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편 대법 수호
[명혜망](전편에 이어) 사부님께서는 《홍음》〈난중불란(難中不亂)〉이라는 시에서 “정법 전(傳)함은 어렵고도 어렵구나 만마(萬魔)가 가로막나니 험난 속에 험난이 있구나”라고 쓰셨다.
대법이 창춘에서 전파되기 시작할 때부터 여러 방면의 방해에 부딪혔다. 사부님께서는 온갖 어려움을 물리치셨고 수련자들도 굳건히 대법을 수호했다. 사부님께서 20년간 법을 전하시는 과정에서 창춘 대법제자들은 시종일관 자발적으로 대법을 수호했다.
1. 파룬궁 비방 사건
1994년, 창춘의 몇몇 무뢰배들이 파룬궁을 이용해 돈을 벌려고 날조와 모함, 유언비어 등 비열한 수법으로 사부님과 대법을 공격하는 ‘자료’를 만들었다. 이런 터무니없는 행위에 직면해 창춘의 초기 노수련자들은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분별했으며, 이성적으로 방해와 파괴를 배제하고 수련자들의 수련 환경을 안정시켰다. 이는 후기 수련자들이 대법에 대한 여러 방면의 방해와 파괴를 제거하는 데 좋은 참고가 됐다.
노수련자들은 이들의 날조와 모함 내용에 대해 직접 기공연구회에 상황을 반영하고 사실을 하나하나 밝혔으며, ‘창춘 극소수 사람들의 음모 폭로’라는 서면 자료를 만들었다. 창춘시와 지린성 두 급의 기공협회는 심도 있는 조사와 여러 의견을 반복해서 청취한 후, 최종적으로 파룬궁을 단호히 지지하고 사건 주동자들의 잘못을 비판했다. 당시 모든 부서는 이들의 행위를 반대했다.
노수련자들은 내막을 완전히 모르는 수련자들을 대법으로 가늠하도록 이끌었다. 사부님께서는 설법에서 수련자를 데리고 절에 가서 귀의하게 하고, 기공치료반을 열고, 수시로 손을 뻗어 남의 병을 치료하고, 기공사가 되어 유명해지고 돈을 벌려는 행위를 엄중히 비판하셨는데, 이런 행위들은 대법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는다.
노수련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시 파룬궁 초기에는 책을 출판할 자금이 없어서 겨우 4만 위안(약 8백만 원)을 빌려 책을 인쇄했고, 첫 번째 발행분이 팔린 후에야 대출금을 갚고 두 번째 발행분을 인쇄할 수 있었다. 몇몇 사람이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 자신들을 따르게 하려고 수천 권의 책을 마음대로 남에게 주어버려서 2만여 위안의 책값이 없어졌다. 당시 사부님께서는 그들을 엄중히 비판하시며 “이 돈을 감히 건드리다니!”라고 하셨다.”
노수련자들은 또 회상하길, 이 몇 사람이 가장 배은망덕했다고 했다. 그들은 가장 먼저 파룬궁을 접하고 사부님을 알게 된 사람들이었다. 승리공원에서 기공을 연마할 때도 사부님께서 그들의 병을 치료해주셨는데, 당시 그들은 무릎 꿇고 절을 하며 감사를 표했다! 사부님께서는 그들을 파룬궁 보도소 책임자로 삼으시고 특별히 이끌어주셨는데, 그들은 오히려 파룬궁을 이용해 명예와 재물을 추구하다가 결국 대법을 파괴하고 자신도 망쳤다.
그때부터 수련자들은 초기의 감정적이고 표면적인 인식에서 점차 대법에 대한 이성적 인식으로 승화됐고, 대법의 진정한 함의를 더욱 이해하게 됐으며, 대법 수호와 대법 실증은 이미 자각적인 의식과 행동이 됐다.
2. ‘광명일보’ 사건
당시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를 주관하던 뤄간(羅干)과 중선부(중앙선전부)의 딩관건(丁關根) 등은 개인적인 정치 자본을 챙기기 위해 파룬궁을 겨냥한 사건을 사주하고 조작했다. 1996년 6월 ‘광명일보’는 ‘사이비과학 반대에 경종을 울려야 한다’라는 평론 기사에서 당시 베이징에서 ‘베스트셀러’ 1위였던 《전법륜(轉法輪)》을 이른바 ‘사이비과학’이라며 비판했다. 1996년 7월 24일, 중선부의 지시로 신문출판서는 전국 각 성시 신문출판국에 내부 문건을 하달해 ‘미신 선전’을 이유로 《전법륜》, 《중국 파룬궁》 등 대법 서적의 출판과 발행을 금지했다.
