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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경문이나 거짓말에 속은 수련생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글/ 대륙 이수이현 대법제자

[밍후이왕] ‘젊은 제자 전화로 진상을 알린 경력’이란 문장을 보고 감촉이 무척 많았고, 대법의 대립 면으로 가서 수련생을 박해하는 유다에게 사부님께서 여러 번 기회를 주시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몇 달 전 우리 지역 어떤 수련생은 일시 얼떨떨하여 가짜 경문 및 사오한 유언비어에 속았고, 그래서 어떤 수련생은 자신이 교란을 당할까 두려워 문을 걸어 잠갔고, 어떤 수련생은 그들을 도와주고 싶었지만 연세가 많아 기억력이 나쁘고 법리 표현이 좋지 못해 괴로워했고, 혹은 두려움이나 어려움 등등 원인으로 도와주러 가지 않았으며, 몇 번을 갔지만 좋은 효과에 도달하지도 못했다.

납치당해 박해를 받거나, 병업 박해 및 가짜 경문에 속은 수련생은 똑같이 모두 사령(邪靈)의 박해를 당한 것이지만 후자는 더욱 슬프고 가련하다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런데 일부 수련생은 전자 둘과 후자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원래 그들은 많은 방면에서 모두 무척 훌륭한 수련생으로서 어떤 이는 진상을 알려 대량의 중생을 구도했는데 지금은 그들 자신 수련의 누락으로 거짓말과 사령에게 독해 당했는데 누가 그(그녀)들을 도와 줄 수 있겠는가? 안에서 찾아보고 자신을 반성해 보면서 점차 일부 문제와 견해를 인식하게 됐는데 동수들과 교류하려 한다.

1. 어떻게 이러한 수련생을 대할 것인가

우선 우리가 이런 수련생의 이지적이 아닌 표현을 보았을 때, 엄숙하게 지적하거나 대법을 파괴하는 현상을 제지하는 것은 옳은 것이다. 하지만 마땅히 동시에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사람이 어떻게 나쁘다는 것만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남을 위하는 기점에 서서 자비와 관용으로 대해야 한다. 수련생 가운데서 “누구누구가 사오했다”고 즉시 소문을 내지 말아야 하고, 이러면 그와 수련생들의 대립을 격화시키기 쉽다. 책임지지 않고 소문을 퍼뜨리는 것 역시 일종의 과시심으로 무의식 중에 대법을 파괴하는 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는 동시에 또 수구 문제도 존재한다. 물론 출발점이 수련생을 돕기 위한 것이라면 그건 별도로 되는 일이다.

예를 들면 한 수련생 가족이 가짜 경문을 전했는데 집에는 사령이 숨울 곳이 있게 됐지만 그 본인은 모르고 있었다, 하루는 법공부를 할 때 갑자기 사령의 교란을 받게 됐는데 두뇌 속에 일부 가짜 이치가 반영됐다. 좋지 못한 상태를 표현할 때면 어떤 수련생에게 보여 지는데 바로 “누구누구가 사오했고 어떠어떠하다”고 하며, 일부 현상 및 많은 구체적인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전한다. 그래서 많은 진짜 말은 없어졌고 또 본인 귀에 전해져 그녀를 몹시 격동시켰으며, 또한 수련한다는 사람이 왜 이런 ‘날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하면서 말했다. “당신들 모든 수련생이 모두 이렇게 나를 대하니 내가 갈 길을 더 확고히 하게 됐다. 나는 모든 동수들을 모두 가족으로 여겼는데 동수들이 모두 나를 피하니 당신들이 나를 밀어낸 것이다.” 사람 마음은 사악에게 이용당해 사악이 하려 하는 일을 하게 됐다. 이와 동시에 사령은 또 그녀 가족을 통제해 그녀에게 난귀(爛鬼)의 거짓말을 주입해 넣는데 박차를 가했다. 물론 어떤 수련생이 자신이 교란 받지 않으려 하는 데는 잘못이 없다. 다만 수련생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는지를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만약 속인이 장기적으로 이런 환경에 처해 있다면 아마 정신병에 걸리거나 또는 마비되겠는지 단언할 수 없다.

2. 사악은 우리의 어떤 사람마음을 겨냥했는가?

