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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가 존재하는 원인을 옅게 깨닫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2017년부터 밍후이왕에서 발표한 전국 각지에서 대법제자에 대한 납치와 불법 판결 사건 보도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우리 지역에서는 아직도 몇몇 수련생들이 짧은 시간 내에 병업 형식으로 박해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정법이 거의 종결하려는 오늘날, 사악한 요소가 아주 적어진 오늘날 왜 갑자기 이런 박해 형세가 나타났을까? 여기서 우리가 현 정권에 대한 의지와 원만 시간에 대한 집착 등 사람 마음을 제외하고 나는 다른 한 각도에서 자신의 인식을 말하려 한다.

나는 우리가 박해에 대해 단지 표면적이고 국면적인 인식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다. 박해가 존재하는 원인, 혹은 심층 원인에 대해 법에서 인식하지 못했는데, 말을 바꿔서 하면, 박해가 존재하는 이 방면 법리에 대해 아주 좋은 깨달음이 없어서 사악이 끊임없이 틈을 탄다고 생각한다.

나는 수련생이 병업 박해에 대해 이 몇 해 동안 거의 한 가지 형식이 생긴 것을 보았다. 수련생에게 병업이 나타나기만 하면 다른 수련생들은 병업 중에 있는 수련생과 함께 법공부하고 발정념하고 안으로 찾아서 결국에는 수련생이 걸어나온다. 우리는 요구의 표준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동안 시간이 지나서 사악은 또 틈을 타고 다른 수련생을 박해하고 우리는 여전히 이런 형식을 중복해서 박해를 부정한다.(물론 안을 향해 찾아낸 집착심은 다름) 이렇게 끊임없이 박해에 처해있는 것이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사실 이것은 사람의 일면이 법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빚어진 것이며”[1] 이런 상태에 처한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이런 한 단락 설법을 하셨다. “우리 현대물리학은 물질의 미립자를 연구함에 다만 미립자 하나를 연구하는데, 그것을 분석하고 분열시켜, 원자핵이 분열한 후 다시 그것의 핵분열 후의 성분을 연구한다. 만약 이런 계측기가 있어 전개(展開)할 수 있고, 이 한 층차 중의 그것을 볼 때에, 모든 원자 성분 또는 분자 성분이 이 한층 중에서 전반적으로 체현되는,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다면 당신은 곧 이 공간을 돌파했고, 다른 공간이 존재하는 진상(眞相)을 본 것이다.”[2] 사부님의 이 단락 설법에서 우리는 이런 ‘미시적’인 국부적으로 박해를 부정하는 표면 인식에서 뛰쳐나오고 심층에서 박해가 존재하는 근본 원인을 찾아서 법에서 바로 잡아야 비로소 진정으로 박해를 해체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구세력은 왜 감히 대법제자를 박해하는가, 사부님께서는 제자에게 알려주셨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정황이 있다. 하나는, 과거에 구세력이 여기건대 대법제자 중에서 일종의 사상(思想)이 생겼는데, 일단 대법을 수련하면 바로 보험에 든 듯이 아무것도 두렵지 않고, 죽지도 않을 것이며, 병에도 걸리지 않을 것이고, 이렇게도 할 수 없으며 저렇게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복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음이 일기만 하면 곧 번거로워지는데, 구세력 그것들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하려하므로, 자각하지 못하고 그것들의 배치를 인정하면 그것들은 곧 당신을 상관할 구실을 가지게 되어 당신에게 여러 가지 위험을 만들어 낼 수 있다.”[3] 사부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구세력 그것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제자들이여, 여러분이 그것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묵인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3]

사부님의 설법에서 나는 박해가 존재하는 세 가지 방면의 원인을 인식하게 됐다.