이 기사를 본 후, 대부분 수련자들은 반드시 나서서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량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대법이 자신의 심신에 가져다준 엄청난 혜택을 말하고, 파룬궁이 국가와 인민에게 좋은 고덕대법임을 실증하며, 파룬궁이 백 가지 이로움은 있어도 한 가지 해로움도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이 기사의 거짓말을 폭로했다.
당시 많은 수련자들이 막 대법 수련의 문에 들어섰는데 심신의 엄청난 변화로 기쁘고 감격스러웠다. 이런 상태가 매우 진실했기에 그들은 펜을 들어 자신의 최근 수련 체험을 썼다. 나이 든 수련자들은 대필을 구해서라도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꼭 말하려 했다. 연로한 수련자들의 신체 변화가 가장 두드러졌는데 이들의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정말 생동감 있고 평화롭고 선량한 말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울렸다. 또 어떤 수련자들은 직접 진리를 찾다가 대법을 얻게 된 사람들인데 역사, 종교, 철학, 현대과학 등의 각도에서 무엇이 진정한 과학인지를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며 기사의 터무니없음을 반박했다. 편지를 쓰는 과정에서 서로 조언하고 수정하고 읽어보면서 자연스레 대법 수련 심득교류회가 됐다.
이런 편지들은 ‘광명일보’, 신문출판서, 중선부 및 현지 언론매체, 국가체육위원회 등 각 부서에 발송됐고, 상당수 수련자들은 지린성, 창춘시 기공협회, 중국기공과학연구회에도 편지를 보냈는데, 그들은 편지를 받은 후 파룬궁에 관해 긍정적인 소개를 많이 했다. 많은 사람과 기관, 부서가 수련자들의 편지를 받고 대법을 긍정적으로 더욱 이해하게 됐고, 일부는 이를 계기로 대법 수련의 길에 들어섰다.
대법 서적의 발행이 금지되어 새로 법을 얻은 수련자들이 잠시 대법 서적을 구하기 어려웠을 때, 노수련자들은 책을 필사해서 제본한 후 신수련자들에게 보내주었다. 사부님께서는 대법서적 발행은 반드시 정규적인 사회 발행 경로를 통하도록 하셨으며, 관련 부서와 회사가 하게 하시고, 보도소는 돈을 만지지 말고 돈과 물건을 쌓아두지 말라고 하셨는데, 수련자들은 매우 어려운 시기에도 매우 바르게 걸었다.
3. TV 드라마 ‘선택’의 파문
1998년 말, 지린(吉林)TV는 17부작 TV드라마 ‘선택[抉擇]’을 방영했다. 이 작품은 랴오닝TV, 베이징영화제작소, 베이징 진잉마(金英馬) 유한책임회사가 공동 제작한 반부패 드라마였다. 드라마는 부패하고 타락하다가 결국 자살한 반면인물을 ‘파룬궁 제자’로 날조해 대법과 대법 수련자를 비방하고 왜곡했다. 드라마의 5, 9, 10, 17부에는 모두 파룬궁 관련 화면과 대사, 음악이 있었고, 줄거리와 화면이 매우 악의적이었다.
창춘 수련자들이 이 일을 듣고는 자발적으로 지린TV로 갔다. 저녁 7시 반 뉴스 종합방송 이후가 바로 이 연속극 방영 시간이었다. 절대로 대법을 비방하는 장면이 나오게 해서는 안 되고, 절대로 수많은 시청자가 기만당하고 상처받게 해서는 안 되며, TV방송국도 대법에 대해 죄를 짓게 해서는 안 됐다.
