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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 5.13] 대법과 인연을 맺은 투자 중개인

글/ 해외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법정에 서서 재판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계적으로 가장 강대한 인권침해 인물과 내가 힘을 겨룰 거라곤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지만 얼마 전 나는 중국공산당 정부를 고소했고 순간 법정에 서게 됐다.

나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실력이 탄탄한 부동산 거물이었고 나와 두 형은 어려서부터 금전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일요일마다 우리를 데리고 교회로 가셨지만 그건 다만 현지 사람들이 모두 다니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는 종교 신앙 혹은 정신 방면의 추구가 없었다. 고등학교 때 나는 레슬링 챔피언이었고 인기가 아주 많아 누구와도 모두 친구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가족의 투자업무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족들과 함께 일하면서 늘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그건 이것이 단순한 업무관계가 아니라 항상 인간관계와 관련됐기 때문이다. 나와 아버지 사이는 관계가 아주 긴장됐고 늘 다투었다. 그가 한 번도 통제권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나와 그의 충돌은 갈수록 빈번해졌다.

그 후 10년 동안, 나는 열심히 일해 돈을 아주 많이 벌었고 비싼 옷과 자동차를 추구하며 무절제한 생활을 했다. 휴고 보스 브랜드 정장과 한 벌에 500달러(한화 약 50만원)하는 베르사체 와이셔츠를 입었다. 자동차를 18대나 구매하고 여자 친구와 다른 사치품도 그만큼 많았다.

30대 초에 나는 자신의 생활과 재산에 대해 불만을 느끼기 시작했고 공허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저 막막하게 느껴지는 구멍을 메우고 싶었지만 금전, 미녀, 파티, 그 어떤 것도 뭔가를 잃은 것 같은 느낌을 없애주지는 못했다.

나의 불만으로 인해 가족들과의 관계는 갈수록 긴장해졌다. 걸핏하면 형들과 싸웠고 아버지와는 일촉즉발의 지경이었다. 결국 나는 가족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1년간 휴가를 내기로 결심했다. 타지에 가 여행하면서 진정한 나 ‘자신’을 찾고 싶었다.

나는 이집트, 이스라엘, 마지막에 인도로 갔다. 인도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8개월 동안 진정한 ‘정신’을 찾아다녔다. 사실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나조차 몰랐다. 길에서 수백여 종의 정신 방면의 종파와 추종자들을 보았고 수많은 종파 수령을 만났으며 하나 또 하나의 사찰을 방문했다. 결국 나에게 돈만 있으면 누구든 나에게 답안을 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8개월 뒤, 나는 ‘오즈의 마법사’처럼 답안은 집에서 수천 마일 떨어진 타향이 아니라 우리 집 뒷마당에 있을 것 같아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후 나는 자신이 갖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새로운 인식과 고마움을 갖게 됐다. 나는 나의 집, 자동차, 자유를 다시 좋아하게 됐고 예전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다양한 사치품들을 사랑했다. 이러한 마음은 약 3개월간 지속됐고 그 후에는 또 예전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는 계속해 일했고 다시 갈수록 강해졌다.

약 1년 뒤, 어머니는 파룬궁을 접하게 되셨다. 어머니는 수년 간 1개월마다 여러 정신적 종파를 연구하셨기에 파룬궁도 그 중 하나라고 나는 농담으로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생활 속에서 어머니의 크나큰 변화를 보았고 어머니가 갈수록 즐겁고 만족하시는 것을 느꼈다.

나는 파룬궁을 주목하기 시작했고 우선 마음에 다가온 것은 파룬궁이 비용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인도에서 정신적 해탈법을 찾으면서 진정으로 순정한 가르침은 반드시 비용을 받지 않는다는 점을 깊이 느꼈다. 파룬궁의 이러한 원칙에 나는 존경하고 주목하게 됐다. 그 후 어머니와 함께 연공을 했는데 파룬궁 공법이 간단하지만 에너지가 아주 크다는 것을 느꼈다. 이전에 나의 생활은 완전히 스트레스와 긴장에 빠지고, 무엇이든 전부 생각했기에 자신의 생각을 걷잡을 수 없었다. 시시각각 걱정하면서 오늘은 뭘 해야 하고 내일은 뭘 해야 할지 고민했다.