1. 대법을 수련하면 보험에 들었다는 사람 마음

나는 자신에게 이런 마음이 없다고 여겼는데 사실 아니었다. 단지 은밀하게 깊이 숨어 있어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것이다. 자신은 최근 한동안 아주 게을러서 세 가지 일을 보장하기 매우 어려웠다. 나는 늘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늘 일종의 무형의 힘이 자신을 억제하고 있음을 느꼈다. 벗어날 길이 없어서 무척 고뇌했다. 가끔 스스로 자신을 위안했다. ‘7.20도 정정당당하게 걸어왔고 장쩌민 고소에서도 누락되지 않았으며 세 가지 일을 이전에 아주 잘했는데 단지 최근 한동안 조금 게을렀을 뿐이다. 무슨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런 법에서 이탈한 인식도 이미 무척 위험하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고 정법 수련에 대해 근본적인 이해가 없었다. 수련이 잘 된 그 부분은 이미 격리됐고 남은 이 부분은 아직 잘 닦지 못했기에 계속 잘 닦아야 한다. 자신의 원만에 대해 무슨 문제가 없다고 느껴 시름을 놓았고 자신이 보험에 들었다고 느꼈다! 이는 사람의 인식이고 근원 깊은 곳에는 중생의 생사를 고려하지 않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인식이었다.

2. 자신도 모르게 구세력을 승인

우리는 늘 구세력을 부정한다고 말하고 구세력의 일체 배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이는 입으로만 말해서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법에서 깊이 깨닫고 실질적으로 수련해야 비로소 해낼 수 있다. 가끔 우리가 입으로 구세력을 승인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언행들은 모두 그것들의 사유에 따라 걸어가고 있는데 이런 정황은 무척 보편적이다.

한 수련생이 나에게 이런 일을 말했다. 하루는 그녀가 갑자기 밍후이왕에 접속할 수 없었고 그녀는 ‘이것이 구세력의 교란이고 너 구세력을 승인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발정념을 시작했지만 아주 오랫동안 발정념을 해도 접속할 수 없었다. 그녀는 통신사에 전화를 걸어서 알아보니 요금 미납이었다.

사당은 19대 회의를 열면서 아주 경계가 삼엄하게 만들었다. 하루는 베란다에서 내가 내다보니 경찰차 한 대가 아파트 아래 길가에 멈춘 것을 보았다. 경찰 한 명이 우리 아파트 뒷문으로 걸어 들어왔다. 나는 즉시 방문을 잘 닫고 긴장해서 그 경찰을 주시했다. 결과 그 경찰은 슈퍼에 들어가서 볼 일을 보고 차를 몰고 떠났다.

들어보면 농담 같지만 여기서 일종 착오적인 사유방식이 반영되어 나왔다. 문제가 나타나면 첫 일념이 생각하는 것이 구세력이고 박해다. 수련을 생각하고 대법을 생각하며 중생구도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아주 많은 시기에 우리는 모두 이렇게 사유하고 있다. 만약 문제가 나타나면 우리의 첫 일념은 구세력의 박해이고 그렇다면 이 자체가 바로 구세력에 대한 일종 승인이다. 이 전제 하에서 안으로 찾고 박해를 부정하는 등 일체 행위는 모두 박해를 승인하는 중에서 반박해하는 것이고 대법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사부님께서 이런 한 단락 설법을 하셨다. “수련 중에서 마난(魔難)에 부딪힐 때 자신을 닦아야 하고 자신을 보아야 하는데, 이는 구세력이 배치한 마난과 그것들이 배치한 마난 속에서 어떻게 잘할 것인가 하는 것을 승인하는 것이 아니며, 이런 것이 아니다.”[4] 이전에 나는 사부님의 이 한 단락 설법에 대해 계속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에야 비로소 한 점의 깨달음이 있었다. 사부님께서 대법제자에게 배치한 정법 수련의 길은 바로 자신을 잘 닦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다. 문제에 부딪히면 우리의 첫 일념은 자신의 수련을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법에 부합되지 않는 곳을 찾아야 하고 진선인(眞善忍)과 뒤틀어진 곳을 찾아야 하며 법 속에서 바로 잡아야한다. 관련된 중생들을 구도해야 한다. 첫 일념이 ‘구세력이 나의 무슨 틈을 탔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무슨 구세력을 고려하지 않아야 하고 이는 무형 중에서 구세력을 부정하고 제거하는 것이다.

