느 한 공장에서 일자리를 찾았고 작업 현장 주임을 맡았습니다. 저는 ‘전법륜’을 갖고 다녔습니다. 제가 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공장의 젊은 사람 열 명이 함께 나가서 밥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식후에 계산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일이 있다고 말하고 먼저 나가고 저 사람도 일이 있다고 말하며 나갔으며 어떤 사람은 돈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남은 대여섯 명의 사람들도 돈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말하자 사장은 누가 계산할 거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그들을 살펴보니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는 내가 계산하겠다고 말했지만,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처음에는 더치페이로 균등하게 분담하는 줄로 여김). 이튿날 어떻게 된 일인지 부서장이 알게 됐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제 막 입사한 어린 여직원을 괴롭혔다고 말했습니다. 몇 개월 후, 동료가 부서장에게 제가 파룬궁을 수련한다고 알려줬습니다. 세 명의 부서장이 저를 사무실로 불러서 한 사람이 한참 저에게 권유했습니다. 그중 한 여성 부서장은 그녀와 왕즈원(王治文)은 동창이고 그가 지금 어느 정도로 빠졌는지 보라며 그렇게 좋던 생활마저 할 수 없게 됐다는 등을 말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습니다. 그때에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에 총부서장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가서 좀 생각해보세요. 내일 내게 답을 알려줘요. 계속 수련하려면 우리 여기서 근무하지 말아요.” 저는 말했습니다. “부서장님, 저는 고려해볼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수련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는 내게 돌아가서 고민해보고 내일 다시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자신이 반드시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근무하지 못하게 하면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하며 다음 날에 떠날 준비를 마쳤습니다. 이튿날 가서 부서장을 찾아 저는 말했습니다. “부서장님, 저는 여전히 수련을 선택했습니다.” 그녀는 제가 착실하게 근무한다며 계속 출근하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여기서 2년 근무하다가 나중에 공장이 외지의 현으로 이사를 갔고 마침 사촌 언니가 컴퓨터 가게(그녀는 회사의 정직원이므로 가게를 볼 시간이 없음)를 열게 되면서 저에게 자신을 도와 가게를 봐 달라고 하여 저는 집으로 돌아가게 됐습니다.

2년 후, 저는 결혼을 했습니다. 외지에서 학교에 다니고 결혼 후 2년의 시간을 합하여 총 6년의 시간은 정진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현지의 정진하는 수련생과 연락이 닿게 됐습니다. 그들이 그처럼 정진하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 다시 깨어났습니다. 그러나 저는 근무시간이 여유가 없었지만, 컴퓨터와 프린터기를 다루는 기술을 알고 있어 주로 수련생에게 유지보수 일을 해주곤 했습니다. 나중에 수련생들은 소모품을 점차 우리 가게에 와서 구매했습니다. 저는 알게 되는 수련생들도 갈수록 많아졌습니다. 처음에 제가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은 저는 수련생 A에게 새로 구매한 프린터기를 설치해주러 갔습니다. 프린터기 시험인쇄를 위해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스티커를 인쇄해봤습니다. 공교롭게도 수련생 B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잘 인쇄된 것을 보고 좀 갖고 싶어 인쇄를 기다렸습니다. 