연공을 마친 후, 나는 놀랍게도 자신의 생각과 기분에 좌우지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대뇌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날 저녁 나는 갓난아기처럼 편히 잤다.

그 후 몇 달 동안 나는 무엇이 진정한 자비와 연민임을 깨닫게 됐고 자신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자기애에 빠졌고 무슨 일이든 모두 ‘나’를 앞세워 늘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생각했다. 다른 사람을 자신의 욕망의 대상으로 여겼고 우선 남을 위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

어느 날, 나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고 더 이상 긴장함이 없이 평온했고 만족감을 느꼈다. 더 이상 무엇을 추구하지 않았고 직업에서 도덕성도 어느 정도 개선됐으며 심지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와의 갈등을 해결하기까지 했다. 또한 파룬궁 연공장에서 아내도 만났다.

파룬궁을 통해 나는 좋은 사람의 진정한 의의를 보았고 생명과 우주에 관한 모든 문제의 해답을 찾았다. 파룬궁은 나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었지만 한 번도 나에게서 그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았다.

1999년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하자 나는 너무 당혹스러웠다. ‘이렇게 좋은 공법을 중국에서는 왜 탄압하는지?’ 그 날 오후 나는 폴란드 파룬궁 수련생을 만났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공산주의 국가에서 자라지 않았지만 저는 그런 공산당이 있는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이게 바로 공산주의 독재자의 만행입니다.”

깊이 알아갈수록 나는 그녀 말이 모두 옳다는 것을 알게 됐다. 공산당 정권은 무신론을 선전했고, 중국 공산당정권은 모든 정신적 신앙을 통제하거나 탄압했다. 파룬궁 역시 그들이 탄압하려는 목표였다.

죽음과 무서운 고문 사례는 날마다 되풀이됐고 수만 명이 잔인하게 살해당한 후 장기를 생체적출 당했다. 이러한 죄악은 수많은 독립적인 조사보고서를 통해 실증됐다. 또한 중국공산당은 거액의 자금을 들여 전 세계를 향해 파룬궁을 비방하고 모독했다.

나는 대도시 교외에서 자란 백인 남성으로서 차별대우가 무엇인지, 박해가 무엇인지, 선전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새 인권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됐다.

어느 날 아침,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중국 부총영사가 현지 신문에서 나를 비방했는데 그건 내가 파룬궁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박해를 주목해달라는 문장 한 편을 썼기 때문이다. 한 달 뒤 나는 그의 비방에 관해 고소장을 제출했다. 그가 외교 면제 특권이 있기에 누구도 내가 승소할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듬해, 나는 법정에 앉아 재판 결과를 기다렸다. 판사는 조사 결과를 대중 앞에서 낭독한 후 내가 승소했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때 나는 참지 못하고 흐느꼈고 이건 내 일생에서 자신이 가장 강대하다고 느낀 순간 중 하나였다. 이 소송은 전 세계 각지에 선례를 남겼다.

19년이 지났다. 우리는 여전히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눠주고 사람들에게 중국공산당의 만행을 주목해달라고 일깨워준다. 우리의 인력과 물력은 여전히 제한돼 있지만 19년 후 오늘날, 가장 강대한 인권 침해자도 마음에 선량함과 세상의 보편적인 정의를 간직한 수백만 사람들을 침묵하게 하지 못한다.

올해 나는 쉰 살이다. 진정한 답안이 바로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파룬궁은 나에게 상상했던 가장 심오한 정신적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물론, 나는 여전히 좋은 차, 좋은 옷을 좋아하며 사업에 관해 협의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생활 속에서 제1위는 이미 확실히 변화되었다. 나의 평온은 더 이상 외부 사물에 달린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남을 대하고 자신을 대하는가에 달렸다. 여전히 노력해 자신을 제고하고 있지만 마침내 기분 좋게 이 과정을 즐길 수 있게 됐다.

(밍후이왕 2018년 ‘세계 파룬따파의 날 경축’ 원고 모집)

 

원문발표: 2018년 5월 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5/9/36503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