때마침 한겨울이었고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으며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수련자들은 직장에서 퇴근하자마자 곧장 TV방송국으로 왔는데 옷도 더 끼어입지 않았고 저녁도 먹지 않았다. 모두 TV방송국 앞 작은 광장에서 기다렸다. 몇 명의 수련자 대표가 건물 안에서 당직 책임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어떤 수련자는 ‘선택’ 소설책을 구해와서 원작에는 대법 비방 내용이 없음을 확인했다. 어떤 이는 전화로 이 드라마를 방영했던 베이징, 선양의 수련자들과 연락해 TV드라마 5, 9, 10, 17부에 대법을 비방하는 장면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어떤 수련자는 직접 자신이 아는 TV방송국 고위층 책임자를 찾아갔다. 더 많은 수련자들은 방송국 앞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바깥은 매우 추웠고 마음은 매우 급했으며 방영 시간은 점점 가까워졌다. 수련자들이 차례로 현관 로비로 들어가 협상 소식을 기다렸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들어와 로비를 꽉 채웠다. 안쪽에는 대형스크린이 있고 바깥쪽에는 유리문이 있어서 붐비면 스크린과 유리문을 망가뜨릴 수 있었다. 수련자들은 중요한 순간에 공공시설을 생각했다. 모두가 자발적으로 손을 잡고 가운데로 모여 스크린과 문을 위해 거리를 비워줬다. 이 모든 것을 당직 직원들과 문 지키는 경비가 지켜보았고, 그들이 뭐라고 할 것도, 조직할 것도, 저지할 것도 없었다.
안에서 수련자 대표들이 당직 책임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7시 반이 지나자 연속극 방영 시간이 체육 프로그램으로 변경됐다.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당직 책임자가 수련자 대표들을 배웅하며 눈물을 머금고 손을 잡았다. 수련자들은 말했다. “파룬궁수련자의 마음을 헤아려준 TV방송국 지도부에 감사드립니다.” 책임자는 말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TV방송국을 위해 책임져주시고 앞으로의 곤란을 면하게 해주셔서요.”
모두가 질서정연하게 문을 나섰고, TV방송국 정문 앞에 두 명의 수련자를 남겨두어 뒤에 오는 수련자들에게 일이 이미 해결됐음을 알리게 했다. 이후의 회차는 더 이상 방영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중공이 파룬궁 탄압 후 날조한 ‘지린TV 포위 사건’의 진상이다.
4. ‘4.25’ 청원
‘톈진 사건’과 ‘4.25’ 사건이 발생하기 전후, 창춘 대법제자들은 개인의 법에 대한 인식에 따라 스스로 어떻게 할지를 선택했다.
가장 먼저 소식을 들은 수련자들은 직접 톈진으로 가서 ‘톈진 사건’과 ‘4.25’ 당일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 청원의 전 과정을 겪었지만, 이런 수련자들은 창춘 대법제자들 중에서는 극소수였다. 더 많은 이들은 ‘4.25’ 전날이나 당일에 이 일을 알게 됐다.
당시 각지 연공자들에 대한 중공 당국의 다양한 수준의 괴롭힘을 자주 들었지만, 40여 명이 납치되고 더 많은 사람이 구타당했다는 것은 선량한 대법제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고, 수련자들을 구하는 일이 시급했다. 일부 수련자들은 택시를 타고 곧장 베이징으로 갔고, 비행기를 탄 이들도 있었으며, 20세도 안 된 한 젊은 제자는 자전거를 타고 베이징으로 갔는데, 창춘에서 베이징까지는 천 킬로미터의 거리였다.
‘4.25’ 당일, 창춘시에는 두 개의 대규모 법회가 있었다. 하나는 도시 동쪽에, 하나는 서쪽에 있었고 법회에 참가한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법회장에서 사람들은 ‘톈진 사건’과 베이징 청원 소식을 알게 됐다.
사람들이 베이징으로 출발한 것은 오후와 저녁이었다. 일부 수련자들은 공항에서 소형 비행기를 전세 내는 표를 예약했으나 떠날 시간이 되지 않았다. 기차로 간 이들은 선양에도 도착하지 못했을 때 당시 총리에 의해 사건이 원만히 처리됐다는 소식을 듣고 하차해서 돌아왔다. 수련자들이 대형버스와 승합차를 10여 대 빌렸는데 쓰핑시 우리포(五里坡)를 지나자마자 시장이 가로막아 돌려보냈고, 그날 밤 바로 경찰이 보도원 집으로 찾아갔다.
당시 톈진 수련자들이 곧바로 집으로 돌려보내졌으며 총리가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를 수용했다는 소식을 듣자, 앞으로 평화로운 수련 환경을 가질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해 수련자들은 모두 매우 기뻐했다.
‘4.25’ 사건 때 창춘에서 베이징에 간 대법제자가 몇 명이었는지는 통계할 수 없다. 당일의 기차표는 기차역 내부 직원을 통해 구매했는데, 한 번에 100장, 150장씩이었고, 한 객차, 한 객차가 모두 대법제자였다. 기차역 직원들도 “설날도 아니고 명절도 아니고 학생 방학 성수기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많지? 다들 베이징으로 가네”라고 했다. 심지어 공항 직원들도 이상하게 여겼는데, 베이징행 항공권이 갑자기 매우 빡빡해졌고 비행기를 전세 내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며칠 후 소식을 들은 외곽 수련자들도 계속해서 베이징으로 갔는데, ‘5·1’ 연휴까지 이어졌다.