20~30장 인쇄됐을 무렵 수련생 A는 그녀에게 줬습니다. 그러나 수련생 B는 충분하지 않으며 더 갖겠다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수련생 A는 다급해지면서 큰 소리로 “당신에게 줄 수 없어요. 자신만 생각해서는 안 돼요. 모두 당신에게 주면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해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수련생 A에게 말했습니다. “왜 그녀에게 좀 더 안 줘요? 갖고 싶다고 하면 당신이 좀 더 인쇄하면 안 돼요?” 그녀는 기분 나빠하며 다른 사람에게도 줘야 하며 그녀만 갖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느냐고 말했습니다! 당시 나의 마음은 씁쓸했고 그렇게 갖고 싶은 진상 자료를 가질 수 없는가 하며 매우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저는 ‘스스로 왜 집에 자료점을 차리지 않는가?’하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무엇이든 다 알고 있고 다른 사람에게도 요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에도 작은 꽃을 피우게 됐습니다. 수련생들이 무엇이 필요하면 저는 그것을 만들었습니다. 얼마만큼 필요하면 저는 그만큼 만들었습니다. 그 몇 년 동안 션윈 CD가 나온 후, 저는 디스크 시디면과 표지 인쇄를 맡았습니다. 디스크 시디면의 인쇄가 비교적 느렸기 때문에 저녁에 저는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 졸리면 머리를 숙이고 잠시 잠을 잤습니다. 조금만 움직이면 깨어나 이어서 프린트를 하다 보니 종종 한밤중이 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법공부를 하는 시간이 매우 적었습니다. 그때 저는 1년에 6일~7일 동안 휴가가 있었습니다. 아침 8시부터 밤에 날이 어두워져서야 퇴근했고 점심시간에도 당직을 섰습니다. 해마다 이렇다 보니 사촌 언니의 일을 봐주고 있는 것이어서 뭐라고 말하기 미안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쉴 수 있는 날이 있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릅니다! 설령 한 달에 하루일지라도 말입니다. 나중에 저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저는 둘째 아이를 가지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합리적인 이유로 휴직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자신이 생각해낸 이 방법으로 기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원을 이뤘습니다. 저는 사촌 언니에게 이야기를 꺼냈고 매일 오전 근무만 하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현지의 법공부 팀에 참가할 수 있게 됐습니다. 다른 시간에는 집에서 법공부를 하거나 대법의 자료를 만들어도 됐습니다.

임신 8개월이 됐을 무렵, 사악은 마을의 벽면에 매우 많은 사악한 표어를 썼습니다. 우리는 구역을 나눠서 깨끗이 제거했습니다. 나와 수련생 A는 밤에 저의 전동차를 타고 갔습니다. 그날 막 비가 내린 뒤, 어떤 마을은 흙길이 돼버려 잠시 타다 보면 전동차 바퀴와 바퀴 위의 씌우개 장치 사이에 진흙이 가득 들어가 내려와 나무 막대기로 긁어내야 했으며 한참을 가다가 다시 나무 막대기로 긁어냈습니다. 우리가 벽면 위의 표어를 깨끗이 제거하려고 할 때, 이 벽의 맞은편 주택에 불이 켜졌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거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기왕에 왔으니 우리는 제거하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수련생 A는 저에게 전동차를 잡게 했고 그녀는 검은색 페인트로 칠했습니다. 거의 다 칠했을 무렵 불이 켜진 그 집 마당에서 ‘누구세요? 뭐 하는 분들이세요?’라는 큰 소리만 들려왔습니다. 우리는 서둘러 전동차를 타고 되돌아서 20m쯤 갔을 때, 차바퀴에 또 진흙이 가득 차서 탈 수 없게 됐습니다. 