문제에 부딪치면 우리는 바로 사부님을 단호히 믿고 대법을 단호히 믿어야 한다. 바로 자신을 순정하게 잘 수련해 중생을 구도해야 하는데 이렇게 해야 우리는 우리의 사유방식을 찾을 수 있고 우리는 바로 이러한 생명이다.

개인 제고에 대한 소원이 중생구도와 법 실증을 초월하면 어떤 문제가 나타나든 먼저 생각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제고이고 절대로 이 제고의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인식은 바로 사(私)를 위한 것이고 나를 위한 것이거나 혹은 개인 수련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안으로 찾고 자신을 닦는 목적과 기점은 바로 대법에 동화하기 위함이고 중생 구도를 더욱 잘하기 위함이며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잘 원융하기 위함이다.

3. 구세력의 배치를 묵인

구세력의 배치를 묵인하는 현상도 무척 보편적이었다. 가끔은 대법에 따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뻔히 알지만 사람 마음에 이끌려서 구세력의 배치에 따라 걸어간다. 우리의 모든 법에 부합되지 않는 언행들은 모두 구세력의 배치를 묵인하는 것이다.

왜 대법의 요구에 따라서 행하지 못하는가. 왜냐하면 우리의 사람 마음이 너무나 많아서 실질 수련이 부족하고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 법공부에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법을 마음속으로 배우지 못했고 법에 진정으로 동화하지 못했으며 사람의 의지력에 의지해 어찌 구세력이 조종하고 있는 집착심을 막을 수 있겠는가?

일부 수련생은 자신의 문제를 보았을 때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 안으로 찾을 줄 모르고 수련할 줄 모르니 아주 걱정됩니다!” 사실 바로 법을 잘 배우지 못했고 법을 얻지 못한 것이다.

한 수련생은 이런 체험을 말했다. 이전에 그녀는 가족수련생과 늘 모순이 있었고 늘 상대방의 부족한 점을 보고 안으로 찾지 않았다. 이후에 그녀는 법을 외우기 시작했고 법을 외우면서 법리가 끊임없이 펼쳐졌으며 그녀는 수련에서 자신을 찾아야 함을 알게 됐다. 남들이 자신의 앞에서 표현하는 것은 모두 자신이 닦아야 할 부분이었다. 이후 가정환경이 좋게 변했다.

나는 이에 대해 깊은 체험이 있다. 2003년 노동교양소에서 집으로 돌아온 후 회사에 의해 불법 퇴사를 당했고 타지에서 일자리 하나를 찾았다. 새로운 곳에 갓 도착해 수련생과 연락이 닿지 않았고 혼자서 밍후이왕에 접속하지 못했는데, 손에는 ‘전법륜’ 한 권과 사부님의 경문 3편이 있었다. 그 시기에 나는 정상적인 업무 이외에 대량의 시간을 법공부를 했고 이후에 법을 외우기 시작했다. 내가 각종 어려움을 돌파하고 법을 외워나갈 때 대법의 법리가 끊임없이 펼쳐졌고 사부님과 갈수록 가까워짐을 느꼈다. 사부님을 생각하기만 하면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그 시기에 어떻게 안으로 찾는지 몰랐지만 문제에 부딪혀서 머리에서 속인의 생각이 나타나면 대응되는 한 단락 설법이 머릿속에서 나타났다. 나로 하여금 그 속인의 인식을 똑똑히 보게 하여 나는 그 단락 법에 따라 행할 수 있었다. 자신의 제고가 무척 빠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 시기에 앉기만 하면 조용해졌고 어떠한 잡념도 없었으며 신체의 존재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자신이 어떻게 노력해서 느끼려고 해도 신체가 없었다. 속인의 업무를 처리하고 기타 일부 일들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대법 법리로 속인의 그 한 층의 이치에 따라 처리할 수 있었고 아주 자유로웠으며 일종의 ‘여의’의 상태에 처해있었다. 매일 마음속으로 사부님을 생각하는 것 외에 대법을 담고 남은 것은 바로 즐거움 뿐이었다!