사실, ‘4.25’ 이전에 뤄간, 허쭤슈(何祚庥) 일당의 날조는 이미 계속 확대되고 있었고, 이웃 성인 랴오닝에서는 수련자들의 새벽 연공을 여러 차례 방해하고 수련자들의 재물을 강탈해가는 등의 불법 행위가 발생했다. 창춘 시내의 연공장에도 감시하는 눈들이 많아졌고, 법공부 소모임에도 수련자가 아닌 낯선 얼굴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모두의 마음은 매우 평온했다. 사부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진선인(眞·善·忍)’을 언행의 준칙으로 삼으라고 가르치셨으니, 그래서 열린 마음으로 포용하며 수련하는 사람들 곁으로 온 인연 있는 이들이 보고 들을 수 있게 했다. 이들은 인생의 미혹에서 깨어난 사람들이며, 자신의 생명의 의미를 깨달은 각성자들이다. 이런 각성과 이성, 대선대인(大善大忍)의 정신은 우주 대법이 만들어낸 것이며, 이것이 국제사회가 ‘중국 청원 역사상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이성적이고 평화로우며, 가장 원만했던 청원’이라고 칭한, 중국과 해외를 놀라게 한 ‘4.25’ 평화 청원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총리가 데려간 베이징 중난하이에서 상황을 반영한 세 명의 파룬궁수련자 중 한 명인 스차이둥(石采東)은 96년부터 98년까지 창춘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할 때 대법 수련을 시작했고, 98년에 중국과학원 지구물리연구소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스차이둥은 말했다. “한 사람이 진정으로 진리를 알게 되어 옳고 그름,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되면, 그의 선택은 압력과 이익 때문에 바뀌어서는 안 된다. 사실 당초에는 무슨 선택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 그런 경지에서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게 되고, 청원하러 간 것은 자각적이고 자발적이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만약 나에게 다시 선택하라고 한다면, 진리가 비방을 받을 때 나는 여전히 나서서 진리를 수호하고, 모든 사람을 위해 좋은 사람이 될 권리를 쟁취할 것이다.” 이는 또한 창춘 파룬따파 제자들의 마음의 소리를 대변한 것이다.
‘4.25’ 이후, 리훙쯔 사부님께서는 1999년 6월 2일 ‘나의 약간의 소감’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셨는데, 글에서 말씀하셨다.
“나는 오로지 사람에게 선(善)을 향하도록 가르치는 동시에 무조건 사람들을 도와 질병을 제거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높은 사상 경지에 도달하게끔 하였다. 나는 어떠한 금전과 물질적인 보수도 받지 않았다. 사회에 대해, 국민에 대해 긍정적인 작용을 일으켰다. 보편적으로 사람의 마음이 선(善)을 향하고 도덕이 고상(高尙)해지게 했다. “
“사실 나는 거듭 사람들에게 인간이 되는 데에 真(쩐)ㆍ善(싼)ㆍ忍(런)을 준칙으로 해야 한다고 가르쳤는바, 자연히 나도 모범이 되어야 한다. 나 개인과 ‘法輪功(파룬궁)’ 제자가 까닭없는 비난과 불공정한 대우를 받을 때 모두 대선대인(大善大忍)의 흉금을 충분히 표현했으며, 정부에 충분한 시간을 주어 우리를 요해(了解)하도록 소리 없이 참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용인(容忍)은 절대로 나와 ‘法輪功(파룬궁)’ 수련생들이 그 무엇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다. 사람이 일단 진리와 생명 존재의 진정한 의의를 알았을 때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쳐도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4.25’라는 이 찬란한 한 페이지는 우주 정법사상, 인류 역사상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5. ‘7.20’ 정사대전(正邪大戰)의 서막이 오르다
1999년 7월 20일 아침, 창춘 보도소 소장들과 일부 연공장 보도원들이 공안에 납치됐다는 소식이 신속하게 전 시(市)와 성(省) 수련자들에게 전해졌다. 성위원회, 성 청원사무실 앞에서 파룬궁수련자들은 한 가지 기본적인 요구를 제기했다 “무조건 사람을 석방하라!”