여기는 또 진흙 구덩이였고 높낮이가 고르지 않아 저는 차와 함께 바닥에 넘어졌습니다. 수련생은 급히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청을 드리면서 천천히 차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사부님의 가지 하에 그 사람은 쫓아오지 못했습니다. 저는 온몸이 흙투성이가 됐고 차도 움직일 수 없게 됐습니다. 저는 수련생인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아버지는 승합차를 몰고 와 상황을 보더니 걱정하며 말했습니다. “배가 이렇게 불렀는데 이 일은 하지 마라. 다른 수련생에게 하라고 해봐. 정말 넘어져서 다치기라도 하면 시댁에는 뭐라고 말할 거야!” 저는 아버지가 법에 있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제 몸을 걱정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뱃속의 아이도 법을 위해 온 생명이며 그녀도 나와 함께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하고 있어서 마찬가지로 행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저의 전동차를 수련생 A의 집에 두고 저를 집으로 데려다줬습니다. 이튿날 차를 깨끗이 씻어 다시 우리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저는 아이의 출산도 순조로워 반 시간 만에 딸을 낳았습니다. 당시, 산실에 한 임산부가 난산이어서 몇 명의 의사를 찾아와 도움을 청했습니다. 어떤 의사는 조급해서 자리를 맴돌고 있었고 임산부는 초조해서 울었습니다. 저는 그 임산부에게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기억해요. 이것은 불법(佛法)이에요. 믿으면 효험이 있으니 염해보세요. 많은 중환자가 염해서 모두 나았어요.” 내가 여기까지 말하자 두 명의 의사가 제 말을 끊으며 말했습니다. “무슨 대법이 좋아요. 의사가 좋다고 염하는 것보다 못하겠어요.” 저는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방법이 없지 않아요?” 그 임산부는 말을 하지 않고 계속 울었습니다. 그녀가 마음속으로 염했는지도 몰랐고 의사는 제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가보세요!” 저는 앉은 다음 내려가서 걸었습니다. 바닥에 막 서자 의사가 말했습니다. “어머. 당신은 정말 강하네요. 누가 당신에게 내려오라고 했어요. 가족에게 와서 부축해달라고 해요.” 이어서 가족이 바퀴가 달린 침대를 밀어왔습니다. 그들은 저를 다른 작은 침대에 옮겨 병실로 데려갔습니다. 산후조리하는 동안 아이는 매우 조용했습니다. 저는 매일 그녀에게 법을 읽어줬습니다. 아이가 3개월 정도 컸을 때, 저는 불려 나가 일을 했습니다. 저는 직업이 특수한 관계로 수련생들은 필요한 소모품을 모두 여기에 와서 구매했으므로 저도 그녀들이 나를 불러내어 일을 하게 한 것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2015년 5월 장쩌민(江澤民)을 고소할 때, 저는 이것이 하나의 새로운 정법 노정이고 대법제자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며 생사를 내려놓는 하나의 관문이기도 하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제가 알게 된 그날 밤, 저는 ‘나는 분명 써야 한다. 쓰고 나서 잡히면(당시의 이 일념은 법에 있지 않음) 나의 두 아이와 나의 가정 그리고 나의 일과 행복한 생활 이 일체를 나는 모두 내려놓아야 하는가?’하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자문하며 자신이 감옥 안에 있는 것을 상상했고 저의 생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았습니다. 저는 자신이 무엇이든 모두 내려놓을 수 있고 일말의 염려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의 이토록 평온한 마음으로 인해 기뻤습니다. 하지만 저는 쓸 줄 몰랐고 양식을 몰랐습니다. 수련생이 작성한 샘플이 나온 후, 저는 즉시 열심히 저의 경험을 써내어 위안퉁(圓通) 빠른우편으로 보냈습니다. 저는 우리 현의 수련생 중 처음으로 작성해서 우편으로 내보낸 사람이었습니다. 그다음 쓰고 싶지만 작성할 줄 모르는 수련생을 도와 정리해서 우편으로 발송했습니다.

