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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법에 동화하는 것은 정체를 형성하는 관건

글/ 천도(天濤)

[밍후이왕] 2007년 사부님께서 ‘파룬따파 호주수련생에 대한 설법’ 영상을 발표하신 후 나는 몇 번이나 봤는지 모른다. 매번 한번 보고 나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눈물을 흘리게 된다. 사부님의 거대하고 자비로운 동작과 눈빛, 심령을 울리는 법음(法音)을 보면 감개무량하다. 우리가 사부님의 설법을 10여년 배웠지만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사부님의 설법은 나를 눈물 투성이로 만드신다. 나는 진정으로 체험했는바 사부님께서는 참을성 있게 한번 또 한번, 한차례 또 한차례, 여러 각도에서 우리에게 설법을 해주시고 우리에게 법을 깨닫게 하시며 도를 깨닫게 하신다. 그러나 또 명백히 알려 주실 수는 없는데 우리 수련의 길을 망가뜨리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부님의 고심을 알지 못한다. 무조건 법에 동화할 수 없고 늘 관념을 부둥켜안고 속인의 사상으로, 사람의 관념으로 법을 가늠하고 자신과 법의 관계를 바로 잡지 못한다. 자신만 법에 있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법에 없다고 생각한다. 모순이 발생하면 안으로 찾지 않고 자신을 찾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질책하는 사람 마음으로 문제를 보고, 질책 받은 수련생은 어떻게 안으로 찾아야 하는지 모르고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모른다. 모두 다 자신의 관념으로 법을 인식하고 법에 대해 절충하고 대법제자 중에서 간격을 만들어 우리가 정체를 이루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구세력이 기대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험악한 중국대륙의 형세에, 이렇게 한번 또 한번 뼈를 깎는 듯한 마난에서, 한차례 한차례 생사고비 중에서, 잔혹하고 처참한 박해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속인 관념을 개변하지 못한다. 매번 구세력의 배치 중에서, 병업상태 중에서 고통을 당할 대로 당하면서도 자신의 속인 관념을 개변하지 않은 수련생을 볼 때, 병마로 생명을 잃은 수련생을 볼 때 내 마음은 아프다. 우리 협조인이 지도자로 되려는 것을 보고, 수련생 사이의 쟁론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고, 수련생이 다른 사람을 질책하는 것을 보고, 또 듣는 말에 의하면 어떤 지방에서는 대법제자가 몇 무리로 나눠지고 서로 협조하지 않으며 심지어 서로 실각시키며, 어떤 사람은 자신이 무엇이라고 자칭하는 황당한 일을 해낸 것을 보고 내 마음은 무척 아프다. 우리 수련인이 진정하게 근본적으로 속인의 관념을 개변시키고 끊임없이 무조건 법에 동화할 때. 우리는 그런 일이 얼마나 가소롭고 슬픈지 모른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한번 또 한번 설법을 통해 우리에게 안으로 찾으라고 하셨고 반드시 안으로 찾으라고 하셨다. 우리는 사부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문제에 봉착하면 다른 사람을 질책한다. 이것은 법에 있지 않느니, 저것은 빗나게 깨달았다느니 등이다. 다른 수련생이 그에 관한 사부님의 설법을 찾아놓으면 그는 ‘단장취의’하며 밖으로 밀어버린다. 우리는 늘 자신 마음의 척도로 다른 사람을 가늠하고 법을 가늠한다. 우리 마음의 척도는 얼마나 긴가? ‘불법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 마음의 척도로 측량할 수 있는가? 우리 마음의 그 척도는 무엇인가? 사람 마음이 아닌가? 우리 마음의 그 표준은 무엇인가? 사람 마음이 아닌가?!

우리는 정말로 마땅히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10여 년간 수련했는데 우리가 법에 대한 인식이 막 입문할 때의 인식이 아닌지 보아야 한다. 우리가 수련과정 중에서 자신을 부정한 적이 있는가,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했는지 보아야 한다. 우리는 감히 자신의 좋지 않은 사상과 행동을 인식해야 할뿐만 아니라 또한 용감히 자신이 좋다고 간주하는 뛰어난 생각과 행동을 부정해야 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아무리 좋은 생각과 행동도 모두 다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다. 모두 다 신의 생각과 행동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정해야 한다. “사람의 전반 수련과정은 바로 끊임없이 사람의 집착심을 제거하는 과정이다.”[1] 바로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하는 과정이다. 오로지 철저히 자신을 부정해야, 철저히 “당신들이 속인의 그 천백 년 이래 뼛속에 형성된 사람의 이치를 개변하지 않는다”[2]라고 말씀하신 것을 개변할 수 있어야, 우리는 비로소 환골탈태할 수 있고 비로소 승화할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법에 있지 않다고 생각할 때 자신도 이미 법에 있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법에 있지 않다고 질책할 때 우리는 더더욱 법에 있지 않다. 다른 사람이 법에 있지 않는 것을 볼 때 즉시 자신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거울이다.

사부님께서는 “다만 제자들의 사람마음이 가로막고 있네”[3]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자신의 사람 마음이 사부님의 정법노정을 저애하고 있는 것을 모른다. 강렬한 사람 마음을 지니고 이 일에 집착하는 데에서 저 일에 집착하는 데로 간다. 2002년 ‘16대’를 집착하는 데에서 2003년 ‘사스’에 집착하고, 2008년 올림픽에 집착하는 데에서 2011년 장(江)마귀의 죽음에 집착하고, ‘왕리쥔-보시라이사건’에 집착하는 데에서 원자바오(溫家寶)의 파룬궁 명예회복 설에 집착한다. 오늘은 내일을 바라고 내일에는 다음 날을 바라고, 금년에 내년을 바라고 내년에는 다음 해를 바라고, 바라고 바라서 13년을 바랐는데 우리는 아직 바라고 있다.

법에서 우리는 알고 있는바 중공사당은 우리 수련을 위해 존재한다. 우리가 무조건 법에 동화되면 정법은 자연히 종결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고 자신을 안으로 찾지 못하며 자신을 수련하지 않고 관념을 부둥켜안고 내려놓지 않으며 중공사당에 대한 증오에서 해탈하지 못했다. 위사위아(爲私爲我)의 원만을 구하려는 사람 마음에서 해탈해 나오지 못하고 구세력의 배치에서 걸어 나오지 못했다.

우리는 다만 무조건 법에 동화되어야 하고 절대 절충하면 안 된다. 사부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면 바로 그렇게 해야 비로소 견고하게 파괴할 수 없는 정체를 이루고 조사정법(助師正法)의 큰 맹세와 소원을 완성할 수 있다.

[1] ‘전법륜’, 작가 리훙쯔(李洪志) [2] ‘정진요지-경고하는 말’, 작가 리훙쯔 [3] ‘홍음3-번거로움’, 작가 리훙쯔

문장발표: 2012년 10월 14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10/14/26397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