이후에 구세력은 여러 차례 악인을 조종해 나를 박해하려고 했지만 모두 달성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법 속에서 사부님께서 박해를 인정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고 구세력은 대법제자를 박해하지 못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당시 구세력이 매번 나에게 배치한 박해의 전반 사유 과정을 나는 단번에 보아냈고 그것의 사유에 빠져서 인식하지 않았다. 진짜로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과 같았다. “사실 당신들이 알다시피 석가모니 부처이든 다른 신불(神佛)이든 그들은 소나 말의 사상마저 알 뿐만 아니라, 더욱 낮은 생명의 사상도 알며 일체를 다 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속에 들어가지는 않고 무엇이든 알 뿐이며, 단지 이에 불과하다.”[5] 그 시기에 구세력이 바로 내 앞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데 지혜가 무척 제한됐음을 보았다. 그것이 어떻게 표현하더라도 나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이 전혀 대법제자를 박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자신의 집착과 법에 부합하지 않는 곳을 찾았고 법에서 바로 잡고 다시 발정념으로 제거했다. 이른바 배치는 무형 중에서 해체됐고 이러한 일들은 여러 차례 있었다.

나는 지금 인식했는데 현재 대법제자 속에서 나타나는 일체 문제의 가장 근본 원인은 바로 우리 법공부에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법을 잘 배우면 일체 문제의 답안은 모두 대법 속에 있다. ‘대법은 창세주의 지혜’[6]인데 우리의 정법 수련에서 부딪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겠는가?

그 외에 나는 또 법공부에 문제가 존재하는 부분은, 우리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배치해주신 정법 수련에서 왜 제자에게 반드시 법공부를 해야 한다고 요구하시는지 그 의미를 이해함에 있어 문제가 존재한다고 본다. 법공부의 중요성을 진정으로 인식하지 못했고 법공부가 우리의 이러한 전대미문의 새로운 정법수련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일부 수련생은 법공부에 대한 인식이 일종 불교 중에서 경서를 읽는 인식에 빠져있다. 매일 읽고서 임무를 완성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의 법공부 상태를 볼 수 있는데 우리가 지금 ‘전법륜’을 보는 것이 반 년 전, 혹은 일 년 전과 같고 새로운 인식이 없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러하다면 우리가 이 한 단락 시간에 전혀 법에서 제고하지 못했다는 것을 설명한다. 단지 일하는 데에 멈춰있는데 이는 큰 문제가 아닌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전법륜(轉法輪)』을 한 번 읽을 때마다 좀 명백해졌다면 바로 제고한 것이며, 당신이 한 번 보고 나서 혹시 단 한 가지 문제라도 명백해졌다면, 그 역시 진정으로 제고한 것이다.”[7] 우리가 책을 본 후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 우리가 제고한 것인가? 나는 지금에야 비로소 사부님께서 왜 경문 ‘대법제자는 반드시 법공부해야 한다’를 발표하셨는지 이해했다. 우리가 진짜로 법공부 함에 있어 큰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상은 개인 현 단계의 한 점의 인식이고 법에 있지 않는 부분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시정해주고 원융, 보충해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도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2003년 정월 대보름 설법’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4-2004년 시카고법회 설법’
[5]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2-2003년 캐나다 벤쿠버 법회 설법’
[6]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논어’[7]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법을 배우다’

 

원문발표: 2018년 1월 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1/3/35913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