7월 21일 아침, 날이 희미할 때 창춘은 성위원회를 중심으로 계엄령이 시작됐다. 고층 건물 위에서 내려다보니 완전 무장한 경찰들이 은밀하게 단일 대열로, 긴 검은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이 시내 중심지를 에워쌌다. 음기, 사기(邪氣), 섬뜩한 살기를 띠면서, 공포스러운 마수를 이 불법(佛法)이 처음 전해진 성지(聖地)를 향해 뻗쳤다. 대형버스들이 경찰에 의해 강제로 차에 태워진 수련자들을 링궁리(零公里) 경찰학교, 체육장과 몇 개 초등학교로 실어 날랐다.
7월 22일, 전날보다 더 많은 수련자들이 왔는데, 날이 희미하게 밝아올 때서야 보니 승리공원에서 인민광장에 이르는 인민대로 양쪽 인도에 사람들이 가득 앉아 있었고, 인민대로와 교차하는 시정부 옆의 베이안로와 충칭로에도 도처에 수련자들이 있어서 동서에서 남북까지 한눈에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인산인해를 이뤘지만 주변은 조용했다. 정오쯤 인민대로에 고압 살수차가 나타났고, 사람들은 사태가 악화되고 있음을 느꼈지만 여전히 조용히 앉아있었다. 공기 중에는 보기 드문 분위기가 감돌았다. 엄숙하고, 무거우며, 살기가 서려 있었다…
오후 3시, 뉴스 방송이 시작됐다. 상상할 수 없는 날조와 누명… 순간, ‘공포의 대왕’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50년간의 중공 악당 통치를 겪으면서 많은 수련자들은 알고 있었다. 정치적 단죄와 날조는 베이징에서 왔으니 창춘에서 고집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오후 4시 이후, 더 많은 수련자들이 이곳을 떠났는데, 어떤 이는 직접 기차역으로 갔고, 어떤 이는 집에 가서 돈을 가져온 뒤 이때부터 베이징으로 가는 청원의 길, 대법을 수호하는 길에 올랐다.
일찍이 ‘4.25’ 당일 오전, 한 창춘 수련자는 이런 광경을 목격했다. 우주의 호법신(護法神)들이 하늘에서 악마와 아찔한 정사대전을 벌이고 있었다. 대법제자들은 사부님께 “우주의 진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겠습니다!”라고 약속드렸다. 이는 한 생명의 오랜 약속이며, 사부님께 지키겠다고 한 서약이었다.

누구와 상의할 필요도 없고, 누가 조직할 필요도 없었으며, 이는 완전히 한 생명 자체의 결정과 선택이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파룬따파는 정법입니다!” “파룬따파는 좋습니다(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사부님의 명예를 회복하라!” “대법의 명예를 회복하라!”
중공이 정권을 찬탈한 폭정 기간에 성공적으로 저항한 선례가 없었고, 모두들 어떤 일이 더 일어날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할지, 길을 어떻게 걸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대법 수련자로서,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정념과 바른 믿음[正信], 본성에서 우러나온 진념, 위대한 사명의 책임의식, 대법 수련으로 다진 금강불괴의 의지, 정법은 반드시 이뤄진다는 신념으로, 파룬궁수련자들은 주저 없이 걸어갔다. 우주 진리와 붉은 마귀 앞에서, 정의와 악 앞에서, 파룬궁수련자들은 올바른 선택을 했다.
‘7.20’ 이후 인간세상이란 우주 정법의 큰 무대에서, 천지를 흔드는 정사대전의 서막이 올랐다. 사부님의 자비와 위엄, 대법의 금강불괴, 대각자 탄생 전의 장거(壯擧), 숨 막히는 장면들이 하나둘 펼쳐졌다.
6. 나는 영원히 리훙쯔 사부님의 제자입니다!
동북사범대학은 전국 중점대학으로 수련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1999년 8월 20일, 동북사대 당위원회는 대법을 수련하는 모든 당원을 소집해 회의를 열어 이른바 대법을 비판하고 그 자리에서 태도를 표명하라고 했다. 50~60명이 모였는데, 회의장에서는 말하기가 어려웠지만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순간 모든 것을 이해했다. 확고함, 격려, 지지였다.
큰 원탁 앞에서, 당위원회 서기가 기계적으로 신문을 읽었는데, 언론이 몇 번이나 방송한 ‘통지’였고, 전체 회의장의 분위기는 무겁고 억압적이었다. 다음은 수련자들에게 비판과 태도 표명을 하라고 했는데, 회의장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때 한 젊은 남자 수련자가 일어나 약간 격앙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엄숙히 선언합니다: 나는 리훙쯔 사부님의 제자이며 끝까지 수련하겠습니다!” 박수 소리가 크게 울렸고 모두가 고무됐다.