이상에서 언급한 과시심, 책임지지 않는 말 나르기 등을 제외하고도 또 어떤 수련생은 말한다. “그가 예전에 어떻게 표현이 좋았든지를 막론하고 갑자기 반면으로 나아간 것은 모두 법을 파괴하기 위하여 온 것이다.” 이는 구세력의 배치로서 정법의 이치에 따르면 이 생명에 대해서도 불공평한 것인데 우리 인정할 수 있는가? 마땅히 사상 중의 당(黨)문화의 독소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남을 깔보고, 타인을 책망하며, 냉담하고, 마비됐으며, 수련생이 사령에게 박해당하고 심지어 도태될 위험에 처했는데도 자기와는 관계가 크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만약 자신의 부모, 자식이 이런 처지에 처했다면 자신은 이럴 수 있겠는가? 천목이 열린 한 수련생은 정진하지 않는 수련생 세계의 중생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의 왕과 주에게 도움을 줄 것을 청구하는 것을 보았다. 진상을 알리는 가운데서 수많은 수련생들은 자신을 박해한 ‘610’ 악인마저도 다 자비로 구도할 수 있었는데 왜 굽은 길을 걸은 수련생에 대해서는 자비로울 수 없는가?

또 어떤 수련생은, 그가 듣지 않으므로 이대로 나가다간 도태되고 만다고 여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는데 마찬가지로 자신의 수련 상황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며, 안으로 찾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정념이 아니므로 그것 자체가 역시 관념이고 역시 사람마음이며, 우리 매 사람이 시시각각 모두 주의해야 할 것이며, 아울러 시시각각 정념으로 제거해 버려야 할 사람마음이다. 수련생을 관념으로 대하지 말며, 이 사람을 나쁘다고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늘 이런 생각을 움직인다면 역시 마찬가지로 동수의 집착에 집착하는 것이다. 사악은 바로 우리의 이런 사람마음을 겨누고 온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동시에 안을 향해 찾아 봐야 한다.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야 말로 바로 동수에 대해 자아로부터 출발한 어떠한 편견과 관념을 지니지 않은 것이라고 나는 여긴다.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과도 같은 것이다. 그가 어떤 사람이고 그에게 어떤 집착이 있는지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남을 위하는’ 기점에 서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자비, 관용한 선념이다. 우리가 이렇게 자신을 수련하는데 습관이 된다면, 아울러 안에서 찾아보는 기제(機制)가 형성될 때면, 이런 사람과 이런 표현은 곧바로 시장이 없어질 것이다.

우리가 이런 현상을 보게 됐을 때, 가장 쉽게 믿게 되는 것이란 바로 눈앞에 보이는 이른바 ‘사실’이고, 가장 생각하기 어려운 것은 자신에게 누락이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이며, 가장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란 바로 동수의 집착에 집착하는 것으로서 단지 그가 어떠어떠하다고만 보는 것이다. 가장 제거하기 어려운 것이란 바로 자신의 관념이고, 가장 개변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구 우주의 ‘자아’를 출발점으로 한 사유 방법이다. 이런 마음이 나올 때면 정념으로 제거해 버리는 것이 수련이고 제고인 것이다. 예를 들면 “정체를 이루지 못한다” 등에 집착하고 구경하면서 기다리는 등이다. 이렇게 집착하는 것은 차라리 순정한 일념을 발하기보다 못하다. “우리는 꼭 금강불파한 정체를 형성할 것이다.” ‘사람마다 모두 협조인’이라는 염원에 좇아 주동적으로 정체에 원용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 정체의 강대한 정념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바로 다른 공간에 형성된 정체적인 금강불파의 물질이 아니겠는가?

3. 우리 아직도 어떤 문제를 알지 못하고 있는가?

우리는 ‘사오(邪悟)’를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말아야 하며, 만약 우리가 바르게 했다면 일부 사람은 우리의 정념의 장에 이끌릴 것이며. 재빨리 명백해 질 것인데 이는 가장 좋은 것을 사악에게 시장을 주지 않는 것이다. 어떤 수련생은 교란 당하는 동수에게 시장을 주지 않음으로서 교란이 스스로 소멸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그를 고립시켜 그에게 부딪히게 한 후 깨닫게 한다는 뜻이다. 내가 느끼건 대 그에게 시장을 주지 않는다는 데는 잘못이 없으며, 그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생각해보라. 우리 자신이 어디에서 잘못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만약 안에서 찾아보는 것에 주의하지 않는다면, 남을 깔보는 마음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각종 관념, 사람의 표면을 선하게 대하지 못한다면 아주 쉽사리 사악에게 틈탈 기회를 줄 것이고, 서로 깔보면서 사람과 사람의 대립을 형성할 것이다.

