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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수련으로 자신을 닦아 온 가족이 수혜를 입다

글/ 칭춘

[밍후이왕] 나는 올해 49살이다. 아가씨 때의 꿈은 현모양처였고 부부가 서로 존중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었는데 결혼 후의 나의 꿈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나는 남편을 만난 지 20일 만에 결혼했다. 지금 젊은이들이 말하는 ‘초고속 결혼’이었다. 시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연로한 시아버지만 계셔 경제조건이 좋지 않았다. 나는 내가 온화하고 다른 사람을 잘 이해하는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부부가 서로 사랑하면서 생활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그때 나는 왜 흐리멍덩하게 초고속 결혼을 했는지 모른다. 아마도 운명일 것이다. 시삼촌이 남편에게 일자리를 소개 해주어 결혼 후 3일이 지나 나는 남편을 따라 타향으로 갔다.

고향과 부모 형제를 떠난 나에게 남편은 유일하게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남편이 나를 줄곧 소중히 여기고 아낄 줄 알았는데 좋은 날은 길지 않았다. 남편은 성격이 급하고 사나웠으며 자아 중심적이고 남자우월주의가 심했다. 생활 하면서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모두 남편이 결정했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의견이나 생각이 있으면 남편은 야단치면서 나와 몇 시간씩이나 싸웠다. 이웃이 알면 체면을 잃을까봐 두려워 나는 가급적 남편과 다투지 않고 울분을 참았다. 하지만 남편은 다투다 지쳐야 그만 두었다.

남편은 술 마시길 좋아해 퇴근 후 매일 몇 컵씩 마시곤 했는데 마시다보면 기분이 나빠져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오늘은 요리가 짜다느니 다음날은 맵다느니 그 다음날은 음식이 부족하다느니 하며 화를 냈다. 직장에서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돌아와 나에게 화풀이를 했다. 화를 낼 때면 흉악한 눈빛을 드러냈고 심지어 밥상을 뒤집었다. 밤마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오면 2시간 동안이나 한 얘기를 또 하며 계속 되풀이 했다. 내가 말을 하면 대든다고 욕했고 말을 하지 않으면 내가 그를 무시 한다고 욕했다. 나는 온순하게 앉아 듣기만 해야 했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우리는 이틀에 한 번은 티격태격했고, 사흘에 한 번은 크게 다투었다. 남편이 동료와 술 마신다는 말만 들어도 나는 겁이나 가슴이 두근거렸고 다리에 힘이 빠졌다. 나는 거의 매일 고통 속에서 살았다. 특히 내가 열이 38도 오르고 머리가 어지러워 서있지도 못했는데 남편은 나를 돌보기는커녕 큰 소리로 나를 훈계하여 나는 아픈 중에도 남편에게 밥을 해주어야 했다. 솔직히 나는 남편이 나를 돌봐주지 않더라도 이번만은 아무 말 안하고 누워 있게만 해도 나는 아주 감사했을 것이다.

마음속의 억압감, 긴장, 공포, 그런 고통은 형용할 수 없다. 나는 이런 일을 시댁식구에게 말하려 해도 그들이 나를 걱정하고 근심할까봐 말을 못 했으며, 또 주위 사람들에게는 체면 때문에 말 할 수 없었다. 도저히 참지 못할 때면 남편 삼촌 집에 가 하소연했다. 삼촌 일가는 모두 남편이 너무 했다며 나의 역성을 들면서 남편을 한바탕 훈계했고 며칠 나아지는 듯싶지만 좀 지나면 다시 화를 냈다.

