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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함에 대한 얕은 깨달음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남을 고려하고 사람을 선하게 대하며 타인을 잘 대하는 것은 선을 수련하는 일부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저는 줄곧 ‘무엇이 진정한 선인가?’하는 것을 생각해왔습니다. 어떤 수련생은 남을 위해 자기 이익을 버렸고 어떤 수련생은 있는 돈을 다 털어서 도와줬지만, 오히려 매우 비참하게 박해당했습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한 노년 여성 수련생은, 남편이 바람이 나 여자를 집으로 데려왔는데, 이 수련생은 그들에게 밥을 해주고 빨래를 해주었습니다. 그녀는 울분을 참으면서 감히 아무 말도 못 했고 남편은 결국 이 수련생을 집에서 내쫓았습니다. 한 중년 수련생은 부모를 일찍 여의고 십 대 때 여동생과 함께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습니다. 여동생이 그녀의 집에 머물면서 먹고 자는 것을 그녀가 모두 떠맡았습니다. 게다가 여러 차례 여동생에게 돈을 빌려주어 장사하도록 했습니다. 나중에는 여동생이 그녀의 이름으로 돈을 빌렸습니다. 더 나중에는 은행에서 그녀의 급여카드를 막았으며 그녀는 얼떨떨하게 빚더미에 쌓여 큰 낭패를 보고 곤경에 빠졌으며 먹고사는 것을 걱정해야 했습니다.

이 두 명의 여성 수련생은 자신의 의견을 굽혀 일을 성사시키려고 했고 고생을 참고 견뎠으며 치욕을 참고 큰 부담을 떠맡았습니다. 그들은 선량한 걸까요? 그들은 잘 수련한 걸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들은 법리가 분명하지 못했고 행위가 바르지 않았으며 수련인의 원칙에 부합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바르지 않은 사람이 그들의 순진함과 선량한 마음을 이용하여 그들을 괴롭혔고 구세력은 그들이 분명하게 변별해내지 못하는 틈을 타고 그들을 박해하는 목적에 도달했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현재 일부 사람은 대법제자란 허울을 쓰고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이유 없이 수련생 집에 거주한다. 먹고, 마시고, 갖고, 달라고 하며 사기 치고 수련생의 선량한 일면을 이용해 대법(大法)의 틈을 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수련생은 왜 똑똑히 분별하지 못하는가?”[1]

이 단락의 법을 되새겨보면서 지금은 ‘자비는 나약한 것이 아니고 관용은 도덕적인 최저선이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선이다. 아무런 원칙 없는 대가의 지불, 용인, 물러나서 양보하는 결과는 사악을 종용하고 부정하지 않은 것이며 오히려 구세력에 협력한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정한 부처인 그는 우주의 보위자(保衛者)이다. 그는 우주 중의 일체 바른 요소를 책임질 것이다.”[2] 우리는 부처를 수련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바른 요소를 책임질 것이다.”[2]를 위하여야만 바른 이치이며 비로소 바르게 걷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법에서의 바름이란 무엇일까요? 전통문화의 부부 관계에 있어서 부의부덕(夫義婦德)이 정도(正道)입니다. 남편은 책임을 짊어져야 하고 아내는 어질고 슬기로우며 유순해야 하며 형제자매 관계에 있어서 형은 아우를 사랑하고 아우는 형을 공경하는 것이 정도입니다.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엄격한 차례가 있고 사랑하고 존경해야 하며 벗과의 관계에 있어서 벗과 벗 사이에는 신의가 있어야 정도입니다. 서로 진실해야 하는 것은 벗을 사귀는 전제이자 기초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위의 몇 가지 사례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남편이 충실하지 않았고 불의를 저질렀을 때 수련생이 제지하지 않았고 남편이 바람 핀 것을 바로 잡아주지 않은 이것은 도덕패괴에 대한 묵인입니다. 언니 수련생은 재차 여동생의 잘못에 대해 계산해주고 응석받이로만 대할 뿐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속담에 ‘아이를 응석받이로 키우는 것은 아이를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줄곧 여동생을 응석받이로 대하는 것은 여동생을 해치고 자신을 해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대법제자의 신분으로 무단거주하며 사기를 저지르는 것은 바로 소란을 피우는 것이며 이것은 사기꾼의 수법입니다. 우리가 제지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준다면 화를 자초하는 것과 같습니다.