나중에 밍후이왕에 어떤 수련생이 교류에서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반드시 우체국 빠른우편으로 보내야 하고 다른 곳의 빠른우편을 최고 인민 법원과 최고 인민 검찰원에서는 받지 않습니다.” 저는 다시 새롭게 수정한 후 또 우체국 빠른우편으로 한 부 보냈습니다. 어떤 수련생은 두려운 마음이 있어서 감히 작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밍후이왕의 관련 교류 문장을 인쇄해 그들에게 스스로 보게 했습니다. 많은 수련생이 보고 난 후 작성했습니다. 나중에 깨달은 수련생이 갈수록 많았지만 모두 작성할 줄 몰라서 우리 가게에 와서 저에게 쓰는 것을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이상하지만 공교롭게도 그 며칠 동안 우리 동료가 휴직기간이어서 저만 가게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며칠은 가게 안에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들도 없었고 유지보수 직원이 있었지만, 저는 그들을 일하는 곳으로 파견을 보냈습니다. 저 혼자 가게 건물 안에서 수련생들을 도와 글을 다듬어줬습니다. 더 신기한 것은 이전에 우리 딸은 매일 친할머니가 데리고 우리 가게에 와서 놀곤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틀 전, 저의 남자 동료가 딸아이를 놀리려고 인터넷 선으로 묶으면서 가지 못하게 했더니 딸아이는 놀라서 크게 울었습니다. 그때부터 오지 않게 됐습니다. 몇 개월 후에야 저는 비로소 그것은 사부님의 신비로운 안배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며칠 동안 매일 십여 명, 이십여 명 정도의 사람들이 우리 가게에 저를 찾아와 이른 아침에 문을 열지 않았는데도 입구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다른 수련생들은 타자 속도가 느리고 글을 다듬을 줄 몰랐으며 그들은 모두 습관적으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당시 시어머니가 알았다면 분명 이해하지 못하고 두려워했을 것입니다(나중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함께 오는 것은 이지적이지 못한 행위이며 사부님께서 제자들을 보호해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프린터기 업그레이드에 따라 HP 451 신제품이 생겼습니다. 이 프린터기는 속도가 빠르고 양면인쇄가 가능해 적어도 이전 모델에 비해 10배로 인쇄 속도를 줄일 수 있어 일을 줄이고 시간도 줄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이 기기로 교체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수련생들에게 제공한 것은 모두 매입 가격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주변 현시의 어떤 수련생들도 우리 이곳이 저렴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소식을 전해주고 받았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7개의 현이 있었고 시의 수련생은 저에게, 그들에게 무한 잉크 공급기와 잉크를 포함해 물건을 발송해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요구하면 반드시 들어줬습니다. 모두 수련생이고 어디까지나 몇백 위안(약 몇만 원)을 절약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모두 대법자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제가 원하는 기기가 갈수록 많아져 어떤 때에는 한 번에 십여 대가 필요했습니다. 당시에는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다가 나중에 수련생이 도처에 꽃을 피워야 한다고 일깨워줬습니다. 저는 제품을 구매한 주소지를 수련생에게 알려줘 그들이 스스로 구매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수련생은 계속 제가 그들에게 사다 주기를 바랐습니다. 저는 체면 때문에 이렇게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우리 2백 리 밖의 도시의 한 협조인이 다른 사람에게 편지를 전달해 나에게 기기가 너무 많으면 시 공안국에서 출처 조사를 하게 되므로 조심하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들은 후, 마음이 놀랐으며 압력이 느껴졌습니다. 마치 아무 때라도 잡혀갈 것만 같았고 분위기가 매우 공포스러웠습니다. 저는 현지의 한 협조인에게 자신이 늘 잡혀갈 것만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그렇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발정념을 많이 하고 정념이 있어야 하며 사부님이 계신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저는 각종 방법을 통해 주변 현에 우리 가게에서 프린터기를 가져가지 말라고 알려줬습니다. 제품 구매 주소지를 그들에게 주면서 스스로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동시에 강한 발정념을 내보냈고 법공부를 했습니다. 이렇게 사부님의 보호하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정말 사존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심성 제고

