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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배우고 법을 외운 약간의 수련체험

글/ 해외 대법제자

[밍후이왕] 대법제자로서 법을 배우는 중요성을 모두 잘 알고 있다. 법 공부의 의의, 어떻게 해야 법을 더 잘 배울 수 있는지에 관해 사람마다 인식이 다를 수 있는데, 법 공부에 관한 자신의 깨달음을 정리해 수련생 여러분과 교류하고자 한다.

1. 법을 배우는 의의에 관한 깨달음

법 공부를 통해 각 층차의 표준과 요구를 알게 되고, 어떻게 수련해야 하는지도 알게 됐다. 예를 들어, 질투심은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나으면 좋아하지 않는 마음인데 이것은 속인의 층차에서 질투심이 표출되는 한 가지 양상일 뿐이다. 기타 표현형식에서 질투심과 관련된 것들이 또 있지만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면, 수련과정에서 그것을 없애기 아주 어렵게 된다. 그러나 스스로 의식하지 못했다고 해서 꼭 그것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법 공부를 하면 법이 각 층차에서의 집착이나 관념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똑똑히 알려주어 그것을 더욱 빨리 제거할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우리는 겨냥성이 있기에, 진정하게 그 마음을 집어내어 그 마음을 제거하는데, 그러면 수련이 매우 빠르다.”[1]

진정으로 법을 배우면서 더욱 높은 층차에서의 법의 표준과 요구를 알게 되고 이로써 자신의 수련을 지도한다. 법 공부를 통해 각 층차에서 집착심을 없애는 법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버림(捨)’, ‘깨달음(悟)’ 등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경(經)은 마음을 닦는다.”[2] 사부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학습반에서 줄곧 여러분에게 설법하여 여러분의 心性(씬씽)도 줄곧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1]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법을 배우는 과정은 바로 수련인의 심성을 높이고, 법에 부합하지 않는 머릿속의 생각과 관념을 개변하는 과정이다. 수련 초기에는 법을 배우면 수련을 지도할 수 있다고 깨달았는데, 이후에는 이 ‘지도’라는 것도 한 가지 수련방법 또는 표준을 지도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법 공부 과정에서 어떤 때는 자신의 좋지 않은 마음이 천천히 법에 녹아드는 것 같았고, 어떤 때는 정념이 생기는 것 같았으며, 어떤 때는 갑자기 한 마디 법의 함의가 내 마음에 있던 집착을 모조리 또는 부분적으로 풀어주거나 내 마음을 열어주거나 넓혀주는 것 같았다. 즉, 법을 배우면 심성을 제고할 수 있다.

법을 배우는 과정은 마음을 닦는 과정이기도 하다. 법을 배울 때 여러가지 마음, 잡생각이 떠오르는데, 그것을 억제하고 법 공부에 집중하면 바로 이런 마음과 잡념을 닦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또 법 공부할 때 머리에 담아 넣는 것은 법이므로, 머릿속에 법의 비중이 클수록 내가 이 법에 동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늘 말하지만, 나는 당신이 수련하여 제고할 수 있고 수련 중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이 법 속에 압축해 넣었다고 했다. 당신들이 비록 부동한 경지에 있지만 모두 내가 한 말이 얼마나 큰 무게가 있는지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당신이 수련하기만 하면 당신은 무엇이든 모두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신들은 아는가? 당신들이 얻은 그것에는 나의 얼마나 많은 것이 그 속에 용해되어 들어있는지를?”[3]

사부님께서는 “수련생의 本體(번티)와 공의 연화(演化)와 제고, 이런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가는 데에 이르기까지”[1]라고 말씀하셨다.

법을 배우는 과정은 내 수련의 여러가지 문제를 푸는 과정이고 또 本體(번티)와 공의 연화(演化)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법은 정념(正念)을 확고히 할 수 있다.”[4]

법 중의 법리와 더없이 큰 법은 끊임없이 나의 깨달음에서 제고가 있게 했고 정념을 확고하게 해주었다. 초기에 법 공부할 때는 대법을 순전히 일반 기공으로 여겨 법 공부를 아주 적게 했을 뿐더러 사부님 설법에 대해 의문도 아주 많고 인정하지 않은 곳도 있었다. 그런데 법 공부에 정진하지 않았지만 정공(靜功)을 하기 좋아해서 줄곧 포기하지 않았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정말 너무 오성(悟性)이 낮았고 심지어 정공을 하면서 손에 신기한 물질을 안고 있는 것도 환각이라고 여겼다. 어느 날 법 공부하는데 사부님께서 반복적으로 점화(點化)해 주셔서야 비로소 완고한 무신론을 깼다.