한 여자 수련자가 일어나 “리훙쯔 사부님은 영원히 제 사부님이시고, 저는 영원히 리훙쯔 사부님의 제자입니다!”라고 했다. 또다시 박수 소리가 울렸고 많은 수련자가 눈물을 흘렸다.
당서기가 목소리를 높였다. “기억하시오, 이것은 비판회이지 파룬궁의 법회가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한 젊고 연약해 보이는 여자 수련자가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저는 매우 순종적인 아이였고 부모님의 압력도 매우 컸습니다. 저는 한 번도 그분들의 뜻을 거역한 적이 없었지만 오늘은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저는 끝까지 수련하겠습니다!” 박수 소리와 함께 수련자들은 눈물을 흘렸는데 그것은 서로에 대한 격려였다.
이어서 또 몇 명의 수련자가 격동되어 거의 떨리는 목소리로 태도를 표명했고, 말을 못하는 일부 사람들은 아래에서 계속 울고 있었다.
당위원회의 한 지도부가 책상을 내리치며 큰소리로 말했다. “무산계급 독재의 맛을 보여주겠다!” 그 순간,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전체 회의장을 채웠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한 중년 강사가 다른 각도에서 그들에게 질문을 제기하며 지도부의 답변을 요청했다. “파룬궁은 왜 병 치료와 건강 증진에서 이렇게 놀라운 효과가 있습니까?” “왜 국내외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배우러 옵니까?” “왜…” 회의장이 매우 조용해졌고 모든 시선이 앞쪽을 향했으며 그들의 답변을 기다렸다. 지도부들은 매우 난처해하며 일어나서 “여기까지 합시다. 해산!”이라고 했다.
이 이른바 ‘비판회’는 바로잡혔다. 그날 밤 이 일은 곧바로 베이징에 전해졌는데, 많은 창춘 수련자들이 그곳에서 청원하고 있었고 각지의 수련자들과 함께 지내고 있었으며, 각지 수련자들이 또 소식을 현지에 전했고, 순식간에 전국의 많은 수련자들이 알게 됐다. 그 후 창춘의 일부 기관에서 비판회를 조직했을 때도 수련자들은 모두 바로잡았다.
7. 천안문 광장에 가다

많은 창춘 대법제자들이 이런 경험을 했다. 우주 대법이 사악에 의해 모독당할 때, 마귀가 창세주의 정법을 파괴하려 할 때, 미혹된 중생들이 신의 구원을 가로막고 무지하게 죄를 지을 때, 대법 수련 중에서 깨달은 한 생명, 우주 진리의 수호자, 사부님을 따라 정법하는 대법도(大法徒)는 베이징 천안문 광장으로 가서 우주 정법사에 영원한 순간, 영원한 충격, 지워지지 않는 장면을 남겼다. 그것은 정법신(正法神)의 신위(神威)를 나타낸 것이며, 생명과 피로 주조한 장엄함이었다. ‘7.20’ 당일부터 2001년 말까지, 대량의 대법제자들이 앞을 다투어 물결처럼, 한 무리 한 무리씩, 천안문 광장은 한 컷 한 컷의 장면으로 이 모든 것을 증명했다.
‘천안문 광장이여, 내게 말해다오’라는 노래는 이렇게 부른다.