저는 남편의 사명은 특별히 와서 저의 심성을 제고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은 수도·난방 설비 일을 하며 한 사장 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사장의 생활은 매우 순조롭지 못하여 몇 년 동안 가게를 열어도 돈을 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치지 않으면 다른 일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수중에는 늘 돈이 없었고 2만 위안(약 344만 원)마저도 없었기 때문에 남편의 임금도 끌면서 빚졌습니다. 사장은 도저히 줄 돈이 없어 남편에게 주식을 사라고 말했습니다. 임금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15만 위안(약 2580만 원)을 꺼내어 주식을 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10년 전 일이며 남편은 동의했습니다. 저는 남편과 도처에 돈을 빌렸고 15만 위안을 모았습니다. 원금이 생기자 장사가 좋아졌고 나중에는 할수록 더욱 커졌습니다. 원금이 부족해지면 우리의 아파트로 담보했습니다. 1백만 위안(약 1억 7206만 원)을 대출받았다가 1백만 위안이 부족해지면 1백 50만 위안(약 2억 5807만 원)을 대출받았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대출금을 이용해 60여만 위안(약 1억 323만 원)을 들여 자신들의 단층집을 6백여 제곱미터의 대형 별장으로 재건축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해마다 1층을 세를 내주며 집세는 10만 위안(약 1천 720만 원) 게다가 가게의 공용 자동차라는 명의로 10만 위안의 자동차를 구입했습니다. 가게에서 기름값, 보험금 등 일체 비용을 내고 그들 스스로 차를 운전했으며 남편은 사장의 승합차를 운전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돈 한 푼도 나눠 갖지 못했습니다. 맨 처음에 주식을 산 후 1~2년 동안 제게서 5만여 위안(약 860만 원)의 돈을 들여 소형 자가용을 구매했습니다. 이 차는 제게 사주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줄곧 그들 가게에서 사용했습니다. 그들 두 사람은 번갈아 운전했고 그들이 새 차를 바꿀 때까지 운전했으며 6만여 Km를 달리고 나서야 저에게 줬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남편이 저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 처음에 저는 몰랐습니다. 한번 술을 많이 마신 후 무의식중에 말한 것이며 제가 캐물어서야 상황을 알게 됐습니다. 그들은 지금 대출금마저 갚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출금 이자를 함께 부담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 소식을 알게 됐을 때, ‘저는 이 고비를 어떻게 넘어야 하는가?’라는 생각에 코끝이 찡했습니다. 저는 하룻밤 내내 생각하다가 사부님의 말씀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1]는 법리를 들었습니다. 아마 지난 생에 제가 남편에게 빚진 것일 수 있고 남편이 저를 곤경에 빠뜨리는 것은 저에게 덕으로 보상해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평온해졌습니다. 이튿날 저는 더는 한 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말하자면 모두 다른 사람의 가정사처럼 담담합니다. 사실 제일 저의 심성을 제고하게 한 것은 남편의 평소 사소한 표현입니다. 예를 들면, 남편은 화장실에 가서 큰일을 본 후, 전혀 물을 내리지 않습니다. 작은 볼 일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제일 참기 힘든 일입니다. 여름이면 날이 매우 덥기 때문에 제가 보지 못할 때 반나절 동안 그대로 두다 보면 냄새가 매우 고약합니다. 겨울이면 난방 때문에 창문을 열지 못하는 방안을 가득 메운 냄새는 매우 독합니다. 무수히 많이 말했지만, 일부러 그런 것인지 아니면 기억하지 못한 탓인지 고치지 않습니다. 저의 시어머니가 스자좡(石家莊) 병원에 입원했을 때, 우리는 병문안을 갔습니다. 남편이 화장실에 다녀온 후, 저는 화장실에 가봤습니다. 남편은 큰 볼일을 보고 또 물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서둘러 물을 내렸습니다. 나중에 저는 자신을 바꾸고 남편을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남편을 위해 화장실 물을 내리고 여러 번 화장실에 들어가 확인하곤 했습니다. 더는 남편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 일을 중요하게 보지 않게 되고 심지어 습관처럼 여길 때 즈음 저는 남편이 화장실 물을 내릴 줄 알게 됐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때에 남편이 물을 내리는 것을 잊어버리고 제가 발견하게 되면 남편은 웃으면서 말합니다. “아, 깜박했네. 당신이 물을 내려줘요.”