법을 배우는 마음가짐이 변했고, 다시는 인간세상에서 배운 지식, 관념, 관점으로 법을 습득하지 않았다. 원래 있던 곤혹과 의심이 법을 배우면서 하나하나 풀리기 시작했고, 새로운 문제가 끊임없이 생기는데 줄곧 법 공부하는 과정에서나 또는 기타 시간에 문득 깨닫게 됐다. 당시에는 한 주에 보통 2번씩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었다. 심성이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아주 뚜렷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도 층차를 제고하는 상응한 상태를 조금 느끼게 해주셨다. 층차가 올라가는 속도는 감히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심지어 수련되는 속도가 아주 빨라서 수련생과 교류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저 말하면 사람들을 깜짝 놀래킬 정도였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전에 우리 연공장에 나오는 어떤 사람이 자신이 이미 ‘삼화취정(三花聚頂)’ 상태가 나타났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마치 삼화취정 상태가 나타나면 아주 높은 층차라는 듯이 말하기에, 당시 속으로 슬그머니 웃은 기억이 난다. 대법은 너무나 커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중에는 깨닫는 빈도가 예전처럼 빈번하지 않았지만 법 공부를 좋아하는 기초를 닦아놓았다. 법의 위대함을 알게 되자 법에서 깨달은 법리는 나를 끊임없이 제고하게 했다. 이후 수련과정에서 법에 대해 확고하지 않거나 심지어 의심이 나타났을 때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온 길과 깨달은 법리를 돌이켜보곤 했다. 그러면 확고하지 않고 의심하는 것이 구름처럼 떠나가 버렸다. 이전의 체득이 확고하게 해준 것이 아니다. 그 체득이 얼마나 강렬했건, 무엇을 봤고 그것이 얼마나 생생했건, 이런 것들은 내가 대법에 대해 확고할 수 있는 기초가 아니다. 대법에 대해 확고하고 신심이 가득하게 한 것은 대법의 법리, 대법의 위대함이었다.

법을 배우면서 나는 사물을 보는 관점과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다시는 속인의 시각에 빠져서 사람, 일, 사물을 보지 않았다. 예를 들어, 천체의 홍대(洪大)함은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더욱 똑똑히 보게 해줬고, 유구한 생명의 역사는 역사와 윤회의 관점, 그 마음가짐으로 주변 사람과 일을 보게 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배우고 이러한 일임을 알게 됐는데, 명백해지고, 받아들이니 또 완전히 다른 경지였다. 법은 만사만물을 보는 관점과 마음가짐이 달라지게 했다.

정법(正法)을 수련하면서 법 공부는 진상을 알리는 방법과 마음가짐을 일깨워줬다. 간단히 교류해보겠다.

법을 배우는 가운데 사부님의 법은 내 마음속 매듭을 풀고 지혜를 열어주고 선념 등을 증가해주었다. 사부님께서 어떻게 내 마음의 매듭을 풀어주셨으면 나는 법에서 깨달은 이치로 속인의 마음속 매듭을 풀어주어 선(善)과 아름다움을 향하도록 이끌어, 정(正)과 사(邪) 중에서 바른 쪽을 선택하게 했다. 법에서 깨달은 이치, 예를 들어 “진정한 선과 악”[5], ‘만사만물’로써, 속인의 집착 등에 이끌려 거짓말에 빠진 ‘주와 왕’을 이해했다. 그들과 따지지 않았고 심지어 그들의 더러움도 생각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그들 마음속 매듭을 생각하고 그들을 도와 마음의 매듭을 풀어줬다. 법에서 단련하고 정제된 강한 의지가 견지를 해낼 수 있게 했고, 진상 알리기를 견지하는 과정에서 수련인의 의지력이 더 강화됐다. 진상을 알리면서 각양각색의 사람을 만나게 됐는데, 사람 마음의 충격과 시험을 겪으면서 스스로를 훈련하고 제련했고, 심성과 마음이 실천 속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제고해 올라왔다. 이렇게 제고된 심성과 마음자세로 다시 법을 배우니 법 중에서 끊임없이 더 높은 법리가 펼쳐졌다. 나는 정법(正法)을 수련하는 것이 중생을 구도하는 가운데 자신을 수련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현재 나는 이해했다. ‘전법륜’에도 마찬가지로 어떻게 진상을 알려야 할지에 관한 법이 포함돼있다.