‘천안문 광장이여, 내게 말해다오
얼마나 많은 제자들이 대법을 위해 왔었나
하늘의 흰 구름이여, 네가 가장 잘 보았겠지
악 앞에서 그들은 자비롭고 평화로웠다네
…
천안문 광장이여, 내게 말해다오
얼마나 많은 현수막이 높이 들렸었나
가벼운 미풍이여, 네가 가장 잘 들었겠지
파룬따파하오! 여전히 공중에 울리고 있네…’
◇ 67세의 한 노수련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날은 토요일이었고 천안문 광장에는 사람이 매우 많았으며, 사복 경찰과 정보원도 많았고 대법제자도 많았습니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이 천안문 광장에서, 오전 내내 대법제자들은 각종 형식으로 대법을 실증했습니다. 대법제자들은 전단을 뿌리고, 풍선을 띄우고, 현수막을 펼쳤는데, 대법제자들의 이런 위대한 장거는 모든 악을 두려움에 떨게 했습니다. 광장의 경찰, 사복 경찰과 정보원들이 혼란에 빠졌고, 대법제자를 납치하고, 사람들 손의 전단을 빼앗고, 풍선을 빼앗았으며, 많은 수련자가 경찰에게 맞아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됐습니다. 저는 오전 11시경 천안문 금수교 옆에서 ‘법정인심(法正人心)’ 현수막을 펼치고 오랫동안 가슴에 눌러두었던 말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사부님의 명예를 회복하라”를 외쳤습니다. 사전(史前)의 서약을 이행했고, 제가 파룬따파가 좋다고 외친 그 순간, 길가의 행인들이 모두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추고 지켜보았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마치고 이 순간의 심정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대법의 신위를 목격했고 대법의 위력이 우주를 진동시켰습니다. 저는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 속에서 당당하게 귀향 열차에 올랐고 다시 정법의 홍류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 가는 길에 사부님께서 계속 저를 관정(灌頂)하고, 가지(加持)하고 격려해주셨습니다. 베이징에 도착한 후 우리는 천안문 광장으로 갔는데, 12월의 베이징은 날씨가 매우 추웠고 관광객도 드물었으며 사복 경찰과 정보원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많은 정오에 현수막을 펼치기로 하고 각자 흩어졌습니다. 11시 30분, 한 수련자가 급하게 저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사복 경찰과 정보원이 저를 미행하고 있으니 빨리 현수막을 펼치죠, 그렇지 않으면 늦을 것 같습니다.”(출발할 때 약속하기를, 시간이 되면 내가 먼저 펼치고 그들이 곧바로 이어서 펼치기로 했다.)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금수교로 갔는데, 그곳은 사람이 매우 많았고 외국 관광객들도 한 무리 왔다. 때가 됐고, 저는 다리의 가장 높은 지점으로 가서 현수막을 머리 위로 높이 들고 온 몸의 힘을 다해 크게 외쳤습니다.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파룬따파는 정법입니다! 사부님의 명예를 회복하라! 대법의 명예를 회복하라!” 가슴 속 깊이 눌러두었던 말이 순간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시간이 멈췄고, 그 현묘하고 신성하며 강대한 에너지장이 저를 그곳에 고정시켰습니다.
◇ 베이징 천안문에 갔을 때 우리는 곧바로 광장으로 가지 않고 광장 주변에서 전국 각지에서 온 많은 수련자들을 만났습니다. 하이난(海南), 산동(山東), 주장(九江) 등에서 온 이들이 있었는데, 우리는 서로 다른 곳에서 왔고 평소 알지도 못했지만 모두의 마음이 매우 가까웠고 대법이 우리를 굳게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간단히 교류하고 모두가 차례로 다른 시간에 천안문에 가서 법을 실증했습니다. 우리 세 노인이 광장 중앙으로 걸어가 천안문을 향해 자리를 잡고 앉아 제5장 공법을 연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마음속으로 계속 말했습니다. ‘사부님, 제가 천안문에 법을 실증하러 왔습니다! 사부님, 제가 법을 실증하러 왔습니다!’ 이 일념이 나오자마자 순간, 저는 자신의 몸이 강대한 에너지에 이끌려 급속히 회전하는 것만 느꼈는데, 그 느낌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묘함이었습니다. 당시 한 젊은 커플이 감동을 받았는지 카메라를 들어 바로 사진을 찍었는데, 결국 경찰이 와서 그들까지도 경찰차에 태워갔습니다.
◇ 우리는 혈기(血旗, 오성홍기)가 걸린 깃대 매우 가까이에 왔고(그곳에 사람이 많았음), 신속히 현수막을 펼치고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진선인은 좋습니다!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사부님의 명예를 회복하라!” 당시 사방이 매우 조용했고 햇살이 밝았으며 하늘에도 무지개가 나타났는데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저는 우리의 목소리가 천지를 뒤흔드는 것 같았고 제 마음도 특별히 상쾌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TV의 슬로모션처럼 외치면서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 명혜망 2001년 8월 2일자는 한 편의 글을 실었는데, 정상적으로 걸을 수 없는 2급 장애인 지징창(戢景昌)이 베이징에 가서 법을 수호한 이야기를 기록했다.