슬프게도, 이러한 사기, 황당하고 우스운 일이 대법제자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처 수련은 마땅히 변별력과 판단력이 속인보다 훨씬 앞서는 큰 지혜를 수련해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속인들이 우롱하고 기만하며 놀리는 대상이 되는 걸까요? 이리저리 생각해봐도 여전히 법리가 분명하지 않고 바른 것과 사한 것을 분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첫 번째, 법에 입각하여 문제를 보아야 합니다. 그해, 수련생들이 베이징에 가서 법을 실증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간 후, 어떤 친척은 말했습니다. “우리 아빠는 혈압이 200이 넘었고 아이는 매일 울기만 하는데 당신들은 선을 수련하지 않나요? 당신의 선은 어디에 있어요? 왜 보증서를 쓰고 나와서 가족을 돌보지 않나요?” 사람의 이치에 입각해서 보면 가족은 매우 불쌍하고 돌봐주는 것이 필요하지만 법리에 입각해서 보면 대의를 고수해야 하는 것이 정도이며 가족은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부님께서 명시하셨습니다. “한 수련인으로서 우주의 특성으로 가늠해야만, 비로소 무엇이 진정 좋고, 무엇이 진정 나쁜가를 변별해 낼 수 있다.”[3] 우리의 행위의 유일한 표준은 대법입니다. 가족이 ‘보증서’를 쓰라고 권유하는 말을 듣게 되면 불법(佛法)을 배반하는 것이며 가족도 불(佛)을 망가뜨리는 죄를 범하게 되어 진정하게 가족을 해치는 것입니다. 수련인은 사람을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법을 수호해야만 비로소 바른길을 걷는 것입니다.

두 번째, 각종 관계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과 관계를 바로잡으며”[3] 전통, 정통적인 문화도덕에 따라 각종 관계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과 자연의 관계는 “사람은 땅을, 땅은 하늘을, 하늘은 도를 법칙으로 삼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오륜(五倫)관계는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도(道)는 친애(親愛)에 있고, 임금과 신하의 도리는 의리에 있으며, 부부 사이에는 서로 침범치 못할 인륜(人倫)의 구별이 있고,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하며, 벗의 도리는 믿음에 있음을 뜻함]”입니다.

위의 몇 가지 사례를 되짚어보면, 남편의 본분은 처자식의 도덕적인 모범이 되는 것이야말로 바른 이치입니다. 남편이 탈선하면 아내가 도리를 알고 타이르는 것이 남편에 대해 책임지고 구원하는 것입니다. 자매 사이에 있어서 언니는 여동생을 교육해야 하고 여동생은 언니를 존경하는 것이 바른 이치입니다. 여동생의 잘못에 대해서 제때에 지적하여 바르게 고치는 것을 도와줘야 합니다. 교육과 처벌 없는 지나친 총애는 해치는 것이며 사랑이 아닙니다. 친구 사이에 있어서 믿을 만한 사람에게는 서로 진심을 터놓고 대하고 사기꾼에 대해서는 결코 믿어서는 안 됩니다. 사기꾼을 믿는 사람은 곧 바보입니다.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법으로 가늠해야 합니다.

세 번째, “세상 쇠락을 끊어 막노라”[4]를 행해야 합니다. 일체 대법 표준에 부합하지 않는 일에 대하여 우리는 스스로 심성을 지키면서 가서 행하지 않아야 할 뿐만 아니라 용기를 내어 가서 제지해야 합니다. 대법에서 수련해낸 선은 속인의 일시적인 즐거움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고 비위와 아첨을 잘 맞추는 것은 더욱 아니며 절대 아무런 원칙 없이 종용하는 것이 아닌 하늘과 땅을 바로잡고 대궁을 바로잡는 선이며 중생과 사회의 먼 앞날에 대하여 책임지는 것입니다. 앞의 사례를 되짚어보면, 수련생이 제때에 남편, 여동생, 사기꾼의 악행을 제지하여 “세상 쇠락을 끊어 막노라”[4]의 작용을 일으켰다면 비로소 진정하게 그들 생명의 영원함에 대하여 책임을 진 것이며 비로소 진정한 선인 것입니다.

네 번째, 방비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현 사회에서 사기꾼은 어디에나 있고 속임수는 가지각색입니다. 길거리에서 협박하는 사람이 있고 전기통신금융사기를 당하는 사람이 있으며 친한 사람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사람이 있고 곤경에 빠뜨리는 사람이 있으며 친구를 해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개인정보를 잘 살펴서 보관하고 보호해야 합니다. 윗글에서 언니는 신분증과 휴대전화에 대해 아무런 방비의식이 없어 여동생이 언니의 휴대전화와 신분증을 가져가 언니의 명의로 20만 위안(한화 약 3,400만 원)을 대출받았습니다.