2. 어떻게 법을 잘 배울 것인지에 관한 몇 가지 체험

법을 배울 때 마음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주의력을 집중하고 잡생각이 없어야 한다. 법을 배울 때 머릿속에 잡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관건은 잡념이 나올 때 어떻게 하는지이다. 자신의 주이스[主意識]가 잡생각에 따라 허튼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정신을 법을 배우는 데 집중시켜야 한다. 잡념을 제거하는 과정도 마음을 닦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대법(大法)을 잘 배우려고 한다면 어떠한 목적도 품지 말고 배워야만 비로소 옳은 것이다.”[6]

법을 배울 때 모든 인위적인 생각을 내려놓아야 하고 그 어떤 추구하는 마음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깨달았다. 법 공부할 때 사람의 머리로 대법의 더욱 깊은 내포를 ‘사고(思考)’하면 안 되고 문자 표면의 뜻만 알아보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 더욱 높은 법리는 사부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신사신법(信師信法)해서 법을 배우고 수련하고 가서 하기만 하면, 얻을 때가 되면 얻을 수 있고, 목적을 가지고 법을 배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사부님을 믿고 법을 믿는 표현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인류 고유(固有)의 오랜 관념이 한 세트의 사업ㆍ사유방법으로 형성된 후에는 새로운 인식을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렵다. 진리가 나타났는데도 그것을 감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배척한다.”[1]

법공부할 때 되도록 머릿속의 모든 관념을 내려놓고 머리를 비우고 대법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의 관념 혹은 경험으로 대법을 이해하면 안 된다.

그리고 또 자신이 어떻게 하고 싶다고 법 공부하면서 법에서 근거를 찾으면 안 된다. 마땅히 마음을 내려놓고 법에서 어떻게 해야 한다고 깨달았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이 순서가 바뀌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으면 법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고, 심할 경우 심지어 그릇되게 깨달아 사오(邪悟)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법공부에 대한 나의 체득은 이러하다. 읽는 속도가 빠르든 늦든, 소리가 크든 작든, 결가부좌를 하든 말든, 두 손으로 책을 받들고 읽든 그렇지 않든, 심지어 어떤 사람은 글자 하나하나를 마음에 닿게 읽어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모두 중요하게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법에서 이러한 내용을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는 오직 유일한 하나의 표준에 따르는데, 바로 사부님의 법이다. 법에서 무엇을 이해하거나 깨달았다면 그것으로 자신을 요구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수련생과의 교류도 교류일 뿐이지 다른 사람을 내가 이해한 바에 따라 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부님의 법 중에서 이렇게 이해했다. 법을 배우려면 마음을 조용히 하고, 정신을 집중하며, 목적이 있어서는 안 되고, 관념을 내려놓고 읽어야 하고, 법을 많이 배워야 한다.

물론 만약 ‘전법륜’을 외워낼 수 있고 법을 외우면서 법 공부하면 더욱 좋다는 것을 체득했다.