이 고비는 지났지만 크고 작은 고비들이 무수히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올해 우리 집은 바닥 난방을 바꾸는 공사를 했습니다. 남편은 난방 일을 하는 사람이었고 그는 1주일 내 공사를 마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막 설이 지났는데 남편은 날이 너무 추워서 봄이 오면 다시 하자고 말했습니다. 4월에 남편을 재촉할 때 남편은 5월 1일에 공사를 준비한다고 말했습니다. 5월 1일이 되자 남편은 다음 주에 시작하자고 말했습니다. 화요일이 돼서 내가 다시 남편을 재촉하자 제가 상관할 필요가 없다며 주말에 일을 해서 마무리 짓는다며 밤에 야근을 해서라도 일을 끝내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일주일이 되도록 조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아빠가 6월 1일(중국 어린이날)이 돼도 마무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자 남편은 그럴 리가 없다고 했고 저도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아이는 6월 1일까지 마무리하지 못하면 뷔페 먹으러 가자고 했고 저는 좋다고 했습니다. 결국 계속 미루다가 심하게 독촉해서야 하루에 조금씩 하기 시작했습니다. 집안은 온통 지저분해졌고 잠을 잘 곳마저 없었습니다. 저는 저의 심성을 시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저는 정말 슬펐습니다. 초조하면 저는 한바탕 소리쳤습니다. 소리칠수록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저는 이것을 고비로 여기며 지나가려고 했습니다. 남편은 설 때부터 지금까지 이 몇 개월 동안 남편의 가게가 바쁘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도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누워 휴대폰을 보고 TV를 보면서도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마음 상태를 잘 조절한 후 말했습니다. “당신은 휴대전화를 갖고 놀고 놀다가 지치면 짬을 내서 조금이라도 해요.” 사실 마음도 철저히 깨끗하게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저의 마음이 정말로 매우 평온해지면 남편은 조금 했습니다. 이렇게 2개월 동안 시달리면서 지금까지 아직도 완전히 마무리 짓지 못했습니다. 남편은 여전히 누워서 휴대전화를 갖고 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몇 년 전부터 이미 각방에서 잠을 잡니다. 남편은 자신의 방문을 한번 잠그더니 아무도 자신을 방해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집에서 어떤 집안일도 하지 않았고 식사조차 아래층으로 내려와 먹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가 식사 준비를 마치면 손자에게 밥을 가져다주게 합니다. 어떤 때에는 아침에 옷을 세탁하고 말릴 겨를이 없어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옷을 말리는 것을 도와달라고 합니다. 밤에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보면 여전히 세탁기 안에 옷이 그대로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모습은 모두 우스갯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저는 이미 습관이 되었습니다.

한번은 저는 도저히 이해가 안 돼 남편에게 남편의 표현을 말했습니다(이전에 저는 말한 적이 없었고 좋은 일만 전하고 걱정거리는 전하지 않는다는 속인의 관념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오히려 남편이 아직 저를 때리지도 않았고 저의 왼쪽 뺨을 때리면 오른쪽 뺨까지 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남편이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들은 후, 순간 사부님의 자비로우신 점화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저는 관점을 바꾸었습니다. 더는 이것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남편이 그렇게 사심이 없고 가련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를 성취하게 하려고 일체를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남편에게 고마워해야 옳은 것입니다!

저는 진상 자료를 만들고 수련생을 도와 기술문제를 해결하는 것 외에 세 명의 수련생들과 함께 밖에 나가 스티커를 붙이고 진상 자료를 배포하는 작은 팀을 구성하여 매주에 한 번씩 나갔습니다. 이를 위해 저는 전용 전동차 한 대를 구입했고 지금까지 하는 것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사악한 표어가 있으면 우리는 밤에 나가서 칠해서 지우고…, 그렇게 하다 보니 점차 두려움이 줄어들었습니다. 저는 젊기 때문에 무엇을 할 수 있으면 그것을 했고 수련생이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면 저는 인내심이 있어 번거로움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수련생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진상화폐를 바꾸는 일을 맡아 진상화폐를 만들었습니다. 제가 쓴 돈은 전부 진상화폐입니다. 또한, 이를 기회로 대면하여 진상을 알렸습니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비바람 속을 걸어왔습니다. 무엇을 하고 얼마만큼 하든지 막론하고 매일 한 걸음도 사부님의 보호와 가지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저에게는 자신의 서약을 실천하고 사부님 따라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한 가지 소원만 있을 뿐입니다!

사부님 감사드립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20421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0/4/21/40414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