비록 구세력의 배치는 매우 구체적으로 부주의한 언니와 교활한 여동생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육친정을 배치하였습니다. 하지만 언니가 교육하고 방비했다면 구세력도 탈 틈이 없었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대륙의 정황은 매우 복잡하다. 염두가 조금만 틀려도 구세력은 바로 틈을 잡는다. 따라서 자신의 수련에서, 일하는 동기에서 특히 조심해야 하는데, 당신은 필경 홍색의 공포 환경 속에 있다.”[5]

다섯 번째, 자금을 지원하려면 행방을 알아야 합니다. 매 대법제자의 시간, 돈, 재물은 모두 대법자원이므로 반드시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진정하게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 있지만,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고 진정하게 어려운 것인지 아니면 욕심으로 비롯된 것인지, 그 여부를 알아야 합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이는 수련에서 정진하지 못해 조성된 것이며, 어떤 이는 다른 마음을 품고 대법제자의 선량한 틈을 타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일들을 당신들은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당신이 그에게 찬조해주고 자금을 대줄 때는, 그가 무엇을 하는지 당신은 반드시 알아야 하며, 똑똑히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비록 그에게 돈을 줬을 뿐이지만, 당신은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을 지지한 것과 같으므로 당신도 잘못했다. 따라서 구세력은 당신이 속아 넘어간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그것은 당신이 한 무리이며 당신이 그를 지지했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일들에 대해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5]

여섯 번째, 육친정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어떤 가족은 수련생을 등에 업고 고리대금을 빌리고 수련생은 차마 마음에 걸려 갚아주곤 합니다. 하지만 가족은 결코 감사하게 여기지 않고 반성하지 않으며 오히려 수련생의 마음이 약한 약점을 잡고 욕망이 한이 없습니다. 식구들은 돈을 물 쓰듯 소비하고 수련생은 먹고 입는 것을 절약해가며 갚아주면서 오히려 사람을 대신하여 갚아주는 것이 옳은지 틀렸는지 법에서 사고하지 않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업력은 자기가 갚아야 하며, 누구도 감히 이 이치를 파괴하지 못한다.”[3] 그러므로 우리가 가족을 위해서 갚는 것은 사실 법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며 가족의 타락을 방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대가를 지불 할수록 번거로움이 많아지는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그러면 왜 가족에게 매이게 된 걸까요? 육친정 때문입니다. 육친정을 내려놓지 않으면 육친정은 우리를 지쳐 넘어뜨리고 옭아매며 시달려 죽게 할 수 있습니다. 육친정은 부드러운 칼과도 같아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만신창이가 되도록 베어버릴 수 있습니다.

또한, 법을 잘 배워야만 바른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사실, 법에는 무엇이든 다 있으며 어디에 문제가 나타나면 분명 어딘가 제대로 잘 배우지 못해서 잘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매번 마난(魔難)이 닥쳐올 때, 본성(本性)의 일면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완전히 사람의 일면으로 이해한다. 그럼 사악한 마(邪魔)는 이 점을 이용하여 끝없이 교란하고 파괴함으로써, 수련생으로 하여금 장기간 마난 속에 빠지게 한다.”[6]

아울러, 사부님 평어 문장 “역시 두세 마디를 말하다(也三言兩語)”(정진요지2), “‘대법(大法)의 위엄’을 평함”(정진요지2), “무엇이 진정한 선(善)인가”에서 모두 무엇이 좋은 사람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르게 걷는 것인가의 내용이 모두 있습니다. 우리가 법을 배울 때, 전면적이고 체계적으로 법을 배워야 하고 단편적으로 배우지 말아야 합니다. 법을 배움에 있어서 누락이 있는 부분에서 쉽게 문제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어느 부분을 배우지 못하면 그 부분에 정념이 없으므로 구세력이 틈을 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청성(淸醒)해야 합니다. 선은 응석받이로 길들여 방임하는 것이 아니고 요구하면 반드시 들어주는 것이 아니며 비위를 맞추며 사사로운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며 쫓는 것이 아닙니다. 참음은 원칙 없이 물러서는 양보가 아니고 온갖 수모를 다 참고 견뎌내는 것이 아니며 굽신거리는 것이 아니고 그럭저럭 양보하며 보전을 꾀하는 것이 아니며 자아를 상실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법을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일체 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7] 것을 해내야 합니다. 정법 속에서의 선은 자비롭고 위엄이 있는 것이며 정법 속에서의 참음은 최저선이 있는 관용입니다. 오직 법을 스승으로 삼아야만 비로소 ‘정견정념(正見正念)’을 가질 수 있고 비로소 바른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선이라는 명목으로 박해하는 것을 경계하고 법의 표준에 따라 좋은 척도를 가지고 분수를 파악하는 선(善)이야말로 비로소 진정한 선입니다.

적절하지 않은 곳은 자비롭게 시정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맹격일장(猛擊一掌)’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도항-미국서부법회 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4] 리훙쯔 사부님 시사: ‘홍음2-널리 비추다’
[5] 리훙쯔 사부님 경문: ‘2015년 뉴욕법회 설법’
[6]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도법(道法)’
[7]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2-대법(大法)은 견고하여 파괴할 수 없다’

 

원문발표: 2020년 1월 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1/4/39763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