3. 법을 외우는 의미에 관한 심득체험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은 마치 용기와 같아서 무엇을 담으면 바로 그것이다. 당신이 담아둔 법은 바로 법에 동화된 것이며, 당신이 흙을 담으면 바로 흙이다.”[7]

법을 외운 기억은 하나의 실질적인 물질이고 다른 공간에 실제로 존재하는 물질이라고 생각한다. 전법륜의 ‘개광(開光)’ 소제목 부분에서 깨달았다. 사람의 의념이 내보낸 사상은 대뇌 상태의 물질이다. 심지어 그 물질은 사상도 있고 어떤 일도 좀 할 수 있다. 한번은 입정하고 있을 때 눈앞에 한가득 글이 쏟아져 내려왔다. 그 글자들은 마치 중국 고대의 열쇠처럼 생겼다. 마음속으로 왜 이러는지 몰랐고 다만 그들은 모두 내가 외워낸 ‘전법륜’ 중의 글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 사람의 사상 속에 법의 기억과 관련된 물질이 많을수록 마지막에 밀도도 갈수록 커진다. 그러면 그 사람의 사상 깊은 곳도 종종 자신을 대법수련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체득이 하나 있다. 법을 외우는 상태가 좋을 때면 흔히 대부분 꿈에서 자신이 수련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 일을 틀리지 않게 하고 시험도 쉽게 넘길 수 있으며, 꿈에서도 진상을 알리고 있고, 접촉하는 사물도 모두 아름답다.

법을 외우는 상태가 특히 좋을 때면, 한가하고 머리를 쓰지 않을 때면, 머릿속에서 자동적으로 법을 외우기 시작한다. 그럴 때의 마음가짐은 아주 좋고 법에 용해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나는 무슨 일에 부딪히거나 다른 사람이 뭘 말하는 것을 들으면 저절로 사부님의 법과 대조하는 습관을 양성했다. 어떤 사람이든 어떤 일이든, 사부님의 법이야말로 그것을 가늠하는 유일한 기준이며, 수련인의 사상이 맑게 깨어있어야 한다. 모든 일을 법으로 대조한 다음 자기 사상 속의 생각을 법과 대조하고, 사상 중 법에 부합되지 않은 곳을 찾아내야 한다. 당시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하건 간에, 사람의 이치에서 옳든지 그르든지 시시각각 법에 대조하면, 다른 수련생이 말하는 바에 따라 나도 말하거나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막무가내로 따라하는 정황을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법을 외우면서 나는 의지력이 강해졌다. 수련인의 의지력은 아주 중요하다. 법을 외우는 과정에서 외우는 양이 그렇게 많고, 사부님께서 반복해서 말씀해주시는 데가 그렇게 많아 책의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데, 또 끊임없이 잊어버리는 것이 생기면 다시 정확히 외워 끊임없이 오류가 적게 나오도록 외워야 한다. 이 과정은 한 사람의 의지력에 대한 부단한 도전인데, 멈추지 않고 견지하는 것이 곧 끊임없이 의지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법을 외우면 법을 배우는 시간이 늘어날 수 있고 사상이 속인의 상태에 처한 시간이 줄게 된다. 평소 속인 상태에 처한 시간이 “법 중에 용해되자(溶於法中)”[8]의 상태보다 많다. 수련상태가 좋지 않을 때면 속인 상태에 처한 시간은 더욱 길다. 법을 외우다보니, 뭔가를 할 때, 예를 들어 설거지 하거나 지하철을 타거나 걷거나 또는 잠에서 깨어나 아직 일어나지 않고 침대에 있을 때 법을 외우게 됐다. 이 쪼개진 시간들은 많지 않은 것 같지만 법을 외울 줄 알면 완전히 달라진다. 법 공부 시간이 많아진 것 같은 동시에 더 많은 시간을 법 공부 상태에 있게 하며, 속인의 상태에 적게 처해지게 한다.

전형적인 실례가 하나 있다. 한번은 걸어가면서 법을 외우고 있는데 반대쪽에서 한 중국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법을 외우는 흐름을 끊지 않으려고 그저 그 여자 분에게 대법의 진상이 담긴 전단지를 하나 드렸는데 뜻밖에 그가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진상을 알렸다. 그가 한 첫마디가 아직도 기억난다. “참 친절하고 선해보여서 무슨 말이건 다 믿고 싶네요.”라고 했다. 사실 내가 인자하게 생겼다고 생각지 않는다. 법에 녹아든 상태가 그에게 그런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지금 진상전화를 할 때, 상태가 좋지 않으면 상태를 좋지 않게 한 원인을 심성 상에서 찾아보는 외에도 법 공부를 하면 상태가 좀 회복된다. 법을 외우기 때문에 하루에 총 세 개 강의를 배울 수 있고, 아주 쉽게 해낸다. 상태가 좋은 시간도 더 많아진다.