사부님은 ‘2009년 대뉴욕국제법회설법’에서 말씀하셨다. “플러싱 수련생, 전면에 나선 수련생들이 사악을 막아내려는 출발점은 좋고, 정말로 좋으며, 이 점에 대해 나는 당신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방법상에서 너무 급하지 않았는가? 냉정(冷靜)하게 사고하고, 마음을 조금 더 크게 해서, 우리가 정말로 모든 사람들을 구도해야 할 중생으로 여기고 구도해서, 그에게 변화가 있는지 없는지를 보라. 그 사악이 플러싱에서 나타나 사람을 통제해 나쁜 짓을 하는 것은 절대로 우연한 것이 아니며, 틀림없이 수련생의 누락이 있는 곳을 겨냥해 온 것이다. 사람의 일면에 대해 한사코 정면으로 맞서지 말아야 하는바, 그들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구도하는 것이다. 자비롭게 하고, 냉정하게 해서, 이 일에 어떤 효과가 있는지를 보라.”

이를 테면 나는 한 수련생이 내내 무척 강한 사람의 마음, 과시심 등을 나타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스스로 “깨달음이 높다”고 여겼다. 많은 수련생은 그를 귀찮게 여기고 그와 만나는 것을 싫어했으며 나 자신도 이러 했다. 그런데 그의 이런 마음을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는가? 내가 그를 귀찮게 여기게 됐을 때엔 사실 그에 대한 관념이 이미 상당히 강해졌고, 이미 수많은 사람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그가 자신의 깨우침이 높다고 말할수록 나는 그를 더 깔보게 됐다. 이것은 질투심, 쟁투심이 움직인 것이 아닌가? 실은 이 때 역시 사람의 상태로서 역시 사악에게 틈탈 기회를 준 것이다. 예전에 나는 정체를 원용하는 각도에 서지 않았고, 신우주의 “남을 위하는” 기점에 서서 문제를 사고하지 않았으며, 안으로 찾으며 일부 질투심, 과시심의 표현 및 수련생을 대하는 심태 방면의 문제를 찾아내긴 했었지만 오히려 정체와 이 수련생 본인에 대한 영향은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동시에 안으로 찾아야 하고, 수련생에게 어떠한 자아적인 관념을 지니지 말아야 한다. 그가 어떤 사람이던, 그에게 어떤 집착이 있던 생각하지 말고, 생각하는 것이란 자비 관용한 선념이라면 사악이 틈탈 기회가 없을 것이다. 최근에야 인식했기 때문에 단지 나부터 해야 할 뿐이다. 수시로 이런 사람 관념을 제거해 버리기에 주의하는 동시에 또한 수련생에게도 일깨워 주는 바이다.

며칠 전 한 수련생이 이런 일 한 가지를 말했다. 그녀가 한 사람에게 진상을 말할 때, 이 사람은 듣지도 않거니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수련생은 묵묵히 발정념 해서 그의 배후의 사당의 다른 공간의 요소를 제거하면서 아울러 이 사람을 꼭 구도하리라는 일념을 발했다. 수련생이 다시 진상을 말할 때 이 사람은 흠칫하더니 즉시 명백해 졌고 아울러 탈당했다. 가령 우리 정체도 이렇게 관용, 자비, 냉정하게 교란 받는 수련생을 대해주고, 표면적인 가상에 이끌리지 않는다면, 동시에 그의 배후의 사악한 요소를 제거해 준다면, 사악한 요소의 통제가 없는 그들과 다시 교류해 보라. 그들도 쉽사리 명백해 진다.

이상은 다만 내가 본 자신과 일부 수련생에게 존재하는 문제를 말하여 동수들과 교류해 보려는 것뿐이다. 물론 수많은 수련생은 진상 알리기 등 많은 방면에서 모두 아주 훌륭하게 하고 있으므로 나 자신은 잘하지 못하여 부끄러움을 느낀다, 나는 다만 생각한다. 이런 수련생들이 극히 위험한 처지에 처했는데 우리가 그들과 다툴 수 있는가? 우리가 그들을 나쁘다고만 원망할 수 있는가? 만약 우리가 안에서 찾지 않고 마비된 채로 대한다면 그들에게는 정말로 기회가 없을 것이고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특히 일찍 아주 잘 했던, 정체를 위해 많은 것을 지불했던 그런 수련생은 불쌍하지 않은가?

약간의 개인 인식으로서 층차에 제한이 있으므로 부당한 곳은 수련생께서 비평 지적해 주기를 삼가 바란다.

문장발표 : 2010년 9월 14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9/14/229599.html