“2001년 7월 21일 저녁, 간단히 준비한 후 아내가 저를 역으로 배웅했습니다. 14개월 동안 문밖을 나가지 못했던 저는, 맨발로 조금조금씩 계단을 향해 움직였습니다. 우리집은 5층인데, 저는 자신만만했고 엉덩이로 한 계단씩 아래층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는데 약 1시간이 걸렸고, 다시 천천히 도로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가족이 택시를 불렀고 이웃과 함께 저를 차에 태웠다. 역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린 후 매표소까지 약 100미터였는데 2시간 이상 걸렸습니다. 이때 뒤돌아보니 선명한 혈흔이 보였고 피도 계속 흘렀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하신 말씀을 되뇌었습니다. “참기 어려운 것도 참을 수 있고, 행하기 어려운 것도 행할 수 있다(難忍能忍, 難行能行).” 저는 이번에 베이징에 간 목적이 세 가지 있었습니다. 1. 정념으로 사부님의 정법을 돕는다. 2. 파룬따파는 좋다고 외치고 대법 현수막을 건다. 3. 자신의 장애를 극복한다(집에서는 식사, 음수, 대소변 모두 아내가 돌보았음).
베이징역에 도착해서 날이 밝을 때 밖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온몸을 두 팔로 지탱하고 허리를 비틀어야만 움직일 수 있었으며 걸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있었습니다. 베이징역에서 신은 천 신발은 열 개의 발가락이 모두 밖으로 드러났고 거기에다 피범벅이 되어 꽤나 무서워 보였습니다. 택시가 저를 천안문 앞 인도에 내려주었고, 저는 혼자 기어서 가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차가 왔는데, 저와 30~40미터 떨어진 곳에 멈췄고, 몇몇 경찰이 저를 차에 태우려고 했습니다. 나는 거부하며 온 몸의 힘을 다해 “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외쳤는데, 정말 하늘을 찌를 듯했고 머릿속이 하얘져서 무아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사악한 무리들이 너무나 보잘것없어 보였습니다. 어둠 속에서 이 경찰들은 내 옷을 잡고, 발을 들고, 머리카락을 잡아 절 경찰차에 던져 넣었는데, 차창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시 크게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두 경찰이 각목을 가져와 저를 가로로 들어올리려고 했는데 저는 엄중히 거부하며 말했다. “당신들이 감히 날 이렇게 괴롭히면 장애인연합회에 가서 당신들 분국을 고발하겠다.” 그제야 그들은 수그러들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저를 천안문 반대 방향으로 데려가 도로에 던져버렸는데, 도로에는 빗물이 5센티미터 정도 고여 있었고 제 두 발의 피가 물속에서 퍼져나갔지만 발은 오히려 깨끗해 보였습니다. 저는 빗속에서 천천히 천안문 방향으로 이동했는데, 마지막에 수십 개의 계단이 있었습니다. 저는 앉을 수가 없어서 인도로 내려가 문을 닫은 상점의 처마 밑에 누웠습니다. 저는 아직 한 가지 소원을 이루지 못했는데, 그것은 현수막을 펼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반드시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당당하게 현수막을 천안문에 걸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이 광장으로 들어왔고 버스를 기다리는 행인도 많았습니다. 저는 즉시 현수막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난간에 기대어 현수막 네 귀퉁이를 칼로 작은 구멍을 내고 비닐봉지로 잘 묶어 현수막을 걸었는데, 보니 꽤 반듯했고 행인들과 차량이 모두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떠났습니다. 다시 돌아보니 많은 사람이 둘러서서 보고 있었고, 현수막은 경찰차가 정차한 곳에서 50여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저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비가 오고 있었고 저는 거의 기어가다시피 했기 때문에 발견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 몸에서 피는 계속 흘렀지만 자비로운 사부님께서 저를 위해 감당해주셨기 때문에 그다지 아프지 않았습니다… 제 온몸은 광장에 있을 때 이미 젖어 있었고, 물속에서 천천히 움직였으며, 피는 물속에서 붉은 기운을 띠었습니다. 사부님을 생각하니 눈물이 그치지 않았고, 이때 빗물, 눈물, 피가 하나로 어우러졌습니다…
이 글의 제목은 ‘이 모든 것이 우주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 한 창춘 대법제자의 정법 역정’이다.
‘천안문 광장이여, 내게 말해다오’ 가사 중에서:
‘선량한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눈물 흘리고, 정의의 소리가 그들을 위해 말하네. 진상을 알리기 위해, 당신을 위해, 당신을 위해, 그들은 고문을 감내했네… 소중한 중국인들을 위해, 당신을 위해, 당신을 위해,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네.
파룬따파하오! 파룬따파하오! 그들의 소리가 공중에 울리고 있네.’
(계속)
(명혜망 파룬따파 전파 20주년 응모작품)
원문발표: 2012년 6월 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나의 사부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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