법을 외우면 나쁜 생각과 잡생각을 제어하고 없애는 데 도움이 된다. 잡생각이 떠오를 때 주이스가 그것을 제거하고 억제하는데, 어떤 때는 되고 어떤 때는 내리누를 수 없거나 많이 노력해서야 조금 내리누를 수 있고, 어떤 때는 정신이 피곤하다는 느낌도 든다. 법을 외워낸 후부터 잡생각을 제거하는 것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 잡생각이 떠오를 때 누를 필요가 없이 직접 법을 외우기만 하면 그 잡념은 즉시 사라졌다.

법을 외우면 사부님께서 반복해서 해주신 말씀에 주의할 수 있다. 매번 중복된 글이 약간씩 다르므로, 법을 외울 때 기타 부분보다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중복된 부분은 흔히 서로 다른 내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를 들어 제1강의 소제목 “진정하게 고층차(高層次)로 사람을 이끌다”[1]에서 사부님께서는 사회에 대한 책임과 수련생에 대한 책임을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전법륜에서 세 번 출현했는데 매번 두 가지 책임이었다. 이 말씀에 대해 두 번 깨달았다. 그리고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도 세 차례 말씀하셨고 역시 두 번 깨달았다. ‘책임’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나는 일하는 마음가짐을 정했다. ‘책임’의 내포를 깨달은 후 체현된 책임은 자연적이고 자각적인 상태고 조금의 무리도 없었다. 아마 일정한 층차 범위 내에서 이 일부분이 법에 동화된 상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명의 기원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왜 인간의 이치는 반대인가, 무슨 마음가짐으로 인류의 고난을 봐야 하는가, 어떻게 사회관계를 대해야 하는가, 사람의 그렇게 많은 집착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가를 알게 됐다. 이 한 단락 법을 조금 깨달았는데 하나하나 집착을 없앤 것이 아니라 단번에 많은 집착이 담담히 보이게 됐다. 집착을 담담하게 본 후에는 버리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4. ‘전법륜’을 외워낸 몇 가지 체득

평소 법을 배우는 기초가 아주 중요하다. 만약 평소에 법을 읽을 때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 공부를 했다면 법 공부를 몇 년간 한 것이니, 많은 이가 전법륜을 이미 수백 번 읽었을 것이다. 박해 이전에 법을 배운 수련생은 아마 1000번 심지어 2000번 넘게 읽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전법륜을 유창하게 막힘없이 줄줄 읽을 수 있다. 보통 다른 사람이 앞의 한 마디를 읽으면 나는 다음 한 마디가 따라나온다. 이렇게 되면 법을 외우는 데 아주 좋은 기초가 있게 되는 것이다. 만약 아직 유창하게 읽지 못한다면 왜 아직 유창하게 읽지 못하는지 원인을 찾아봐야 한다. 이렇게 되면 법을 배우는 효과를 제고할 수 있다.

결심은 아주 중요하다. 결심을 내리고 매일 법공부하는 시간을 정하며, 매일 한두 단락만 외운다고 정해놓지 않는다면 외울수록 빨리 외워진다. 나와 아이는 3개월가량 ‘전법륜’ 한 권을 다 외워냈다. 처음에 하루에 한 단락을 외울 수 있었지만 나중에는 한 페이지, 몇 페이지씩 외웠고, 보통 5~6페이지였는데, 중간 길이 정도의 한 소제목 내용을 외워냈다.