차츰 아이가 자라 세상 물정을 알게 됐다. 아버지의 불같은 성격에 아이는 과묵해졌다. 남편은 말 트집을 잡아 끝없이 잔소리를 했기에 남편과 말할 때 조심해야 했다. 아들과 내가 하는 말에 별다른 뜻이 없는데도 남편은 다른 뜻으로 이해하고 좋아하지 않았다. 시간이 길어지자 남편이 말을 하면 우리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집 분위기가 얼마나 답답한지를 생각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아이가 13살 되던 해 우수한 성적으로 명문중학교에 합격되어 집을 떠나 학교 기숙사에 살게 됐다. 주말에 내가 정거장에 아들 데리러 가면 아이는 차에서 내려 반가워하며 나에게 말했다. “어머니, 저 때문에 근심하지 마세요. 난 학교에서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집 생각이 전혀 나지 않습니다.” 후에 아들은 집이 너무 답답하다면서 집에 오기 싫다고 말했다. 솔직히 나도 이런 억압에 냉담해졌으며 얼굴에는 오랫동안 웃음기가 없어 졌고 무표정했다. 내 마음 속은 원망, 불평이 가득하고 억울했으며 생활에 전혀 희망이 없어 늘 아이가 크면 죽거나 출가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다 1998년 친척이 파룬궁을 연마하여 병이 나았다고 나에게 파룬궁을 수련하라고 알려주었다. 이 공이 아주 좋다면서 부처 수련하는 수련법이라고 알려주었다. 평소 신화 이야기를 좋아했던 나는 부처 수련이라는 말에 흥취를 가졌다. 나는 친척에게서 ‘전법륜’ 한권을 빌려 집에 돌아와 보았다. 첫 페이지를 펼쳐 보았을 때 나의 마음이 사로잡혔다. 나의 일념이 바로 이 책은 어찌 이렇게 좋을까 생각했다. 나는 목마른 사람이 물마시듯 이틀 사이에 다 보았다. 깊은 밤 나는 베개수건을 적셨다. 이 책이 너무 좋은데 왜 이제야 보았을까? 나는 금후 인생의 고달픔에서 해탈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친척을 만난 후 나는 기뻐하며 그녀에게 난 파룬궁을 수련하겠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이렇게 즐거워 본 적이 없었다.

파룬궁 서적을 깊이 배워감에 따라 나는 남편을 이해했고 포용했다. 한 번은 남편이 또 동료와 술 마시러 갔다가 늦게야 집에 돌아왔다. 집에 들어섰을 때 똑바로 서있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누워 괴로워서 소리 지르고 토하고 때때로 나에게 두어마디 욕하기도 했다.

나는 아주 냉정하게 남편에게 화를 내지 않고 묵묵히 작은 물통, 타월, 휴지를 들고 남편이 토한 더러운 것을 치웠다. 온 방에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런 냄새를 맡을 때마다 나는 토했는데 토하면서도 남편을 돌봐주었다. 이전 같으면 겉으론 참았지만 울화통이 터졌을 것이다. 나는 힘주어 남편을 끌어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고 꿀물을 타주었다.

침대에 누워 남편은 눈을 감고 이쪽저쪽에 토해 댔다. 나는 머리맡에 앉아 타월, 휴지를 들고 끊임없이 닦았다. 밤 12시 이후 남편은 조용해졌다. 이튿날 나는 위에 좋은 좁쌀죽, 국수를 끓여주고 여러 방면에서 남편을 돌봐주었고 남편 입장에서 생각했다. 억울하지도 않았고 원망하지도 않았다.

사실 남편도 살기가 쉽지 않다. 남편 혼자 월급으로 세 식구를 먹여 살려야 했다. 지금 직장에는 서로 경쟁이 심하고 일도 많으며 압력도 크기에 자연히 짜증났을 것이다. 남편은 직장에서 인정하는 성실한 사람이고 일을 근면하게 했다. 대인관계도 좋고 다른 사람과 다투지 않았지만 억울한 일이 있으면 집에 와 나에게 화를 내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차츰 남편도 속마음을 나에게 털어놓았고 나는 내가 이해한 파룬따파의 법리로 남편을 일깨워주면서 옛사람의 전통 미덕을 말했다.

차츰 남편도 변했다. 더는 취하도록 마시지 않았고 밥 먹을 때 트집 잡지 않았고 아들과도 마음을 열고 말했다. 부족한 점을 지적해주면 받아들이고 묵묵히 고쳤다. 퇴근하고 방에 들어서면 나의 이름을 부르면서 뭘 하냐고 물었다. 또 유머로 나를 웃기기도 했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늙으니깐 낭만적인 것을 배웠네요.” 남편은 말했다. “젊었을 때 철이 없어 당신을 화나게 했어. 난 노년에 당신에게 준 상처를 갚을 거요.”

설에 아들이 집에 왔다. 우리 가족은 밥상에서 화목하게 밥을 먹으면서 말했다. 이전에 나는 다른 사람의 가정을 부러워했는데 지금은 다른 사람이 우리 가정을 부러워하고 있다. 남편의 사촌여동생이 나에게 말했다. “언니, 지금은 웃길 좋아하네요. 예전보다 젊어지고 예뻐졌습니다. 사람들은 다 언니 남편이 언니와 같은 현처양모를 얻어 운이 좋다고 합니다. 언니는 오빠를 그렇게 잘 대하고 아들도 철이 들어 근심할 필요 없으며 또한 오빠 성격도 변했습니다. 부럽습니다.” 나는 말했다. “모두 파룬따파가 나에게 준 복 덕분입니다.” “한 사람이 연공하면 온 식구가 혜택을 본다.”[1]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오스트레일리아법회설법’

 

원문위치: 2017년 12월 2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12/26/35830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