법을 외우는 것도 결국 수련이다. 정말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결심하면 법의 힘은 체현될 것이다. “나는 기억력이 나쁘다” “나이가 많다” 등을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 그 기억력이 나쁜 것이 진정한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나이가 많고 적고를 수련인의 각도에 서서 봐야 한다. 물론 육신의 기억력의 영향을 받을 수 있으니 다 외우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최선을 다해 노력하기만 하면 된다. 외우는 과정이 바로 제고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견지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특히 절반 넘게 외웠을 때 매일 새로운 내용을 외우며 복습도 했는데 며칠 게으름피우면 외운 것이 또 그리 똑똑치 않아지면서 갑자기 이전에 잘 외운 말씀이 모호해질 때도 있다. 어떤 때는 내 수련상태에도 파동이 있거나 일이 생겨 바쁜 현상 등이 나타났는데, 이때 흔히 심하게 무기력한 감이 들면서 계속 ‘그만하자, 책을 읽어도 마찬가지니까.’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다행히 처음에 법을 외웠을 때 멈춤 없이 해냈다. 그러나 이후에 잘못 기억한 것을 줄이는 과정에서 확실히 몇 번 멈춘 적이 있었고 상태가 좋아지면 바로 또 법을 외우기 시작했다. 끝내 전법륜을 잘못 기억하는 것을 적게 외워낼 수 있게 되자 즉시 경쾌해졌고 갈수록 수월해졌다. 돌이켜보면 참 기쁘고 다행이다.

끊임없이 복습도 해야 한다. 매일 조금씩 외우는 동시에 조금씩 끊임없이 반복해서 복습해야 한다. 대부분 수련생은 법을 매일 한 단락이나 두 단락씩 외우고 복습하지 않는데, 이런 경우 마지막 페이지까지 외웠을 때는 외웠던 앞부분은 시간이 오래되어 이미 많이 잊어버린다.

전법륜을 외울 때 틀리는 곳은 노트에 몇 페이지, 몇 번째 행, 어떤 단어를 틀리게 외웠는지 기록해놓았다. 기록해놓고 매일 시간을 내서 잘못 외우는 부분을 살폈다. 그리고 다른 노트에 또 반복적으로 하신 말씀을 따로 적어 서로 대조하면서 기억했다. 예를 들어 “잃지 않는 자는 얻지 못한다”[1]는 여섯 번, “사람의 元神(왠선)은 불멸(不滅)한다고 한다.”[1]는 세 번 나타났다. 반복적으로 나타난 곳을 적어놓고 외우자 틀리게 외우는 곳이 갈수록 적어졌다.

잘못 기억해 자주 막히는 부분을 거의 다 외워냈을 때, 또 막히지 않았던 다른 부분에서 막히는 현상이 돌출해졌다. 즉 책을 읽을 때 틀리게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법을 외우다 생각나지 않아 막히는 부분이 있었다. 가끔 막히는 부분의 경우는 자주 막히는 부분보다 쉽게 바로잡을 수 있다. 그렇지만 가끔 이 부분이 막히지 않으면 또 다른 부분이 막히는 것이었다. 사실 여전히 확실히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가끔 막히는 부분을 바로잡는 과정 중에 전체 법에 대한 기억이 더욱 견고하게 됐다. 기억한 물질이 밀도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믿는다.

지금은 자주 막히는 곳이 극히 적지만 가끔 막히는 부분을 더하면 아직 100여 군데가 있다. 줄줄 외워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낙심하지 않고 막힘없이 줄줄 외워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법 중에서 깨달았다. 신은 확신한 길을 꼭 끝까지 갈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도 목표를 정했다. 그토록 좋고 위대한 법은 꼭 외워내야 하고 더욱 정확하게 외워내야 하고 각 층차에 있는 내가 다 외워낼 수 있게 하겠다고. 나는 아주 행복하게 견지해서 외워낼 것이다.

이상은 법을 배우고 법을 외운 개인적인 체득이고 지금 층차에서의 인식일 뿐이다. 깨달았어도 스스로도 완전히 해낼 수 없는 것이 많다. 심지어 초기 법공부 때 깨달은 것도 있는데 지금까지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깨달은 그 법의 요구대로 할 수 없을 때가 많다.

체득을 쓰려고 할 때 이렇게 길게 쓸 생각이 없었는데 정리하다보니 이렇게 많아졌다. 법을 배우는 일이었고 수련생들과 교류하려고 생각하고 써낸 체득이다. 수련생들께서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의 시사: ‘홍음-동화(同化)’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스위스법회설법’
[4]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2-교란을 배제하자(排除干擾)’
[5]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논어(論語)’
[6]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법을 배우다(學法)’
[7]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싱가포르 법회 설법’
[8]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법 중에 용해되자(溶於法中)’

 

원문발표: 2018년 8월 1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8/14/37244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